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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주석
사천 명을 먹이심 (마가복음 8:1-9)
우리는 전에 이와 매우 흡사한 기적의 기사를 본 복음서에서(막 6:35) 살펴 본 일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적의 기사를 마태복음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이다(마 15:32). 여기에 나온 기사는 마태복음의 경우와 별로 다르거나 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 다음에서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Ⅰ. 큰 무리가 주 예수를 따랐다. "큰 무리가 있어"(1절). 예수를 비난하고 예수에 대한 인기를 저하시키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술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도자들보다 더욱 솔직하고 참된 지혜를 소유한 평범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고귀한 생각들을 계속 간직하여 온 것이다. 우리는 이 무리가 그리스도께서 교제를 갖고 친숙하게 된 그러한 초라한 사람들로 대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당신의 명예를 나타내시지 않으셨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초라한 사람들도 생명과 은혜를 얻으려고 담대히 그분에게 나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는데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그것은 어려운 봉사였다. 바리새인들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하지 않도록 하자. 아마 그곳에 집으로부터 음식을 싸 가지고 온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다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 갈 길은 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해산시킬 때까지는 그분을 떠나겠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의무를 수행하는 길에 있어서 참된 열심은 아무 것도 고난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맞이한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를 위해 화려한 준비로써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 가운데에는 "누렇게 구워진 빵과 복음은 호식에 적합하다"는 옛 말이 있다.
3. 그리스도께서 빈곤한 자들과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베푸신 것처럼, 예수께서 그 성회에 참석하려는 열심과 근면으로 말미암아 먹을 것이 떨어져 어렵게 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하시었다. 바리새인들이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자들을 예수께서 동정과 온유함으로 겸손하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만민에게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자이다. 예수께서 주로 생각하신 것은 "저희가 나와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손실도 견디고 고난도 통과한다면, 예수께서 그러한 손해들을 어떠한 길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만회하여 주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동정을 가지고 말씀하셨나를 살펴보자.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 하리라"(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분을 잘 아시고 고려하신다. 그리고 머리이신 예수께서는 "몸을 위해"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면 "참으로 우리는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으며" 돌아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시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 참석한 "무리를" 볼 때에 우리는 비록 모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계심을 생각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계 2:13).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들을 굶겨서 돌려 보내실 수 없으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정중하게 성회에 참석한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낸 다는 것은 당신으로서 하실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인들의 의심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구해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4절).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떡이 나타나고 그것도 풍부하게 나타났으니, 그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동을 취하시는 때는 모든 것이 최후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인 것이다. 그들이 "기진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이 떡을 위해서 당신을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먹을 것이 완전히 떨어지고 그들을 "집으로 보내려"는 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 것이다.
6. 그리스도의 풍부함은 무진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기적을 반복하심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항상 구원과 양식을 주시는 증거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원함과 필요를 항상 새롭게 허락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 앞서 있었던 기적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받은 떡 다섯 덩이를 전부 활용하시어 당신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 즉 오천 명을 먹이셨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떡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였으니 떡 네 덩어리면 사천 명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만도 했을 것이지만, 예수께서 떡 일곱 덩어리를 다 받으셔서 그것을 통해서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취하고 그것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라는 교훈을 주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여 최선의 것이 되게 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나려 주실 때에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과 같은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7. 우리의 아버지의 집에, 우리의 주님의 집에 "배부르게 할 수 있고" 남음이 있는 떡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충만함은 그분의 거룩한 손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 것이다(요 1:16).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자들은 결핍을 겁낼 것 없다.
8. 그리스도를 그러나 따르는 자들은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 사천 명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다 먹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양무리 가까이 있어야만 하며 그들과 보조를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표적에 대한 논란 (마가복음 8:10-21)
그리스도께서 아직 활동 중이시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영토의 한 모퉁이인 달마누다 사람들이 자기들은 그리스도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는 원성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곳에 배를 타고 오시었다(10절). 그러나 그곳에 당도하자 바리새인들의 힐난을 받게 되어, 그곳에 선을 행하시지도 않으시고 "다시 배에 올라" 타신 후(13절), 돌아오신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하면서 당신에게 도전하는 바리새인들을 만족시켜 주기를 어떻게 거절하시는가를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께 힐난"하려는 목적으로 그분으로 나왔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그 대답을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예수를 힐난한 것이다.
1. 그들은 마치 그들에게 더욱 관련이 있고, 더욱 관찰과 조사를 해 볼 수 있는 예수의 지상의 표적들이 부족함 것처럼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예수에게 요구한 것이다.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나타난 표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오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 것이다(마 3:16, 17). 그 일은 공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마땅히 그렇게 하였어야 하는 대로 요한의 세례에 참례하였더라면, 그들 자신들이 이 사실을 목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에 여수께서 십자가에서 목박히셨을 때에 그들은 새로운 표적을 구하면서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고 희롱하였다. 대단히 불합리한 것이지만 그러한 완고한 불신앙은 지금도 희롱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를 시험하여" 이 표적에 예수에게 구한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이 만족할 만한 표적을 그들에게 대답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그러한 대답을 못하리라는 희망에서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불신앙적인 가장을 생각해 낸 것이다.
2. 예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었다.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12절),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이 완고함을" 인하여, 그리고 당신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기적을 행하시었는데도 그들이 그렇게 감화를 받지 못함을 슬퍼하시며 탄식하시었다. 오랫동안에 확신할 만한 증거를 본 자들의 그러한 불신앙이 주 예수에게 큰 슬픔이 됨을 유의하라. 그들이 빛 가운데서 그렇게 있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문을 그렇게 봉하는 것은 예수에게 고통스런 일이었다.
(1) 예수께서 그들의 이 질문에 대하여 주를 달았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이 세대는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와 동반해서 표적이 나타나기에 합당하지 않은 세대이다. 이 세대는 장로들의 유전은 전연 아무 표적이 따르지 않아도 욕심 많게 삼켜버리는 그런 것이다. 이 세대는 구약에 예정한 때를 계산함으로써 메시야가 곧 오리라고 벗어나게 알아내는 그런 것이다. 이 세대는 그들의 병자를 고치는 많은 지각 있고 자비스런 표적을 가진 그런 것이다. 그들이 표적을 구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이리석은 짓인가 !
(2) 예수께서 그들의 요구에 대답하시기를 거절하시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반적인 섭리의 노정을 벗어나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기드온과 아하스처럼 그들은 담대하게 표적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자들에게, 율법과 복음서에서처럼 보통으로 말씀하실 때에는,거기에 대한 증거도 아울러 말씀하실 것이므로, 예수께서 나타내신 것 외에 다른 표적을 구한 것은 외람된 일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예수께서는 그들이 아예 말할 만한 상대가 안 되는 것처럼 그들을 거절하고 그들을 떠나시었다. 그들이 그렇게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라고 그들을 망상 가운데 버려두고 떠나신 것이다.
Ⅱ.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어떻게 경계하셨나를 보여 주고 있다.
1. 무엇을 조심하라고 하셨나를 보자(15절).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 말씀은 아마 이런 뜻으로 말씀하시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너희가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들이 집착해 있는 장로들의 유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그들처럼 교만하거나 외식적이거나 의식적이 아 되도록 주의하라." 마태는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첨가하였고 마가는 "헤롯의 누룩"을 첨가하여 말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는데 헤롯은 오랫동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어떤 표적을 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눅 23:8). 그러하였으므로 두 가지 누룩을 똑 같이 주의하라고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중에 나타난 표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자신들이 고안해 낸 다른 표적들을 원하였던 것이다. "누룩을 주의하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심). "너는 본 기적으로 확신을 가지라. 그리고 더 많은 표적을 보려고 욕심을 내지 말라."
2. 그들이 이 주의를 얼마나 오해하였나 보도록 하자. 그들은 지금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었다"(1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당부하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바다 건너편에 당도할 때에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도움을 구하지 말라는 암시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마 전에 "손 씻지 않고 먹는 일 때문에 그들에게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하신 이 "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서로 의논하고"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우리가 바다로 떠나고 낯선 사람들 가운데로 가면서 떡 한 덩어리밖에 안 가지고 가기 때문에 우리의 부주의를 책망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그들이 "의논하기를" 이 말의 원어 "dielogi,zonto"는 그들이 논쟁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서로 "당신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논쟁하였다. 하나님에게 대한 불신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게 만든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풍부한 경험을 하였음에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논쟁하는 그들의 우둔함을 책망하시었다. 그러나 그 책망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시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이 그러한 따뜻한 책망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렇게 많은 나타나는 증거를 보았는데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그러므로 그 마음에 아무런 좋은 인상을 못 주며 또한 너희 주께서 갖는 생각과 그렇게 다르냐? 눈이 있으면서도 너희 눈앞에 보이는 그런 평범한 일도 모르느냐? 귀가 있으면서도 너희가 그렇게 많이 들은 것에 대해서 모르느냐?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감각한 너희냐! 그리고 지난날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의 일을" 기억치 못하느냐? 그리고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 번은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고 한 번은 일곱 바구니를 거두었다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데 어찌하여 떡 다섯 개와 일곱 개를 많게 하신 자가 떡 한 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었다. 그들은 만일 예수께서 당신의 청중들을 대접하실 마음이 있어도 떡 한 개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의심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만일에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면 마치 예수께는 수가 적든 많든 기적을 나타내시는데 마찬가지가 아니고, 떡 다섯 개로 하신 것처럼 떡 한 개로 능히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없다고 본다면 이것은 정말로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앞서 있었던 기적의 식사에 대해서 그들이 흡족하게 먹었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생각하시고, 그들이 거기에서 배웠을 그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마땅한 꾸지람을 듣게 된 것이다.
(1)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는 길에 있어서. 우리가 갖게 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경험이 하나님에게 대한 우리의 불신을 더욱 가증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를 몹시 노엽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참된 의도와 의미를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염려와 불신으로 압도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주 예수에 대한 능력과 자비하심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본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날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며,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러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나 우리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잊거나 그분을 불신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엄하게 꾸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완고한 것일까?"
맹인을 고치심 (마가복음 8:22-26)
이 신유의 기사는 다만 본 복음서 기자만이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독특한 점이 있는 것이다.
Ⅰ. 여기에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예수께서 "손대기를" 구하면서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나온 "소경 하나"가 있다(22절). 여기에 그 사람을 데리고 나온 자들의 신앙이 나타나 있으니 그들은 예수께서 한 번 안수하시면 그의 시력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은 다른 소경들이 보인 바와 같은 그러한 신유에 대한 열심과 기대가 보이지 않았다. 영적으로 소경이 된 사람들도 스스로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그들을 만져 주실 것이다.
Ⅱ. 여기 그리스도께서 이 소경을 인도하시고 계신다(23절). 예수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그를 인도하도록 부탁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인도하신 것인데, 이것은 그분의 겸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욥과 같이 "소경의 눈도 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욥 29:15). 불쌍한 소경으로서 이와 같은 인도자를 결코 가져보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심은 다만 은밀히 역사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아마 예수께서 그를 어느 집이나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서 그를 고쳐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분은 그곳에 큰 권능을 행하시었지만 헛된 일이 되고 만 벳새다를 책망하시려고 하신 것이다(마 11:21). 그리고 그 지방은 더 많은 역사를 나타내시기에 합당치 못함을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께서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그가 눈을 떠보게 될 때에 좁은 길에서 보다 앞이 훤히 트인 들이 더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Ⅲ. 여기서 찬송을 받으실 위대하신 안과 의사에 의해서 소경의 시력이 회복된 것이다. 이 대의사는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눅 4:18) 그분이 전파하신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 신유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의 일을 살펴보려고 한다.
1. 그리스도께서 소경의 시력을 회복하실 전조를 보이셨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었다". 예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그 사람을 고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으로써 믿음이 약한 그의 믿음을 일으켜 주시기를 원하시었으며 그의 불 신앙을 극복하도록 그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침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눈에 발라 주는 안약을 나타내는 것이다(계 3:18).
2. 이 신유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대체로 나타내시는 다른 기적과는 달리 서서히 이루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23절). 아마 예수께서 그에게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도록 그의 눈이 볼 수 있는 상태를 말하게 하였을 것이다. "우러러보며" 그가 시력이 회복되어 눈을 뜰 수 있게 되자 그는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이 보이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사람들과 나무들을 다만 움직이는 것을 식별하는 외에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는 희미하게 볼 수 있으며 자기와 하늘 사이에 나무와 같이 서 있는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 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욥 4:16)/
3. 그의 시력은 곧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일을 결코 절반만 이루시거나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까지 내버려두시는 일이 없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불완전한 시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쳐다보라고 명령하시자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만물을 밝히 보았던" 것이다(25절).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를 나타내시나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 방법에 매이시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자유롭게 역사 하심을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기계적 방법이나 노정에 의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고 당신께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길을 통해서도 같은 목적을 달성하시므로 사람들은 절대적인 신앙으로 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환자의 믿음에 따라 그 환자에게 알맞게 역사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사람의 신앙은 처음에는 아주 약하였던 것이나 나중에 시력이 회복되면서 강해진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항상 이와 같은 원칙으로 나가시는 것은 아니며, 의심하면서 당신께 나오는 자들을 때로는 책망하신 것이다.
(3) 이러하므로써 그리스도께서 본래 영적인 소경들을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치료해 주시는 가를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지식이 혼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빛 같이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러" 그들은 "만물을 밝히 보는" 것이다(잠 4:18). 우리는 "믿음"이 그 "실상"이며 "증거"인 그러한 것들이 "보이느냐?"고 우리에게 물어 보자. 그리고 은혜를 통해서 그러한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어 보자. 우리는 "점점 잘 보이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함을 받은 자들을 영원히 완전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고치신 그 사람에게 "벳새다 마을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라"(이 부분은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음-역자 주) 지시하시었으며 그 보다도 더 어렵게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었던 것이다. 아마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데리고 마을에서 나가는 것을 본 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그리스도를 따를 만큼 큰 호기심을 갖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마을 밖으로 나가실 때에 그분에게 존경을 표기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눈 뜬 것을 보여 만족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에 사는 자들에게도 금하신 것은 아니고 이 마을에 사는 자들에게 금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는 일은 그 은혜를 다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원함으로써 그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가치를 알게 하신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은혜의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친히 방문해 주시던 날에 자기의 평화에 속한 일들을 몰랐던 벳새다, 지금은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2). 그들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 (마가복음 8:27-38)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많은 교훈과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런 교훈들과 기적들은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많고, 색다르고, 잘 증거 되고, 다양하며, 여러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이러한 모든 일들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인 줄 안다. 그리스도께서 소문을 내지 않도록 금하시고 이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역사들은, 그럼으로써 온 세상에와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에 전해지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그러한 모든 사실들에 대한 기록이 다만 흥미를 위해서나 우리의 담화를 장식하도록 위해서 이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이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해서 필요한 반영을 나타내고 올바르게 활용하는데 우리를 돕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로부터 세 가지 일을 추론할 수 있다고 본다.
Ⅰ. 제자들은 예수께서 "참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의 구주임을 증거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일들이 그 분에 대해서 증거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신 이 모든 일들의 목격자들인 제자들이 여기에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 일들에서 똑 같은 추론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그 신앙 고백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한 사람들의 의견이 어떤가를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비록 사람들에게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이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결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를 물으신 것은 그것을 자신이 알고자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가 이를 생각해 보고 서로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2. 그들이 예수에게 말한 답변은 예수에게 대한 사람들이 가졌던 잘 알려진 고상한 의견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진리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그들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기적들로 보아 그분은 하나님의 임명을 받고 보이지 않는 타계에서 오신 비범한 인간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메시야가 외관상 화려하고 권세 있는 이 세상의 왕으로 출현하신다고 가르치는 그들이 선생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않았던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시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외모는 그들이 생각한 그 메시야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무어라고 말하더라도, 예수의 완전하시고 영력 있는 가르침에 그들은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사기꾼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그들 중에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하였다(28절). 모두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라는데 일치한 것이다.
3.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그들 자신들의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분 안에서 그들이 크게 만족하고 있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이제 얼마 동안의 시련이 지나면 회개할 이유를 찾아 볼 수 없게 될 예수에 대해서 의견을 진술하게 된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한 가지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한 것이다(29절). 메시야는 자주 약속이 되었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진정으로 고백하고 그와 같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심을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으로 분명히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를 그들은 알고 있다. 이제 곧 그들은 이를 드러내어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이를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30절). 그것은 그 증거가 완성될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이를 전파할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행 2:36).
Ⅱ.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러한 기적들은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치워 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패배한 것이 아니고 승리자이심을 우리에게 확신케 하여 준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언급하시기 시작하는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침착하게 들러야만 할 것이다(31절).
1.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들이 메시야 되심에 대하여 세상의 군주로써 오류를 범했지만, 그들이 자기들의 선생님이 메시야임을 믿는 한, 그분의 현재의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곧 화려하고 찬란한 가운데 군림하시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면 여전히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류를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그들의 전망에 모순된 말씀을 즉 당신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그들에게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 곧 왕으로 군림하실 때에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굴복하고 그분을 높일 것으로 알았는데 오히려 버림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왕관을 쓰시고 왕위에 오르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나시어 이 세상에 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32절), "드러내놓고"의 원어 "parrhui,a"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자유롭게 분명하게 하시고 모호한 표현으로 숨겨서 하시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만일 그들이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예수께서 태연하게 아무 두려움 없이 말씀하시고 그들이 그렇게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치 당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모르는 것뿐 아니라 그렇게 하시고자 결심하시고 그것을 그 행위로써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처럼 담대하게 말씀하시었다.
2.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반대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여기에서 베드로는 신중을 기하기보다 예수께 대한 사랑을 보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자기의 안전을 위해 열심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지식에 따라 하지 않은 것이다. 저가 "그를 붙들고"의 원어 "proslabo,menoj avuo.tn "는 저가 그분을 멈추게 하고 저지하려는 듯이 그분을 붙들고, 팔로 안고, 껴안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의 귀한 선생께서 그토록 심한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 두 손으로 그분의 목을 붙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그분의 옆구리를 은밀히 붙들고 "간하"였는지 모른다. 이것은 권세가 적은 자의 언어가 아니고 최대의 애정의 언어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자의 행복에 대한 투기 즉 "죽음같이 강한" 사랑의 언어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더불어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여기에 베드로는 지나친 자유가 허용된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의 반대를 용납치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33절) 그 나머지 제자들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 이레 대해서 베드로와 일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시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역시 그러하다면 지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려는 그러한 책망을 그들도 스스로 자청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친절히 말린 일 때문에 그런 준엄한 책망을 들을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아마 얼마 전에 자기의 신앙고백에서 보여 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칭찬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언행 중에서 우리도 모르고 있는 잘못된 것을 보고 계시는 것이며,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는 우리의 정신 상태를 알고 계시는 것이다.
(1) 베드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합당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와 같이 말하였다. 그가 매일 그리스도의 능력을 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증거를 보았다면 그분이 할 수 없어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님을 결론짓게 되었을 것이다. 가장 유력한 원수들도 병과 죽음도, 바람과 파도와 귀신도 복종케 하고 굴복케 하신 예수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매일 그리스도의 지혜의 풍부함을 보았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위대하고 영광스런 목적이 아니고는 그런 고난의 길을 택하시지 않으실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에게 모순이 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선지자들이 당하던 것 같은 하나의 순교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만일 그분께서 대제사장들을 책망하는 일을 좀 삼가시거나 그 길을 조금만 피하신다면 그 고난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 당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탄을 멸함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며,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완전케" 되어야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란 그것을 하나님의 계획에 가하려고 할 때에 아주 어리석은 것이 되는 것임을 유의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가장 큰 실례인 십자가가 어떤 이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된다.
(2)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합당하게 생각하지도 못한 자와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이 왕국이 신령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반해서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절). "fronei/j"는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와 같은 표현이 로마서 8장 5절에도 나와 있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에 속한 일들과 앞으로 누리게 될 생활보다도 이 땅에 속한 일들과 현재의 생활을 더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일들보다 사람의 일들을 마음에 두며, 하나님의 일들과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보다 우리 자신의 신용, 안락, 안전등을 더 마음에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죄이며 많은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이 죄가 보통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고난의 날에, 시험의 날에 다 들어 나는 것이다. 그 때는 인간의 일들을 가지고 오르는 자들이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논 사피스(Non Sapis)는 "너희는 하나님의 일에 지혜롭지 못하고 사람의 일에 지혜롭도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어떤 지혜로운 세대에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눅 16:8). 고난을 피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과 함께 의무를 피한다면 그것은 육체의 지혜이며 결국에는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 되는 것이다(고후 1:12).
Ⅲ. 이러한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선교의 확립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획과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오신 은혜의 성격을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러한 질병으로 고난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나와서 고쳐 주시도록 맡길 때에 그들의 육체를 고쳐 주신 것처럼,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눈먼 것과, 귀먹은 것과, 저는 것과, 문둥병과, 각색 질환과 사귀들림을 고쳐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해 주는 것이다. 각양 질병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예수에게 나왔던 많은 무리들에 대한 기사가 종종 나와 있다. 지금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의 대 의사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며, 우리로 그분의 도움을 받는 환자가 되고 그분의 처방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떤 때에 이르렀는가를 알려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비밀히 대화하실 때에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계시었으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 불러 이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치료해 주기를 바란다면 누구나 모두 관심을 갖고 알고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1. 그들은 마땅히 육신의 안일에 빠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한 것처럼 영적인 병을 고치기 위해 "아무든지 나를(그리스도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부정의 생활과 금욕의 생활과 세상을 경멸하는 생활을 해야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의 의사인 체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나, 자기 자신의 의와 힘에 대한 모든 신념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본을 자신이 본받으며,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쳐 주신 모든 사람들과 같이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나를(그리스도)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치유를 받는 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던 자들같이, 그분을 따라야 하며 그분과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그분으로부터 가르침과 책망을 받아야만 하며, 그분을 결코 버리지 않겠노라고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기의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때에도 결단코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염려해서는 안 된다(35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역사로 말미암아 초대를 받았는가? 우리는 고요히 앉아서 우리가 우리의 목숨 그 자체에 앞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유익이 더 소중하다고 평할 수 있을는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을 생각을 할 수 있을는지 그 가치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마귀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과 종들을 곁길로 미혹할 때에, 마귀는 가장 나쁜 것은 숨기며, 그들에게 자기를 섬김에 있어서 다만 쾌락만을 말하고 멸망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창 13:4). 그러나 그리스도를 섬김에 따르는 고난과 위험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그분을 섬기는 일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통 그것들이 입증하는 사실보다도 적게 가 아니라 크게 절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이며 우리가 가장 어려운 일을 아는 것도 겁내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공정하게 두 가지를 대조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섬김에서 얻는 유익이 충분히 절망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잃는"것을 두려워 말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것을 드릴 수 있어야만 한다(35절). 그리스도께서 나와서 신앙을 고백한 후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그리스도를 버리거나 그를 따르기를 거절하거나 그를 부인하면, 그는 "잃을 것이요" 그는 평시의 자기 생활의 위로를 잃게 되며, 영적 생활의 근원과 원천을 잃게 되며 영생에 대한 자기의 모든 소망을 잃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한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진정으로 잃어버리려고 하며 모험하려고 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을 때에 그것을 버리려고 한다면, "구원하리라." 그는 말할 수 없는 흑자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목숨을 버림은 그에게 더 나은 생명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군주와 나라를 이해서 자기들의 목숨들을 버린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보상을 해 주고 그들의 공적을 기념하며 치하할뿐더러 그 유가족들을 원호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영생을 얻게 된 때에 얼마나 귀한 보상을 하여 주겠는가?
(2) 비록 우리가 "온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36,37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잃으면 세상에 잇는 모든 부귀와 쾌락을 얻는다 해도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후퍼 주교(Bishop Hooper)가 순교 당하기 전날 밤에 말하기를 "생명은 달고 죽음은 쓰다는 말이 옳도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더욱 달고 영원한 죽음은 더욱 쓴 것이다"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하늘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 자신의 생명을 바친 일에 대한 넉넉한 보상이 되는 것처럼 죄 가운데서 온 세상을 얻는 것은 지로 말미암아 오는 영혼의 멸망이 흡족한 보상이 못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제 목숨을 구원코자, 그리고 세상을 얻고자 무엇을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어떤 운명의 결과가 그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나 보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절). 이와 같은 말씀을 마태복음 10장 33절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1]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손실을 당하는 것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신앙 고백이 되기 위해서이다. 인류의 그러한 세대는 음란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세상에 대하여 불순한 포옹을 하고, 그 육체가 죄악 가운데 누워있는 것이다 어떤 시대와 어떤 곳에서는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와 같이 유난히 더 음란하고 사악한 것이다. 그러한 세대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다가 배척도 당하고 고난도 당하는 것이며, 어느 곳에서나 비난과 경멸을 당하고 조롱과 희롱을 당하는 것이다.
[2] 비록 그리스도의 주장이 옳은 것인 줄은 알면서도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많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에 거기에 따르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친척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를 부끄러워하며, 사람들이 자기들의 말을 신용치 않을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비웃고 멸시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배신의 급류에 떠내려가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금 천대와 멸시를 받는 것 같이 밝고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날이 임박할 것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의 아버지와 영광과 주의 천사들의 광명이 참된 영광으로 임하실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멸시를 당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영원히 경배를 받으시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욕을 당할 때에 같이 동참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의 영광 가운데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