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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민특위 전국연대 ! 원문보기 글쓴이: 도시락~
친일파 군상
임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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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와 변절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절개나 주장을 바꾸는 것이 변절인 이상, 최초부터 바꿀 만한 절개나 주장이 없었던 경우라면, 그 행적이 아무리 변절자와 같은 줄에 설지라도, 변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비근한 예로써 부연해 보자. 수절과부가 개가를 했다면 물론 그것은 변절이다. 그러나 遊女․酌婦가 무릎에서 무릎으로 옮아 다닌들 그것을 변절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경우를 혼동해서 다 함께 친일파로, 혹은 변절자로 관념지우기도 한다. 이러한 오류를 탈피하기 위해서, 이장에서는 가급적 그 둘이 구별될 수 있게 서술함으로써 원칙을 삼겠다.
다음, 친일파와 변절자는 원칙으로는 구별이 되어야 당연하지만, 그 둘이 일제침략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연장선에 서게된다. 사상전력자의 변절이 일제의 물리적 탄압의결과라면, 최초부터 친일적이었던 자 또한 어용세력 육성정책 등 음성적인 사상대책의 부산물이라 할 수가 있다. 이 장의 주제는 이러한 측면, 즉 사상탄압의 결과로 조선인이 어떻게 왜곡되었던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3․1운동이 나자, 일제는 무력탄압과 병행해서 만세열풍의 진정을 위한 모략선전을 전개하였다. 민원식․이완용 등 어용분자를 동원한 소요망동론의 유포가 그것이었다.
민족진영에서 여기에 동조한 것은 105인사건 관련자이던 尹致昊였다. 그는 윤웅렬(남작)의 장자, 17세에 신사유람단을 수행․도일하여 영어를 배우고, 주한미공사 후트의 통역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갑신정변 후 다시 망명을 겸한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에모리대학을 마치고 1895년에 귀국, 김흥집내각의 의정부 참의로부터 학부대신 서리를 역임한 후 1898년에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무렵이야말로 그가 민족주의자로서 가장 명성을 떨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완용을 이어 제2대 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면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근대 주권의식을 고취한다. 독립협회 해산 후 德源監理 등을 하다 5조약으로 퇴관, 교육․종교사업에 전심하면서 개성의 韓美書院장을 하였다.
이러할 무렵 1911년에 105인사건이 일어났다. 날조된 총독암살미수 혐의를 쓰고 1심에서 10년, 2심에서는 李昇薰 등 6명과 함께 주모급이라 하여 4년형을 받는다. 2년 남짓 옥고를 치루고 특사로 1913년 2월에 출감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친일적인 경향을 나타내었다. 『매일신보』 기자와의 회견에서, 조선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 양민족의 同化에 대한 계획에는 어디까지나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3․1운동의 비타협 급진노선을 오히려 외면하는 입장에 섰다. 甲翼熙․崔南善이 국민대표로 나서도록 권유하자, 윤치호는 뒤에서 멀찌감치 따라가겠다면서 표면에 나설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는 1919년 3월 7일, 『경성일보』와의 기자회견을 통해서, 조선은 민족자결권이 없고, 독립한대도 자립 능력이 없으며, 이로운 것은 순종뿐으로 이것만이 日鮮화합을 이룩하는 길이라는 뜻의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비타협 급진노선의 부정은, 민족점진파들의 일반적인 기본입장일뿐더러, 또한 총독부의 모략내용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윤치호의 급진노선 부정은 점진보다는 얼마간 친일 쪽으로 치우치고 있는 내용이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從順해야만 한다는 발언은 점진이 아니라 차라리 통치의 긍정과 식민지적 굴종을 선동하는 말이다. 이러한 독립불능․투쟁무용․일선동화론은 그것이 어용지 『경성일보』와의 회담인만큼 당국의 촉수가 짙은 밀도로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윤치호의 민족노선은 그 후 종교․교육․농민운동―즉 비폭력 점진의 테두리에서만 전개되고 있었다. 1922년부터 25년까지, 윤치호는 한미서원 후신인 松都고등보통학교장으로 재임한다. 기독교청년회 총무를 1920년에 물러난 후에도 그는 하와이 교포를 위해서 조선인 文庫후원회를 조직한다. 1925년에는 申興雨․李商在와 태평양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종교․경제․외교․이민연구를 통한 민족역량 육성을 모색한다. 1930년에는 천도교 신파 李鍾(?) 등과 硯農社를 설립, 『농업세계』를 발간하면서 농촌개발․농민각성에 노력한다. 그리고는 信友會를 중심으로 朴熙道 등과 함께 연정회 계열의 자치론에 접근하려는 기세마저도 보였던 것인데―.
이러한 노선은 大韓自强會․新民會 이래의 전통노선, 즉 국력배양의 점진노선과도 합치한다. 그러나 『매일신보』『경성일보』기자회견을 통해서 말한 바, 일선동화의 통치수긍은 30~40년대에 이르러 움직일 수 없는 친일로 모습을 굳히고 마는 것이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그는 동 중앙연맹 이사, 동 경성연맹 부이사장을 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맡는다. 임전대책협의회의 중심인물이던 그는 동 회의 임전대책연설회(41. 9. 4)에서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로 연설하면서 興亞保國團․大和동맹 위원장, 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의 고문 등을 한다. 그는 또 중추원고문을 하더니 1945년 4월에는 소위 정치처우개선으로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된다.
한편 윤치호는 그 무렵 기독교 황민화의 중심역할도 수행하였다. 1938년 5월, 교단의 내선일체 황민화 완성을 위해 일선 교인을 망라한 경성기독교연합회가 창설될 때, 윤치호는 평의원을 맡았다. 이들 지방 연합회의 상위중앙조직인 1938년 7월의 조선기독교연합회에서 윤치호는 평의원회 회장이었다. 이해 6월, 기독교 일본화를 위해서 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가 개최됐을 때, 윤치호는 그 회의를 주재한 후, 이제야 대임을 마쳤다. 우리 기독청년도 이제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 소위 대임―즉 그날 가결된 의제는 기독교청년회가 세계지청연맹을 탈퇴하고 일본기독교청년동맹에 가입하는 것인 바 윤치호는 潘河斗․申公淑․兪億兼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그 탈퇴․가입 수속을 취하였다.
윤치호의 이러한 변절은, 105인 사건으로 특사될 당시의 기자회견에서의 담화를 소급하는 시점에서는, 그 싹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비해서, 李光洙의 친일성향은 이광수가 문단을 개척하기 훨씬 이전의 시점에서 발견된다. 천도교 유학생으로 도일한 이광수는 1910년 3월 명치학원 중학부를 졸업한다. 그 직전인 1909년 12월 15일 발행 『白金學報』―명치학원 동창회지―에 이광수의 처녀작 「사랑인가」가 발표됐던 바, 그의 이기에 의해서 그 작품이 1909년 11월 18일 밤에 탈고된 것임이 증명된다.
이 작품은 이광수의 분신으로 볼 수 있는 주인공 文吉이 操(미사오)라는 일인소년을 동성연모한다는 줄거리의 일어 단편이다. 이러한 줄거리가 나타내는 바 친일성향은 그 작품의 제작일자에 의해서 더욱 배족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 작품이 탈고된 1909년 11월 18일은 安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한 1909년 10월 26일로부터 따져서 꼭 23일이다. 민족적인 의거가 진행되던 바로 그 시점에서 이광수는 일어로 일인소년을 연모하는 소설을 썼고, 몰염치하게도 그것을 발표까지 했던 것이다.
그 후 이광수는 치타에서 국민회 기관지 『正敎報』발행에 관여했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며, 상해에서는 안창호를 도와서 임정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약한다. 안창호의 점진노선의 영향 밑에서 『무정』(1917)등 초기작품을 썼던 그는 1920년에는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이러할 무렵 1921년 5월, 이광수는 상해로 온 許英(?)을 따라 돌연히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변절했다는 비난 속에서 이광수는 1922년 1월 상해 안창호로부터 흥사단지부 조직의 밀명을 받고, 23년 10월에도 북경에 가서 안창호와 접촉하였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 동안인 1922년 9월 30일 밤에 총독 齊藤實과도 첫 면담을 하고 있었다. 총독의 막후 브레인, 『경성일보』제2대 사장이던 아부(阿部充家)를 통해서 이광수의 수양동맹회의 규약은 사전에 총독에게 제출되었고, 이러한 조선인 개조문제에 대해서 재등은 문화운동화로 그 방향을 전환하도록 암시를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광수는 20년대 초반의 정치 모략의 주인공이던 아부와 빈번히 접촉하면서 심지어는 안창호의 근황에 관한 정보제공까지하고 있었다. 안창호와 여운형의 접근설을 확인하라는 아부의 요구에 대해서, 이광수는 공산당으로부터 당수가 되도록 권고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한데, 실력․비폭력노선이 아니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는 서신까지 보내곤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광수는 이 시점에서 당국의 비호를 확실히 받고 있었다. 1922년 6월 1일자로 아부는 총독에게 잡지『東明』이 발행되면 출판업을 일으키게 해서 그것으로 조선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秦學文․이광수들의 생활비의 출처로 삼게 하도록 매번 말씀 드린다는 서신을 보낸 바 있었다. 그리고 이광수는 1922년 가을 총독부 주선으로 월수당 3백圓을 받으면서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한다. 그 해의 평균곡가 1백80리터에 34圓90錢으로 환산하면 3백圓은 쌀 15.5가마―현시세 1백만원의 대금이다.
1922년 5월의 「민족개조론」은 이러한 풍토에서 발표되었다. 안창호의 비폭력․실력노선 즉 務實․力行의 사상과 합치하는 듯하나, 반면에 「민족개조론」은 폭력노선의 비폭력적 변질을 획책하던 당국의 어용노선과도 합치한다. 이광수는 여기서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하면서 어용학설인 조선인열등설을 전개한다. 독립운동가의 명망의 유일한 기초는 떠드는 것과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 해외에 漂泊하는 것인 듯하다는 말은 민심을 독립노선에서 이간할뿐더러, 독립불능론을 넌지시 선전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바탕에서 주장된 무실․역행―이것은 島山사상의중심개념이면서, 폭력을 비폭력으로 유도하려는 총독부 정치모략의 초점이기도 하던 개념이었다.
그럼 이광수는 양두구육으로 이리의 본심에 도산사상의 옷을 입혔던 것인가, 아니면 호랑이 새끼를 잡기 위해서 虎窟에 든다는 식으로 총독부의 책동에 편승해서 도산의 노선을 실천하려 했던 것인가? 설사 호굴에 드는 것이었다손 쳐도 그것은 불행한 결과 이상을 초래하지 않는다.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사람은 혼까지 팔게되고 만다는 공식대로, 30년대 이후의 이광수는 그야말로 혼까지 팔아 버린 친일파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광수는 20년대에서도 그가 한때 몸담았던 임정의 분리주의 독립론에서는 그 자체가 이미 변절을 의미할 뿐인, 현상이 허락하는 범위내로써 그 자신의 노선을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 발표된 것이 1924년 1월 2~5일에 걸쳐 『동아일보』사설로 연재된 이광수 집필의 「민족적 경륜」이었다.
硏政會의 자치론을 위해서 관측기구로 던져졌다는 이 논설은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의 정치․산업․교육적 結社운동으로 민족 백년의 대계를 위한 경륜을 삼자는 것이었다. 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란 일본 국법이 허하는 범위 안이요, 따라서 그것은 통치의 긍정이자 수용이다. 文鐸 등이 내정독립청원서를 제출했을 때 『동아일보』는 사실 「내정독립도 독립인가」를 통해서, 일보 천황폐하 아래 조선의 내정독립을 기한다는 것이 조선을 일본 통치권에서 분리하려는 독립운동과 동일한 내용을 가지는 것인가고 반박하였다(방점 필자). 이광수의 이러한 통치 긍정․수용론―즉 식민지적 굴종은 그 논설의 군데군데에서 당국의 정치모략과 일차하는 구절들을 남기고 있었다.
즉,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단결하여…장례 구원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成해야 한다는 정치결사의 대목을 실력부재론과 자치론으로 조선독립을 당면 아닌 구원한 장래의 과제로 밀어 덮으려던 당국의 정치모략과 일치한다. 산업적 결사에서 일치한다. 산업적 결사에서 이러한 제도 밑에서 가능한 무슨 방침으로 물산장려 등을 말한 것은 정치적 반항운동을 산업운동으로 전환시키려던 모략노선과 일치한다. 교육적 결사에서 避敵捕(?)術을 말하되, 그 적을 일제 아닌 기후․水土․질병의 원인․타동물에 한정한 것은 대일적개심을 교묘히 전환시키려는 저의라고 볼 수도 있다.
정체불명의 이러한 민족논리(?)를 이광수는, 전술했듯이, 당국과 밀착된 상황 밑에서 전개하고 있었다. 20년대의 이러한 행적이 30~40년대로 들면서는 남들이 李狂洙라 빈축할 정도의 광적인 친일로 탈바꿈한다. 조선문인협회․조선문인보국회의 수뇌자이던 그는 皇道학회․조선임원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대화동맹․大義堂에 위원으로 참가하고, 대동아문학자대회 대표로 2차례 출석한다. 소설 「그들의 사랑」(『신시대』:41.1)에서 광주학생의거를 어리석은 군중심리라고 하면서, 「황민생활요령」(『매일신보』24.7.30)에서는 身命觀․家門觀․자손관․직업관은은 물론, 일상생활과 심지어 언어․풍속․습관까지도 일본적 수정을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광수를 타락시킨 일제는 또한 崔麟을 변절시켰다. 기미년 민족대표의 한사람이던 최린의 민족노선은 그 나이 25세 되던 해 1902년의 一心會사건으로 소급한다. 이것은 일본육사 출신인 유학생들이 쿠데타로써 정부를 개혁하려던 비밀결사이다. 이 결사원이던 최린은 계획이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 李軫鎬의 집에서 충청도 부자 李祥憲으로 변성명한 망명객 손병희를 만났다.
얼마 후 특사로 귀국한 최린은 1904년에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동경부립 제1중학에 입학한다. 이해 11월 최린은 교장의 조선인 교육불필요설에 대항하는 스트라이크로 퇴교처분을 받는다. 익년에 그는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을 거쳐 제2대 회장직을 맡는다. 1906년에 명치대학 법과로 진학한 그는 왕실모독의 공연행위를 한 흥행장을 습격하여 영업방해․손괴죄로 피검된 적도 있었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최린은 손병희를 찾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경영이던 普成고보장을 맡는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족대표로 참가한 그는 3․1운동의 노선을 대중화․단일화․비폭력의 3원칙으로 결집시키고 투옥된다. 공판에서 그는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일제의 음험한 촉수는 이 무렵부터 그의 주변에 뻗쳐지기 시작하였다. 민원식의 참정론, 선우순의 일선융화론이 대중에게서 외면되자 일제는 보다 고등한 정치모략을 구상하면서 그것으 수행시킬 후보자로 최린을 점찍었던 것이다. 다음의 1921년 11월 29일자 아부의 對총독서한이 그러한 사정을 설명한다.
여기에는 이번 가출옥한 위인들 중 특히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 소생도 그와는 말 없이도 마음이 통하는 바 있으니 웬만큼 이야기가 될 승산이 있습니다. 이러한 터에 鄭과 함께 전번에 貴地(서울)에 놀러갔을 때도 하루 저녁 잘 놀아두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천도교도 따위를 채찍질하여 저쪽으로(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큰 바보짓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후 최린의 민족노선은 3․1운동의 분리독립원칙에서 자치노선으로 선회한다. 경무국편 『최근의 조선치안상황』에서 최린 및 그와 관련된 천도교의 동정을 옮기면,
대정11년(1922년) 이래 분열 苟合을 종종 거듭하고 마침내 신파․구파․연합회파․六任派 등으로 분립하여 서로 排(?)로써 일을 삼으며… 최근에 이르렀는데… 대체로 신파는 인도의 스와라지운동을 본받아 합법적․불복종적․비폭력적 정신에 따라 민족자치운동으로 나아가려는 색채 농후하며, 구파는 급진 비타협적 사회운동 방면으로 진출… 소화 5년(1930년) 12월 신파 수뇌 최린의 제의로 신구 양파의 합동을 보았으나… 소화7년(1932년) 4월 4일의 정기대회에서… 재차 신구 양파로 분열… 항쟁은 더욱 치열화하면서 구파는 朴寅浩․權東鎭․李鍾麟을 중심으로 제2의 신간회인 민족단일당의 조직을 획책하려는 듯하고, 신파는 최린․鄭廣朝를 중심으로 자치운동에의 진출을 기하면서, 이로써 장래의 조선운동의 패권을 획득하고자 자임하고 있는 것같다.
최린의 이러한 자치론은 『동아일보』계의 민족 우파와의 접촉에 의해서 1924년 이래의 연정회 운동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아부의 관여에 반발한 김준연 등의 탈퇴로 연정회의 부활계획마저 좌절하는데―.
1926년 9월~1928년 초까지, 최린은 최린․윤치호 등의 사람들을 묶어 중견세력을 만들고, 對外선인의 온화파와 기맥을 통하게해서 잘 양해시키기 위해서는, 최린을 중국시찰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어 안창호 등과 만나게 해서 서로의 의사를 소통시켜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당국의 계획에 의해서 아일란드 등 구미 각처를 외유한다. 귀국하여 1933년 4월에 중추원 참의를 수락한 그는 동 11월에 時中會를 조직, 大東方주의와 일선융합을 외치는 바, 그 운동의 정신적 요책은 다음과 같다.
이 운동(시중회운동)에는 일선인의 정신적 전환이 절대 필요한 선결문제이다. 진심과 (??)으로써 조선인은 제국신민임을 자각 자처하고, 일본인은 조선인을 진정한 동포국민으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內心에는 폭탄과 칼을 품고 일본국민 입에 假裝․僞稱하고, 동일동포라 하면서 우월감을 포지한대서야, 이 역시 혼연일치하는 日鮮一家의 결성은 되지 않는다. 조선의 민족성을 어디까지나 존중하고, 조선문화를 숭배하면서도, 우리는 일본제국신민이 될 수 있고, 일본제국의 세계에 대한 사명에 공헌하면서, 대동아의 평화에 진력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최린 역시 30~40년대로 들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로 전락하였다. 어용지 매일신보사장, 조선임전보국단장, 국민총력조선연맹이사, 조선언론보국회장 등을 하면서 「泣訴」라는 연제로 임전대책연설을 했고(41.9.4), 언론총진격대강연회(45.6.15) 등을 주재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윤치호․이광수․최린의 세 경우는 그 변절의 이면에 당국의 책동이 짙은 농도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경우에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 대부분의 민족파 또한 윤치호 등 3인과 대동소이한 경로를 밟아서 그들의 명성을 친일의 오명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1937년 7월의 수양동우회사건으로 李基潤․崔允浩가 사망하고, 金性業은 불구가 된다. 이해 11월 친일전향한 동우회계 목사 鄭南水는 미국내 친지․주지사․의원․교회 등에게 친일메시지 5천부를 자비 발송한다. 1938년 6월에는 田榮澤․玄濟明․洪蘭坡 등 18명의 수양동우회원이 변절하여 친일 大東民友會에 가입하고, 동 2월에는 興業구락부도 전향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해 1938년 5월, 기미민족대표이던 목사 鄭春洙는 친일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으로 변절하고, 동 10월 감리교의 내선일체를 위해 金永燮․申興雨․梁柱三․柳瀅基․李允榮․정춘수․윤치호의 7명으로써 일선 감리교의 합동을 논의하는 특별위원으로 참가한다. 역시 민족대표이었던 朴熙道는 1939년 1월 친일일어잡지 『東洋之光』을 창간하면서 「신동아의 건설과 我等의 사명」(39.4) 등 친일논설을 발표한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은 중추원참의․만주건국대학 교수를 거쳐서 관동군의 주구단체인 東南지구 특별공작 후원회본부의 고문으로 독립투사 투항 권고문에 이름을 얹는다. 2․8선언의 주동자 白寬洙는 국민정신총동원 경성연맹 상담역으로 전락하고, 2․8선언의 역시 실행위원이던 徐椿 또한 국민총력연맹 참사를 하면서 조선문화사장으로 일문 친일 월간 『太陽』을 발행하였다.
동아일보 영수 金性洙도 총동원연맹 이사, 총력연맹 참사로 참가하였다. 조선일보사주 方應謨도 총력연맹 참사를 한다. 서울청년회․조선청년회연합회를 이끌면서 민족파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張德秀는우파인사 유억 겸(제3분회장)과 함께 사상보국연맹(제4분회장)을 하였다. 최린과 함께 신파의 자치론자이던 鄭廣朝는 물론, 비타협 급진노선이던 구파의 중심인물 이종린도 친일대열에 서고 말았다.
1925년 11월의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이후 1930년 9월의 검거사건에 이르기까지, 조선공산당은 전후 5차의 대량검거로 조직의 대부분이 괴멸하였다. 그런데다 이들은 1928년의 3․15사건, 1929년의 4․16사건 등 일본공산당에 대한 대탄압으로 연계세력마저 잃어버린다. 만주사변으로 더욱 가속화하던 軍파시즘체제의 강화는 이들이 설 땅을 더욱 위태롭게한다. 그러던 중 1936년 12월, 朝共 최후의 거물이라던 李載裕의 피검으로 마지막 재건의 기도마저 좌절하고 말았다.
일본의 주의자들이 잇달아 전향하자 그 영향은 당연히 조선에도 파급하였다. 중․일전쟁전까지, 재감사상범 1천2백98명 중 3백49명, 요시찰․요주의인물 7천7백90명 중 1천3백16여명이 전향노선에 섰다는 통계가 있는 바, 이러한 전향의 선풍은 먼저 만주에서 시작되었다. 관동군관학교 출신, 소련에서 공산운동을 한 李亮으로 개명하고 중․일전쟁 때 일제의 화북 출병군으로 종군한다. 적군장교 경력자인 金東漢은 1924년 9월 친일 간도협조회장에 취임하였다.
국내에서는 車載貞이 친일 大東民友會 이사가 되어 학무국 주최의 시국순회강연반에 참가한다(37.8~9). 이 차재정은 20년대에는 조선청년총동맹의간부였다. 1929년 3월, 차재정은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서울의 각 중학에 세포조직을 부식함으로써, 동년 11월의 광주학생사건을 전국적인 소요로 유도하려 하였다. 그와 함께 대동민우회 이사장을 한 安淙, 또 이사이던 朱鍊, 모두 과거의 좌익운동자들이다.
이들 전향자로써 조직된 사상보국연맹은 1938년 6월 20일부터 3일간 동경 법조회관에서 개최된 사상권력자들의 시국대응 전국위원회에서 태동하였다. 일본의 전향자들이 사상보국․국책협력을 맹서하면서 동 위원회를 개최할 때, 조선에서는 權忠一․朴英熙가 대표위원으로 참석하였다. l들은 동년 7월 3일 경성보호관찰소에서 경과보고회를 가졌다. 이 석상에서 조직을 결의한 사상보국연맹은 사상법보호관찰소의 주동으로 탄생된, 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였다.
여기에 간사로 참가한 金漢(?)은 1928년 4월 제4차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에서 설치한 조공일본총국의 책임자였다. 그는 신간회 동경지회․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등의 합법단체를 통해서 계급․반제노서늘 선동하면서, 1928년 8월 29일의 국치기념일에 반일데모를 계획하다 피검된다. 그 후 김한경은 사상보국연맹 간사, 또 1939년 여름에는 친일 『東洋之光』誌 편집부장으로 입사한다. 그와 함께 동양지광사 경리부장을 한 姜永錫도 광주학생사건 무렵 동지방의 좌익운동자였다. 동사 여기자 高明子는 공산대학 출신으로 모스크바에 갔던 경력을 갖는다.
印貞植도 조공 일본총국 조직의 중심인물이었다. 1927년 5월 서울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될 때 이들은 당 일본총국 및 청년회 일본지부를 동경에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 건의에 의해서 인정식과 朴洛鍾․崔益翰이 미구에 그것을 조직하였다.
1928년 2월 제3차 조공검거사건으로 박낙종․최익한은 검거되고, 인정식은 도피하였다. 이후 인정식은 김한경의 일본총국이 제1차 일본총국 검거로 괴멸한 후 1929년 4월 朴文秉과 함께 다시 그것을 재건한다. 2차 일본총국 검거로 조직이 파괴되면서, 인정식은 이윽고 친일노선에 섰다. 30년대 후반, 桐生一雄(기리우 가즈오)으로 창씨개명한 인정식은 가마다 사와이찌로(鎌田澤一郞)가 주재하던 대륙경제연구소에서 조선경제의 내선일체적 사실을 연구하고 있었다.
金斗禎은 1933년 2월에 검거된 조선공산당 재건투쟁협의회사건에 연좌하였다. 그는 1932년 2월 金致程․文鎌夏 등과 일본에서 노동계 급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노동계급』을 발간하면서, 당 재건운동을 선동하였다. 일본공산당의 후원하에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재건투쟁협의회를 조직한 그는 오르그로서 조선에 잠입, 경남북․원산 일대에서 조직공작을 하다 체포된다. 옥중에서 그는 사상보국연맹의 결성에 축하메시지를 보내고, 옥중 저서 『반공전선 승리의 필연성』(국판 350면)을 저술하면서 전향대열에 섰다.
金基鎭․朴英熙는 1924년 8월 약칭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결성될 당시의 핵심멤버들이었다. 계급예술운동으로 반봉건․반제투쟁을 하던 이들 멤버는 1930년 4월 일본의 나프의 조직에 준하여 산하에 문학․영화 등 전문분과를 두면서 활동을 계속한다.
이해 6월 權(?)이 「조선예술의 구체적 과정」을, 林和가 「조선 프로예술의 임무」등 논문을 발표하면서 카프는 이윽고 극좌 선회의 조짐을 보인다. 1931년 3월, 權景完․임화 등 간부는 카프의 운동을 鮮內 공산운동의 일익이게 하기 위해서 산하에 조선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 등 전문독립단체를 둘 것을 결의하였다.
30년대로 들면서는 이들도 친일의 길을 걸었다. 박영희는 사상보국연맹의 산파 역할을 하고, 황군위문작가단으로 화북을 다녀와서 日文으로 「전선기행」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친일을 하던 그의 영락한 모습을, 역시 좌익의 전향자이던 在鮮 日작가 다나까 히데미쓰(田中英光)는, 완전히 피로해 버린 늙은 원숭이같은 얼굴이라고 묘사하였다. 김기진도 사상보국연맹에들었고, 조선문인보국회에서 황도문학 건설을 외친다. 임화․李泰俊은 황군위문작가단의 산파 역할을 한다. 朴世永은 수필 「오 고마운 황군이여」(『매신』42. 2. 20)를 발표하고, 安(?)南은 「징병제 실시 만세」(『매신』43.8/7)을 외치며, 韓雪野도 「血」(『국민문학』42.1)․「影」(『국민문학』42.12) 같은 일문창작을 발표하였다.
이들 좌파 문인 중 선회의 폭이 가장 컸던 사람은 金龍濟가 아닐까 한다. 중학시절에 도일한 그는 1930년 근뭐인 농천목장의 파업을 지도하고 29일간 구류된다. 1931년 일본 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 가입한 그는 산하에 조선위원회가 설치되자 그 핵심멤버로 위원을 맡는다. 1932년 6월, 김용제는 일본프로문화연맹 기관지의 부록인 조선어판 『우리동무』의 편집장이 될 예정이던 차에 제3차 피검으로 4년형을 받는다. 출옥한 지 채 반년밖에 안돈 1936년 10월, 조선예술좌사건으로 제4차 피검을 당한 것이다.
□「오, 고마운 皇軍이여!」
이 무렵 김용제는 나프의 유수한 시인으로, 다음의 1절에서 보듯이 직설적인 反帝詩를 쓰고 있었다.
굶주린 평원
그것이 그대의 가슴의 넓이이다.
빨갛게 헐벗은 산맥
그것이 그대의 수척한 등줄기이다.
어머니의품―그대의 아들들의 침상(寢床)은 상처 투성이
…사×(死×)에 충만하고
선혈을 뒤집어 쓰면서…
아아, 식민지 지옥의 야산에는
한 방울 물을 기를 자유도 없고
한 다발 섶을 깍을 그늘도 없다.
조선을 식민지 지옥이라고 하던 반제시인은 1년 남짓 옥중생활을 하다 서울에 와서 1938년 무렵부터 친일노선에 선다. 친일 『동양지광』사 사업부장․조선문인협회 상무․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대표 등을 하면서, 일어 황민시집만도 무려 3권을 발간한다. 『아세아시집』과 일본의 건국신화를 예찬한 서사시 『御東征』, 또 『報道詩(?)』인 바, 그중 『아세아시집』으로 1943년의 제1회 國語문예총독상을 수상하였다.다음은 그 서시인 바, 제1급 사상시인의 실의․영락한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나의 제1시집은
불행한 『대륙시집』이었다.
그것은 슬픈 사상 속에서
햇볕을 보지 못한 채
추억의 동경에서 죽어 갔다.
나는 10여년의 문학생활의
모든 공죄(功罪)를 아낌 없이
그 낡은 시대의 운명과 함께
저 荒川(아라끼와)의 물결에 흘려 보냈다.
나는 이제
그 죽은 자석의 나이는 세지 않기로 했다(하략)
ML 공산당의 조직부장이던 崔益翰, 서울파의 중진이던 李英 등 거물급도 광산부로커나 술장사, 또는 전향성명을 하고 일제의 밑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1939년 7월 말 현재 사상보국연맹원은 2천7백65명이었다. 동년 10월 8일의 제1회 통상대회에서 이들은 反코민테른 결의를 한다. 다음은 그 결의문이다.
인류사에 있어서의 코민테른의 파괴적 죄약은 신인 공히 용서 못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에 소련의 세계정책기관이자 인류평화 파괴의 총본영인 코민테른을 상대로 감연히 宣戰하고, 동아의 천지로부터 적색세력을 구축․(??)함에 의해서 興亞的 대사명을 다하고, 그 세계동란을 유발하는 세계적화음모를 철저히 분쇄함에 의해서, 인류를 적색제국주의의 침식으로부터 구제․방위하고, 써 황국의 八一字의 대상의 실현에 매진할 것을 기한다.
우리는 半島의 사상국방전선의 堅陣에 서서 위를 결의함.
일제는 소작쟁의․노동쟁의는 극력 탄압하면서 조선인 지주․갑부에 대해서는 극력 보호하는 정책을 썼다. 20년대 이래 이 계층의 상당수가 부․도회 의원과 중추원참의로 진출하고, 岩泰島 기타의 소작쟁의에서 무장경찰대로서 지주 文在喆․白寅基 등을 보호한 예 등이 그 증거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친일세력권으로 들고, 예속지주․매파나본가로전락할 때, 일제로서는 몇가지의 효과를 얻었다. 첫째는 收賄源을 확보한다는 효과이니, 『동아일보』 1924년 7월 28일자 사설 「賄賂의 (?)행」이 말하듯 회뢰는 부호가 아니면 행사할 수가 없고 그 때문에 총독부가 부호를 우대하며 이로써 회뢰는 私徑을 통하려는 가릴 수 없는 사실이 때때로 人言에 오르곤 했다고 한다. 동 사설이 폭로한 바만도 서무부 要任에 있는 모가 전남부호 김모에게 군수 채용을 예약하고 3만원, 개성부호 김모를 양행할 때 동반하여 여비 2만원, 진주부호 김모에게 참의운동비로 6만원을 받았다등등이다. 이러한 뇌물사건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소화 3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꼽힌 제4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의 독직사건이다. 충남도청 이전․토지 불하 등을 미끼로 金鴻亮․崔錫浩 기타 이전관계자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은 한조와 비서 히다 리기(?田理吉)는 부산 米豆場 개설관계로 5만원을 받아먹다가 총독 신분으로 고랑을 차고 쫓겨 갔다.
부호 우대로 거두는 효과의 제2는 일제의 착취의 합리화이다. 『동아일보』1922년 2월 22일자 「은폐된 官惡과 민원」이 보도하되,
방금 군내에 있는 지주라고는 그중 몇몇을 제하여 놓은 외에는 전반이 그와 같이 가혹한 소작료를 받는데, 그 가운데에도 원성의 적이 되어 있는 것은 산양면에 사백여두락의 전답을 차지하고 앉았는 부산농사주식회사와, 천여두락의 전답을 차지하고 있는 張吉相 등을 비롯하여 읍내에 있는 조선개척주식회사와 岩佐梅吉․藤原(?)平 등 대개는 일본인 지주가 많은데….
이 경우 장길상의 가혹한 소작료를 옹호해야만 부산농사주식회사 등 일인 지주의 착취가 합리화되는 것이었다.
부호 우대의 제3의 효과는 소위 日鮮자본가의 제휴를 내세움으로써 침략자본의 진출을 위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제휴로써 매판화를 통한 친일여론 조성도 이룩할 수 있으니, 이래서 조직된 것이 1916년 11월 창립된 大正親睦會이다. 일본인 유력자와 조선인 갑부의 친목가교단체이던 대정친목회는 설립 당시 국가경축일에 관한건, 법령 주지, 납세의무 이행 기타를 활동목표로 하고 있었다.
갑부 옹호의 효과의 제4는 이들에게 부회의원․도회의원․참의를 줌으로써 어용화하고 이들 영향력 있는 층을 통해서 민중의 절대수를 친일권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이 계층은 그 방면에의 진출에 있어서 오히려 일제의 귀족층을 능가하였다. 또 1927년 5월에 시작된 통영사건에서 보듯이, 일제는 민중이 배척한 金淇正을 관선 도평의원으로 굳이 기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럼 누가 그런 보호를 받으면서 어떻게 친일을 했는가? 公州 갑부 金甲渟은 1872년생. 왕조시절에 중추원의관․충남 捧稅官을 하고 부여군수로 1902년에 퇴관했으나 문벌 학식가는 아니다. 재리에 밝았던 그는 개간․매립․수리사업 등으로 거만의 부를 축적하자, 운수업을 시작하면서 공주를 중심한 각 노선의 영업권을 획득한다. 공주구제원장․우성수리조합장․유성온천주식회사 추체역이던 그는 이래 친일노선에 서서 국민협회 간부․道농회부회장․도회 의원․중추원 참의를 하고 총력연맹평의원․임전보국단 이사로 참가한다. 그는 역대 총독의 사진과 사적을 모신 역대총독 列傳閣을 건축하면서 당국에 아부하였다.
金琪邰는 晋州굴지의 대지주로 식산은행 이사, 재산은 3백80여만圓으로 평가되었다. 전게 「회뢰의 사행」이 말한 바 진주부호 김모에게 참의운동비로 6만圓의 주인공으로 중추원참의를 하였다.
金 洙는 경도제대 출신, 일제의 會社令 하에서 金性洙와 함께 경성방직을 차렸고, 해동은행․저축은행․중앙상공회사 등의 대표 또는 중역이었다. 중추원 참의․총독부 시국대책 조사위원회 위원․경성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총력연맹 이사․조선항공공업회사 대표 등을 하였다.
文明琦는 1878년 평양 출생, 어릴 때 부친 文承渙을 따라서 경북 영덕으로 이주, 한학을 배웠다. 제지․수산․광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그는 소유 금․은광이 12만圓에 팔리자 그 중 10만圓으로 육해군기 합 2대를 헌납하였다. 伊勢신궁에 참배하여 국방기 1백대 헌납을 서약한 그는 강연행각으로 1군 1대 헌납을 선동한다. 중․일전쟁을 당해서 그는 화북에 파견할 조선인의용군을 모집했고, 화북장병 위문을 가곤 하였다. 당시는 소위 가미다나 分布式을 겸행하고, 제1차로 서울의 각 町會總代(동장) 1백30명에게 가미다나가 선내에 배포된 시초이다.
경북 道議․영덕국방의회장․일본 조선신문사장․황도선양 회장․총력연맹 평의원․임전보국단 평의원이던 문명기는 중추원 참의를 수차 중임한다. 육해군기 2대 외에도 그는 육군 2만圓, 해군 4만圓의 국방비 헌납으로 1939년 2월 천황에게서 감수포장을 받았고, 동 8월에도 육군에 4만圓을 헌납한다. 이러한 행적에 대해서 당국은 그를 愛國翁이라 하였고, 일반은 野蠻琦라고 빈축하였다.
閔圭植은 1893년 황해도 출생. 서당과 사립일인학교를 마쳤다. 조선 굴지의 대지주로 연수입을 14만圓으로 추정한 기록이 있었다. 평균곡가 14圓으로 환산하면 현시가 6억원 이상이 되는 금액이다. 한일은행 상무취체역이기도 했던 민규식은 향리인 신천군 온천면의 면장, 면협의회원․도회의원을 수차 중임하고 중추원 참의를 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 경성연맹 이사․국민총력연맹 평의원․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등이었다.
朴興植은 1903년생. 미곡상․선광인쇄소를 하다 서울에 와서 선일지물․화신주식회사 등을 창립하고, 대동흥업․경성직불․북선제지․조선석유 등의 중역 혹은 대표였다. 친일행적은 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총 동원연맹 총력연맹 이사․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대화동맹 이사․대의당 위원․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이사, 왜정 말기에 그는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었고, 金 洙가 대표인 조선항공공업회사의 추체역이었다.
方義錫은 1895년 북청 출생. 운수사업가로 공흥자동차․함흥택시․북청전등회사장을 하면서 목재업․농업을 겸영하였다. 북청읍회의원․함남 관선도회 의원․함남도회 부의장이었고 중추원 참의를 수차 중임한다.
중․일전쟁 후 비행기 2대, 고사기관총 1대, 지원병훈련소용 앰블런스 등 수차의 헌납행위로 포장 등을 받는다.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등을 하였다.
龐寅(?)은 1878년 보은 출생. 1905년 평북관찰부 주사를 했고, 1911년에 일본시찰을 했다. 대지주요 (?)林家로 조림면적은 보은에 수십정보, 청주에 수백정보이었다. 1911년 청주군참사, 이후 도평의원(관선)을 했고, 1921년에 참의로 임명되었다.
白樂承은 1896년생으로 명치대 전문부 출신. 1926년에 서울에서 애국합명회사를 설립하고 금융대부․부동산영업을 하였다. 중․일전쟁 후 비행기 1대를 헌납하였고, 일본무연탄제철회사의 생산책임자(사장).
白寅基는 1882년생으로 구한국 탁지부 주사․외부 참서관을 한 전주의 대지주. 그의 농장은 논 2천99정보, 밭 1백97정보에 달했다. 서울 실업계의 거물이기도 했던 백인기는 한일은행 전무취체역․한호농공은행 이사․조선권농주식회사 취체역으로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상임의원(1901)이었다. 1908년 창립된 일계자본 일한와사전기에서 백인기는 한말 실업가 金時鉉과 함께 단 2명의 중역(취체역)이었고, 역시 일계자본인 경성전기에서도 단 1명의 조선인 중역(감사역)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일계자본인 조선물산․조선무연탄에서 취체역을 하였다. 1928년 12월 그의 전주지방 농장의 소작쟁의에서 경찰은 쟁의농민 다수를 검거․투옥하면서 그를 옹호하였다.
薛卿東은 1898년생. 수산업계의 거물로 동해수산공업사장, 풍국수산․조선기업 취체역, 신흥해운․함흥(?)油(?)수산조합 감사를 하였다.
정어리를 잡고, 정어리 기름을 짰던 것인데, 당시 정어리 기름은 화약원료로 군수품이었다. 함북도회 의원을 지냈다.
(?)宗錫은 1872년 연천 출생. 조실부모하고, 서울 종형 집에서 電郵학교를 나왔다. 이후 電郵總局주사, 중추원 의관, 궁내부 典膳司監董, 노․일전쟁에 종군했던 그는 1907년 大正이 황태자로서 내한했을 때 유길준․趙鎭泰․張憲植과 함께 한성부민회를 조직하고 迎送활동을 한다.
이등박문을 따라 일본시차도 한 바 있었던 예종석은 3․1운동마저 반대하였다. 1919년 4월 22일, 연천 성묘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종석은 촌민들에게 만세를 반대하면서 만세운동자, 즉 不逞漢의 출입 등에 관해서는 속히 경찰관헌에 신고하도록 선동하였다.
1916년 11월에 그는 일인 유력자와 조선인 부호의 사교친목단체로 대정친목회를 하직하고, 회장․이사 등으로 일선융화운동을 벌인다. 경성부회 창설 이래의 부회의원으로 京城神社상담역, 조선乃木會 상무이사, 자치․참정권을 표방한 한일합작의 친일단체 甲子구락부의 상무간사, 치일 각파유지연맹의 간부 등을 하였다.
完悳常은 1883년 서울 출생. 일본 千(?)의전을 마치고 서울에서 덕제의원을 개업하였다. 경성부회 의원․경기도회 의원․경성상공회의소특별평의원을 했고, 1927년이래 중추원 참의를 수차 중임한다. 종로금융조합장․조선생명보험 전무취체역이었고, 총동원연맹 이사․총력연맹 평의원․임전보국단 상무이사를 하였다.
(???)은 1881년 원산 출생. 화약원료인 정어리 기름을 판매하면서 어업․수산가공업을 하였다. 수산가공․판매업체 삼산상회의 경영자로 원산부회 의원, 함남도회 의원, 수산회․상공회의소 의원, 중추원참의를 하였다.
張(?)相은 1882년생. 칠곡의 명문․부호가로 부친은 경북 관찰사를 한 張承遠, 형은 대구은행장이던 張吉相이다. 경북 신령군수 등을 하다 퇴관, 금융계로 진출하여 대구은행․전남은행․경일은행 취체역을 하였고, 왜관금융조합장, 대구창고회사장, 남선합동전기․조선신탁의 취체역이었다. 대구부회 의원․경북도회 의원․대구상공회의소 회두로 1930년 이후 중추원 참의를 수차 중임한다. 총력연맹 평의원, 임전보국단 이사, 흥아보국단 경북위원, 대화동맹 심의원이었다.
趙鎭泰는 1853년생인 한말의 실업가이다. 서울 굴지의 대자본가로 한성 手形 조합장,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장, 한성은행 취체역, 한호농공은행 이사를 하였고,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常의원이었다. 東拓 창립과 함께 감사를 맡았던 조진태는 1916년 창립인 일제 조선철도주식회사의 유일한 조선인 중역(취체역), 또 1922년 창립인 합작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의 취체역이었다.
崔準集은 1893년 강릉 출생인 지방 유력자, 명치대학 출신이다. 강릉합동양조․강릉육운․강릉곡자․강릉자동차사장을 하였고, 강릉상사회사 전무취체역이었다. 관선 도회의원으로 기용되었고, 중추원참의를 수차 중임하면서, 임전보국단․총력연맹 이사, 대화동맹 심의원 등을 하였다.
韓相龍은 이완용의 생질로 남작 韓昌洙와도 친척관계를 갖는다. 1880년생으로 부친은 奎章閣提學 韓觀洙. 관립영어학교․일본 成城학교 출신이다. 외부 참서관, 궁내부 秘書監丞을 했으며, 李載完(궁내무대신)이 경의선 부설권을 팔아먹은 대가로 경영권을 얻어 설립한 한성은행의 설립위원이었다. 1905년 창립인 한성은행의 행장은 이재완, 부행장은 남작․정우회 총재를 하는 金宗漢, 한산룡은 총무→전무취체역이었다.
실업계 굴지의 거물로 구한국 한성수협조합․한호농공은행의 설립위원이었던 한상룡은 일제의 조선 郵船․조선제당․조선방직․조선축산흥업․조선천연빙․조선서적․조선화재해상보험의 설립위원․설립발기인으로 참가한다.
한편 그는 조선생명보험의 사장이었고, 조선맥주․조선도시경영․금강산전철회사 감사역, 조선신착 취체역회장이었다. 동척 설립위원으로 참가한 그는 1908년 창립 당시에 이사겸 조사부장을 하였고, 1916년에 동척 고문직을 맡는다. 그는 또 東三省실업공사․조선임업개발회사 등 국책․준국책회사의 설립에도 참가하였다.
경기도의 부의장․경성상공회의소 특별의원이었던 그는 중추원참의를 수차 중이하면서 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조선중앙방공위원회 기타에 위원으로 참가한다. 총력연맹 사무국총장․임전보국단 고문․조선유도연합 고문이었고 1941년 이래 중추원고문을 2차 중임하였다.
玄俊鎬는 진사 玄基奉의 아들, 1889년 전남 출생이다. 목포 굴지의 재산가요, 대지주인 현기봉은 드물게 보는 덕행자로서, 흉년이면 수백석을 풀어 궁민을 구제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편에서 명치신군 奉(?)會조선지부위원․제국군인후원회 특별회원․전남 도참사․전남 도평의원․중추원참의 등을 한다. 3․1운동 때 현기봉은 당국의 요청으로 나주․무안․제주 등 6군을 유세하면서 군민에게 만세불참가를 종용하였다.
현준호도 사재 20~30만圓을 투척하여 우수학생을 후원함으로써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1920년에 그는 호남은행을 창리하여 두취가 되었고, 간척사업도 하였다. 중추원참의로 임명된 그는 8․15까지 수차 그것을 중임하면서 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한다. 1937년에 사상범보호관찰소가 설치되면서 그는 광주 보호관찰심사위원을 4차례 중임하였다.
친일과 변절은 일제침략의 부산물이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한 시대의 악몽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변명의 구실은 될 수 없을 것이, 쓸개까지 뽑아 바친 자들에 의해서 범해진 너무나 많은 추악한 사례들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 추악한 사례의 하나가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을 쓴 김모의 피검사건이다. 당시의 보도에서 사건의 곡절을 살피면,
…은 얼마전에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어 齊賀사찰계주임에게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 중인데 불원간 일건서류와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하게 될 모양이라 한다. 그런데 그 죄상은 한청빌딩 엘레베타 운전소녀에게 강제로 외설행위를 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여성의 정조를 유린하여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또는 각처를 돌아다니며 협박 공갈 등을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그에게 피해를 입은 남녀들로부터 경기도경찰부로 투서가 들어오는 것이 매일 5~6통씩 되는데, 그 내용은 그런 무도한 자는 사형에 처하여 달라는 것과, 또는 10년 징역을 받게 하여 달라는 등, 전부가 원한에 사모친 사람들의 투서라고 한다.
이 사건의 혐의죄명은 사기․공갈․주택침입․상해․보안법위반 등이었다. 이 자를 모델로 해서 쓰여진 金史良의 『天馬』가 말한 바 술집에서 무전취식하고, 계집을 강탈하고, 사람을 공갈한 끝에 빚어진 사건―. 이런 짓을 하면서 김모는 조선사람이었기 때문에 가졌던 일체의 불미 불선―취기 분분한 그 썩은 내장물을 위로는 토해내고 아래로는 관장 배설하여 속을 깨끗이하고 황국신민이 되라고 역설하였다.
그런가 하면 장모는 한달 경상관찰사 물망에 올랐을 때 당시 의정부 참찬이던 許蔿에게 약속하되, 벼슬값을 안받으니 대신 국가 위급시에는 언제든지 20만금을 지체없이 의연하겠다고 하였다. 허위의 의병정신을 계승한 대한광복단이 의연금 지출을 요구하자 거절할뿐더러, 광복단원을 오히려 적대시하므로, 그를 사살해 버린 사건이 있었다. 명문․부호가이던 이 집에서는 중추원참의를 한 아들 장모가 출현하였다.
20년대로 들면서는 망국대부인 일제의 귀족들이 고종의 廟의식을 둘러싸고 미증유의 협잡극을 연출한 적이 있었다. 국상이나, 靈位를 宗廟에 모시는 부묘의식일 때는 서민들 중에서 뽑힌 轝士軍이 무관인 轝士大將 밑에서 靈轝나 부수된 수레를 끌고, 의식이 끝나면 참봉 등 상작을 받는 관례이었다. 이런 전례를 이용해서, 자작 윤모 등 이왕직의 귀족들은 差備員 명목으로 간신히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 첩지를 수도 없이 남발, 팔아먹어 버렸다.
심지어 엿장수를 통해서까지 팔려졌던 껌데기뿐인 참봉 첩지―관보 사령란에도 오를 턱이 없는 종이 한 장을, 어리석은 백성들은 황제가 주시는 마지막 벼슬이라면서 앞다투어 사는 희비극을 벌였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윤모는 내가 자작이요 合邦功臣인데 경기도경찰부 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이런 식으로 해서 번 돈으로 윤모자작은 李吉善의 딸을 억지 소실로 삼은 후 황금 5만금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일제의 도지사 박모는 속리산 여승과의 추문 끝에 그 여승 양순재가 자살함으로써 지사사임설까지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여전한 충성으로 중추원참의․고문․부의장을 하였고…. 백작 송모는 친구 金時鉉(한말의 대실업가)의 소실이던 백락자를 가로챈 끝에 금전소송문제까지 일으킨다. 내부 협판․경무사․한성부윤을 한 박모는 경기도 참여관을 물러난 후 철원군 월하리 8천평의 대지에다 8선녀집을 차리고 시조명창 경주집, 수심가 잘하는 평양집 등 8명의 소실들과 흥청거렸다. 그 재원은 군용철도 경의선을 조사부장을 하면서 청절과 바꾼 것이라는 소문이었고….
1922년 2월의 제45의회 下院예산위원회에서 황천(荒川五郞)의원은 47건의 경찰 불법사례를 들어 총독에게 질문공세를 폈다. 그 중 31호사례인 의주경찰부의 無審問 총살사건을 아래에 옮기면,
평안북도 선천군 대산면 토성리 거주 田龍水는 대정 10년(1921년) 1월 18일 오전 6시 동면 동동 田陽(?)방에 권총을 휴대하고 투숙함을 탐지하고 의주경찰부순사대 경부 김덕기, 동 순사 玄彦․朴弘植․金應鎭․金亭稷 등이 현장에 출장하여 동인을 체포하였는 바, 경부 김덕기는 此에 대하여 하등취조도 하지 아니하고 直히 총살한 후 전보로써 경찰부에 보고하고 태천군 방면에 (?)하였는데 전용수는 오후 1시에 至하여 僅히 소생하여 동동 田仲三방에 逃하였는데 동면 주재소 순사 旱川次郞․朴治幹 양인은 此를 聞하고 馳往하여 재차 총살하여 此를 경찰부 及 소관 경찰서에 보고하였는데, 早川순사의 보고가 경찰부에 달하매 귀임한 김경부는 기 보고를 見하고 자기의 공로를 탈한 자이라하여 항의를 경찰부장에게 제출하여 양자 간에 극렬한 분쟁이 생함에 지하였으나 기 無取調 총살에 대하여는 反히 당연한 事이라 하여 하등의 의혹과 질책이 無하였다.
독립운동 혐의자를 취조도 없이 총살해 놓고 공로 다툼을 벌였다는 내용이다. 이리하여 1923년의 관동대진재 때―이때 일제는 조선인 추산 6천명을 무고히 학살한 후, 살아남은 조선인을 총 검속하여 강제노동에 투입하였다. 경시총감 아까찌 아쓰시(赤池濃)는 당시를 말하되, 3일 밤 相愛會의 조선인 3명을 경시청에 불러서 그들의 (상애회) 보호를 고함과 동시에, 그들은 차제에 자진하여 사회봉사적 노력을 할 것을 설유했다. 익 4일 아침 이기동․박춘금은 余를 찾아서… 말씀하신 바는 가장 묘안이라 생각하기에 즉시 도로의 정리에 종사하고 싶다고 청해 왔다 이리하여 어용 폭력조직인 상애회는 동족인 조선인을 채찍질하여 강제노역을 시킴으로써 치부까지 했던 것이다.
명치대 법학부 졸업인 이모―이 자는 신의 주 변호사로 치안유지법․국방보안법 제29조에 의한 총독지정변호사로 선임되었다. 신의주 부회의원․흥아보국단 평북위원․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을 한 그는 1937년 이후 신의주사상범 보호관찰에 붙이는 여부를 심사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1942년 1월 마작죄 벌금 50원의 확정판결로 변호사 정적 1년의 처벌까지 받고 있다. 물론 보호관찰심사위원도 떨어져 버렸고―.
신간회 운동을 하다 변절한 辛모―임전보국단 이사, 언론보국회 이사, 대의당 위원, 국민동원총진회 이사, 국민동지회 간부를 한 친일 변호사이다.
1942년 4월 20일 시행 중의원의원 선거에 대판 제4선거구에서 입후보했던 바, 당선 목적으로 德山舜功에게 5백원, 土井淸太郞에게 2백원을 제공한다. 이 선거법위반 부정사건으로 신모는 1943년 6월 6일 대판공소원에서 벌금 2천원,, 換刑 2백일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신모는 품위 실추를 이유로 변호사 정직 8개월에 처해졌다.
선거법 부정을 해가면서 일제의 국회의원을 해먹겠다던 앞의 신모는 해방 후에도 수차 국회에 출마하였다. 황천(荒川五郞)의원이 말한 김경부는 경시로 승진했는데, 반민특위에서 독립투사 박해사실을 부인한다. 1935년 12월 해주경찰서 신축자금 3천圓을 기부하고 일제의 표창을 받은 전 四橋․望遠町총대는 해방후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맡는다. 반민법을 제정하던 국회의 부의장 1명 김모도 임전보국단 평의원을 하였고, 그 법을 반대한 당시의 내무차관도 반민법 해당의 전력자―즉 일제의 고등관 4등 복심법원 판사이었다.
자유당 정권과 결탁한 이들 친일세력이 4․19발포령을 내린다. 3․1운동을 탄압하던 일제헌병․경찰의 수법이 해방된 조국의 경무대 앞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 정경문화 1989.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