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남자
밤의 여로
북미를 누비는 트럭커
한 해만 더!
신이여! 길을 잃게 하소서! 그리고 그 길이 끝나지 않게 하소서!
<He & I>
HE
난 칼잽이다. 맨해튼 전설의 설전(surgeon, 외과의사)이다. 대장(colorectal) 암, 직장(rectal) 암 전문의이다. 내 직업을 뜨겁게 사랑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차갑게 증오하기도 하지!
그는 스물두 살이다. 몇 달째 아무런 소식이 없다. 살아있다면 연락이 왔을 것이다. 약속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사이 묵언의 합의였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흰 피부와 입체적이고 단정한 이마라인, 가로로 길고 큰 무쌍의 눈, 우수의 그림자를 몰고 오는 참빛처럼 길고 촘촘한 속 눈썹, 미간부터 코 끝까지 선명한 T자를 그리는 날렵하면서도 둥근 코, 뚜렷한 윤곽에도 불구하고 착한 이미지는 편안함을 준다. 격렬한 운동으로 불필요한 살들을 제거한 절제된 몸은 그의 생활습관과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암시해 준다.
그는 잘생김의 미학으로 칭찬하고 싶은 외모를 가졌다. 첫인상은 고대 금화 속 빛나는 알렉산더 (Alexander) 대왕의 옆모습을 그대로 옮긴 듯한 모습이었다. 남자가 봐도 다시 훔쳐보게 되는 묘한 끌림이 있다. 어떤 여자이건 말을 걸면 쉽게 마음을 열것이다.
이십 대의 방황이나 이성에대한 고민은 그의 선택에 없었다. 대학을 갈 것인가? 돈을 벌 것인가를 신속하게 결정해야 했다. 안개 짙은 밤, 망설임의 상황에서 가장 빠른 결론을 내도록 도와주는 마법의 방법을 사용했다.
허공에 쿼터(Quarter) 하나를 던졌다. "IN GOD WE TRUST"가 새겨진 뒷면이 나왔다. 신이시여,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 놈이라면 공부를 할 것이고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돈을 벌겠지요. 하여 저는 이 길을 가려 합니다. 뉴욕의 트럭 운전사가 되겠습니다."
그는 제도화된 교육을 거부했다. 부모님께서 어렵게 마련해 준 등록금으로 대학을 가지 않고 트럭을 샀다.
New York에서 트럭 면허인 Commercial Driver's License (CDL)를 땄다. 거대한 트럭을 몰고 밤마다 희망의 질주를 했다. 행운이 어둠의 형제인 불운과 손잡고 와도 미련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길 위에서 생을 마쳐도 그것마저도 뜨거운 받아들임이었다.
가도 가도 맴도는 침묵의 길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밤길은 이상하게 밤바다와 닮아있다. 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바다를 돛새치(Sailfish)처럼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분이다.
물기 머금은 안갯속을 달려가는 길,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가난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잘라버릴 것이다. 더는 떠돌이로 사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달리는 그 순간엔 세상 모든 연민과 분노가 사라지고 신비한 감성만이 솟아났다.
농도 짙은 어둠 속, 달과 별이 다가온다. 그와 근육질의 우람한 트럭 그리고 열린 하늘만이 존재했다. 하루 8시간의 운전, 최대한 빨리 임무를 마치기 위해 그는 끼니도 거르고 생리적 현상도 참고 달렸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을 얼마나 극한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극도의 배고픔이 밀려오면 식은 페퍼로니 피자를 말아서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그렇게 청춘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버리고 쉼 없는 질주, 또 질주를 했다.
돌아보면 모든 게 뜻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따듯한 식사 한번 준비하지 않았다. 이제 다 과거이다. 되돌릴 수 없는 후회의 파동만이 잔악하게 일렁인다.
1년 만에 트럭 값을 벌었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일하면 가족의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어느 날 복통과 함께 혈변이 나타났다.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너무 늦어있었다. 양심도 동정도 없는 허깨비 신께 매달렸다.
원하지 않는 변수, 대장 암이었다. 평생 소변 백을 파우치처럼 달고 다녀도 좋으니 천천히 죽어갈 시간을 달라고 기도했다. 제발, 천천히 죽어갈 거룩한 시간을 달라고.. 그는 먼저 신께 매달렸다. 그러고 나서 인간인 나에게 애원했다.
"불멸을 바라지 않습니다. 미래의 행복을 저당잡아, 지금 이 순간, 조금만 느리게 죽어가게 하소서."
한 해만 선물로 달라고, 아니 평생의 모든 운을 다 가져가도 좋으니 단 한 해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스물세 살의 생일까지만이라도 이 땅에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시간만 허락하여 준다면 악마의 베일 뒤라도 숨을 것이다. 시간의 신은 자비가 없다. 우직한 그가 조금만 빨리 병원에 왔더라면 냉철한 죽음의 신이 조금만 지각했더라면..
죽음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조차도 단 한 가지의 소원만 갖게 만든다. 딸의 결혼식만 보게 해 달라는 자와 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만 하게 해달라는 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재물이나 화려한 것들을 바라지 않았다. 시간 앞에 돈은 가치 없는 허상일 뿐이었다.
그의 신은 존재한다면 잔인한 자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덧없는 존재일 것이다.
한 해만 더 벌면 평생 원했던 집을 부모님께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원은 평범한 사람들이 탐내지도 않는 사소한 것이었다. 욕심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소박한 소원은 통렬하게 묵살되었다.
난 외과 전문의, 망설임과 흔들림과 침묵 사이를 수십 번 오간다. 잘못된 수술의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난 집요하고 단호하다. 청년의 작은 소원 하나도 들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울했다. 이제는 없을지도 모르는 힘없은 청춘의 숨결을 기억의 회로에 담는다.
남은 날을 셈하며 미래를 계획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사치인지를 그로 하여 배웠다. 살아야 한다는 욕망과 살리고 싶다는 열망이 우리를 하나이게 했다.
여덟 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안드레아 보첼리의 " Because we believe "를 듣는다. 정적 속에 아련하게 낮달을 물들이는 노을, 아랫입술을 깨문다.
뜨거운 밤들을 흑표범처럼 질주하던 젊은 그가 어디서든 달리고 있기를 희망해 본다. 살아있다는 희미한 암시라도 받고 싶다. 유독 그가 그리운 한여름 밤이다. 극한의 아름다움은 때로는 지독한 아픔이 된다! 푸른 청춘의 적멸, 해명되지 않은 비애로 분노에 젖어든다.
에필로그 (Epilogue)
He & I
I <나>
인생의 황혼, 영혼을 마비시키는 술 취한 노을 아래
운명이 미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 이제서야 만났을까요?"
당신을 본 순간, 신경 회로에 푸른 불꽃이 튑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나 홀로 숨겨온 외딴 골목길 그 집, 창문에 밝은 불을 켭니다.
당신과 함께 351 Herricks Rd, New Hyde Park, NY 11040을 향해 가는 길,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던 기억이 납니다. 길 위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 길이 영원히 끝나기 않기를 바랐습니다. 나직하게 불러 주시던 보첼리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당신의 목소리엔 매끄럽고 부드럽고 달달한 휘핑크림의 맛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스트 할렘 Manhattan, 173년이 넘은 종합병원에서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수술에 임하는 존경하는 당신께! 서글픈 청춘의 자화상을 바칩니다.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New York이여! 영원하길!
당신으로 하여 나는 삶을 향해 뜨거운 손을 내밉니다. 아찔하게 애달픈 청춘의 이야기와 세 번의 만남으로 내 모든 혼을 빼앗긴 정념의 시간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남은 제 삶을 무료 나눔 하고 싶었습니다.
죽어가는 자와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자의 괴리가 느껴집니다. 죽음으로부터 쫓기는 자와 죽음을 쫓아가는 자의 피의 절규로 쓰인 삶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삶의 힘든 곱이 곱이마다 난 나를 잃어버리고 타인 안에서 사랑을 찾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흑점의 시간에서 당신을 만났으니 내 사랑은 더욱 클 것입니다.
푸르른 젊음의 서사시가 완성되기를 바라는 우리도 하나입니다. 어설프고 허접하지만 유통기한이 없는 그리움과 존경을 글로 대신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