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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필
- 문학기행을 다녀와서(1)
- 문학기행을 다녀와서(2)
- 횡설 수설
○ 작가 프로필
․ 仁山 박 윤 수
․ 구례출생
․ 구례문화원 회원
․ 한국문인협회 구례지부장(現)
․ 전남문인협회 회원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전남 수필문학회 회원
․ 세기문학 수필부문 등단(1997년)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1)
- 두만강 용정(북간도) 윤동주 시인 생가를 찾아서-
박 윤 수
오늘은 전남문학에서 백두산권을 중심으로 문학기행이 있는날이다. 3.28~30까지2박3일 일정이다. 중국은 그동안 두세번 가보았지만 다녀온 곳이 대부분 북경, 서안, 계림, 장가계등 주로 중국의 역사나 풍경이 있는 곳의 탐방이었다면 이번에 가는 곳은 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연길(연변)지방으로 두만강이나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내가 평소에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새해가 시작된지 엊그제 같더니만 어느새 시절은 3월말로 접어든다. 참 빠르게 오가는 주야의 반복 사시의 변화속에 계절은 어느새 봄이 선 듯 내안에 다가왔다온 대지가 새 봄기운을 을 맞아 파릇파릇 움이 터 오르고 노란 개나리하며 황홀한 벚꽃들이 머잖아 만개할 것 같다.
자연은 한치의 어김도 없이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또 꽃이피고지고 하지만 어이하여 한번 가버린사람은 영영 돌아오질 않을까? 해 마다 이 맘 때이면 보고싶은 사람들이 못내 하얀 그리움으로 변해 내 머리에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아직은 3월이라선지 새벽바람은 조금은 차갑다. 새벽4시, 온 땅이 어둠이 싸여 있는데 농촌 한적한 시골길에 가로등 불빛만이 띄엄띄엄 새벽을 밝히고 있다. 난
중간집결장소인 순천으로 차를 몰아 정해진 장소에 먼저 도착하였다. 조금 기다리니 목포에서부터 회원들을 싣고 온 버스가 도착하여 함께 차에 올랐다. 참 반가운 얼굴들이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순천에서 어두컴컴한 고속도로를 달려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아침 8시경이었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중국 연길을 목적지로 9시출발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에어 부산으로 승객정원이 약 170명 정도 탑승할수 있는 작은 비행기였다. 지난 1월7일부터 김해 - 연길노선을 취항했다고 한다.
약 두시간40분 비행 끝에우리는 무사히 연길공항에 도착하였다. 연길공항은 별로 크질 않은 조그만 도시 공항이었다. 공항 대합실을 빠져나오는데 언뜻 눈에 띤 간판들이 낮 익은 한글 간판으로 보기에 참 좋았다. 다른때 중국에 갔을 적에는 공항에서부터 모두가 붉게 쓴 중국어 간판으로 읽을 수도 없었는데 참 좋았다.
처음일정으로 연길에서 두만강으로 이동했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대인 두만강은 길이만 해도 무려547km의 긴 강인데 양강도 심지연군지점 북동계곡에서 발원하여 회령을 지나 동해로 흘러가는 강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두만강을 가까이에서 보니 어려서부터 말로만 들었던 두만강하고는 차이가 많이 났음을 알수가 있었다. 조금은 실망감까지 들었다. 평소에 생각했던 두만강은 강폭이 넓고 물결이 푸른 강으로 생각했는데 강폭은 불과 2~30m이며 수심 또한 갈수기라서 그런지 어른 키를 채 넘지 않은 야트막한 강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시대 저 김정구 선생님이 애달프게 부른 두만강 푸른 물은 오간데 없고 그날따라 황토빛 붉은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아야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은 중국 저 쪽은 북한땅이다. 분명한 것은 이쪽은 자유와평화가 있는 반면 저쪽 북녘땅은 자유나 평화는 없고 오직 김일성 독재체제로 부자, 손자로 이어져 개망나니 못된 사람들탓에 민초들은 못먹고 못살고 그야말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을것을 생각하니 내 맘이 금새 침울해진다.
두만강을 둘러보고 우리일행은 용정으로 이동했다. 중국 지린성 동북부에 있는 용정(龍井)은 조선조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개척한곳으로 엣날에는 북간도(北間島)라 불렀다. 특히 이지역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며 청산리,봉오동, 일송정 따위의 항일운동 유적지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또한 용정은 우리 조상의 한 맺힌 역사가 서려 있는 간도 땅 중심부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일부는 독립운동 때문에, 일부는 굶주림과 일제를 피해 이 간도 땅으로 넘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간도 땅 중 용정은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용정이란 도시명은 도시 가운데에 있는 용정이란 우물에서 비롯되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현재도 용두레우물이란 우리 민족이 붙였을 호칭으로 보아 용정은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도시임을 알 수가 있었다
용정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저 유명한 윤동주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기도 하다. 윤동주는 1917년2월30일 중국 지린성 연변 용정에서 태어나 1945년 2월16일 광복6개월을 앞두고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분인데 일본유학중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100여편의 유명한 시를 남기고 옥중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도 있고 또한 그의 사후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사망했다고 하는 설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사인은 불확실하다고 한다. 다만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무참히 사망한 것만은 확실하다.
윤동주 선생의 고향인 용정시 명동촌 한켠에는 선생의 생가가 있는데, 명동시에서는 선생의 생가를 관광지로 지정하고 1994년8월 생가를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둘러보니 선생의 주옥같은 시비며 우물등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생가를 나와서 버스로 이동 조금 달리니 대성중학교가 있다. 용정중학교는 본래 대성중학교라는 이름이었으며, 저항시인 윤동주(1917.12. 30 ~1945. 2. 16)의 모교로 알려져 있다. 용정중학교 한켠에는 대성중학교의 옛 학교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에는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옛 대성중학교 예 학교 건물 입구에는 이렇게 윤동주시비(尹東柱詩碑)가 세워져 있는데, 학창시절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서시(序詩)가 새겨져 있다. 그 시비에 새겨져 있는 서시(序詩)를 옮겨 본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출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윤동주 생가를 찾아서|작성자 둥글재
2015. 4. 5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2)
- 일송정, 해란강, 청산리를 지나 백두산 가는 길-
윤동주 생가를 지나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가는길은 버스로 3시간여길이라고 한다. 여려서 어른들로부터 귀에 많이 듣던 만주(북간도)벌판은 아직은 겨울이다. 북간도 일제 강점기 만주등지를 다녀온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만주의 바람은 참 차다고 한다. 지금도 용정지방 한 겨울철온도는 영하 20도 이하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참 추울 것 같다.
용정지방의 도로는 지방도로지만 우리나라 도로에 비해 별로 잘 다듬어지질 않아 차가 통행하는데 조금은 어려움이있다 거개가 2차선으로 세멘트 포장길이다. 시골길을 달리는데 차창가 좌우로는 농경지와 집들이 있는데 농경지는 아마도 착박한 땅리서 그런지 모두가 옥수수를 심었다. 또한 띄엄띄엄 집들은 거의 스레트와 간혹 빨강 기와집으로 이은집이였다.
용정(북간도)를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저 멀리 가곡 선구자로 일려진 일송정이 보이고 해란강도 어설프게 보인다. 재중동포 김혁이란분의 글을 보면 룡정 비암산에 있는 일송정은 1930연대에 이미 있었던 소나무로 흡사 큰 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같다고 하여 많은사람들은 일송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구자 “라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구자(先驅者)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우물가에 저녁종이 울릴때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일송정은 용정을 지켜주는 당산나무 격이었는데 저 잔악한 일제경찰은 일송정에 대못을 박고 구멍을 내어 후추가루를 집어넣고 급기야는 나무에 대고 사격연습을 하는 등 악랄한 수단으로 나무를 고사시켰다고 한다. 그 후 일제 말 용정시에서는 300여만원을 투입하여 한국의 저명한 조경사를 초빙 일송정주변을 새롭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용정 북간도 일원은 우리 민족, 특히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을 펼쳤던 주요 활동지이기도 하며 또 일제 겅점기에 돈벌이 수단으로 가서 돈은커녕 죽을 고생만 하고 돌아왔다고 그전 어린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용정 만주지방은 넘 추워서 사람살기가 못된다는 애기를 들었는데 직접 가서보니 황량한허허벌판 으로 척박한 땅이었음 틀림이 없었다.
백두산 가는길에 청산리 골을 지나갈 때에는 저 유명한 독립투사 김좌진,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들이 전투를 벌여 대승한 지역이기도 한데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또는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羅仲昭),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만주 지린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삼둔자와 봉오동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고자 훈춘 사건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하게 된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을 실패로 만들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인 독립군들은 러시아로 일부 건너가는 등 만주 독립군벌은 해체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고 한다.
독립군들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청산리골을 지나 차는 백두산 가는길로 달리고 있었다. 창밖은 이제 완전히 어둠이 깔린지 오래다. 지역이 고지대라선지 눈발이 휘날린다. 눈 덮인 산은 어두운 밤길을 환하게 비춰준다.
족히 두시간여 달려 오늘밤 묵을 숙소인 이도백하(북파)란곳에 다다르니 밤 8시가 넘었다. 그곳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고 쉬었다. 하루가 참 지루하였고 좀피곤하였지만 그래도 좋은 여행길이라 생각하니 맘은 편했다.
이튿날 아침이다 백두산 가는길에 올랐다. 백두산으로 가는길에 장백폭포를 먼저갔는데 폭포는 약 68m라고 하는데 갈수기라 겨울철이라서 그런지 했다. 폭포 물줄기는 볼수 없었지만 여름에 보면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올라야했다. 짚차를 이용 천지에 도달하니 참 꿈에 그리는 민족의 영산답게 산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때가 겨울이라선지 천지로 가는 길은 가파르며 위험한 산길인데도 우리를 실은 짚차는 잘도 다녔다.
2000m 가 넘는 정상부분은 풀 한포기 없고 눈 덮인 설산이었다. 천지 또한 눈으로 덮여 물은 볼수가 없었다. 다만 백두산 천지를 아름답게 둘러싸인 설경을 제대로 감상하는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백두산은 그 높이가 2749m라고 한다.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산호로, 쑹화 강(松花江)의 발원지이다. 그 수면은 해발 2,257m,면적은 9.165㎢,둘레14.4km,평균 깊이213.43m,최대 수심은 384m이며, 수량(水量)은 19억5,500만m³로서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라고 한다.
백두산에 정상에 오르니 조선조 5대 문종때 저 유명한 남이장군이 읊은 시 한수가 생각이 난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의 돌을 칼로 갈아 다하고
豆萬江水 飮馬無 두만강의 물을 말로 먹여 없애리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가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
이 얼마나 호탕하고 용기 있는 말인가?. 참으로 장부다운 시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시로 인하여 남이는 역모로 몰려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하고 마는데 당시 간신배 유자광이 남이를 시기하는 사람으로 시 가운데 男兒二十에 未平國이면을, 未得國으로 고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이라 모함을 하는 바람에 반역죄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어찌 분하지 않으랴,
저 백두산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웅장하게 서 있다. 천지의 물도 한반도 역사의 중심축에 서있어 오랜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난 지금 중국에서 우리나라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다. 중국을 거치지 않고 북녘땅을 걸쳐 백두산을 오른다면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백두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련만 남북으로 가로막힌 철벽 때문에 머중국을 통해 우리의 영산 백두산을 올라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니 웬지 맘이 아프다. 어서 통일된 그날이 오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횡설 수설
박 윤 수
봄이 오는 소리는 참 빠르게 들리는가 싶다.
새해 창문이 열린지 엊그제 같더니만 입춘이 지나 우수가 훨씬 지났으니 올해는 더 쏜살같이 느껴지는 계절의 오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자연은 부단히 흐르는 세월과 주야의 반복 속에 한치의 어김도 없이 때가 되면 저절로 다시 이땅에 찾아오지만, 우리 인생들의 삶이란 그렇지 못한가보다 저마다 부모님뱃속을 잠시 빌려 세상에 태어나 주어진 여건과 환경속에서 잠시 살아가다가 나중엔 휭하니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 버리고나면 다신 돌아 올수가 없으니 그래서 옛부터 우리인생을 가르켜 공수래 하여 공수거, 또 불귀객(不歸客) 이라고 했던가?
저 전북 진안땅 “데미샘” 작은 골짜기에서 시작된 섬진강은 임실,곡성,구례골을 지나 하동으로 흘러가는 장장 그 길이만 해도 오백여리 길이다. 오늘따라 잔수 들녘 구비진 강길을 획 돌아 오산(獒山) 사성암(四聖庵) 산자락 아래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하동포구로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은 차라리 한 가닥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나 할까 싶어진다.
더 아름답게 보이기만 한 섬진강을 응시해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본다. 아마 40여년이 훨씬 지난 60년대 배고픈 시절이었던가 내 나이 청소년기에 학창시절에 접어든 무렵의 일인 것 같다 그 시절만 해도 지금처럼 물이 더러워진 환경이 아닌 강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정도로 맑디맑은 물이었고 목이 마를때이면 강물을 직접 마시고 했던 기억이 난다. 또 가장자리엔 바닷가 해수욕장처럼 길다랗게 하얀 모래가 펼쳐져 있었다.
그 백사장 모래위로 친구들과 나뒹글며 수영도 맘껏 하고 즐겼으니 그러나 지금은 옛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더군다나 먹는게 늘 부족했던 터이라 어둠이 스며드는 밤이 되면 저 너머 문척 구성리 던대들에 있는 수박발을 습격하여 수박서리를 간간히 했던일들이 주마등처럼 생각난다.
수박을 한 두개씩 따서 배위에 안고 어둠속에 섬진강물을 송장헤엄(등배) 으로 건너는 풍경은 어떠했을까? 또 그 따온 수박을 백사장 한켠 외진곳에서 야금 야금 먹던 모습은 차라리 어린아이 젖먹는 모습처럼 보였을거라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작은 미소가 일어난다. 어찌 그시절 우리들만 배고팠는가? 수박농사를 지은분은 대다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을 터인데 또 수박농사를 지어 자식들 가르치고 힘들었을 터인데 참 생각하니 그분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맘이 든다.
그래도 가만이 생각해보면 그때 그 시절이 못내 그립고 또 간혹이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못입고 못먹고 못살고 했던 그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그 시절엔 아마도 이웃들하고는 최소한의 인정과 도덕만은 살아 숨쉬고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밤에 제사라도 지내고 어른 생일날 등 색다른 음식이라도 만지는 날에는 이웃집과 함께 음식을 나누기 위해 토담사이로 넘겨주고 도란도란 애기하며 주고 받던 어머님의 정겨운 모습들이 지금도 훤히 생각나고 있으니,
그러나 지금은 어떻한가?
살아가는 구조가 주택에서 닭장처럼 촘촘히 생긴 두터운 벽으로 단단히 꽉막힌 아파트가 온 땅에 생겨나면서 이제 아파트는 대부분 사람들이 사는 주거의공간이 되고 삶의 보금자리가 된지 오래가 되었다. 주거환경이 바뀌면서 단단한 벽으로 인해 이웃간에 돈독한 정이나 따스한 사랑이 없어져져 버린것같다.
사는 집들의 구조가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웃간 일부사람들은 층간 소음으로 한지붕밑에 살지만 서로가 앙숙처럼여기며 때로는 분을 참지못해 살인까지도 서슴치않은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으니 우린 참으로 지금 사는 세상이 황량한 세상에 사는것만은 틀림이 없다. 오늘도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자살하며 한강다리아래로 떨어져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묻지마 살인행위는 어떤가? 인간으로 태어나 나를 낳아준 부모나 날 가르켜준 스승에게 효도나 공경은 못할망정 이제는 부모에게 효도나 스승에대한 존경심 남을 배려하는 모습들은 더더욱 사라진지 오래이고 날만 새고나면 신문이나 TV영상에 보기에고 섬찍하고 잔혹한 기사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있으니,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면맘이 침울해진다.
누군가는 4월을 가르켜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이제 4월이 다가온다. 작년 4월16일 이나라에는 저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기억하기조차 하기싫은 세월호 대참사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맘을 아프게 한 큰 사고였다. 타고 가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안산에 있는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300여명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대 참사였다. 아마 우리나라 역사상 여객선 사고로는 가장 큰 사고로 기록될 것이다
바다에서 일어난 세기적인 여객선 사고로는 지금부터 꼭 103년전인 영국의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 여객선으로 1912년 4월14일 대서양을 항해하던 배가 그만 20m의 거대한 빙산에 부딪혀 2,223명가운데 710명만이 까스로 구조되고 나머지 1,514명은 배가 침몰하면서 함께 사망했던 큰 사고였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와 타이타닉호 사고를 비교해보면 참 다른 데가 많은 것 같다. 먼저 세월호 사고는 선장 이준석이 배를 운항하는 선실에서 술판까지 벌이며 잠이라도 자다가 왔는지 사고가 나자 승객들은 내동댕이 쳐버리고 저만이 살겠다고 배에서 팬트바람으로 기어나와 구조원들에게 구조되는 모습을 보면 일말의 양심도 없는 그 잔혹한 행동에 치까지 떨리는가 하면,
1912년 4월14일에 일어났던 영국의 유람선인 타이타닉호 선장 에드워드 죤 스미스 선장은 무려 20m의 빙산에 배가 부디쳐 침몰하면서 물이 차오르자 선박실에서 끝까지 방향키를 잡고 배안에 타고있던 사람들을 먼저 구조하게 하고 마지막까지 온갖 구조의 힘을 발휘하다가 결국은 배와 함께 물에 휩쓸려가 생을 마감한 걸 본다.
참으로 역사적으로 잔인했던 4월의 굵직한 사고의 모습을 회상해 보노라니 맘이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월호 사건은 이제 꼭 1년이 다 지나도록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진행중인 사건이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더 가슴이 아프리라 생각해본다.
어디 4월달만 잔인하다고 하겠는가?
내 바로밑에 동생 연수가 바다에서 실종한 것은 꼭 36년전인 1979년 3월 달이다. 22명이 함께 고깃배를 타고 이역만리 저 태평양 사모아 앞마다에서 조업하다가 배에 함께 타고 있던 선원 22명이 큰 풍랑을 맞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모두가 실종되어 지금까지 시체도 찾지 못한채 동생을 잃은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내 심정 또한 어떻한가? 당해본 사람이나 알까 설명해서 무엇하랴 싶다.
이제 좋으나 굳으나 또 내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 잔인했던 사건들이 내 앞에 다가온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해마다 이 맘때이면 스스로 찾아오는 세월 또 다가오는 그날을 어찌 인위적으로 마다하랴. 이런 때이면 난 잠시나마 러시아가 나은 유명한 시인 “퓨쉬킨”이 쓴 서름의 날을 참고 참노라면 머지않아 행복한 날이 오리라 “라는 명시 한줄로 내 지금 심정을 위로라도 받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은 어디서 온것일까?
봄 볕 따스한 햇살 한줄기는 참 귀한것일까?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다들 좋아라고 하지만 난 이 시간 내 마음속 가슴깊이 응어리진 어두웠던 지난 삶의 뒤안길을 곰곰이 회상해보니 웬지 맘이 더 침울해진다.
더구나 지난 2003년에 앓았던 우울증이 2012년 4월 이유도 없이 재발되는 바람에 3~4년동안 심한 우울증으로 큰 고통속에서 지내야만했던 내 나이 초로(初老)의 인생 한 모퉁이에서 생각해보니 속절없이 가버린 서름의 시간들이 못내 억울하고 너무 아깝다. 부디 올 한해에는 내게도 저 봄 볕 따스한 광명한 햇살 따라 좋은 일들만이 찾아오리라 간절히 기도해본다.
2015.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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