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어(相思魚)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출항 전 자정이 넘으면 바다 상황이 좋지 않을 거란 예보가 있었음에도 무리수를 두었다. 예전 경험으로 태풍이나 풍랑주의보가 내리기 전에는 항상 대박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례 없는 흉년으로 한 번도 제대로 잡은 적이 없어 더 안달이 났던 것 같다.
오늘도 씨알 좋은 게 많이 잡히긴 하나 가장 힘든 선수에 앉았다. 예상과는 달리 초저녁부터 자정이 다가오도록 달랑 한 마리밖에 못 잡았다. 처량한 마음으로 혼자 누워있는 갈치를 들여다보니 투명한 큰 눈 속에 내 얼굴이 비친다. 저 혼자 잡힌 게 억울하고 외롭다며 하소연하는 것 같다. 낚시에 이골이 난 친구도 견디지 못하고 선실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정말 안 잡힌다. 줄이 내려가기 무섭게 낚싯대가 덜덜덜 떨린다. 고등어다. 도끼질같이 거푸 내리찍는 건 삼치다. 계속되는 잡어 입질에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설상가상으로 조류는 얼마나 빠르게 흐르는지 두 번에 한번은 옆 사람과 채비가 걸린다. 반복되는 줄 싸움에 평정심은 흐트러진다. 추를 내릴 때 일정 수심을 정해 전동릴을 정지하라고 일러줘도 계속 바닥을 찍는 모양이다. 여지없이 또 줄이 엉킨다. 은근히 짜증이 난다. 나이 일흔은 훨씬 넘어 보여 뭐라고 말은 못 하고 괜히 애꿎은 생수만 들이킨다. 낚싯대를 툭툭 쳐보고 줄도 잡아당겼다 놓아본다.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초보라서 죄송하다며 사과를 한다. 두유 한 팩을 권하며 처음엔 다 그렇다고 다독여주었다.
재작년의 호황이 떠오른다. 하룻밤에 백화점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갈치를 백여 마리나 잡았다. 가기만 하면 잡지 못한 날이 없었다. 온 바다가 물 반 갈치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러닝셔츠 쪼가리를 바늘에 달아도 물고 올라오더라는 농담까지 생겼다. 이러다 갈치 씨가 마르는 거 아닌지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한 계절만 나오던 게 일 년 내내 잡혔다. 다녀오면 한 주일동안 먹을 만큼만 손질해 냉장고에 넣어둔다. 남은 건 출석하는 교회주변의 독거노인과 아파트 경비원을 비롯해 청소원 아주머니와 아파트 담벼락에 옹기종기 볕을 쬐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골고루 나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올해는 벌써 열두 번째다. 다 해도 작년의 한번보다 못하다. 제대로 먹을 만한 걸 잡은 기억이 없다. 들고 오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풀치가 대부분이라 풀 베러 다녀오겠다는 게 인사가 되었다. 좋아하는 아내에게 구워줄 만한 큰놈을 잡지 못해 비용 타내기도 난감하다. 드디어 염려하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열두 번 타간 돈으로 제주수협에 주문하면 한 트럭은 사겠다.”는 잔소리를 들었다. 이때는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것쯤은 기본으로 알고 있다. 그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몇 마디 할 뿐이다.
“그런 건 유통과정을 믿을 수 없고 냉동과 해동을 반복해서 맛도 없을 걸”
한마디 하다가 핑계 좋다는 소리만 들었다. 벌써 기죽고 나왔는데 무슨 낚시가 되랴. 한 번이라도 대박을 터트려 어깨 펴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취미생활로 얻는 수입에 경제 논리를 대입하면 답이 없다는 걸 알지만 본전 생각이 절로 난다.
갈치의 경계심을 돋우던 보름달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옷이 축축하게 느껴질 만큼 습한 기운이 감돈다. 이젠 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에 굳은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다 넣어둔 채비를 걷어 올린다. 퉁퉁 불은 미끼가 그대로 올라온다. 다시 꽁치 살을 큼지막하게 썰어 열 개의 바늘에 먹음직스럽도록 꿰어 던진다. 흔들리는 뱃전에서 동상처럼 서서 고기가 바늘을 물고 당겨주길 기다린다. 잡히겠지. 눈부신 은비늘로 감싼 몸을 세차게 흔들며 올라오겠지. 내 몸 어디에 이런 끈기가 있었을까 싶다. 무디어져 가는 세포가 살아나는 듯하다. 곧 열 개의 바늘에 갈치가 주렁주렁 달려 올 것 같은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갑자기 눈앞에 밝은 빛이 번쩍였다. 뭐지? 하는 순간 하늘을 쪼개듯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찌릿찌릿해진 것도 잠시 장대비까지 쏟아진다. 덩달아 바다도 하얀 갈기를 세우기 시작하고 바람과 너울에 서 있기조차 힘이 든다. 벌써 사방에서 임산부 입덧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시큼한 냄새는 파편이 되어 바다가 흔들어대던 몸을 냄새가 뒤집어 놓는다. 스멀거리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저녁으로 먹은 김밥의 밥풀 하나 남김없이 다 밑밥으로 뿌렸다. 더 나올 게 없자 이제 바다는 인신 공양이라도 바라는지 연신 파도가 선수를 넘어온다.
눈으로 흘러드는 빗물을 손등으로 훔쳐낸다. 젖은 손에서 꽁치비린내가 풍겨온다. 시인 이해인은‘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 멀미가 난다’라고 하지만, 나는 갈치를 너무 많이 잡다 보니 은빛 자태에 취해 멀미가 나고, 그렇게 잡히던 갈치가 안 잡혀 애를 태우니 보고 싶어 멀미가 나는 것도 모자라 상사병에 걸릴 지경이다. 고기만 올라오면 멀미는 절로 극복될 거라고 자기최면을 걸어가며 악착같이 버티기로 마음을 먹었다.
곧 나를 덮칠 듯이 몰려오던 너울은 내 앞에 이르러서야 배 밑을 파고든다. 사람들은 엎어지고 구르는가 하면 아예 선실로 들어가 버린 사람도 있다. 배도 쿵쿵거리며 덩달아 비명을 지른다. 넘어온 파도를 뒤집어쓴 데다 비까지 맞아 속옷까지 젖은 몰골이 서글퍼졌다. 뜻밖에 살아온 지난날이 되짚어진다. 오늘은 돌아가서 무슨 핑계를 댈지 잠시 고민한다. 이제 사먹고 말지, 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하지만, 이 다짐은 항상 이틀을 넘기지 못하는 게 흠이다.
이제 갈치는 내 연인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든다. 만나러 가면 잘 만나 주지도 않고 만나지 못하면 보고 싶다. 집어등 불빛에 얼굴이 타는 만큼 내 마음도 탄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내게 갈치는 사 먹는 생선이 아니다. 가을 한 철 잡아 일 년을 먹는다. 그 맛은 달리 비교할 대상이 없어 잡으러 다닐 수밖에 없다.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성의를 봐서라도 이제 얼굴을 보여줄 때가 되었건만 왜 이리 애를 태우는 걸까. 해마다 풍년들기는 어려울 테지. 수많은 갈치를 잡아먹고 나눈 죄에 대한 벌로 한참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 낚시를 못 하게 하라는 계시는 아닐까? 안 잡힐 때는 뭘 해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얼마 전, 중국 어선들이 월동하러 간 갈치의 치어까지 모조리 코 작은 그물로 잡는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 바람에 낚시로 잡는 제주어선들의 수확량이 현저히 줄었다는 소식이었다. 또 한 가지는 일본이 처리과정을 거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로 내보낸다는 것이다. 유엔이나 우리 정부에서 잘 대비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염려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남해는 갈치들이 산란하러 올라오는 곳이다. 동물들은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는 기상이변이나 재해를 먼저 알고 피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위험을 감지하고는 알 낳을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긴 건 아닐까?
비단 중국이나 일본만 탓할 일이 아니다. 우리 낚시꾼들도 놓아줘야 할 작은 고기까지 얼마나 많이 잡았던가. 청정해역이던 우리 바다를 오염시키는 데 낚시꾼이 한몫을 한 것 또한 부인할 수가 없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바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야겠다는 다짐을 바다에 그려 넣는다.
내게는 상사어(相思魚)가 되어 버린 갈치, 올해는 부디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나저나 그 많던 갈치가 다 어디로 갔을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 제주 갈치 구경하나요?
올해는 좀 잡혀줄지 모르겠습니다. ^^
언제 낚으실지 기대하며 읽었습니다. 갈치는 이제 멀어지는 건가요?
아마도 올해는? ..... 매번 갈 때마다 타작을 꿈꾸며 기대하고 가는 게 일상입니다. ^^
아주 오래 전 제주 선상에서 바다 낚시를 체험했습니다.
묵직한 느낌이 든 낚시를 들어올릴 때 그 짜릿함이란...^^
제 낚시는 그날 그 한 마리가 다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