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
정 성 천
이 세상에는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종교마다 다르고 의식 수준, 지적 수준, 사회적 계층 그리고 문화권마다 다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세계관에 따라 삶에서 부딪치는 내면의 경험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살아 온 날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심리적 평안의 측면에서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여러 가지 세계관이 있겠으나 그중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요즈음에는 물질주의 세계관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계관은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현세주의자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그 비중이 더 높은 것 같다. 이는 조선조 500년 동안 내세관이 없는 유교를 생활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온 점과 빠른 경제 발달로 물질적 생활이 갑자기 풍부해진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물질주의 세계관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할 때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신이나 의식도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철학적 세계관이다. 즉, 초월적 존재나 영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소유·재산·성공 같은 물질적 요소를 삶의 중심 가치로 삼는 태도이며 자연과 물리적 법칙만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노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사는 게 뭐 특별한 게 있겠나?, 나 죽으면 만사가 다 끝장인데 살아생전 내 좋은 것들 많이 경험하고 주위 사람들과 잘 지내며 즐겁게 살다가 오라고 하면 미련 없이 훌훌 털고 가는 거지 뭐 별수 있겠어?”
이런 노인들에게서는 ‘로버트 사폴스키(Robert M Sapolsky)’가 말한 “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을까?”에서 언급되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초원에서 즐겁게 풀을 뜯는 얼룩말이 연상된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과연 오라고 할 때 쉽게 훌훌 털고 갈 수 있을까? 육체가 무너져 운행이 부자연스러울 때도 과연 즐거울 수가 있을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또 죽는다는 것을 자기가 인식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최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순간부터 인간에게는 자의식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인간의 온갖 불안과 괴로움이 생겨났음을 신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불안은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내가 없어진다는 이 존재적 불안은 육체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의식의 표면 위로 떠 올라 육체의 부자유스러움에 비례하여 점점 더 불안이 증폭되고 끝내는 평온하게‘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 벌렁 나자빠지는 ‘당하는 죽음’을 겪게 된다고 한다.
물질주의에 반대되는 세계관이 인간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는 영성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과 인간 존재를 단순히 물질적·육체적 차원에서만 이해하지 않고, 초월적·내적 차원인 ‘영적 실재’를 중시하는 세계관이다. 즉,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영적 성장, 내적 성찰, 초월적 관계에서 찾는다. 영성주의로 영적 실재를 찾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집단신앙을 중시하는 믿음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영성의 길인 앎의 길이다.
믿음의 길은 신과 나를 구분하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돈독한 신앙으로 신에 의한 인간구원을 목표로 하고 앎의 길은 일원론에 근거하여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신성을 알아가고 끝내는 신과 일체가 되는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 믿음의 종교인 기독교(가톨릭, 개신교)에도 초기부터 하나님과 일체를 주장하는 일원론적 경향인 앎의 흐름은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을 바탕으로 강력한 전교를 해야 하는 단체적인 목적에 반하는 개인 영성주의, 신비주의는 탄압의 대상이 되고 수면 밑으로 숨어들어 비밀리에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1873년 스리랑카의 한 마을인 ‘파나두라’에서 불교와 기독교 간의 교리적 대논쟁이 벌어졌다. 영국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을 가지고 실시한 이 논쟁에서 뜻밖의 결과가 벌어졌다. 불교 측의 ‘구바난다’스님과 기독교 측의 ‘실바’목사와 ‘시리만나’전도사가 나흘에 걸쳐 질문과 답변으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기독교 측이 던진 “영혼이 없다면 윤리와 도덕은 어떻게 성립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불교의 무아(無我) 교설을 공격하려 했으나 오히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인간 영혼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며,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인 윤회와 업(karma)에 의해 도덕적 책임이 성립한다고 반박한 ‘구바난다’ 스님의 논리적 답변으로 되레 기독교 측의 단점이 되었고, 그리고 불교 측 구바난다 스님이 제기한 “만약 신이 자애롭고 전능하다면, 왜 선한 인간을 불행과 고통 속에 두는가?” 또 다른 질문 “영혼이 단 한 번만 존재한다면, 선과 악의 행위는 어떻게 공정하게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는 기독교 측은 부실한 답변이나 침묵하여 제대로 된 반론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논쟁 기록은 영어로 번역되어 서구에 소개되었고, 기독교의 강압적인 선교에 맞서 불교가 교리적인 측면에서 우세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과학적 사고와 합리주의가 확산하던 19세기 서구 사회의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미개한 종교”가 아닌“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인간사회에 더 합리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바람으로 서유럽과 미국에 불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논쟁에서 주된 쟁점 중의 하나인 환생 교리는 초기 기독교인 가톨릭교회의 일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도 영혼의 환생이나 윤회적 보편 구원론을 주장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환생이나 윤회적 보편 구원론 사상이 정경의 기본 교리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위와 황제의 신격화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공식적인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교리에서는 단 한 번의 삶과 죽음, 그리고 최종 심판 즉 종말론적 심판론만을 정식 교리로 인정하게 되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한창 떠오르고 있는 죽음학은 서양철학의 원조인 헬레니즘의 신 플라톤 철학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19세기 후반 유물론에 반기를 들고 시작된 신지학에서 주장하는 사후세계와 환생의 교리, 기독교적인 개별영혼론 그리고 불교에서 주장하는 까르마(업)의 법칙을 주된 원리로 내세우며 사회 전반에 걸쳐 죽음에 대한 의식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죽음학은 서양 선진국에서는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연구해 온 학문으로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로 인근의 일본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의 국가(유물론적인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은 제외)들보다도 현저히 뒤처져있으며 그에 따른 말기 환자의 돌봄 문제와 존엄사 문제 그리고 자살 문제에서 그 후진성을 나타내고 있다. 고 판단된다.
2005년도에 창립된 한국 죽음학회(회장: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옥스포드 휴먼즈 코리아 공동 주관으로 2025년 4월 19일에 서울 선언이 발표됐다.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종 환자와 근사 체험자들의 보고를 통해 뇌 활동이 멈춘 뒤에도 의식은 존속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호스피스 현장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를 단순히 ‘죽음으로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인도되는 존재’로의 이해를 촉구하며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죽음에 대해 열린 태도로 바라봄을 권장했으며 죽음에 대하여 성인과 충분히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죽으면 끝’이라는 잘못된 죽음 관을 버릴 때 개인의 삶과 인류 문명이 혁명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사회적인 메시지도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인 정현채 교수의 죽음학 강의는 2007년에 시작해 현재 19년째, 700회 이상 진행되고 있으며, 단순한 학문 강의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하는 대중적 교육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삶의 완성으로 바라보게 하는 교육이며, 청소년부터 사회 지도층까지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죽음과 삶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현채 교수는 말한다. “죽으면 나비(영혼)가 고치(몸)를 벗고 훌훌 날아가듯 자기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은 없고 각자 자기 영적 수준, 파동(진동) 수에 맞는 영혼들끼리 유유상종하며 사는 것이죠.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끼리 천국을 만들며, 욕심 많은 사람은 또 그런 사람끼리 지옥을 만들며….”
우리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때도 낯선 땅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고 여행을 떠나는데 하물며 죽음 후의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말해서 무엇하랴.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일은 막상 죽음에 임했을 때 그 마음가짐도 달라질 것이며, 설사 사후세계가 없어 죽음이 벽이라 해도 그리 손해 볼 것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혹시라도 죽음이 문이라서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정보에 깜깜한 채 가장 낯선 세계에 내동댕이친다고 생각될 때를 가정해서라도, 특히 우리와 같은 망 팔십의 노인들은 죽음학을 시름시름 공부해봐야 하지 않을까?
첫댓글 신지학, 신적 지혜를 터득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보다 심오한 존재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인 바, 사후 세계를 공부하는 것 역시 불교의 업(까르마)을 가져와 대비해서 최준식 교수가 이야기를 펼치지만, 들어도 늘 언저리에서 듣고만 말고 있다네. .
계속 관심을 갖고 들어보시게 "원인은 감추어진 결과이고 결과는 드러난 원인이다." 이세상 모든 현상은 그 원인이 있다. '나'라는 이 인간은 어떤 원인으로 생겨났고 어떤 법칙으로 이 세상이 돌아가며 그 궁극적인 실제(Ultimately Reality)가 궁금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