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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양사(正陽寺) 헐성루(歇惺樓)
금강산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정양사(正陽寺) 헐성루(歇惺樓)에 앉은 의상의 눈앞으로, 일만이천 봉우리의 윤곽이 하나둘 떠올랐다. 각 봉우리마다 나름의 화려한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나, 그 산줄기는 모두 한 뿌리에서 솟아난 듯 이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마치 뿌리 없는 가지로 도리와 서까래를 만든 신비한 모습 그 자체였다. 표훈(表訓)을 비롯한 제자들이 누각 마루에 둘러앉았다. 발아래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멀리서 폭포 소리가 우레처럼 울려왔다. 그 소리와 바람, 구름과 빛이 모두 하나의 거대한 숨결처럼 느껴지는 자리였다.
의상이 입을 열었다. “화려하게 펼쳐진 저 봉우리 하나를 하늘에서 떼어낸다면, 어느 산이 혼자 설 수 있겠습니까. 각각 서로 닿지 않은 것 같으나, 실상은 모두 한 땅에 뿌리를 두고 서로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화엄의 도리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무수한 세계와 무수한 존재가 흩어진 듯하나, 그 근원은 한 마음, 일심(一心)에 머무릅니다. 일심이란, 어느 한 마음이 아니라 모든 마음의 바탕이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나’와 ‘너’의 경계가 없고, 있음과 없음, 생과 멸, 성(聖)과 범(凡)의 이름도 없습니다. 다만 연기(緣起)의 그물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를 의지해 일어나고, 서로를 비추며 사라집니다. 바로 이러한 자신만의 길이 아니라, 만 가지 길을 모두 아는 마음 즉, 모든 수행자의 길을 평등히 알고 존중하는 대지혜의 마음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평등한 햇살 아래 빛나는 장면이었다. 의상은 손을 들어 서로 다른 봉우리 몇 곳을 가리켰다. “저 봉우리를 각각 다른 종파, 다른 교리, 다른 수행자의 길이라 생각해 봅시다. 선(禪)을 닦는 이, 교(敎)를 익히는 이, 계율을 지키는 이, 미륵을 염하는 이, 또 어떤 이는 이름도 없는 무명의 수행으로 자신을 깎아내고 있습니다. 표면으로 보자면 길이 다르고, 서로 옳다 그르다고 다투기도 하지만, 그러나 산허리 아래로 내려가 보면, 모든 길이 결국 하나의 땅을 딛고 있지 않습니까. 비유하면 그 땅이 곧 일심이요, 그 일심이 곧 법계(法界)인 것입니다. 법계란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무수한 세계가 서로를 비추며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거울 하나가 다른 거울을 마주 볼 때, 그 안에서 또 다른 수없이 많은 모습들이 끝없이 비추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인드라망(因陀羅網)의 이치입니다. 망의 매듭마다 구슬이 하나씩 달려 있고, 그 한 구슬 안에 온 우주가 비춰 집니다. 한 존재의 미소, 한 존재의 슬픔, 한순간의 깨달음이 그물의 끝에까지 서로 서로에게 물결을 일으키게 됩니다.”
제자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스승님, 그렇다면 한 사람의 작은 악행도 온 세계를 어둡게 합니까?” 의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요. 작은 선행 또한 온 세계에 빛을 더하게 한다는 것을. 사사무애(事事無礙)라 하니, 모든 일과 일이 서로 막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일으키며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한 아이의 눈물이 어떤 어머니의 자비를 깨우고, 그 어머니의 기도가 또 다른 이의 마음을 돌이키게 됩니다. 한 사람의 집착이 수많은 갈등을 낳듯이, 한 사람의 용서가 수많은 인연을 풀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살은 ‘나’만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한 몸을 닦되, 동시에 모든 몸을 생각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온 세계의 안온(安穩)을 함께 품는 완전 평등의 세계인 것입니다.”
산 아래에서 안개가 한 겹 더 걷혀 나갔다. 평소 잘 보이지 않던 먼 봉우리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의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란, 세계 속에 다시 세계가 겹겹이 있어 일체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고, 한 생각 안에 다시 무량한 생각이 포개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대들이 지금 듣고 있는 이 법문도 그러합니다. 겉으로는 한 노승의 목소리이지만, 실은 부처님의 음성이요, 또 그대들의 마음이 부처의 소리를 빌려 자기를 듣는 것입니다. 듣는 자와 말하는 자가 둘이 아닌 것, 이것이 곧 원융무애(圓融無礙) 대자유의 경지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말하는 이로서 법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물과 바람과 그대들이 함께 한 법계의 일부로서 숨 쉬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들이 숨을 들이쉴 때, 금강산의 모든 나무도 함께 숨을 들이쉬고, 그대들이 괴로움을 이겨 편한 숨을 내쉴 때, 어딘가의 중생들은 위안을 얻게 되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 아픔을 또한 기꺼이 인내하며 오직 그 중생들의 이익만을 바라보는 행이 바로 보살행입니다. 그렇게 서로 얽혀 있으니, 어느 길 하나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요. 어느 종파 하나를 버리지 마십시요. 어느 사람 하나를 포기하지 마십시요. 보살은 모든 수행자의 길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같이 존중해서 걸어 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길이 다르다고 해서 진리가 둘이 되는 것은 아니며,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자비가 나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길이, 방편(方便)인 것입니다. 중생의 눈높이에 따라 문(門)이 달라질 뿐, 그 문 너머의 하늘은 곧 하나입니다.” 의상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원효 스님은 무애(無礙)라 하여, 모든 경계를 녹이는 바람이 되셨습니다. 나는 화엄이라 하여, 그 바람이 흔들고 간 나뭇잎의 결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애와 화엄은 서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바람과 나무, 그늘과 빛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 몸인 것입니다. 그대들도 앞으로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선방에서 침묵 속에 묻혀 살 것이고, 어떤 이는 장터에서 중생들과 함께 웃으며 법을 전할 것이며, 또 어떤 이는 글을 써서, 세상이 보지 못한 질서와 인연의 결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요. ‘나의 깨달음’이 아니라 곧 ‘우리의 깨달음’을 구해야 합니다. 나의 해탈이 아니라 함께 사는 모든 생명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모든 길을 아는 바람의 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상의 말이 끝날 즈음, 헐성루 앞 산허리로 선명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눈부시게 맑은 햇빛이 수많은 봉우리를 골고루 영롱한 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제자들은 고개를 들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높고 낮음의 차이 없이, 햇살은 모든 봉우리와 계곡, 숲과 바위를 같은 온기로 감싸 안고 있었다. 의상이 조용히 말했다. “보십시요. 부처님의 지혜는 저 햇빛과 같습니다. 누구의 것만을 더 비추지 않고, 어디에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화엄의 눈을 뜬다는 것은, 그 빛을 닮아가는 일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길을, 함께 비추어 주는 마음, 그 마음이 곧 일심이요, 그 일심이 곧 불국토인 것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멀리서 우레와 같은 폭포 소리가 한층 커졌다. 그 소리가, 마치 웃음 섞인 독경처럼 금강산 골짜기마다 메아리쳤다. 그날 헐성루에서 들려온 의상의 법문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모든 길을 아는 바람’의 소리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다른 길을 걸어가며 다시 울리고 있었다.
제자 해진(海眞)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렇다면 모든 길이 한 마음에서 나온다 하셨지요. 그러나 산 아래 마을에서 서로 다른 법을 주장하며 다투는 이들을 보면, 어찌하여 한 마음이 갈라져 서로를 미워하게 됩니까?” 의상이 잔잔히 미소했다. “좋은 물음입니다. 한 마음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을 보는 눈 즉 안목(眼目)이 그에 상응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법계의 그물에서 한 매듭이 다른 매듭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각각이 서로를 비추며 존재하는 법이니, 미움조차도 결국 자비의 반향일 뿐입니다. 다투는 자들의 마음을 보십시요. 그 다툼 속에서도 서로의 말을 잘 듣고 있지 않은가요? 결국 상대의 말이 맞든 그렇지 않든 말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닿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닿음이 증오든 사랑이든, 결국은 한 흐름의 파도일 뿐입니다.”
또 다시 권적(勸適)이 손을 모으고 물었다. “스승님, 그렇다면 저희가 세상으로 나아가 수행자들의 길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화엄의 지혜가 구체적인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의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장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화엄은 교리만이 아니라, 발심(發心)의 불씨입니다. 한 사람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온 법계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드라망의 한 구슬에 먼지가 앉으면, 그 그늘은 온 그물에 드리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란 상대를 바꾸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고통이 내 고통임을 알아차려 함께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는 일이며, 보살행이란, ‘내가 구제한다’가 아니라 ‘함께 고통받아 이겨낸다’는 적극적인 행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행이 있으면, 타인의 고통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한 사람의 눈물조차 법계 전체를 적시는 비가 되는 법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초발심이자 정각인 것입니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스승님께서는 저희에게 어떤 길을 택하라 하시겠습니까? 선종의 길인가요, 아니면 교학의 길인가요?” 의상이 헐성루 아래 펼쳐진 산맥 전체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금강산을 보십시요. 어느 봉우리가 가장 높고, 어느 계곡이 가장 깊다고 생각이 됩니까? 모두가 서로 다른 높이와 깊이로 하늘을 향해 서 있지 않습니까. 선종이든 교학이든, 모두가 법계의 다른 얼굴입니다. 그대의 근기에 맞는 길을 택하되, 다른 길을 걷는 이를 절대 경멸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보살의 평등한 지혜란, 자신의 길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만 가지 길을 모두 아는 마음이며, 그리고 같음이란(同) 어느 한 곳에 머무름이 아니라고 이미 말했듯이, 모든 길이 부처의 방편임을 깨닫는 순간, 그대는 이미 그 어떤 길보다 ‘높되 높지 않은, 낮지 않되 낮은, 그리고 높고 낮음을 떠난’ 봉우리에 서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여 합장했다.
“스승님, 그러면 저희가 마을로 돌아가 장터에서 법을 말한다면, 그것도 화엄의 길입니까?” 의상이 웃었다. “장터에서 죽을 끓이는 할멈에게 물 한 사발을 떠다 주는 것조차 화엄의 길입니다. 법당에서 경전을 펼치는 것도, 길에서 아이에게 미소 짓는 것도, 모두가 법계의 숨결입니다. 중생의 눈높이에서 부처님의 법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화엄입니다. 원효 스님께서 장터에서 활짝 웃으시던 그 마음이 바로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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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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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大師와 義湘大師(92) - 第10卷 《法性圓融》 第1章 正陽寺 歇惺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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