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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위안2 - 개울가를 따라 리캉 李坑(이갱) 마을을 보고 강변에서 왕구촌을 바라보다!
10월 23일 루산庐山(여산) 을 내려와 주장 九江(구강) 에 도착해서는 시외버스를 타고
오랜 도자기 도시 징더전 景德镇(경덕진) 에 내려 서너시간을 구경하고는 버스로
우위안 婺源(무원) 에 도착해 시내 버스와 마을 버스를 갈아타고 하얀벽에 검은색
기와의 휘주 스타일 오래된 옛 집들이 늘어선 마을 "리캉 李坑(이갱)" 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입구에 내리니 인터넷 부킹닷컴에서 예약한 후산주 后山居(후산거) 사장이 승용차를
가지고 마중나왔기로 200미터를 들어와 유객중심 매표소 (卖票所) Ticket Office,
shòupiàochù 售票处 에서 관람권 통표를 210위안(경로 105위안) 에 끊고 호텔에
배낭을 넣고는 개울가에 자리한 리캉 李坑(이갱) 밤거리 를 구경하고는 하룻밤을 잤습니다.
10월 24일 아침에 일어나 마을을 산책하려고 나오니 놀란 할머니가 사장인 아들을 부르러
가려기에 황급히 제지하는데, 실은 오늘 아침 9시에 사장이 운전하는 승용차 를 타고
여러 마을을 둘려보려고 에약 했기 때문인데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할머니를 진정 시킵니다.
호텔을 나서니 작은 개울 에는 낡고 작은 배 들이 많이 매여져 있고 강물에 빨래 를
하는지 아님 그릇을 씼는지 여자가 보이는데 이른 아침부터 오리떼 들이
나들이를 하는건지.... 아님 먹이를 찾아 나선건지 무리지어 떠다니는게 보입니다.
그러고는 걸어서 모퉁이를 지나니 작은 공터가 나오고 좀 더 걸어서 마을 바깥으로 나와
고속철도 가 지나는 다리 아래를 지나 유객중심 매표소 (卖票所, 售票处) 쪽으로
걷는데 풍로 가 보이고 건너편 산 허리로 해서 마을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 이 보입니다.
먼 발치로 절 을 보면서 걸으니 이렇게나 이른 아침에 벌써 밭일을 나와 일하는 사람 들을
보노라니.... 문득 할아버지 가 떠오르는데, 옛날 우리 농촌도 새벽에 눈을 뜨면 바로
지게를 지고 밭에 일하러 나가 몇시간 땀흘리고 난 다음 돌아와 아침겸 점심 을 먹었지요?
그러고는 다시 밭과 논으로 일하러 나가 하루종일 일한 다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점심겸
저녁을 먹었으니.... 모내기나 추수철 이 아닌 다음에는 하루 2끼 먹고 살았는데, 밤에
캄캄한 가운데 남자들은 새끼를 꼬아 가마니나 멍석을 짜고 여자들은 삼을 벗기거나
목화씨를 발라내고 실을 만들어 베틀에 올라앉아 밤늦도록 베를 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새벽 부터 밤 늦도록 죽자고 일만하고 살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어머니는 꼭두 새벽에 300여미터 떨어진 동네 우물에 가서 물 한 동이 를 이고
오면 그게 여덟 식구가 하루를 써야하고.... 온 산이 나무라고는 없는 민둥산 이니
나무 한짐을 하기 위해서는 20리(8km) 를 걸어 고생 고생 해야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몇년 전에 판문점을 통해 귀순한 북한 병사의 몸에서 수백마리의 기생충 이 나왔으니....
한국인들은 경악하며 호들갑 을 떨었는데, 최재경 씨에 따르면 1967년 한국인 기생충
감염률은 98% 였으며.... 1963년 9세 소녀에게서 1,063 마리의 회충 이 나왔고 당시
국군 환자 배에서.... 양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회충 을 빼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의 인분을 밭에다 뿌려 채소를 키우기 때문인데 우리 민족은 수천년동안 이렇게
"자연순환적인 농업" 을 영위해 왔으니 회충은 필연 이라..... 반면에 서양인들은
인분을 강에다 버리고 하류에서 그 강물을 먹으니 "전염병" 이 엄청 크게
자주 창궐했는데... 우린 인분을 밭에다 뿌리고 우물물을 먹었으니 상대적으로 덜했습니다.
서양에서는 도시의 집에 화장실이 없었으니 모두 "요강" 을 사용했는데, 부자들이야
하인 을 시키거나 인분을 치우는 업자에게 돈을 주고 비우지만 일반 시민들은
새벽에 창문을 열고 요강의 오물을 도로변에 쏟아버리니....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산 을 펴고 높은 구두 를 신어야 했으니 하이힐이 탄생한 유래 라고 합니다.
또 에티켓 Etiquette 의 유래를 보자면.....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으니 숱하게
열리는 궁전 연회에서 남녀 귀족들은 궁전 건물을 나와 정원에서 대소변을 보는데...
너무 가까운데서 보면 역한 냄새가 연회장 까지 날아오므로 “여기서는 일을 보지 마세요”
라는 나무 팻말 을 박았는데..... 나무 팻말을 이르는 보통명사 가 “에티켓” 이었다고 합니다?
리캉 마을은 국화주 가 유명한 동네인지라 국화밭 이 많은데 사람들이 꽃에 손을 대는지
적발당하면 무려 200위안이라는 거금을 벌금으로 물린다는 경고 팻말이 몇군데
보이고, 건너편 산에는 나무가 무성 한데 문득 계명대 강판권 교수가 쓴 나무 인문학
이라는 칼럼에 측백 나무 편에서 “나이를 옆으로 먹어야 장수한다” 는 글이 떠오릅니다.
"늘 푸른 큰키 나무 측백(側柏) 나무 는 아주 오래 사는 나무다. 중국 산시(陝西)성 황링
(黃陵)현 동쪽의 차오산(橋山) 산에 위치한 황제릉(黃帝陵) 앞의 측백나무는 수령
5000년인데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 대구 동구 도동의 측백나무 나이는 200년 정도다"
"측백나무 이름 중 ‘백(白)’ 은 도깨비 뿔 같은 돌기가 달린 열매에서 본 뜬 글자 이고
‘측’은 다른 나무들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측백나무만 서쪽으로 향해 있어서
붙인 것이니 측백 나무가 서쪽으로 향한건 ‘백’ 이 오행에서 서쪽 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측백나무 는 중국의 황허(黃河) 강 유역을 대표하는 나무다. 현재 베이징 이허위안
(이和園), 톈탄(天壇)을 비롯해 황허강 유역에는 나이 많은 측백나무가 아주 많다.
중국인들은 측백나무를 ‘성인(聖人)’ 의 기운을 받은 나무라 생각했다. 북송의
왕안석(王安石) 은 측백나무의 한자 백(柏) 중 ‘백(白)’ 을 백작(伯爵) 으로 풀이했다."
"그래서 중국 주나라때 측백나무를 제후(諸侯) 무덤 에 심었으며 한나라 무제는 측백나무를
선장군(先將軍) 에 당나라 무제는 대부(大夫) 에 비유했다. 중국 허난성 쑹산(嵩山)산
자락의 쑹양(嵩陽)서원에는 한나라 무제가 장군으로 임명한 4500년 된 측백나무가 살고있다"
"측백나무의 의미 를 가장 잘 드러낸 기록은 ‘논어 · 자한’ 의 ‘날씨가 추운 뒤에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 이다.
추사 김정희 는 논어의 구절을 모방한 ‘세한도’ 를 그려서 이상적 에게 선물했다. "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송백의‘백’을 측백나무가 아닌 잣나무 로 오역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의 문헌에 등장하는 ‘백’은 잣나무 로 사용하는
사례가 대단히 많아서 유의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례를 ‘문화 변용’ 이라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장수 를 원한다. 그런데 장수는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의미 를 갖는다. 측백 나무 처럼 장수하기 위해서는 나이를
옆으로 먹어야 한다. 대부분의 나무는 줄기를 위로 뻗는 반면 나이테는 옆으로 만든다."
"나무가 나이테를 옆으로 만드는 것은 수직 상승만으로는 균형 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는 종횡무진의 균형 잡힌 삶을 통해 장수한다. 나이를 수직으로만 계산하는데
익숙하지만, 나이테처럼 나이를 수평으로 생각하면 훨씬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패방까지 갔다가 문창각 정자 는 바라만 보고 되돌아 오는데 개울에는 대나무로 뗏목 으로
엮은 "죽벌 배" 가 메어져 있는데, 여름철에 비가 와서 개울에 수량이 늘어나면 관광객
들을 태우는 용도인가 봅니다? 그리고 승합차 가 보이니 마을 입구까지 운행하는가 보네요?
그러고는 호텔로 돌아오니 나는 어제 마을로 들어올때 210위안 하는 통표를 학생과
경로 할인에 적용하는 반표인 105위안 에 끊엇지만, 마눌은 그냥 들어
왔었는데.... 사장이 어젯밤에 만들었는지 30위안 할인된 관람증 을 건네 줍니다?
9시 정각에 사장이 운전하는 승용차 에 오르니 차는 마을을 빠져나가..... 유객중심 매표소
를 지나 큰 도로에서 우회전을 하여 오른쪽에 강을 끼고 10여분을 달려서는 차가 섭니다.
차에서 내리니 강변 언덕에 정자 가 한 채 서 있는데 전망대 에서 강 건편에
유씨 마을 집성촌 인 왕구촌(汪口村) 이 잘 내려다 보이는데....
이른바 뷰 포인트 로 많은 관광객들이 마을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얀 벽에 검은색 기와 의 휘주 스타일 집 들이 늘어선 우위안 婺源(무원) 은
현성(县省) 에서 동선 거리는 15km 이갱, 22km 왕구, 29km 강만, 35m 효기,
45km 강령에.... 그 밖에도 사계연촌과 국경촌에 채홍교등이 점점이 존재합니다.
언덕에서 유씨 집성촌인 왕구촌 을 내려다 보니 문득 이성제씨의 논문 “4~7세기 중국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 집단 취락생활” 이 떠오르는데, 광개토대왕은 392년 거란을
공격해 빼앗긴 고구려인 1만명 을 찾아 데리고 왔으며..... 668년 고구려가 망할때는
황해도만 신라가 흡수했을뿐 고구려인의 70% 가 중국으로 잡혀가 노예 생활 을 했습니다.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은 치욕적 패배를 하니 중국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의 침략에
수도 국내성이 함락 되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 도 뺏겨버린 것인데, 전연은 퇴각하는
길에 왕모와 왕비등 수도 주민의 대부분인 5만여명의 고구려인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중국에서 이들의 삶을 알려주는 사료가 거의 남지 않아 역사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최근 고구려 유민이 중국에서 집단 취락 을 구성하며 고구려계라는 정체성 을 유지해온
사실을 밝혀낸 연구가 나왔으니 이성제 동북아 역사재단 연구위원이 계간지
‘중국고중세사연구’ 46호에 실은 ‘고구려 유민의 요서 지역 세거와 존재 양상’ 논문이다.”
“논문은 691년에 사망한 고구려 유민 고영숙의 무덤 내부 묘지명(墓誌銘) 을 분석했는데
묘지는 1975년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시 근처에서 발견됐으며, 그동안 중국 학계에선
거란계가 많이 거주했던 이 지역의 특성상 고영숙 역시 거란인 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연구위원의 분석결과 고영숙이 고구려 유민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들이 묘지에서
발견됐는데 묘지에는“ 고운(高雲)이 일어나 연(燕)을 멸하였다” 며 가문의 기원을
‘고운’ 이라는 인물로 특정했으니 고운은 고구려 출신으로 후연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고운이 고구려 출신이란건 342년 전연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어 잡혀온 포로 후예?)
모용수 가 세운 5호16국의 하나 후연(後燕) 은 북방의 최강자였으나 죽은후 북위의 공격을
받아 수도 중산이 함락되고 북쪽 용성으로 쫃겨오니 국세는 30% 로 쪼그라 들었는데...
407년 모용희의 폭정에 한인(漢人) 풍발의 주도로 모반이 일어나 고구려 포로 의
후예 로 모용씨의 양자가 된 모용운(慕容雲) 을 허수아비 왕 으로 세웠다가 2년후 죽입니다.
그러고는 주인공인 한인(漢人) 풍발 이 천왕(天王) 으로 즉위하니 북연 인데 436년 북위의
공격을 받아 북연은 망하며 북위는 서위와 동위로 갈라졌다가 결국에는 수나라 로
이어지는데, 저 모용운의 후손 이 살아남아 다시 성을 모용씨에서 고(高)씨로 바꾸고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집성촌 을 이루어 전란의 시기에 용케도 대를 이어갔던 모양이네요?
“이뿐만 아니라 묘지에는 고운의 후예이자 고영숙의 증조부 고회(高會) 와 할아버지
고농 (高農)이 ‘본번대수령(本蕃大首領)’ 을 지냈다고 밝히고 있는데....
본번 대수령 은 "고구려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장" 이란 뜻이며 또
아버지 고로(高路) 는 사주(師州) 지역을 통치하는 자사(刺史) 였다고 나와 있다."
“사주(師州) 는 현재 중국 차오양시 일대로 중국과 거란, 고구려의 경계 에 있던
지역인데 이 연구 위원은‘고구려계 수령 이 존재한 사실을 통해 당시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정체성을 유지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살아왔던 시기니 4세기 부터 7세기 까지 요서지역에서
거주한 이들은 5호 16국 시대 부터 수나라와 당나라 까지 중국 정치권력
이 격변하던 시기를 살았는데.... 중국 한족 정권이 교체되는 동안에도
고영숙 가문은 수령 자리를 세습 하며.... 고구려계 문화를 유지 해온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중국에서 고구려로 유입된 이들에 대한 연구는 상당 부분 진행됐지만
거꾸로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에서 집단취락 을 이룬 사실을 밝히는 연구는 없었다 ’며
“고구려 유민들의 삶 을 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라고 밝혔다.“
고영숙의 묘지명에 선조인 고운이 연을 멸하였다고 적혀있으며 우리 역사학계도 그리 보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게 407년 선비족 후연국에서 모반을 일으킨 한인(漢人) 풍발 은 왕위에
오르고 싶지만 선비족들의 저항을 우려해 고구려 출신으로 선비족 후연 2대 왕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 을 바지사장 으로 내세웠다가 409년에 죽이고 풍발이 왕에 오르니 북연 입니다.
언덕 전망대에서 유씨 마을 집성촌 인 왕구촌(汪口村) 을 구경하고는 내려와 다시 승용차
를 타고 10분 가량을 갈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 여기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큰 마을이자 중심지 인 "장완전 江弯镇(강만진)" 에 도착해 마을로 들어갑니다.
첫댓글 인분을 우리나라는 밭에 버려서 회충이 많지만 서양처럼 강물에 버리지 않아서 전염병이 작앗군요.
에티켓의 유래도 잘 들엇습니다
중국시골사람들도 역시 부지런하군요.
아, 예! 이 사람들 아침 일찍부터 밭에 나와 일하는
모습이 옛날 우리 농촌을 연상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