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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과 건설적 대화를" 중·일 권고
중국과 일본은 6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안보.국방 포럼에서 다른 나라들에
북한과의 건설적인 대화를 권고했다.
왕광야(王光亞)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는 이날 뮌헨에서 열린 연례 비공식 안보.
국방 포럼에서 다른 나라들이 북한을 다루는데 건설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권고하면서 그러한 태도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 국가들이 북한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다면 이는 미사일과 핵 의혹을
포함한 문제들에서 더욱 건설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유도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중앙/2/7/00-
* 러 진출 北근로자 2만여명 추정"
지난 98년 이후 감소 추세에 있던 러시아 지역의 벌목장, 농장, 공사장
등에 진출한 북한 근로자가 최근 2만여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일 관계당국에 따르면 이들 북한 근로자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및 아무르 지역의 벌목장과 블라디보스토크 도로공사장, 연해주 농장 등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1-2년 단위로 러시아 지방당국과 공식적인 근로 계약을 맺고 있으며 특히 러시아의 목재 수요량 증가에 따라 벌목장에서 일하는 북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당국은 전했다.
또 러시아는 북한인들이 대체로 유능하고, 계약기간 만료 후 북한으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하는 등 범죄를 일으킬만한 소지가 없는 점 때문에 이들의 고용을 원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관계당국은 설명했다.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러시아에 진출한 북한인 수는 체류기간 및 종사하고 있는 업종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나 대체로 2만여명 수준이다"
고 밝혔다. -중앙/2/7/00-
* 일(日) 정계 북-일의원연맹 부활 움직임
작년 12월 북한을 방문했던 일본 초당파의원단을 중심으로 북-일의원연맹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소식통은 7일 "일본 초당파의원 방북단 단장을 맡았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총리 등을 중심으로 북-일의원연맹을 부활시켜 대북 대화창구로 활용하려는 조짐이 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특히 민주당 지도부가 적극적이지만 자민당은 일단 관망 자세인 것으로 안다"면서 "재일 조총련은 북-일관계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북-일의원연맹 복구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71년 결성된 북-일의원연맹은 한때 300여명의 일본 의원이 가입하기도 했으나 90년대 일본내 대북여론이 악화되면서 97년 10월 사무국 폐쇄로 사실상 해체됐다.
한편 무라야마 전총리를 단장으로 한 일본 초당파의원단은 작년 12월 1∼3일 북한을 방문, 북한 노동당과 합의로 북·일 양국정부에 국교정상화 협상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중앙/2/7/00-
* 서울선언 전문
-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 - ‘서울선언’전문
북한 내 기본적 인권부재 문제와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탈출한 북한 난민의 참상을 다룬 이번 국제회의에 참가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과 전 세계 인류가 북한 정권에 대항하고
그들의 범죄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데 최선을 다해 주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김정일이 이러한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요청에 응해, 폭압적 정권을 종결하고, 정치범수용소를 폐쇄하며, 식량을 찾아 다른 나라를 헤매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롭게 북한을 드나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 정부 당국이 북한 주민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국제 NGO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에 들어온 이들 난민을 지원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전 세계인들이 자국 정부에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 독재정권의
종식을 위해 정치적 경제적으로 대항하도록 압력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조선/2/7/00-
* 북한박물관 건립
통일전망대에 북한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북한박물관이 만들어진다.
강원도는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통일전망대에 국비와 지방비 등 10억원을 들여 연건평 200평에 2층 규모로 대형 북한박물관을 건립키로 했다고 7일 밝혔다.
상반기중 착공해 연말까지 완공될 이 박물관에는 최근의 북한 자료와 물품 등을 전시하는 전시관과 시청각실 등이 들어서게 된다.
통일전망대에는 지난해 1년 동안 91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등
연평균 100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동화/2/7/00-
* 내가 기억하는 참전 미군들
미국정부가 한국전쟁 50주년 기념 행사를 크게 준비하고 있다. 최근 한국전쟁 기념 웹사이트(korea50.army.mil)를 클릭, 금새 그 내용에 빨려 들어갔다. 화려하게 펼쳐진 각종 행사와 정보들-특히 참전군인 3명의 인터뷰를 옛날과 지금의 사진과 함께 실은 것 등-을 보니 전쟁때 내가 겪은 참전 미군들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11살이었던 나는 미군과 말을 나눈 적도 없었지만, 그들에 대해 호감을 가졌었다. 우리집 식구들에게 그들은 공산당들을 북으로 내몰아 평화를 되찾아줄 큰 힘의 존재였고, 물자가 풍족한게 좋아 보였었다.
1951년 봄, 연합군이 서울을 재탈환한지 몇주 안됐을 때, 미공군 부대가 우리동네에 있는 학교에 들어와 진을 쳤고, 그때부터 약 반년간 이 병사들이 우리집 7식구-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5남매-를 먹고 살게 해줬다. 어머니와 오빠에게 일거리를 준 덕이었다.
전쟁이 터진 직후 아버지가 실종됐기 때문에 15살밖에 안된 오빠가 우리를 먹여 살린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오빠는 벌어오는 돈 말고도 가끔 부대서 남아도는 쇠고기 통조림, 초콜릿, 캔디 등을
얻어 왔다.
어떤 때는 굳어진 빵껍데기를 큰 자루에 담아오기도 해서 그것을 쪄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군복 빨래감이 든 더플백 두어개를 가져와 어머니가 빨고 다림질하게 했다. 당시 37세인 어머니는 이 군복들을 목욕탕에서 손으로 빨았고 다림질할 때는 내가 거들었다. 작은 프라이팬 같은 용기에 이글거리는 숯불이 담긴 재래식 다리미로 옷을 다릴 때는 둘이서 마루에 마주 앉았다. 바지나 셔츠 한 끝은 내가 두 손으로 잡았고, 어머니는 왼손으로 한 끝을 잡은채 바른 손으로 다리미를 눌러가며 움직였다. 그런데 옷밑으로 뿜어나는 증기가 손이 델듯 뜨거워서 참다못해 소리 지르면 어머니는 멈추었다.
미군들에 관해서 제일 좋았던 기억은 1954년 크리마스였다. 우리 학교 음악선생님이 나하고 다른 8학년생 5명으로 소규모 합창대를 만들어 2달정도 크리스마스 캐롤을 영어로 연습시킨 후 서울의 미8군 채플에 데리고 가서 부르게 했다. 크리스마스 자정 예배에서 「고요한밤 거룩한밤」「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 캐롤을 부르니 미군들이 크게 박수를 쳐주었고, 예배후에는 모두에게 큼직한 빨강 스타킹을 주었다. 그속엔 연필 12자루, 크레욘 1갑, 공책, 그리고 달고 맛있는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미군에 관한 기억들이 모두 좋지는 못했다. 제일 잊을 수 없는 일 2가지가 있는데 생각만해도 무섭고 창피했다. 1951년 이른봄 어느날 오후 우리가 묵고있던 동두천 외가집에 미군 병사 2명이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갑자기 외할머니의 뒷덜미를 잡고 뒷뜰로 끌고 갔다. 너무 무서워 따라가질 못했는데 그후 외할머니를 다시 봤을 때는 괜찮은 것 같았다. 할머니는 그일에 관해 한마디도 안하셨고 나도 감히 물어보지 않았다.
또 한번은 공산군 철퇴후 서울로 가는 길에서 있었다. 해가 쪼이고 따뜻한 오후였는데 우리가 걸어가는 신작로로 미군을 태운 트럭이 지나갔다. 우리 옆에서 속력을 늦추고 가길래 쳐다보니 차뒤에서 병사 하나가 뭔지 내게 던졌다. 초콜릿이나 캔디인줄 알고 빨리 받으려고 달려갔는데 가서 보니 돌이었다. 어린아이 주먹크기였다. 그러자 그 병사가 크게 웃으며 한국말로 외설된 욕지거리를 외쳤다.
그런 일이 있은지 14년후 나는 미국인의 별다른 세계를 알게 됐다. 1960년대, 서울의 양대 영문 일간지코리아 헤럴드와 코리아 타임스 기자로 일할때 미8군과 대사관 사람들의 기사를 많이 쓰게 됐다. 그때 내가 만난 사람들이 너무나 예의바르고 세련돼서 미국은 정중하고 품위있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이 내가 이민을 선택한 요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7년간 이민생활에서 본 미국인의 진상은 여러 계층, 부류의 사람들이 나라를 구성하고 있고, 서울서 기자로 만났던 군장교나 외교관은 특별한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단 미국에 와서 이민자 생활을 하게 되면 부자이든 가난하든 이 사회 상류층 사람과는 접촉없이 살게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민후 약 16년간 한국전 참전 미군에 관한 생각은 잊었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한국전쟁때 종군기자로 복무했던 사람을 만나서 매우 기뻤다. 언론에 관한 컨퍼런스에서 한 토론자가 훌륭한 보도는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모르는 사람들에 관해 큰 관심을 일으키게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한국전쟁 체험담을 얘기했다.
당시 USC 신문대학원 학장이었던 윌리암 우스텐디크씨는 그가 한국에서 궁핍한 사람들에 관해 기사들을 써서 고국의 신문에 보냈을 때 그것을 읽은 독자들이 감동, 수십상자의 의복 등을 보냈다는 예를 들었다.
컨퍼런스가 끝나자 나는 우스텐디크씨에게 다가가서 『나 자신도 미국인들의 너그러운 도움을 받은 사람중 하나』라고 말했다.
나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도와준데 대해 한 미군 참전 병사에게 이처럼 감사의 말을 하는데 반세기나 걸린 셈이 됐다. -임 갑손/hkusa/2/7/00-
* 평양냉면
-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는 칼국수, 삼청동 총리공관은 냉면으로 상징되던 때가 있었다.
청와대 칼국수는 김영삼의 오찬에 초대받으면 으레 칼국수가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항간에는 청와대 칼국수를 먹어보지 못하면 '불출'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총리공관 냉면은 문민정부 세번째 총리였던 이영덕 (李榮德) 총리로부터 비롯됐다.
평안도 출신인 李총리는 냉면을 좋아해 평소 냉면집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총리가 된 후 냉면집 출입이 어려워지자 아예 총리공관에 냉면 국수틀을
갖춰놓고 손님들에게 진짜 평양냉면을 대접했다.
냉면은 평양식과 함흥식으로 대별된다.
평양냉면은 메밀에 녹말을 섞어 국수를 만들고, 꿩고기.쇠고기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부은 다음 무.편육.오이채.배채.삶은 달걀 등을 얹는다.
함흥냉면은 감자녹말로 국수를 만들어 가자미. 홍어 회를 치고 고추장 양념을
한 다음 국수에 비벼 먹는다.
평양음식은 원래 짜지도 맵지도 않은 담백미(淡白味)가 특징이라 평양냉면도
담백한 것이 본래 맛이다.
따라서 동치미 국물 맛이 냉면 맛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독을 땅속에 묻고 배추에 비해 무를 많이 넣으며, 고추는 적게 넣는다.
한겨울 뜨거운 온돌방에서 이가 시릴 만큼 찬 냉면을 먹는 맛은 별미중 별미다.
해방 전만 해도 남한엔 평양냉면집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6.25 이후 월남한 사람들에 의해 널리 보급됐다.
먹는 때도 비단 겨울철뿐 아니라 사철 언제나 즐겨 먹는 음식이 됐다.
음식점들은 저마다 본가 (本家) 라고 내세운다.
북한에서 평양냉면의 본가는 평양시 옥류거리에 자리한 옥류관이다.
평양냉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는 이곳에는 요리사 숫자만 3백명에
하루 최대 1만 그릇의 냉면이 팔린다.
북한에는
"옥류관 냉면을 먹어보지 못했으면 평양 갔다 왔다고 자랑하지 말라"
는 말이 있다고 한다.
평양 옥류관 분점이 서울 강남에 문을 열어 서울에서도 옥류관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게 됐다.
음식 재료는 물론 그릇.수저 등 일체를 북한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남북한 교류와 경제협력 활성화의 상징적 '사건' 이라 하겠다.
예부터 잔칫상엔 국수가 빠지지 않았다.
혼례식에선 양가 (兩家) 화합의 상징으로 국수를 먹는다.
평양냉면을 통해 조성된 남북한 화해무드가 냉면발처럼 길게 이어지길 바란다.
- 중앙/5/4/99 -
* 냉면붐
- 북한냉면 붐이 일고 있다.
북한에서 가수활동을 하던 김용씨가 96년 일산에 문을 열었던 냉면집 「모란각」은
그동안 44개의 분점을 갖게 됐다.
음식점으로는 국내 최대규모의 점포망이다.
동독 유학생 출신인 전철우씨의 「고향랭면」은 1년 2개월만에 40개의 체인점을 거느렸다.
김정일의 기쁨조 출신으로 유명한 신영희씨의 「진달래각」은 북한 상류층이 즐기는
냉면이라는 차별화 전략으로 1년동안 대형 체인점 3개를 거느린 요식업체가 되었다.
■ 이번에는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냉면집이라고 선전하는 평양의 「옥류관」
서울분점이 생겼다. 엊그제 서울 역삼동에서 개업한 이 냉면집은 메밀 수수같은 식자재와
냉면그릇 등 집기류를 모두 북한에서 들여왔고, 평양본점에서 여러차례 조리기술을
연수한 재일동포 조리사를 데려와 본바닥 냉면과 가장 근접한 맛이라고 선전한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도 300평 가까운 매장에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냉면은 북한지방의 전통음식이어서 광복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냉면집이 하나 뿐이었다.
6·25 동란 이후 북한 피란민들이 차린 냉면집이 늘어나면서 남쪽 사람들에게 그저
신기한 별식 정도로 여겨져 왔으나, 이제는 불고기와 함께 가장 인기있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 해도 국가부도의 경제위기 속에 유독 냉면집만 호황인 이유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양쪽 사람들이 같은 음식을 즐기는 현상이 혹 남북관계와는 관련이 없을까.
■알게 모르게 남북간에는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해 북한을 방문한 한국인은 3,300명으로 그 이전 9년간의 방북 연인원 2,400여명보다
많다. 제3국에서 이루어진 이산가족 상봉이 100건을 넘고, 생사확인도 400건에 가깝다.
신포에는 남한 근로자 600여명이 상주하며 원전 건설작업을 하고 있고,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사람이 5만명을 넘었다.
북한이 조금씩 빗장을 열고 있는가. 때 아닌 냉면붐이 통일의 징조라면 얼마나 좋을까.
-5/5/99/한국 -
* 북한 주민의 굶주림
-대북한 구호에 나서고 있는 세계 각국의 비정부기구(NGO)들이 3일부터 5일까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국제회의를 열었다.
95년 이래 북한에 식량과 의약품 등을 지원해온 세계 각국 55개 단체가
참석한 이번 회의에서 이들은 북한에 대한 지원과 지원단체들간의 연계망
구축을 둘러싸고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이 회의 참가 단체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이들 북한 지원 단체들이 북한에 파견한
팔루(FALU)라는 조직.
낯선 이름의 이 단체는 ‘세계식량계획(WFP) 식량지원연락사무소’가 정식명칭으로 미국과
유럽에 본부를 둔 NGO단체들이 북한구호활동을 위해 96년 결성해 97년
북한에 파견한 조직이다.
지금까지 북한에 남아서 활동하고 있는 팔루 요원은 모두 20명.
이들은 북한 내 5개 지역에
흩어져 후원단체가 지원하는 구호품을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또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이 시급한 식량이나 의약품을 조사해 후원단체들에 전해주는
모니터 역할을 하고 있다.
팔루가 그동안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한 긴급구호 식량과 의약품은 97년 1천4백만달러,
98년 1천1백만달러 상당.
팔루측은 올해도 1천만달러 상당의 식량이 지원돼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팔루를 후원하고 있는 NGO는 과거 선명회로 불렸던 국제월드비전(WVI)과
미국 오리건주에 본부를 둔 국제자비군(MCI), 메릴랜드주 실버 스프링스에 있는
재림파구제기구(ADRA) 등
미국의 3개 단체와 캐나다의 캐나다식량은행(CFGB), 이탈리아의 국제카리타스(CARITS),
스위스의 함께 하는 교회운동(ACT) 등 6개 단체.
그리고 스웨덴의 PMU 인터라이프, 프랑스의 테제 브라더스,
독일과 미국 양국에 본부를 둔 국제CARE 등도 팔루를 대북한 지원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97년 초 북한에 파견된 팔루의 대표 에릭 와인가트너(56)는
“특히 그해 여름은 무척 길고 괴로웠다”
“당시 북한의 식량부족이 절정에 달해 어린이와
노약자들의 참상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직도 11%의 북한 어린이들을 포함해 약 8백만명이 절박한 식량부족에
직면해 있다”면서 회의 참가단체들에 서둘러 식량 지원의 손길을 뻗쳐줄 것을
호소했다.
“북한에서는 이미 보릿고개가 시작됐습니다.
미국이 60만t의 식량을 지원키로 하고 WFP도 7월부터 2억6천만달러 규모의 식량을 지원할
예정이지만 이 식량이 도착할 때까지의 공백기가 문제입니다.
긴급지원이 없으면 5∼6월에 다시 몇십만명의 생명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5/11/99/동아 -
* 북한에 대한 위협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북한을 미국에 대한 [거대한 위협(huge threat)]이라고
말하면서도, 대북 식량 원조를 중단하라는 의회 요청을 거부했다고
AP통신이 25일 보도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하원 국제관계 위원회 증언에서
"미국은 세계 식량계획(WFP)의 운영 계획에 따라 식량 원조를 계속할 것"
이라고 말했다.
벤자민 길먼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은
"미국의 관대한 정책에도 불구, 북한은 식량을 지원받아 군비
확충에 힘쓰고 장거리 미사일을 이란과 시리아 등에 판매해 왔다.
북한 미사일 사정거리는 미 본토에 이를 정도이며 우리는 서울뿐
아니라 시애틀의 안보를 걱정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올브라이트는
"클린턴 대통령이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윌리엄 페리 북한정책
조정관(전 국방장관)을 만나 대북 정책에 관해 논의할 계획"
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 미사일 개발과 지하 핵시설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이라고 올브라이트는 말했다.
한편 익명을 요구한 의회 소식통은
"미 하원은 북한이 현금 확보를 위해 북한내에서 기른 헤로인을 수출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고 말했다. - 조선/2/2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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