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전택부 선생의 삶과 한글날 국경일
최기호(외솔회 회장/ 상명대 명예교수)
1.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다
오리 전택부(全澤鳧) 선생은 1915년 2월 12일 함경남도 문천에서 전현석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조국의 고통과 암울함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었기에 그의 일생은 나라를 걱정하며 살아간 한 평생이었다.
‘전택부’는 아버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전택부의 선친 전현석님은 한학을 많이 공부하신 분으로서 맏아들을 낳자,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이란 옛 한시를 생각하여 맏아들 이름을 ‘택만(澤滿)’이라고 지었다. 연못에 물이 가득 차야 한다는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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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은 거북이를 넣어서 ‘택구(澤龜)라고 짓고, 셋째 아들은 용을 넣어서 ‘택용(澤龍)’이라고 지었다. 봄에 물이 가득한 연못에서 거북이처럼, 용처럼 천년만년 건강하게 잘 살라는 뜻을 실어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넷째 아들을 낳자 ‘오리 부(鳧)’자를 달아 ‘택부(澤鳧)’라고 지었고 어려서는 ‘오리야’ 라고 불렀다.
전택부 선생은 나중에 자기의 아호를 ‘오리(吾里)’로 정한 것도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 때문이라고 하였다. 오리 선생은 고향에 정착한 이후 서른이 되어 8살 연하의 아내를 맞이하였다. 오리 선생은 아내애 대한 회고를 다음과 겉이 하였다.
“아내는 그 이후 60여년이 넘도록 나의 반려자로 나를 위해 온갖 고생도 마다않고 헌신했다. ...아내는 나를 사람답게 살게 해준 은인이다. 나는 아내에게 빚진 자이다.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내 아내 학님과 나 오리는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천생연분을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
2, 하나님을 만나다.
오리 선생은 15세부터 함흥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 영생고보를 다니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일본 신학교로 유학을 가면서 ‘성경책과 찬송가와 밑반찬과 함께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이라는 잡지를 10여권 챙겼다.’라고 회고하였다.
1940년 일본신학교 예과를 마치고 본과에 재학 중에 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항의를 하다가 일본 신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52년에는 기독교 계통의 월간 잡지 <새벗>에서 주간으로 일하였으며 1954년에는 <사상계>의 주간으로 일했다. 그리고 1957년부터 20여 년간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총무 등 여러 중요 직책을 맡아 일하였다.
이처럼 오리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정로로서 살았다. “나는 그 동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평생의 가치관으로 여기고 야인으로 살면서 정권과 명예 앞에 굽실거리지 않았고 남들이 관심 갖지 않았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 한글보급운동과 YMCA운동에 헌신했다....내 나이 올해 93세, 내 인생을 돌아다보니 모두가 은혜며 감사할 따름이다. ”리고 회고하였다. 그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YMCA운동을 한 것이다.
3. 나라를 위하여 한글 운동을
오리 선생은 ‘내 소원은 한글날이 빨간 글씨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늘 기도하였다. 그래서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도록 아주 구체적으로 운동하였다. 2000년에는 ‘한글날국경일 제정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를결성하여 그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면 오리 선생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한글운동에 매달렸느냐 허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오리 산생은 15살에 기독교 학교인 함흥의 영생고보애 다니면서 한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일본 신학교로 유학을 떠나면서 조선어헉회의 기관지인 <한글>을 짐에다 꾸렸다고 했다. 오리 선생은 일본 유학 시절에는 한글운동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그는 크리스찬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하늘나라를 위해서는 YMCA 운동을 했고, 이 나라를 위해서는 한글운동을 했다. 이것이 내가 평생 걸어온 두 개의 주 노선이다"라고 밝혔다. 오리 선생이 <사상계> 초대 주간을 할 때에 이른바 '한글 간소화 파동’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는 이유로 한글 철자법을 무시하고 소리 나는 대로 간편하게 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회와 학자들은 일제히 반대를 하였다. 신문 등 언론계도 반대 기사를 실었다. 그때 오리 선생은 <사상계> 주간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간소화 지시를 반대하는 내용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즉 '독립운동 사상에서 본 한글운동의 위치'라는 제목으로 <사상계>에서 기사를 실어 대서특필을 하였다. 여러 신문의 기사들과 국회 속기록까지 게재하여 특집호로 꾸몄다. 여러 학자들의 반대와 특집기사가 실린 뒤 이승만 대통령과 이선근 문교부 장관이 한글 간소화를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뒤에 종로 종각 부근에 있는 사상계 사무실로 외솔 최현배 선생이 찾아오셨다. 전택부 선생에게 책상 앞에 와서 거의 90도 각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당시 오리 산생은 30대 젊은이였는데 대학자인 최현배 선생이 찾아와서 특집기사의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글 파동'을 계기로 오리 선생은 외솔 선생을 만났고 한글운동에 더욱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한글문화협회’ 부위원장과 ‘한글전용국민실천회’ 회장, ‘국어순화추진협의회’ 위원,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부회장, ‘재단법인 외솔회’ 이사, ‘세종국제공항명칭 추진위원회’ 위원장,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맡으며 활약하였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위하여 참으로 먾은 사람들아 노력을 하였다. 그중에 오리 선생은 위원장을 맡았고 서정수 박사와 이대로 사무총장과 팔자가 실무를 맡으며 노력하였다. 필자는 그때 ‘한글안터냇주소추잔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한글날 국경일 재덩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국회 대강당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한글날의 국경일’에 대한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독일의 삿세 교수와 일본의 여택대학교 우메다 총장을 초청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강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회의원을 일일이 방문하여 의원회관 사무실 앞에 ‘한글이 꽃 피는 아름다운 일터’라는 팻말을 달아 주었다. 문광위원을 먼저 달아주고 이어서 행자위원들과 다른 국회의원의 사무실애도 달아 주었다.
그리고 반대하는 국회의원에게는 항의 방문도 하고 격려의 난과 꽃을 보내며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데 힘을 썼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넷피아 이판정 사장이 거의 댓고, 오리 전택부 선생은 총 지휘를 하였다. 신기남 의원과 정두헌 의원 등 많은 국회의원이 힘을 써 주었는데 여러 국회의원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그리하여 한글날은 국경일로 태어난 것이다.
오리 선생은 국어학자가 아닌데도 외솔상을 받았고, 2008년에는 세종문화상 (사회봉사부문)을 받았고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 공로상을 받았다. 세종문화상은 한글창제를 비롯해 찬란한 민족문화 발전을 이룩한 세종대왕의 창조정신 및 위업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한 공적이 현저한 분에게 드리는 상이다.
오리 선생의 주요 저서에는 <월남 이상재>, <한국 기독교 청년회 운동사>, <한글 성서와 겨레 문화>, 수필집으로는 <강아지의 항변>, <무슨 재미로 사나>, <이 땅에 묻히리라>, <달을 쏘는 아이> 등이 있다.
4. 겨레의 스승과 스승의 노래
오리 선생이 존경하는 스승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W.Schofield) 박사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의료선교를 히였고 독립운동을 보도하는 등의 활동을 한 캐나다인이다.
한국의 3·1운동을 적극 지지해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렸고, 그래서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오리 선생은 스승 스코필드 박사와의 각별한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G.S.Gale)과 연세대 세브란스를 세운 에비슨(O.R.Avison)과는 토론토대학의 동문이었다. 그들은 한국 YMCA창설자였기 때문에 오리에게 늘 큰 스승이었다. 오리 선생은 아동문학가인 강소천에게 스코필드같은 스승을 생각하여 노레를 지을 것을 권면하였다. 강소천은 오리 선생과 친한 고향 친구이다. 오리 선생은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잡지 ‘새벗’의 주간으로 있었다. 1955년 오리가 ‘사상계’로 옮길 때, 강소천을 새벗의 주간으로 추천할 정도로 절친했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은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스승의 노래는 오리 선생이 스코팔드 스승을 생각하여 친구 강소천에게 권면하여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5. 오리 스승님을 그리워하며
나라가 어려울 때 온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전택부 장로님을 그리워한다.
청년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고 평생을 YMCA와 함께 하신 오리 선생을 그리워한다.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멀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는 주시경 선생의 뜻을 따라 우리 멀글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신 오리 스승님!
이제 한글날 국경일은 우리가 완성하고 지키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몽골 울란바타르대학에서
최기호 삼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