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김현희의 칼기 폭파사건 의혹 여부로 연일 언론이 시끄럽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납북 어민들이 귀환하면 십 수년 후 연행해 고문을 통해 가족 간첩단 사건을 터뜨리곤 했다. 이들 재판 기록을 보면 고문의 잔혹함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수 십 차례에 걸친 진술서 작성과 암기 현장 검증의 완벽한 조작은 그야말로 영화 감독을 뺨치는 연출이다. 대표적인 간첩 조작 사건인 수지 김 사건을 다시 살펴본다.
우선 참고로 길지만 윤태식 게이트를 간단히 설명 드린다.
87년 1월3일 홍콩에 있는 무역회사 주재원이었던 윤태식은 부인 수지김 (김옥분)과 돈 문제로 크게 싸우다가 그만 수지 김을 목졸라 살해하였다. 윤태식은 도피처로 일단 북한을 생각하고 다음날 북한대사관이 있는 싱가폴로 날아 가서 북한대사관에 입북의사를 밝혔으나 거절당했다. 다시 미국대사관에 가서 이번엔 북한에 부부가 납북될 뻔했다며 망명의사를 밝혔고 이를 미심쩍게 생각한 미국 측은 망명을 허가하지 않고 한국대사관에 윤태식을 넘겼다. 한국대사관에서 그는 그의 처를 북한공작원이라고 주장하며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고 거짓 주장을 했다.
이 사건을 접수한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에서는 이 사건을 대북 공작과 국내정치의 국면전환의 호재로 삼았다. 1987년1월9일 김포공항에 내린 윤태식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안기부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윤씨는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돼 홍콩을 떠난 이후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 받자 다음날 새벽 "사실은 내가 아내를 살해하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진월북을 시도했다"고 실토했다.
사건발생 23일 후 수지 김의 시신은 침대 밑에서 홍콩경찰에 의해 발견되었다. 홍콩경찰은 윤씨를 살해범으로 지목했으나 윤태식은 이미 한국의 안기부 보호 하에 있었다. 1월10일 경 전모를 알고 황당해진 안기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여럿 다치게 될 것은 뻔한 이치. 당시 안기부장이던 장세동은 사건은폐를 지시하고 4개월에 걸쳐 윤씨에게 살인, 납북미수, 폭행치사 등 3가지 경우에 대한 시나리오를 숙지케 하는 교육을 완벽하게 시켰다. 외무부 역시 그 사실을 알고서도 안기부의 요청에 응하였다.
원귀가 된 수지 김은 드디어 복수를 시작했다.
1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말. 안기부의 후원 하에 윤씨는 패스21이라는 지문인식 출입기를 만드는 벤쳐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었고 그는 매우 잘 나가는 벤쳐인으로 정계, 관계,언론계의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김대중대통령을 알현하는 영광(?) 도 가질 만큼. 하나 때는 때대로 가는 법.
2000년 1월28일 홍콩주재 외사협력관이던 조모 경정은 수지 김 가족들의 제보에 따라 홍콩 현지에서 취재를 벌이던 SBS 취재팀으로부터 "윤씨가 부부싸움 중 김씨를 살해했는데 납북미수 사건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 당시 경찰청 외사관리관이던 김모 치안감에게 보냈다. 이에 김 치안감은 다음날인 1월29일 경찰청 외사분실에 사건을 배당하고 내사토록 지시해 사건발생 13년 만에 수지 김 사건에 대한 경찰내사가 은밀히 시작되었다. 당근 경찰 측에서는 2000년 2월14일 윤씨에 관한 조사기록 열람을 국정원에 요청했다.
국정원에서는 이때 경찰 측의 내사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급해진 국정원에서는 당시 이무영 경찰청장에게 사람을 보내 사건내막을 보고하면서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으로 북한에게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단순 살인사건을 대공사건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면 외교 및 대북 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사건내사의 중지를 요청했다. 이무영 청장. 부평 대우차강제진압사건으로 악명 높은 이 양반. "사건을 묻어달라"는 국정원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 전 청장은 다음날(2월15일) 김 전 치안감을 불러 수지 김 사건을 국정원에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수지 김 사건에 대한 내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 2000년 봄 우연히 TV를 통해 성공한 벤처인으로 나온 윤태식을 본 수지 김의 오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족들은 여간첩의 가족이란 생 누명을 씌운 윤태식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드디어 가족들은 2000년 3월 9일 검찰에 윤씨를 살인죄로 고발하게 이르고 검찰에서는 재수사를 결정하였다. 10월 14년 전 홍콩경찰의 자료를 입수했다. 결국 1년 반에 걸친 수사 끝에 11월13일 공소시효 15년을 불과 50일(2002.1.2,- 사건이 87.1.3발생했으므로)을 앞두고 윤태식은 구속되었다.
역사에 남을 사기꾼 윤태식과 후안무치한 국가 권력
그 사이의 윤태식의 행적을 잠깐볼까?
"90년대초 영화 관련 사업을 하던 윤씨는 경영이 어려워지자 방송사 직원 등의 신분증을 위조해 신용카드를 발급 받아 수 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94년 2월 구속돼 2년6개월 간 복역했다. 98년 벤처회사를 차린 윤씨는 지문인식기술을 개발해 `성공한 벤처기업인'으로 언론 등의 조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기회사 (패스21)의 주식을 언론인과 짜고 뻥튀기를 했다. 사실 그 당시 벤쳐회사를 신문에서 좀 띄워주면 주식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경제신문과 한 통속이 된 윤씨는 그 주식을 정계, 관계에 뿌려대며 수 백억 대의 성공기업가가 되었다.
그런데 살인자 윤태식의 주식로비는 참으로 광범위했다. 청와대 공보수석부터, 정계는 당연히. 방송국 PD, 경찰 공무원, 각 장관, 공무원, 서울경제 사장.... 심지어 부패척결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된 김성남 변호사는 패스21의 고문변호사였고 2500주의 스톡옵션까지 챙겼으니..
구속된 이무영 전 경찰청장이나 국정원 간부들은 당시에 공소시효 지났다고 태연했고 특히 처음에 일이 결정적으로 꼬이게 만들고 조작/은폐의 장본인인 장세동은 큰소리 탕탕 쳤다.
1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수지 김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다 라는 진실이 밝혀졌지만 파탄된 한 가정이 원상회복 되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다. 국가권력이 동원된 반인륜적 범죄가 이토록 가혹하다니.
죄 짓고는 못 살고 때는 때대로 간다.
사족 같은 말이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윤태식. 이 아저씨 맘은 어땠을까? 가끔 자기 손으로 목 졸라 죽여 침대 밑에 넣어둬 20여일씩 썩게 만든, 한때 자기 마눌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얼마나 떠올렸을까? 그리고 수 백억 자산가가 된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어리둥절, 꿈인가 생시인가, 안도했을까? 그리고 공소시효를 50일 앞두고 붙잡힌 자신의 운명을, 머리를 쥐뜯으며 50일만, 50일만 하고 한탄했을까?
이무영, 2000년 롯데호텔 노조 강제진압 사건, 농성 중인 비정규노동자들을 개 잡듯 잡아 시끌시끌했었다. 노동계에서는 당시 경찰청장인 이무영이를 해임시키라고 난리였지만 끄떡없었다. 그리고 2001년 1월 대우차 해고노동자 과잉진압. 부평이 거의 계엄상태에 이르게 한 장본인. 그 때도 민주노총에선 이무영, 이무영 하며 이를 갈았다. 어쨌든 무슨 고래심줄 같은 뒷배경이 있는 지 모르지만... 그런 이무영이가 14년 전의 거짓말을 거짓말로 나두게 했다는 죄로 콩밥을 잠시나마 먹게 될 줄이야.
장세동, 감옥을 제 집 마냥 다니면서도 출소하자마자 곧장 전두환이 집을 찾아 큰절을 올리면서 하는 첫마디 "각하 출장(휴가가 맞나?)다녀왔습니다" 라고 한 도저히 구제불능의...국민의 원성을 사든 말든 똥인지 오줌인지 모르고 그저 상전에게만 잘 보이만 만사 오케이인 사나이. 수지 김 은폐사건으로 검찰에 출두한 그의 모습은 아주 익숙함 그 자체였다. 훗날 역사는 냉혹한 것. 그의 더러운 이름 석자는 앞으로도 꽤 오래 문헌과 글에 오르내리리라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조상 탓에 호의호식할지는(숨겨둔 돈이랑 상전에게 받은 꽤 큰 돈이 있으니까)몰라도 내가 누구 자손이요 하고 소리치며 살지는 못할 것이다.
한편 서울지법은 지난 8월 15일 수지 김씨 여동생 옥자씨 등 유족 10명이 국가와 수지 김씨 살해범 윤태식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42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판결했다. 전해철 변호사 등 수지 김 사건의 민 형사상 소송을 맡고 있는 소송대리 변호인단 5명은 5천만 원 내외의 수임료를 사건 해결을 위해 연대하고 지원해준 인권운동사랑방,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 등에 기부했다.
또한 이해구 전 안기부 1차장과 이학봉 전 2차장 그리고 김씨 살인죄로 복역 중인 남편 윤태식의 부동산에 대해 국가가 손해배상 구상을 위해 제기한 가압류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다.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도 같은 처지이다. 고영구 국정원장은 지난 8월 21일 "억울한 누명으로 인해 유가족이 겪은 고통과 슬픔, 국민의 실망을 생각할 때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관련 글 중 몇 부분을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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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기막힌 것은 수지 김 가족들이다. 간첩 어머니라고 경찰에 불려가 이년, 저년 소리를 들어가며 조사를 받기도 했던 그의 어머니는 이후 화병으로 사망하였으며, 큰언니는 정신병에 걸렸고, 오빠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차에 치여 숨졌다. 여동생 두 명은 간첩 동생이라고 제대로 취직도 못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결혼을 하였으나, 남편과 그의 가족들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다가 결국 이혼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중략)
수지 김의 주검이 발견된 이후에 안기부는 살인 자백을 받고도 남북관계를 고려해 진상발표를 보류하였으며, 진실을 밝히면 죽여버리겠다고 윤태식을 협박하였다. 이들은 윤태식에게 나라를 위해서 침묵하라고 요구하였다. 윤태식이 증언한 것처럼 검찰 역시 사건의 전모를 알고도 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2000년 사건의 의혹이 제기되어 재수사에 들어간 이후 경찰은 또 다시 국정원의 압력을 받아 내사를 중단하였다. (중략)
우리는 관련 분야에 아무런 전문지식이 없는 전과자 윤태식이 벤처를 창업하여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지, 주가조작으로 고발당하고도 무사했는지, 왜 전 장관출신이 패스21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는지, 왜 그의 범죄사실과 엄청난 조작 사건이 15년 동안 거론되지 않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주식이나 현금으로 로비를 한 정치권, 국정권, 정부, 경찰, 언론 관계자들의 면면을 통해서 전모를 추측만 할 따름이다. 특히 25명의 언론종사자들이 이 잔치에 가담한 사실들을 통해서 짐작만 할 따름이다. 언론과 세상사람들은 이 사건을 수지 김 가족의 불행으로 보면서 관심을 `윤태식 게이트' 쪽으로 옮기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공권력의 반인륜 범죄로서 이 사건을 보아야 한다. `안보'를 명분으로 한 공권력의 반인륜 범죄는 사실상 한국전쟁당시 의 양민학살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사회에는 현재 수십만의 수지 김 가족이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