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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졸저(拙著)인 월간지 <학전통신> 2020년 6~7월호에 연재했던 내용을 일부 윤뮨한 글입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페렌바크의 6.25 전쟁사 명저인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의 독서 후기를 이번 주부터 3주에 걸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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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전 북리뷰(Book Review)
THIS KIND OF WAR/ 『이런 전쟁』 (1)
T.R.Fehrenbach 지음/ 최필영외 옮김/ 플레닛미디어, 2020.
전쟁의 달 6월, 6,25 전쟁이 다시 우리 앞에 왔다. 당시 전선을 누볐던 젊은 청춘들은 이미 9순을 훌쩍 넘겼고 전쟁동이는 7순 노인이 되었지만 전쟁의 끈질긴 악연(惡緣)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다. 피난민의 울부짖음과 뜨거운 젊은 피가 산하(山河)를 물들인지도 어느덧 70년, 그동안 한반도의 남쪽은 총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었고 북쪽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핵병기의 칼을 갈았다. 그래서 6,25전쟁은 그만큼의 자유와 풍요를 남(南)에게 또 그만큼의 굶주림과 눈물과 한숨을 북(北)에게 되돌려주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전쟁사의 교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아니 남북이 모두 그 전쟁의 기억 안에서 끝없이 자유의 가치를 찾아내야 할 이유라 해야겠다.
6,25전쟁은 한국인만의 전쟁이 아닌 국제전이었다. 16개국 참전 유엔군 가운데 단연 미군의 규모와 희생이 가장 컸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54,240명의 꽃다운 아메리카의 청춘들이 산 설고 물 설은 낯선 땅, 어느 산골짜기, 개울가, 논두렁, 마을의 한 모퉁이에서 쓰러져 간 사실을......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나 본적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단 한 번도 들어 본적 없는 나라를 위하여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덧없이 흘러간 무정한 세월, 그들은 오늘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기념비 아래에 잠들어 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의 달 6월만이라도 그들의 '한국전쟁(Korean War)'을 기억하고 역사의 빚을 갚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이 한권의 책을 차분하게 읽어야 한다. 이것은 전쟁 없는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할 우리 시대의 소박한 다짐이자 소명이다.
‘평화를 원하는 자는 전쟁에 대비하라.’ 베게티우스(vegetius) 『군사학 논고』의 명언으로 첫 장을 여는 『이런 전쟁』은 6,25전쟁 당시 야전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던 퇴역미군장교가 펼쳐내는 흔치 않은 전쟁이야기다. 지은이 페렌바크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은 작은 충돌이자 계획에 없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접전에서 세계 최대의 양대 세력이 충돌하여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인류가 걸어 온 길옆으로 난 골짜기가 얼마나 깊은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한국전쟁은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전쟁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을 역사서라기보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 사이, 피로 물들었던 한반도 전역에서 소부대를 이끈 군인들의 행동에 바탕을 둔 ‘소대장들의 기록’이라고 정의했다.
지은이 페렌바크(1925~2013)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역사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모두 참전했고 평생 18권의 역사서를 썼다. 특히 그의 고향인 텍사스의 역사서 Lone Star; A History of Texas and that Texans 으로 그는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이후 텍사스 역사위원회를 이끌었으며 그 공로로 ‘페렌바크 출판상’이 제정되었다. This Kind of War 는 1963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후 미국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지휘참모대학의 필독서로 지정되었다. 이 책은 ‘미국판 징비록(懲毖錄)’으로 일컬어져 육군참모총장 전문도서목록 역사분야 필독서와 군사교육과정을 거치는 모든 장교들의 필독서로 지정되었고 한국에 부임하는 외교관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읽히는 책이 되었다.
故메케인(J.McCain) 미상원의원은 2007년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 책을 일컬어 ‘한국전쟁을 다룬 최고의 책’으로 평가한 바 있다. 또 2017년에는 당시 메티스(J.N.Mattis) 미국방장관이 육군협회행사에서 ‘한반도에서 분쟁가능성을 낮추려면 미군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제가 페렌바크의 책을 권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책을 꺼내 다시 한 번 읽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번역자는 이 책의 가치를 이렇게 정리했다. ‘이 책은 치열한 전장에서 생사를 가르는 군인들의 용기, 나약함, 암울한 시련, 영웅적 희생, 때로는 이등병부터 장군까지 군인 개개인의 비극적인 실수를 깨알 같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백악관과 미국의회는 물론 유엔과 공산권까지 짚어가며 6,25전쟁에서 벌어진 외교의 굴곡과 전쟁의 전략적인 전환을 섬세하게 조명하고 분석한 문단을 읽다보면 미국이 생각했던 전략목표와 전술적 현실이 한반도 전역(戰役)의 작전적 차원에서 부조화 했다는 불편한 현실과 마주한다.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의 근대사회와 역사의 특수성을 배경으로 대한민국과 한국군의 모습을 제 3자의 눈으로 객관적이고 노골적으로 짚어 낸 것 또한 이 책이 가진 장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6,25전쟁이 끝나고 10년 뒤에 차분하게 전쟁을 뒤돌아보며 다각도에서 예리하게 내렸던 평가가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오늘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을 이해하고 도전에 대응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늘 책에 묻혀 사는 나에게도 800쪽이 넘는 방대한 이 책의 두께 앞에서는 기가 질린다. 지금 같은 내 독서 속도라면 족히 사나흘은 꼬박 매달려야 정독이 가능할 것 같다. 글을 쓰고 번역하고 책을 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이 정도의 분량이면 초인적 집념을 쏟아붓지 않고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노작(勞作)이라는 것을.......지은이와 옮긴이에게 먼저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엄청난 분량의 증언과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집필되었지만 지은이는 단 한 줄의 각주나 참고문헌을 밝히지 않은 아주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진술의 근거가 궁금하지 않았다.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현장의 상황을 그려내 준 덕분이다. 사실 이 책의 비교적 소략한 1부 개전(Beginning)과 방대한 2부 전투(Battle)는 전쟁사 독자에게는 나름 익숙한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부 실책(Blundering)은 무게감이 달랐다. 전쟁사의 교훈은 그 자체가 전몰장병들이 흘린 젊은 피 값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지의 지면 관계상 당월 호와 차월 호에 걸쳐 이 책의 인상적 부분들을 요약 정리해 보기로 한다.
* 제 1부; 개전------6,25 전쟁 직전 남북한의 상황은 대조적이었다. 1950년 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 소 고위급 회담에서 남침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소련은 T-34 전차를 포함한 엄청난 무기와 군수물자를 중국은 8만의 의용군 병력을 북한으로 들이밀었다. 38선 전역에는 122미리 곡사포와 76미리 자주포, 150여대 전차와 200여대 야크전투기, 7개 사단, 1개 기갑연대 등등의 병력이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군 야전사령관 최용건과 그의 휘하 지휘관들은 만주사변 때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다. 그리고 저들에게는 ‘조국통일’이라는 응집력이 살아있었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 군대는 불안했다. 전군을 지휘하는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키 169센티미터에 몸무게 100킬로그램의 술고래 뚱보장군이었다. 병사들은 체력과 용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군은 유능한 지휘관과 참모를 제대로 양성하지 못했다. 이미 수백 명의 북한 첩보원들이 남한 도처에 깔려 있었고 좌익들은 전국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산악은 사실상 남부군 게릴라들의 해방구였다. 그러다 보니 채병덕이 지휘하는 병력의 1/3이상은 국방이 아닌 치안에 매달려야 했다. 육군 8개 사단이 미제 M1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일제 99식 소총은 그대로였고 포병은 미국이 폐기한 구식 M-3 105미리 곡사포였다. 그게 전부였다. 전차도 없었고 중구경 야포도 없었고 박격포나 무반동총도 없었으며 수송자산은 부품도 없었고 전투기는 단 한 대도 없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밤새 내리던 장맛비가 부슬비로 바뀌던 그 시간 38선 전역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청색 전투복에 가죽장화를 신은 군관들의 지휘에 따라 겨자색 면 전투복의 하전사들이 곡사포의 위장막을 벗기자 포신은 불을 뿜었다. 수백 대 전차들이 캐터필러에서 진흙을 튀기며 질주하자 황갈색 상의를 입은 키 작은 남자들이 총을 들고 남쪽으로 쏟아져 나갔다. 오랜 시간 최전방 전투태세를 총괄하던 인민군 2군단 작전참모 30세 이학구 총좌가 빛나는 눈동자로 만세를 불렀고 참모들도 만세를 불렀다. 인정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한반도에 전쟁의 불길이 치솟은 것이다.
38선 서쪽에서 시작된 공격이 1시간 이상 순차적으로 동해안까지 번져 나갔다. 서울함락을 겨냥한 주 공격로는 ‘의정부 회랑’, 주말 외출로 졸고 있던 한국군 전방부대로 돌진해 오는 전차들은 난생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유재흥 장군의 7사단이 치른 육탄전, 김종오 장군이 치른 6사단의 춘천방어전이 적의 진격을 잠시 묶었을 뿐 개전 직후의 한국군은 패배가 아니라 거의 궤멸 수준이었다. 쌀가마니 정도나 빼앗으러 온 줄로만 알았던 북의 공격이 그게 아님을 깨달은 미 군사고문단도 무초대사도 한국군 지휘부도 허둥대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수원으로 빠져나오고 주한 미국인과 군속 가족을 서둘러 인천항에서 노르웨이 비료 수송선에 태워 일본으로 실어 나른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나머지 미국인들을 태운 수송기가 수원 비행장에서 일본을 향해 이륙할 무렵 서울은 탈출 러시로 가득했다. 그냥 버리고 나온 미국 소유 차량 1,500대와 7만5천 리터 이상의 연료, 미화 10만 달러치의 식료품과 4만 달러치의 주류는 사실상 별게 아니었다. 끔찍한 실수는 그냥 남겨진 5,000명이 넘는 대사관 소속 한국인 직원의 인사 기록부, 그것은 저승사자에게 넘긴 살생부였다. 이미 쥐구멍에서 튀어나와 죽창을 꼬나들고 좌익들의 눈에는 이미 핏발이 서 있었다. 성급한 한강인도교 폭파로 1,000여 명이 폭사한 것은 이에 비하면 약과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미국 트루만 행정부의 행보였다. 저들은 철저하게 유엔이란 망토 안에서 주판알을 튕겼다. 가능하다면 해군, 공군만 투입하는 제한적 범위의 전투로 전쟁의 불을 끄고 싶었다. 이미 그들에게 공산주의 세력은 봉쇄하는 것이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계를 구하는 전쟁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을 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 육군은 군복을 입었지만 마음은 민간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전쟁 트라우마가 미국인의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긴 결과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전쟁의 신’, 맥아더 원수는 달랐다. ‘현 전선을 유지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미 지상군을 한국전에 투입하는 방안뿐이다. 효과적인 지상군 없이 해군, 공군만으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 워싱턴에 보낸 이 같은 맥아더의 전문에는 ‘시간이 없다. 지체없이 결정해 달라.’라는 절박한 요구로 끝을 맺었다.
* 제 2부; 전투-----미 지상군의 참전은 7월 5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전투로 막을 올렸다. 하지만 수원~오산 간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적의 전차와 맞섰던 첫 전투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이 부대의 거의 모든 병사는 한국행 수송기를 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구두닦이 소년 뿐만 아니라 애인이나 첩을 두고 살았다. 군인의 운명은 고통스럽고 필요하면 죽는 것임을 배우지도 않았다. 결국 인민군이 누구와 싸우는지 알면 곧바로 도망칠 거라는 스미스 부대의 오만은 오히려 그들을 도망치게 했다. 단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승자가 좋아할 만한 것만 남겨둔 채 무너진 것이다.
이후 미 육군은 전 세계 각지에 진공청소기를 켠 듯 병력을 빨아들여 부산에다 토해 냈지만 여전히 미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기강은 약했다. 무엇보다 개전 이후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선이 굳어지고 피아간 공방이 장기화되던 1950년 8월 4일까지 미군들은 여전히 전쟁 상황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1950년의 지독한 장맛비와 40도에 이르는 살인적 무더위와의 싸움에서 이미 탈진해버렸다. 병사들은 셔츠와 벨트가 부식될 만큼 땀을 흘렸고 배는 상어 배처럼 하얗게 되고 보니 식염은 탄약과 더불어 항공 투하의 필수품이 되었다. 게다가 낮은 곳도 경사 60도가 대부분인 한국의 산등성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렸고 헐벗은 한국의 산야는 오븐 속에 들어간 접시 같았다. 인분이 뿌려진 갈색의 논물 외는 마실 물도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의 총탄보다 탈진과 열사병과 이질로 더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다 보니 인분 냄새 가득한 들판 진흙 길이 걷기 힘들어 전투화를 벗어던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걷잡을 수 없는 후퇴 과정에서 도로가 차단되면 고지를 넘어 안전지대로 거의 이동할 수 없었기에 중화기, 탄약상자, 중장비는 그대로 버리고 가야 했다. 이 때문에 미 육군은 소련 다음으로 인민군에게 실탄과 총을 가장 많이 제공한 군대가 되었다. 게다가 기동과 보급으로 승패가 갈라지는 전쟁터에서 한국의 열악한 도로와 온통 산지로 이루어진 한국의 지형에서 미군의 차량은 인민군의 두 발과 등짝을 도대체 이길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와서 싸워야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 듣지 못한 그들에게 한국 땅은 피 값을 수업료로 내면서 전쟁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던 세상에서 가장 힘든 학교였다.
그러나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온 미군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동해와 남해 바다가 지척에서 둘러싼 한반도의 조그마한 구석자리 뿐이었다. 마침내 미8군을 지휘하는 월튼.H.워커 장군은 ‘우리가 부산으로 밀리면 역사상 가장 큰 살육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미 그 무렵 대전에서는 인민군들이 우익 인사들을 샅샅이 찾아내 100명 단위로 손을 묶고 끌고 가 집단 매장지에서 7,000여 명을 처형하고 있을 때였다. 1950년 7월 16일자 <뉴욕 타임즈>는 한국전쟁을 일컬어 ‘소수의 죽음으로 수백만 명의 학살을 막는 것이라는 희망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라는 멋진 사설을 게재했다. 그리고 1950년 9월 1일 미 35보병 연대장 헨리.G.피셔 대령은 ‘나는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셔 대령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마침내 미군은 왜 싸워야 하는지 과장 없이 말하자면 왜 이 땅을 지켜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 미군에게 한국의 무더위와 지형은 더 이상의 적이 아니었다. 총알만 있으면 하루 주먹밥 한 덩이만 먹고도 며칠 밤을 싸울 수 있는 키 작고 다부진 노란 얼굴의 인민군이 적이었다.
1950년 8월 4일에 이르러 미군의 전사자는 6,000여 명, 한국군의 전사, 부상, 실종자는 7만여 명, 인민군은 6만여 명에 이르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대치한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병력은 총 14만 1,800명이었고 인민군은 절반이 줄어든 11개 사단 7만여 명이었다. 유엔군 전차 550대에 비해 인민군 전차는 고작 40여 대에 불과했다. 개전 6주가 지나는 동안 유엔군은 영토를 내주면서 시간을 벌었지만 인민군은 전선이 늘어난 만큼의 패색만 더욱 짙어졌을 뿐이다. 비록 남진(南進)은 계속되었지만 전투력은 고갈되고 있었고 병참선은 길어졌다. 부족한 병력을 남한 현지에서 충원했지만 틈만 나면 도망치는 그들을 붙잡을 방법은 총살뿐이었다. 게다가 제공권과 제해권은 유엔군의 손에 있었다. 당시 미국은 극동에서 야포보다 항공기가 더 많았다. 미군 조종사들은 동이 트기 전 일본에서 날아올라 종일토록 한국의 불타는 고지에 폭탄을 쏟아붓고 돌아가 밤에는 아내와 카드놀이를 했다. 물론 개활지로 나온 인민군은 공중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보급망은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그들이 살아남을 길은 위장과 야간 이동뿐이었다.
* 1950년 인민군에 의한 대전의 양민학살현장
낙동강 방어선 공방전은 육군보다 전장에서 죽을 준비가 잘되어있는 미 해병대가 참전하면서 국면을 전환시켜 나갔다. 미 해병대는 격전의 불길을 잡는 전선의 소방대로서 인민군 전쟁영웅 리권무의 정예 4사단을 격멸시키며 최대격전지였던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까지 8월 하순부터 9월 중순까지 이 지역은 6,25 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동부에는 한국군 사단이 대구 직전까지 56킬로미터에 이르는 중부방어선을, 낙동강 돌출부는 미 기병 1사단, 미 2사단이 혈투를 벌였다. 어쨌든 얻어맞고 피 흘리면서 어렵게 전쟁의 교훈을 배운 미군 병력들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군인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것은 6,25전쟁 개전 초기 인민군의 포로에 대한 잔혹 행위였다. 미 기병 1사단이 역습으로 되찾은 왜관 인근 303고지에서는 미군 중화기중대 박격포 사수 26명의 처참한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 중에는 처형당하기 전 불에 탄 후 거세 당한 경우도 있었고 혀가 뽑혀 있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는 가시철조망으로 머리와 입까지 묶여있었다. 314고지에서는 손발이 묶인 채 새카맣게 타죽은 미군 장교의 시신 옆에 20리터짜리 빈 석유통이 있었다. 이를 본 미군들은 서서히 무관심 대신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마침내 맥아더 원수는 여러 차례 인민군의 포로 잔혹행위를 비난하는 방송을 내보냈으며 미 공군은 인민군 지도부에게 보내는 경고 전단을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사실 인민군 전선사령부와 총참모부도 전쟁포로에 대한 불필요한 학살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지만 극한 상황에서의 보복심리를 막지는 못했다.
남북전쟁 이래 미국은 지상전의 장기화를 혐오해 왔다. 그래서 이후 해군, 공군에 무게를 두고 지상군을 대규모로 보유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만들어 낸 92개 사단은 독일군의 400개 사단과 어마어마한 소련의 야전군 전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90만 명, 프랑스가 100만 명을 잃었지만 미국은 5만 명의 희생에 그쳤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은 군인, 민간 합쳐 2,000만 명이 죽었고 1940년 6주 동안 프랑스는 50만 명이 죽었지만 이는 전쟁 내내 발생한 미군 전사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후 미군이 그들의 전략적 특성을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절정에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다.
* 1950년 전쟁 당시 사실상 전쟁을 총지휘했던 두 사람,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오른쪽), 미 8군사령관 월튼 워커중장(왼쪽)
요컨대 인천상륙작전은 해군, 공군이 우세한 미국의 힘을 최대한 사용하면서 미국의 약점을 최소화하는 맥아더 원수의 탁월한 전략이었다. 이른바 ‘블루허츠(Bluehearts) 계획’ 중 '100-B'라는 이름의 작전이 채택되었다. 상륙군으로 창설된 미 10군단과 1해병사단이 인천항으로 상륙함과 동시에 미 8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해 북진한다는 내용이었다. ‘망치와 모루’의 개념, 10군단이 모루가 되고 8군이 망치가 되어 한강 이남의 인민군을 궤멸시킨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인천상륙작전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간만의 차이가 큰 인천은 그 자체가 노르망디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험지 중의 험지였다.
비록 그럴지라도 서울이라는 한반도의 중추신경망을 장악할 급소 중의 급소는 역시 인천뿐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다만 9월 중순, 해가 떠 있는 2시간 안에 미 해병대가 인천을 둘러싼 4,8미터의 방조제를 넘을 수 있는가의 문제만 남았다. 요컨대 인천상륙작전은 미군 최고의 군사능력의 구현이었다. 당시는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이 정도의 전투력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구성해 낼 수단과 지식이 없었다. 아니 맥아더의 이 같은 작전을 시도할 엄두를 낼 나라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어쨌든 1950년 9월의 맥아더에게는 인천을 뚫고 들어가야 할 이유가 차고도 넘쳤다.
맥아더 원수의 예상대로 7만의 10군단을 바다에 띄어 놓고도 용감한 미 해병 1사단은 9월 15일, 작전 개시 정확하게 1시간 25분 만에 해안교두보를 구축했다. 그리고 9월 28일, 치열한 서울 시가전을 거쳐 서울수복을 마무리하기까지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위대한 역전극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맥아더 원수는 서울 수복 후 미군 고위지휘관과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중앙청 중앙홀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대통령 각하, 자비로운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 군대는 유엔이라는 가장 위대한 희망과 인류 영감의 깃발 아래에서 싸워 한국의 오랜 수도인 서울을 해방하였습니다. 저는 유엔군 사령부를 대표하여 각하의 정부가 있는 이곳을 돌려드려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각하는 헌법이 각하께 부여한 책임들을 보다 잘 이행하시리라 기대합니다.’
맥아더가 주기도문을 외우며 연설을 마치자 모여 있는 이들이 이를 따랐고 전쟁으로 부서진 지붕에서 유리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노대통령 이승만이 일어나 연단에 섰지만 한동안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 두 손을 뻗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가락 끝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승만이 감정적 부담을 느낄 때마다 나타내는 버릇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젊은 날 일본 관헌들이 이승만의 손톱 아래에 기름종이를 끼워 넣은 후 하나하나 손가락을 망치로 내리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어쨌든 서울 수복으로 한국전쟁의 모루는 준비가 끝났다. 이제 망치로 내려칠 일만 남았다. 낙동강 전선의 총성이 서서히 북상하고 있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병력은 7만 정도, 그 70%는 신참 징집병이었다. 이에 비해 유엔군은 15만 병력, 그중 6만은 중무장한 미군전투 병력이었고 화력은 인민군에 비해 5배가 넘었다. 게다가 인민군은 전쟁 내내 군수(軍需)문제라는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 댄 결과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유엔군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이미 미군 전사자가 2만 명을 넘었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한국군의 수준도 인민군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또 지금까지 수세 위주의 전투만 하다가 갑자기 공세로 돌아서야 하는 전략상의 부담도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중순을 고비로 인민군은 마치 한 번에 늘어난 고무줄처럼 갑자기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 8군의 진격을 막을 더 이상의 걸림돌은 없게 되었다.
후퇴를 시작한 인민군은 산산이 흩어져 도주하면서 도처에서 학살극의 흔적을 남겼다. 패전을 앞두고 적들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하면서 정예 인민군 전방 사단들은 사실상 분해되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전쟁을 통틀어 최상위계급 포로가 된 리학구 총좌가 자진 항복했다. 또 지금의 북한실력자 최룡해의 아버지인 당시 인민군 2사단장 최현은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유엔군은 적들이 후퇴하는 것보다 더 빨리 진격했다. 목표는 한강 남쪽 제방, 이렇게 미 8군은 망치를 내리쳤고 망치는 모루를 때렸으며 그 사이에는 사실상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미 10군단이 깔아놓은 북쪽의 모루와 남에서 북상하는 미 8군의 망치 사이에 끼여 있던 인민군 2만 5,000명만 틈새를 비집고 북으로 탈출했다. 달콤한 승리였다. 하지만 모루와 망치 사이에는 적의 시체만 즐비한 게 아니었다. 북진 중인 미 24사단 6전차 대대가 허리까지 땅에 묻힌 채 손이 등 뒤로 돌려 묶여지고 끔찍한 고통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담겨있는 한국군 500명과 미군병사 86구 시신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의 일부는 대검에 찔려 죽었고 일부는 맞아 죽었으며 일부는 자비롭게도 총알에 맞아 죽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군의관 하비 펠프스 대위도 있었다.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던 그가 마침내 술병을 받아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 유엔군에게 남은 일은 38선의 돌파였다. 맥아더 원수도 이승만 대통령도 38선에서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맥아더의 자유이자 이승만의 집념이었다. 10월 1일 이승만이 한국군에 북진명령을 내릴 즈음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아마겟돈으로 치닫는 것을 걱정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생각은 달랐다. ‘혹시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할 가능성은 없는가?’ 맥아더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의 없습니다.’ 그때는 만약 중공군이 내려온다면 엄청난 학살을 각오해야 한다는 맥아더의 견해를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누구도 반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공이 만약 유엔의 정당한 군사 활동을 저지한다면 분노와 화염으로 보복한다는 맥아더의 판단은 30만 중공군이 압록강으로 다가서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맥아더의 유엔군이 꿈의 나라에서 잠시 누린 달콤한 승리의 축배는 점차 청천강변 군우리에서 받아 들 지독한 패배의 쓴잔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돌아보면 70년 전 그날 맥아더의 잘못된 용기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이 더 잘못된 결정으로 이어져 6,25전쟁은 결국 미완의 전쟁으로 남고 말았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민족이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역사의 아픔으로 살아있다. 이게 바로 6,25전쟁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안목을 넓혀주는 교과서가 되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라 해야겠다. (1부 끝) * 글/최익제장로(敎博)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