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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이찬*
<차 례>
1. 들어가며
2. 그로테스크의 개념과 의미
3. 김수영 시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그 미학적 의미
4. 김수영 산문의 알레고리 방법론과 마조히즘의 문제
5. 나오며
[국문초록]
이 논문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알레고리 방법론, 마조히즘
의 심리적 태도가 상호 연동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의 맥락을 심구하고, 그 배경을 형성하
는 (탈)현대미학의 핵심 문제들을 상세하게 해명하고자 했다.
이는 그가 현대적 시각체제의구체적인 양상들인 원근법적 시각양식이나 시각적 합리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기괴하고 신비 스런 현상들과 보이지 않는 힘과 감각을 현시하는 자리에서, 김수영 자신의 미학적 자의식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탈)현대미학의 방법론과 그 사유의 첨단을 체득했다는 것을 뜻한다.
김수영의 여러 시편들과 산문 문헌들은 그로테스크 미학이라는 문제틀을 통해 새롭게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를 통해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서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낯선 그
로테스크 이미지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의 맥락과 미학적 연원이 보다 심층적으
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영의 시와 산문이 현대세계의 도덕적 관념과 정치적
이데올로기, 그 미학적 통념이나 지식 체계의 한계와 맹점을 고스란히 현시할 수 있는 미학
적 방법론의 첨단과 전위적 스타일을 선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다 명징하게 드러날 수 있
을 것으로 기대한다.
[주제어] 김수영, 그로테스크, 시각성, 원근법, 알레고리, 마조히즘
*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교양교직부 부교수
544 한국학연구 제42집
1. 들어가며
이 논문의 목적은 김수영 시와 산문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알레
고리 방법론과 마조히즘의 심리적 태도를 심층적으로 탐구하여, 그 배면을
가로지르는 (탈)현대미학의 핵심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다.
이는 현대적 시 각체제가 일상적 차원에서 공고하게 유포시키는 원근법적 시각양식이나 시
각적 합리성으로 포섭되지 않는 기괴하거나 신비스런 현상들, 또는 비가시적
인 힘들의 유전과 변이 현상들을 현시하려는 자리에서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방법론이 움터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현대시를 비롯한 현대예술의 미학적
중심에 그로테스크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의
맥락을 김수영이 매우 명민하게 자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창안된 원근법은 이후 현대적 시각체
제의 중핵으로 기능해왔을 뿐만 아니라, 기하학적 비례의 원리에 입각하여
시각적 공간을 합리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1) 이렇듯 원근법의 일상화는 보는 방식 자체의 합리화를 의미할뿐더러 가시적 세계의 중심이 되는 어떤 주체를 상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근법에서 평행선이 가상의
어떤 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듯이 나타나는 것을 소실점(the vanishing point)
이라고 부른다. 또한 현대세계 전반을 지배하는 원근법적 시각체제는 그림의
중심, 나아가 시각장의 중심에 있다고 전제되는 저 소실점과 시각주체의 시
점을 중첩시킨다. 이에 따라, 현대적 시각주체는 시각장 전체를 지배하고 통
어할 수 있는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현대성을 합리성과 주체성의 원리로 축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각장의
영역에서도 일관되게 관철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근법이라는 과학적 시각양
식에 의해 보다 공고하게 일상적 차원에서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현대세계의 시각체제는 원근법이라는 합리화된 시각양식이 지배하는
시각장인 것이며, 이와 같은 양식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는 데카르트적 코기
1) 주은우, 현대성의 시각체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4쪽.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45
토와 마찬가지로 무소불위의 권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곧 원근법을 작
동시키는 시각주체는, 시각장에서 자기의지에 따라 대상세계를 거리를 두고
조망하면서 그것에 통제력과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계의 중심이자 사유
주체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2)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들은 주체의 존재론적 확실성에 기초해 세계에 대
한 명석 판명한 인식을 얻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모델과 ‘보는 사람’
의 눈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명료한 시각장을 구성하고자 하는 현대성의
시각체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동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다. 결국 원근법이라는 하나의 발명품이 그 시대의 정상적인 ‘보는 방식’으로
인준되는 과정에는 그것에 준하여 세계를 보는 방식이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
하다는 믿음이 그 저변을 가로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 전체를 통
어하고 지배하는 문화적 규범 체계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압력이 함께 작동하
고 있기 때문이다.
3)김수영에 관한 선행 논의들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리얼리즘/모더니즘’
이라는 문학사적 대립 구도를 전제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4) 2000년대 접어들면서 이러한 도식적 대립 구도를 혁파하
고 양자의 회통이라는 관점에서 김수영의 문학을 재평가하려는 시도5)와 더
불어 그의 시와 산문에 나타난 “전통”의 문제들을 의제의 초점으로 삼으려는
새로운 방향의 연구들6)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들
2) 위의 글, 5쪽.
3) 조강석, 「김수영과 시각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22권, 한국문학연구학회, 2004, 425쪽.
4) 백낙청, 「참여시와 민족문제」, 김수영의 문학, 김수영 전집 별권, 민음사,
1983, 166~172쪽; 염무
웅, 「김수영론」, 위의 책, 139~165쪽; 정남영,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김수영의 시」,
살아있는 김수영, 창비, 2005, 13~31쪽; 김재용, 「김수영 문학과 분단극복의 현재성」,
위의 책,163~194쪽; 조현일, 「김수영의 모더니티관과 <<파르티잔 리뷰>>, 위의 책,
336쪽.
5) 최원식,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회통」, 문학의 귀환, 창작과 비평사, 2001.
6) 김수영에 대한 선행 연구는 대체로 ‘모더니즘’, ‘리얼리즘’, ‘현대성’, ‘아방가르드’ 등을 키워드로
삼는 서구 담론의 테두리에서 논의되어왔으나,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와 그의 시를 반전통주의의
범주에서 논의할 수 없다는 견해들이 지속적으로 산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의제의 테두리로 수렴
될 수 있는 논의들은 다음과 같다.
유중하, 「달나라에 내리는 눈」, 실천문학, 1998 여름; 최동호, 「김수영의 문학사적 위치」, 작가
연구 제5호, 새미, 1998; 「김수영의 시적 변증법과 전통의 뿌리」, 김수영 다시 읽기, 프레스
21, 2001; 「김수영과 부자유친-동양사상과 부자유친」, 작가세계, 2004 여름; 김혜순, 「문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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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상적 탐구와 주제론적 분석으로 요약되는 김수영 연구사의 중심 범
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추론된다. 물론 최근 제출된 논의들 가운
데는 이런 주제론적 연구의 편향을 벗어나, 김수영의 다양한 언어들을 미시
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용례들의 수사학적 용법과 의미를 규명하려는 연구들
이 존재한다.
그러나 언어학적이거나 수사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고 있는 최근의 연구
들은 ‘인칭대명사’7), ‘부정어’8), ‘감정어’9), ‘조어’10), ‘인지어’11) 등과 같은
지엽적이고 세부적인 언어의 갈래나 용법으로 그 대상 범주를 제한하는 경향
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김수영의 언어에 대한 미시적 차원의 섬세한 분석들
이 그의 예술적 방법론이나 미학적 사상에 대한 해명으로 연계되지 못할뿐더
러, 도리어 그 방향이 특정 부분들로 함몰되는 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김수영 시에 나타난 “보다”의 다양한 언어적 쓰임새와 의
미론적 함축성에 주목하고, 이러한 시각성의 문제를 통해 그의 실존적이고
예술가적인 태도를 추출해내려는 방향의 연구들12) 역시 유사한 문제를 드러
낸다. 이 연구들 또한 김수영의 실존적이고 예술가적인 태도에 포함된 사
회․정치적 의미소들을 명료하게 분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포함
된 (탈)현대미학의 방향과 양상들을 상세하게 해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상 김수영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보다”라는 용언의 다양한 활용형
장자와 김수영의 시 담론 비교 연구」, 김수영 다시 읽기, 프레스 21, 2001; 나희덕, 「김수영
시에 있어서 ‘전통’의 문제」, 배달말 제29호, 2001; 신형철, 「김수영 시에 나타난 ‘사랑’과 ‘죽음’
의 의미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이찬,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 연구」, 고려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7) 장석원, 「김수영 시의 ‘인칭대명사’ 연구」, 한국시학연구 제15호, 한국시학회, 2006.
8) 김종훈, 「김수영 시의 ‘부정어’ 연구」, 정신문화연구 제32권 제3호, 2009 가을.
9) 이현승, 「김수영 시의 감정어 연구」, 어문논집 제42집, 중앙어문학회, 2009.
10) 이근화, 「김수영 시에 나타난 조어 연구」, 국어국문학 제153집, 국어국문학회, 2009.
11) 주영중, 「김수영 시의 ‘인지어’ 연구」 우리어문연구 제36집, 우리어문학회, 2010; 주영중, 「김수
영 시의 ‘인지어’ 연구 2」, 비평문학 제39호, 한국비평문학회, 2011.
12) 김수영 시의 ‘시각성’을 주요 의제로 삼고 있는 선행 논의들은 “바로 보마”가 그의 실존적 태도와
생애 전체를 수미일관하게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지점이자 예술가적 자의식의 중핵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논의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조강석, 「김수영과 시각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22호, 2004; 임지연, 「김수영 시의 시각성
연구」,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0호,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2006; 이찬, 「김수영 시에 나타난 ‘진
리의 윤리학’과 ‘현대성’ 인식 양상」, 우리어문연구 제36집, 우리어문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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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단지 시각적 요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 기관의 공조 또
는 공감각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13), 그것에 내포된
(탈)현대미학의 첨예한 선취의 지점들을 갈피 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이다. 이 지점에서 김수영의 참된 문학사적 의미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그의 영향력과 파급력의 정체와 원천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행 연구들의 한계와 문제점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시어들의 쓰임새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더불
어 그의 실존적 삶의 태도와 예술가적 자의식에 대한 해명이 동시에 이루어
져야만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측면들의 기저를 이루는 김수영의 첨예한 (탈)현대미학적 사유와 그 성과들이 가시적인
차원으로 드러나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김수영 시와 산문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방법
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그가 선취해낸 (탈)현대미학적 성과들을 구체적으
로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김수영의 문학사적 의의가 보다 분명하게 가
시화되면서, 우리가 여전히 참조해야 할 미학적 방향과 그 첨단의 사유와 방
법론에 대한 활발한 논의들과 재평가들이 산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그로테스크의 개념과 의미
그로테스크(grotesque)는 ‘기교적인 것, 희극적인 것, 무서움을 일깨우는
것, 부조리한 것, 초현실주의적인 것, 이상한 것, 흉측한 것’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또한 ‘자연의 법칙과 비례로부터 어긋나고 우스꽝스러우며, 양립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들이 섞인 비정상의 상태, 고통과 두려움을 포함하는 악
마적인 것’과 연관되어 해명되어 왔다.14)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본래 로마황
제 티투스의 목욕탕의 지하통로와 네로의 황금 궁전의 폐허에서 발견된 기괴
13) 이찬, 「김수영 시의 ‘언어-문자’ 이미지와 ‘에크리튀르’의 정치학」, 비교문화연구 제26집, 경희대
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12, 181쪽.
14) 필립 톰슨, 그로테스크, 김영무 옮김, 서울대출판부, 1986, 1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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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벽화 이미지들에서 기원한다.15) 1480년 발견된 이 궁전의 벽과 천장에는
엽상 형태의 식물과 가면 형태의 인간 머리와 더불어 온갖 신화적 형상들이
한데 혼재되어 있었다.
이 기괴한 형상들은 불합리한 배치와 상호 관계의 부
조화를 통해, 놀라움, 불편함,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을 뿐만 아
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폭력적 병치이자 부조리한 것들의 조합이라는 형식적
짜임관계를 지닌다. 또한 그로토(grotto)라는 단어는 동굴 또는 발굴을 뜻하
는 이탈리아어로서, 유물들의 발견 후 유물에 나타나는 그림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후 이러한 이국적 형식이나 스타일을 ‘라 그로테스카’(la
grottesca)라는 명사형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로테스크라는 용어
의 시초를 이룬다.16) 이후 그로테스크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의 그림에서
사용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과 독일로 확산되면서 캐리커처와
관련된 우스꽝스럽고 괴상하고 속물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고 할 수 있
다.
17)그로테스크 개념이 단지 ‘기괴한 장식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미학적 대
상의 차원에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다. 낭만주의
예술에서 ‘초자연적인 것과 인간 외부에 있는 것’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그로테스크는 ‘인간 외부에 있는 것의 묘사’라는 의미론적 위상을 지니게 되
었다. 여기서 ‘인간 외부에 있는 것’과 대비하여 인간이 갖는 지위는 한 사람
의 개성이 품은 ‘내적 무한성의 자각’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다. 곧 그로테
스크는 이러한 자각에 이르게 하는 촉매로 인식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바흐
친은 이런 ‘내적 무한성의 자각’이 일체의 독단주의와 제한성으로부터 우리
를 해방시켜주는 힘이 그로테스크의 방법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18) 바로
15) 김혜련, 「그로테스크의 시각성과 존재론적 함의」, 가톨릭철학 제12호, 한국가톨릭철학회, 2009,
205쪽.
16) 백훈기, 「모방의 관점에서 본 그로테스크의 기능과 의의」, 종합예술과 음악 학회지 2권 2호, 한국
달크로유리드믹스학회, 2008, 100쪽.
17) 박슬기, 「그로테스크의 미학의 존재론적 기반과 의의」, 인문논총 제58집,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
원, 2007, 180쪽.
18) 이렇듯 그로테스크의 본질적 특성을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괴상한 것’이라고 정의할 때, 웃음과 공
포 가운데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상이한 개념 규정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공포
를 강조하는 러스킨, 위고, 카이저의 계열과 웃음을 강조하는 바흐친의 계열로 나누어져 그로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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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그로테스크는 막연히 ‘기괴한 것’에서 자아나 인간의 내적 무한
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발견은 그로테스크가 안겨
다주는 괴상하고 끔찍한 느낌이란 것이 인간 외부에 있는 것, 즉 ‘악마적인
것’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18세기 당시그로테스크는 ‘유머러스한 것’으로 경멸받았는데, 이는 결국 그것이 지닌 파
괴적인 힘을 반증한다. 당대 현실의 안정화된 인식 체계를 깨뜨리는 그로테
스크의 파괴적인 힘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멸하는 방법 이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의 미학은 괴상한 취미 정도로만 치부될 수 없는 것이
며, 만일 그것을 호사가의 괴상한 취미나 예외적으로 돌출된 어떤 일시적 현
상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이 품은 무한한 가능성은 결코 발견될 수 없다.
더구나 그로테스크 미학을 현실 세계에서 수용될 수 없는 일종의 도덕적 탈선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을 일종의 괴물적인 것으로만 치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결국 그로테스크의 문제는 인간이 ‘인간 외부에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하는가라는 인식 체계의 정상성의 문제와 결부
되어 있다. 곧 우리 인간들은 기존의 개념이나 상식을 통해 식별될 수 없는
것이 출현했을 때, 그것을 기이하고 괴물적인 것 또는 악마적인 것으로 호명
함으로써 의식의 바깥쪽으로 밀어내려 하는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로테스크 이미지는 인간의 시각장(the visual field)과
그 인식 체계의 배면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정상성의 질서와 밀접하게 연동되
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면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기이함은 결국 사회적
크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위의 글, 180~181쪽.)
후자를 대표하는 바흐친은 기독교와 중세적 권위의 억압 속에서 민중들의 카니발이 드러내는 생명
력을 그로테스크가 지닌 힘의 원천으로 파악했다. 그는 그로테스크를 단순한 과장, 왜곡, 풍자라는
측면보다는 ‘유쾌한 풍요’라는 점에 근본이 있다고 보았다. 엄청난 식욕, 상상을 초월하는 배설의
힘 등을 통해 그로테스크는 고상한 것을 저하시키고 천상을 의미하는 상부와 대지인 하부가 연관
되어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상한 것들의 격하를 통해 그로테스크는 천상의 것
을 대지의 것으로 만들어감으로써 보다 훌륭하게 다시 탄생하기 위하여 죽는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내비치게 된다. 이렇듯 그에게 그로테스크는 생명, 생성, 또는 재생과 밀접하게 관연관된 긍정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이덕형․최건영 옮김, 2004, 아카넷, 46~54쪽; 백훈기, 앞의 글,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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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과 전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
다. 볼프강 카이저가 그로테스크를 ‘지각의 한 양식’이자 ‘세계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라고 언급한 것 역시, 그것이 인간의 인식 체계의 정상성
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19)그로테스크를 우리들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하는 방식, 곧 인식 체계의 뒷
면에서 작동하는 어떤 정상성의 질서와 연관시킬 때, 그것은 기존 사회 질서
와 존재 범주에 대한 도전과 전복의 시도로 규정될 수 있다.
경험적 차원에서 그로테스크는 일견 끔찍스럽고 흉물스런 시각적 장면을 직접 대면하는 것
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괴물적인 것과 기형적인 것이
환기시키는 잔혹한 비현실성이 명명될 수 없다는 당혹감, 곧 표상 불가능성
이나 이해 불가능성, 나아가 사고 자체의 무능과 연계되어 있다.
달리 말해,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대면한 사람이 느끼는 현실 세계 내부의 비가시적인
빈틈들이 존재한다는 깨달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로테스크의
어원적 맥락에 깃들어 있는 그로토(grotto), 곧 동굴이나 무덤은 단지 역사적
흔적이나 고고학적 유물이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을뿐더러 삶과 죽음, 빛과
어둠, 그리고 지식과 무지의 공존이 돌출적으로 감지될 때 느끼는 불가해성
의 표지라는 확장된 의미를 함축한다.20)
이렇듯 그로테스크를 불가해성의 표지, 곧 우리 의식 내부로 수렴되지 않는 비가시적인 빈틈들이나
기존의 인식 체계로 수렴되지 않는 낯선 것들의
19) “그로테스크한 것에 있어서 세계는 소외되고 형식은 왜곡되며 우리들 세계의 질서는 해체되는 것이
고(그로테스크한 장식 모양에서 이미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의 모든 영역이 혼합되어 있는데 후
세에 오면 꼭두각시, 납제인형, 어떤 때는 광인, 몽유병자 또는 언제나 훨씬 야수적인 동물들이 즐
겨 사용되는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모티브인 것이다), 무시무시한 메카니즘이 사물과 인간을 엄습하
는 것 같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소외가 일체의 기반을 파괴하고 어떠한 의미 해석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희생에 대한 동정적인 온갖 정열과 온갖 관심은 그로테스크한 것의
효과를 저해한다. (.....)
무시무시한 힘이 우리들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와서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
이다. 이색적인 것, 지리멸렬한 것을 보고서 웃는 모든 웃음 속에는 요컨대 웃음이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더라도 언제나 어떤 공포심이 혼재해 있는 것이다. 음험한, 그리고 그 밑을 모르는 힘들이
항상 희화(戱畵)로써 그리고 기형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 순전히 익살스럽
다는 것과 동일하게-그로테스크한 것은 그림을 보았을 때도 알 수 있듯이 직접적으로 장르에 예속
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의 범주, 세계 파악 및 세계 형성의 범주인 것이다.”(볼프강 카이저, 언어예
술작품론, 김윤섭 옮김, 예림기획, 1999, 554쪽.)
20) 김혜련, 앞의 글, 207쪽.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51
출현으로 규정할 때, 함께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현대적 시각체제와 원근법
적 시각양식의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 자체가 이미 주어진 어떤 사회
적으로 공인되고 학습된 방식, 즉 그 사회의 정상성의 체계나 문화적 규범
내용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우리가 나날이 경험하는 일
상적 시각 역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학습된 내용을 매개 삼아
이루어진다는 인식론적 체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곧 어떤 특정한 시대
와 특정한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당연시되는 ‘보는 방식’은 그 시대와 사회의
정상성의 체계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듯, ‘보는 방식’ 역시 특정
한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
시되는 ‘보는 방식’은 그 시대를 관류하는 지배관계, 또는 한 시대를 관류하
는 무의식적 인식론적 배치인 에피스테메(épistémè)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
제할 수 있을 것이다.21)
3. 김수영 시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그 미학적 의미
김수영의 시 가운데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시각적 직접성의 차원에서 전경
화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끔찍스럽고 흉
물스런 시각적 장면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넘어서 괴물적인 것과 기형적인
것이 환기시키는 잔혹한 비현실성이 명명될 수 없다는 당혹감, 곧 표상 불가
능성이나 이해 불가능성, 그리고 사고 자체의 무능함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
을 염두에 둔다면, 김수영의 많은 시편들은 그로테스크의 범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로테스크의 어원적 맥락에 깃들어 있는 그로토(grotto),
즉 동굴이나 무덤이라는 의미가 단지 역사적 흔적이나 고고학적 유물에 그치
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빛과 어둠, 그리고 지식과 무지의 공존이 돌출적
21) 주은우, 현대성의 시각체제에 대한 연구, 3쪽.
552 한국학연구 제42집으로 감지될 때 느끼는 불가해성의 표지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김수영의 대다수의 시편들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는 문제틀을 통해 새롭게 해
명될 수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전쟁의 모든 파괴 속에서/불사조같이 살아난 너의 몸뚱아리-/우주의 파편같이
/혹은 혜성같이 반짝이는/무수한 잔재 속에 담겨 있는 또 이 무수한 몸뚱아리-들은
/지금 무엇을 예의(銳意) 연마하고 있는가”(「국립도서관」 부분)22)
“밑씻개로 하자/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껄껄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
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부분)
“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스러운 청년/떼로는 일본에서/때로는 이북에서/때로는
삼랑진에서/말하자면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천수천족수(千手天足獸)/미
인, 시인, 사무가, 농사꾼, 상인, 야소(耶蘇)이고도 한/나날이 새로워지는 괴기한
청년”(「절망」 부분)
인용 시편들은 빠짐없이 우리들이 시각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장면들, 또는 그 이미지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 그로테스크를 돋을새김의 문법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나타난
“몸뚱아리” “밑” “천수천족수(千手天足獸)”라는 시어들은 우리들의 육체와
직접 관련된 것이면서도, 그것이 지닌 비천하고 수치스럽고 기괴한 모양새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의 느낌과 분위기가 스며나게 할 수 있는
힘을 품는다. 그것은 이른바 ‘인간적인 것’이란 말 속에 내포된 문화적 예의
22) 이 논문에서 인용되는 김수영의 시편들은 김수영 전집(민음사, 2003)을 근간으로 삼는다. 이후에
제시되는 김수영의 인용문들은 모두 이 책의 판본을 활용할 것이며, 그것의 쪽수를 명기하지 않음
을 미리 밝혀둔다.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53
규범이나 그 정상성의 통념을 벗어나, 우리들에게 어떤 불쾌감과 천박함과
기이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현실 세계 내부의 비가시적인 빈틈들을 표현
하는 메타포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국립도서관」에 나타난 “전쟁의 모든 파괴 속에서/불사조같이 살아난 너
의 몸뚱아리”라는 구절은 한편으로 “도서관”이라는 사물의 육체성을 마치 인
간의 훼손된 신체처럼 표현함으로써 그로테스크의 효과를 얻는다. 또한 “불
사조같이”라는 말에 포함된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신적인 것과 “너의 몸뚱아
리”라는 인간적인 것 이하의 저속한 것을 표현하는 말이 하나의 문장 단위에
서 결합됨으로써, 그로테스크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부조화와 기묘함과 과장
이 한꺼번에 울려나도록 만든다. 김수영의 저 구절은 그로테스크의 가장 유
별난 특징으로 언급되어온 ‘부조화’를 기본 요소로 삼고 있으며, 「국립도서
관」의 이미지 구성은 갈등, 충돌, 이질적인 것의 혼합, 다른 것들의 융합에서
발생하는 ‘부조화’의 원리로 빼곡하게 에둘러져 있기 때문이다.23) ‘부조화’의
원리는 또한 기묘함과 과장, 부조리와 비정상성 등과 같은 다른 요소들을 빠
짐없이 포괄할 수 있는 그로테스크의 중핵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4․19 혁명 직후인 “1960
년 4월 26일 이른 아침”에 씌어진 시편으로서, 표면적으로 혁명의 해방감과
더불어 정치 상황의 급격한 변동의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대면케 한다.
그것은 당대 최고권력자의 사진이 그 지고성의 자리에서 내려와 “밑씻개”라는 가
장 저열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급변하게 되는 과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인
용문에 나타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 “강아지장에 깐 짚”이라는 시어
들 역시 “밑씻개”라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 계열을 형성하는 메타포로 기능한
다. 이 시어들은 모두 저 “사진”이 현실적인 차원에서 비루하고 저속하고 무
가치한 것으로 변이되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시각성의 차원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사물을 “밑
씻개”라는 촉각적 차원의 사물로 급변하게 만드는 이 시편의 전체적인 이미
23) 필립 톰슨, 앞의 책, 27쪽.
554 한국학연구 제42집
지의 전개는 카니발적 해방감의 분출이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서, 그로테
스크의 미학적 효과를 마디마디에 흩뿌려놓는 것으로 추론된다.24) 저 “사진”
이 “밑씻개”로 돌변하는 상황은 표면적인 차원에서 정치적 해방감에 따른 웃
음과 즐거움과 유희라는 희극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틀림없지만, 그
이면에서는 낯선 광경이 돌출하는 데 따르는 공포와 경악의 감정이 슬며시
동반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밑씻개”라는 촉각적 질감의 차원에서 직접적
으로 느껴지는 비정상성과 섬뜩함과 혐오감을 소리 없이 수반하기 때문이다.
곧 높은 곳에 걸린 “사진”으로 표상되는 기념비적 고상함과 정신성이 “밑씻
개”라는 배설의 누추함과 육체성으로 변모되는 자리에서 「우선 그놈의 사진
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에 깃든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면모가 가장 도
드라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절망」은 문면에서 활용된 “괴기스러운 청년”, “천수천족수(千手天足獸)”
라는 시어들로 인해 시각적인 직접성의 차원에서 그로테스크 효과를 산출한
다. 우선 저 두 시어들에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쁨과 정상적인 것에서 벗
어난 기쁨’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비정상의 정도가 일정한 수준’을 넘어
서는 그 순간에 생겨나는 ‘친숙하지 못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배어나기
때문이다.25) 특히 인간의 몸을 비정상적인 육체성을 지닌 짐승에 빗댄 “천수
천족수(千手天足獸)”라는 시어는 서구의 카니발 전통에서 행해졌던,
곧 ‘고 24) 이런 측면에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편을 비롯하여
김수영의 정치적 담론이 명시적으로 나타난 여러 시편들을 바흐친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범주에서 집중적으로다시 검토해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성과를 산출할 것이라 예측된다.
그의 시에서 빈번하게 활용된 비속어와 일상어, 또한 한자어와 외래어 등은 거의 대부분이 ‘고상하고 정신적이며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을 물질․육체적 차원으로, 불가분의 통일체인 대지와 육체의 차원으로 이행시키는것’으로 요약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주도적인 특성’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바흐친의 언급은 김수영의 대다수 시편들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친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중세 어릿광대의 우스꽝스러움 속에서 주도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는 모든 고상한 예식과 의식을
물질․육체적 차원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것이 어릿광대들
이 시합이나 기사 서훈식 등등에서 보여주는 행동이다. 바로 이러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전통
속에는, 특히 돈키호테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기사도적 이데올로기와 예식에 대한 수많은 격하
와 저속함이 깔려 있는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이덕형․최건영 옮김, 2004, 아카넷, 49쪽.)
25) 필립 톰슨, 앞의 책, 33쪽.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55
대의 동물가면극으로부터 이탈리아의 즉흥가면극에 이르는 그로테스크의 민
중적 전통의 전모’에 잇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용 구절 전체의 의미
맥락을 살피면, “천수천족수(千手天足獸)”라는 시어는 축자적 의미에 해당되
는 인간 이하의 끔찍스러운 야만성을 뜻하는 것이기보다는 세계 자체가 지닌
천변만화하는 물질적 흐름과 그 변이양상들을 비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2~3연에 나타난 시상의 전개를 꼼꼼히 뜯어보면, 인간 주체 내
부에 깃든 잠재적 역능과 다양성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
수천족수(千手天足獸)”라는 돌출적인 시어는 단지 시각적 차원의 그로테스
크 이미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구조 원리의 차원에서 그로
테스크의 미학이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기능하는 것처
럼 보인다. 이 작품의 제목이 “절망”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추론된
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세계와 인간의 모양새를 뒤따라 잡을
수 없는 시인 자신의 시세계를 맨 끄트머리의 3연에서 “그 동안에도/그뒤에
도 나의 시는 영원한 미완성이고”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
먹들먹한다/꾸루룩거리는 배에는 푸른색도 흰색도 적(敵)이다//배가 모조리 설사
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시작하기 위해서다/성(性)도 윤리도 약이/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여름이 끝난 벽 저쪽에 서 있는 낯선 얼굴/가을이 설사를
하려고 약을 먹는다/성과 윤리의 약을 먹는다 꽃을 거두어 들인다/문명의 하늘은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원한다/나는 지금 규제로 시를 쓰고 있다 타의의 규제/아슬아
슬한 설사다”(「설사의 알리바이」 부분)
“자연이 하라는 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 대로 느끼고/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여/길고긴 오늘밤에 나의
사치를 받기 위하여/어서어서 불을 끄자/불을 끄자”「사치」 부분)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아니
556 한국학연구 제42집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모양이다//나는 섬
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다시 돌아간다/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완연
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지독하
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성(性)」 부분)
바흐친이 제시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육체 자체와 먹고 마시고 배설
하는 것, 그리고 성생활의 이미지들과 같은 삶의 물질․육체적인 원리’를 품
고 있는 것이며, 그 형식적 특질은 ‘중세문학과 예술의 모든 숭고한 형식들’
을 ‘격하(格下)․저속화․육화’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26) 위의 시편들
은 ‘조야한 물질․육체적 영역’에 해당되는 ‘먹고 마시는 것, 배설하는 것,
성생활’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범주로 수
렴될 수 있다. 「설사의 알리바이」에 나타난 “설사”라는 이미지는 기존의 한
국시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똥과 배설의 육체성을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질감을 선사한다.
그것은 또한 “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꾸루룩거리는
배에는 푸른색도 흰색도 적(敵)이다”라는 불쾌하고 혐오스런 장면들을 밀착인화의 기법으로
시의 표면 에 형상화함으로써 시라는 글쓰기가 형이상학적 이념이나 고상한 예식과 의
식 절차들을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양식이라고 간주해온 전통적 시의식의
개념과 지식 체계를 무너뜨리는 낯설고 불편한 심리적 기제들을 곤두세운다.
「사치」와 「성」은 시인 제 자신의 성생활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지나칠 정
도로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로테스크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유교적 도
덕관념이 매우 강력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생활의 그 자체의 감각으
26) 미하일 바흐친, 앞의 책, 48~49쪽.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57
로 작동해온 한국사회에서 시인이 자신의 성생활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돋을
새김의 필체로 드러낸다는 것은, 실상 자신의 시쓰기와 예술 행위 전체를 일
종의 추문처럼 만들어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의 그로테스크이자 자기모멸
의 실천 행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측면에서 김수영 시에 나타
난 다채로운 마조히즘의 이미지들 역시 그로테스크의 미학 범주에서 다시 논
의될 수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시쓰기의 사후적인 차원, 또는 수용미학적 차원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쾌감’과 ‘혐오감’이라는 그로테스크의 요소들을 과감하게
선취해냄으로써, 당대의 도덕적 안정성의 틀이나 미학적 통념과 그 지식 체
계에 균열을 가하는 정치적-미학적 전복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인
다. 특히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현대 가족제도의 도덕적 정상성에서 벗어난 상황을 밀착 묘사함으로써, 기묘
하고 섬뜩한 그로테스크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혓바닥이 떨어져나가 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이라는 시어는 성애의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밀착된 촉감의 세부 묘사로 인해 오히려 극단화되거나 과장된
것이라는 느낌을 풍겨내면서 희화적 과장의 범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희화적인 과장에는 일정한 규범, 즉 비정상이라는 규범이 있는데, 이러한
규범을 넘어설 경우, 희화(캐리커처)는 단순히 우스꽝스러울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역겹거나 두려운 것이 된다’27)는 희화와 그로테스크의 관계에 대
한 언급을 참조해보면, 「성」은 그로테스크와 희화의 이미지를 공존시킬 뿐
만 아니라, 양자를 상호 대립의 고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상호 이행의
역동적인 차원에서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그로테스크의 본질적 특징으로 논의되어온 ‘희극적인 느낌과는 양립할 수
없는 혐오, 공포, 두려움 따위와 희극적 느낌이 함께 뒤얽혀 있다는 사실’28)
을 김수영이 매우 자각적이고 의도적인 차원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이 틀림
27) 필립 톰슨, 앞의 책, 54쪽.
28) 위의 책, 9쪽.
558 한국학연구 제42집
없어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도, 시인 제 자신이나 또는 현대적 삶을 “거
미” “이” “파리” “나비” “하루살이” 등의 벌레 이미지에 빗댄 시편들에서도
이러한 그로테스크 효과가 산발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서도 독을 지닌 작은 벌레인 “거미”, “이”, “파리”는 현대적 삶의 기괴한 변
형과 모순과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그로테스크 이미지로 기능하며, 죽었거나
죽게 될 벌레인 “나비”와 “하루살이”는 시인 자신과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벌레의 죽음에 비유하면서 그로테스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29)
그러나 이 두 계열의 시편들에 나타난 죽음 이미지가 다른 한편으로 재생
을 의미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단지 혐오스럽거나 비천한 느낌을 가져
다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희극적 웃음을 유발하는 아이러니의 미감을
동시에 발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곧 김수영 시에서 저 벌레 이미지들은 죽음과 재생이라는 순환적 의미 확산을 통해 일상세계의 고정성과 부자유를 초월하여 시적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는 것이다. 또한 욕설이나 비속어 등을 적극적으로 표면화한 시편들30) 역시
29) 이런 시편들로는 「거미」, 「나비의 무덤」, 「파리와 더불어」, 「거미잡이」, 「이」, 「하루살이」 「백의」
같은 작품들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김수영 시에서 벌레 이미지가 지니는 의미를 상세하게 탐구한
논의로는 (김용희, 「김수영 시에 나타난 유희적 부정성과 벌레 모티프」, 한국현대문학연구 제28
호, 한국현대문학회, 2009, 435~450쪽.)을 참조할 수 있다.
30) 이런 시편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거대한 뿌리」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이다. 이 작품
들에서 욕설과 비속어가 도드라지게 표현된 부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
도 개좆이다/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
한민국 관리,/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
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은 여자, 무식쟁이, 이 무수한 반동이 좋다/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거대한 뿌리」 부분)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
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식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가로놓여 있다/이를테면 이런 일
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
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너스들 옆에서”(「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부분)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59
‘카니발 그것 자체를 더 할 나위 없는 그로테스크 행사’로 간주하면서, 카니
발 기간 동안 행해지는 욕설과 비속어에 대해 민중들이 온갖 종류의 신체적,
심리적 억압 기제들을 자기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생성의 시공간‘으로 규
정한 바흐친의 견해를 따른다면, 그로테스크 미학의 범주에서 새롭게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또한 김수영 시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이미지들을
단지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낯선 것의 출현이라는 충격과 전율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존의 도덕적 관념과 정치적 이데올로기, 나아가 미학적 통념과 지
식 체계의 한계와 모순과 맹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미학적 전복과 새로
운 미학의 기획이라는 생성과 긍정의 차원에서 다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4. 김수영 산문에 나타난 알레고리 방법론과 마조히즘의 문제
1)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지금의 가장 진지한 시의
행위는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인의 행동이 극치가 될 것이다. 아니면 폐인이
나 광인. 아니면 바보.31)
2) 예술가는 되도록 비참하게 나와야 한다. 되도록 굵고 억세고 날카롭고 모진
가시면류관을 쓰고 나와야 한다.32)
3) 그는 모든 진정한 새로운 문학은 그것이 내향적인 것이 될 때는-즉 내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우에는-기존의 문학 형식에 대한 위협이 되고, 외향적인
것이 될 때에는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이 된다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철칙을 소홀히 하고 있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적용하려 들고
있다.33)
31) 김수영,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2003, 185~186쪽.
32) 김수영, 「문단추천제 폐지론」, 위의 책, 190~191쪽.
33) 김수영,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위의 책, 220~221쪽.
560 한국학연구 제42집
4) 스타일도 현대적이고 말솜씨도 그럴듯한데 가장 중요한 생명이 없다. 그러니
까 작품을 읽고 나면 우선 불쾌감이 앞선다. 또 사기를 당했구나 하는 불쾌감
이다. 한국의 젊은 시단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금년에도 이 사기성
의 치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까 우리나라는 진정한 혁명을 못하고
있고 진정한 혁명을 할 자격이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34)
5) 나는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또한 환상시도 좋고 추상시도 좋고 환상적
시론도 좋고 기술시론(技術詩論)도 좋다. 몇 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기술의
우열이나 경향 여하가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양심이 문제다.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인데 작금의 시나 시론에는 양심은 보이지 않고 기술만이
보인다. 아니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
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기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35)
위 인용문들에 나타난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인의 행동” “폐인이나 광인.
아니면 바보” “굵고 억세고 날카롭고 모진 가시면류관” 같은 표현들은 시각
적 직접성의 차원에서 그로테스크의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
은 아니지만, 현대적 시각체제의 정상성의 원리를 작동시키는 합리적이고 이
성적인 주체의 테두리를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빠짐없이 ‘신체적으로 잔인하거나 비정
상적인’, 나아가 ‘일종의 갈등에 의존하’면서 ‘본질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고
‘심각한 일탈감과 소외감의 표현’이라는 그로테스크의 정의에 적확하게 부합
하는 면모들을 지닌다.
“형무소” “수인” “폐인” “광인” “바보” “가시면류관”
같은 어휘들은 실상 메타포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현대세계에서 시인
과 예술가가 이성과 합리성을 통해서는 식별 불가능하고 명명 불가능한 삶의
영역들을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전제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4) 김수영, 「세대교체의 연수표」, 위의 책, 249~250쪽.
35) 김수영, 「난해의 장막」, 김수영 전집 2, 위의 책, 237쪽.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61
그로테스크가 삶의 ‘불가해성의 표지’들을 적극적으로 현시하는 자리에서
발생하는 것일 뿐더러 기괴하고 섬뜩하고 비정상적인 것들을 자신의 구성 요
소들로 거느린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전제는 곧 현대세계에서 시와 예술이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현대세계에서 시인과 예술가는 그 정상성의 체계를 지배하
고 있는 이성과 합리성의 타자들, 곧 그로테스크를 개현시키는 소수자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하기에 그 공화국의 치안과 질서로부터 추방되거나 고통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유가 집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
수영의 이러한 사유가 예술적 방법론의 차원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에 관한 정의를 전복시켜 벤야민이 새롭게 제시한 알레고리
방법론과 연동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추론된다.36)
36) 괴테는 알레고리적 형상은 현실에서 추상된 개념의 ‘도해’라는 한계에 갇힌 것이기에 그 지시대상
이 명확하고 의미가 명료해 보이지만, 그 명확성으로 인해 오히려 그 의미가 제한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반면, 상징은 현상을 이념으로 이념을 하나의 형상으로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념은 형상 속에서 언제나 무궁무진한 작용을 일으켜서 결코 그 궁극에 도달
할 수 없는 어떤 무한성과 신비를 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에 대한 가치론적 정의는 고전주의 시대 당대의 시대정신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교양’의 이념이라는 그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떠나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다.
(임홍배,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 개
념에 대하여」, 비교문학, 제45집, 한국비교문학회, 2008,
103~109쪽; 이찬, 「김수영 산문에 나타난 알레고리적 방법론과 전복적 사유」, 현대문학이론연구
제59집, 2014, 235~236쪽.) 벤야민은 괴테의 이러한 상징 개념이 현대세계의 삶의 조건에서는 총
체성이라는 거짓된 가상을 통해 야만적 현실을 은폐하고 교양의 허위의식을 유포시킨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알레고리적 문자이미지(Schriftbild)는 무정형의 파편으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파편보
다 예술상징, 조형적 상징, 유기적 총체성의 상과 더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가 무한성, 형식 및 이념의 이름으로 완성된 구성물을 비판적으로 강화시키는
곳에서, 알레고리적인 깊은 시선은 사물과 작품들을 자극적인 문자로 단번에 변형시킨다’고 진술하
는데, 이는 곧 알레고리를 통해 상징이 떠받치고 있는 ‘총체성의 거짓된 가상’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벤야민은 괴테의 이러한 상징 개념이 현대세계의 삶의 조건에서는 총체성이라는 거짓된
가상을 통해 야만적 현실을 은폐하고 교양의 허위의식을 유포시킨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알레고리적 문자이미지(Schriftbild)는 무정형의 파편으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파편보다 예술상징, 조형적 상징, 유기적 총체성의 상과 더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 또한 그는 ‘낭만주의가 무한성, 형식 및 이념의 이름으로 완성된 구성물을 비판적으로 강화시키는
곳에서, 알레고리적인 깊은 시선은 사물과 작품들을 자극적인 문자로 단번에 변형시킨다’고 진술하는데, 이는 곧 알레고리를 통해 상징이 떠받치고 있는 ‘총체성의 거짓된 가상’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발터 벤야민,독일 비애극의 원천, 최성만․김유동 옮김, 한길사, 2009, 261~282쪽; 정의진, 「발터 벤야민의알레고리론의 역사시학적 함의」, 비평문학 제41호, 한국비평문학회, 2011, 398~402쪽; 이찬,
「김수영 산문에 나타난 알레고리적 방법론과 전복적 사유」, 현대문학이론연구 제59집, 2014,
246~248쪽.)
562 한국학연구 제42집
앞의 인용문들에서 나타난 “기존의 문학 형식에 대한 위협”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 “가장 중요한 생명” “사기성의 치욕” “시의 기
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 같은 표현들은 벤야민이 개진한 알레고리와 직․간
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명징하게 예시한다. 이 표현들은
모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가 차지할 수밖에 없는 주변부적 위치를
암시하는 것인 동시에, 진․선․미의 상이한 가치 영역들이 결코 조화와 통
일이 이룰 수 없는 그 파편화된 현실적 조건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
리 말해, 진․선․미의 상이한 가치 영역들이 상호 분열되어 불협화음과 갈
등과 투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현대세계의 근본적 조건과 이에 따른 삶의
파편화 현상을 몽타주의 표현 방법으로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벤야민의 알레고리는 인용문 4)와 5)에서 보다 명징하게 제시된
다. 4)의 “스타일도 현대적이고 말솜씨도 그럴듯한데 가장 중요한 생명이 없
다.”는 말이나, 5)의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
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라는 문장은, 괴테의 ‘진정한
상징’으로 표상되는 현대 부르주아 사회 성립기의 지배적인 예술담론과는 상
반되는 벤야민의 알레고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저 두 표현에는 고전주
의의 미학적 이상인 유기적 총체성과 작품 내적 완결성을 일그러뜨리는 전복
적 사유와 그 실천의 기획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 그리고 “양심이 없는 기술만
을 구사하는 시”라는 언표는 김수영의 주장하고자 하는 대립 구도를 보다 선
명하게 부각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결국 그것은 현대 한국인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과 상처를 외면하면서, 시작품의 형식적 표면과 기술의 차원으로
만 국한되어 있었던 김춘수를 비롯한 “언어파”의 한계를 명시적으로 비판하
는 맥락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37) 또한 시작품 내부의 어조와 이미지
와 구조 등과 같은 구성 요소들이 상호 유기적인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낼
37) 이러한 측면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 산문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위 <예술파>의 신진들의 거의 전부가 적당한 감각적인 현대어를 삽입한
언어의 조탁이나 세련되어 보이는 이미지의 나열과 구성만으로 현대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과오를 범하고 있다.”(김수영,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김수영 전집 2, 369~370쪽.)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63
수 있는 언어적 기술의 완성도만을 문제 삼는 “언어파” 시인들의 한계와 문
제점을 “미숙”과 “생명”이라는 의미 내용적 언표를 통해 전복하려는 시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38)
김수영의 산문 문헌들의 곳곳에서 산견되는 알레고리적 사유와 방법론은
우리 현대인들의 삶 대부분이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돈과 제도와 권력과 쾌락
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되는 그 황폐한 진실을 드러내려는 시편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호감을 표명하고, 이러한 진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양
심”이 부재하면서 “스타일”과 “기술”만이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시
편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혹평을 내리는 평가의 준거점으로 작용한다.39)
따라서 김수영이 몇몇 산문들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양심”이라는 언표는
현대적 삶의 분열 양상과 그 파편화 현상의 진실을 그려낼 수 있는 “언어의
윤리”인 동시에 앞서 살핀 “미학적 사상”과 동일한 의미 맥락을 거느리고 있
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김수영의 시적 사유의 핵심을 형성하는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알레고리 방
법론은 그가 호감을 표명했던 시인들과 시편들에 대한 산문 문헌들에서도 동
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그가 한국시의 “모더니티”를 현대적인 “장식품”이나
현대적인 “언어의 기술”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 지닌 “후진성”에 대
한 “양심”과 “자각”과 이를 체험하는 “밀도”와 “성실성”에서 찾았던 것이
나40), “진정한 현대성은 생활과 육체 속에 자각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
38) 김수영이 “언어파” 시인들을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용어는 “언어의 윤리”이다. 그는 “언어파” 시인
들이 내세우는 “언어의 순수”에 맞서 “언어의 윤리”라는 언표를 새롭게 제시하고, 이들의 미학과
방법론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미숙”과 “생명”이라는 말 또한
“언어의 윤리”로 표상되는 그의 일관된 미학적 사유와 관점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측면이 명징하게 나타난 산문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현대적인 시인이 이행하고 있는 언어의 순수성이 사회적 윤리와 인간적 윤리를
포함할 수 있을 만한(혹은 배제할 수 있을 만한)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필자가 언어
의 순수라고 평이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언어의 윤리라는 얄궂은 말을 쓰는 것도 이런
양자간의 미묘한 뉘앙스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이런 뉘앙스의 식별의 감도가 우리나라의 존재파
시인들에게 지극히 무디게밖에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김수영,
「새로운 포멀리스트들」, 김수영 전집 2, 591쪽.)
39) 이찬, 「김수영 산문에 나타난 알레고리적 방법론과 전복적 사유」, 현대문학이론연구 제59집,
2014, 238쪽.
40)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이 작품(「東洋畵集一」:인용자)에서도 현대적인 단어-표출, 선명한 혼
564 한국학연구 제42집
면서, 박태진 시에서 나타나는 “서투른 솜씨”와 “어휘의 패배”를 오히려 “그
의 숨은 순진을 엿보여주는 것”이며, “그가 「무교동」 세계를 성공적으로 발
전시킬 때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인생시를 새로운 흘음(吃音)으로 노래할 수
있는 독보적인 세계를 획득할 것”이라고 호평했던 대목41)에서 가장 도드라
진 형세와 윤곽선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등장하는 “서투른 솜씨”와 “어휘의
패배”와 “흘음(吃音)”이라는 언표들은 모두 상징이라는 고전주의 예술의 미
학적 이상, 곧 예술작품이 추구해야 할 어떤 선험적인 조화와 질서와 균제미
를 일그러뜨리는 미학적 전복의 기획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의 역사
적 현실 내부에서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후진적 모더니티의 균열과 소음
과 갈등의 지점들을 현시하려는 자리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2)
벤야민이 정의한 알레고리가 사물과 현상에 내재하는 일종의 자연스런 본
질로 간주되던 궁극적 조화 상태인 ‘자연스러움’을 인위적으로 일그러뜨리는
것이자, 상징 개념이 하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었듯, 김수영 역시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에 깃든 그 황폐하고 비루
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정직하고 투박하면서도 그 진실에 육박
할 수 있는 균열된 언어와 일그러진 형식을 한국시의 방향으로 제시하고자
돈, 유. 무한, 천체, 가구류, 반 고호, 표정-를 과부족 없이 합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이러한 맵시 있는 신선한 표면적인 모더니티는 사실상 이 작자가 모더니티를 추구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변명이나 장식 같은 인상을 준다. (.......)
그러나 박성룡이
내 언어를 학대하는 자기를 객관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는 데 반하여, 구자운은 스스로를 학
대하는 바로 내 언어 그 자체가 되고 있다. 구자운을 성실하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이다. 물론 이
성실과, 이 성실을 효과적으로 작품으로 형성시키는 문제는 다른 문제이지만 그러나 이런 성실이
없이는 진정한 모더니티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김수영, 「모더니티의 문제」, 김수영 전집 2,
352~353쪽; 이찬, 「김수영 산문에 나타난 알레고리적 방법론과 전복적 사유」, 현대문학이론연구
제59집, 2014, 238쪽.)
41) 김수영은 시의 모더니티(현대성)가 결국 몸에서 나온다고 반복하여 진술한다. 그는 박태진의 「歷史
가 알 리 없는.......」을 고평하면서, 진정한 현대성이란 결국 우리가 우리의 나날의 현실에서 겪는
체험의 진폭이자 몸의 감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여러 발음들이 본질적인
현대성을 바탕으로 하고 유니크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있는 현대성은 육체에서 나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를 쓰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시단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이것이다. 진정한 현대성은 생활과 육체 속에 자각되어있는 것이고, 그 때문에 그 가치는 현대를
넘어선 영원과 접한다.”(김수영, 「진정한 현대성의 지향」, 김수영 전집 2, 317쪽; 이찬, 「김수영
산문에 나타난 알레고리적 방법론과 전복적 사유」, 현대문학이론연구 제59집, 2014, 247쪽.)
42) 이찬, 「김수영 시와 산문의 진리의 윤리학과 알레고리적 역사의식」, 한국근대문학연구 제30호,
한국근대 문학회, 2014.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65
했던 것이 자명해 보인다.43) “또한 이러한 언어와 형식은 서투른 솜씨”와
“어휘의 패배”와 “흘음(吃音)”이란 언표로 표상되는 벤야민의 알레고리를 향
해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측면은 그의 구체적인 시작 방법론과 이미
지 구성법, 시론의 방향 제시에 있어서도 매우 자각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
로 이행되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김수영의 초창기 시편에 해당되는 「공자의 생활난」44)에 등장하는 “바로
보마”라는 단호한 어조의 자기 다짐과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로 표현된
미래로 열린 실존적 기투의 언어는 그가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기인하
는 황폐하고 끔찍한 역사적 현실의 다양한 현상들을 정직하게 응시하려는 실
존적 태도와 자의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표상한다.45) 따라서
「공자의 생활난」이란 시편은 ‘김수영적 자의식의 축도’46)를 단적으로 예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보다”라는 동사의 활용형들이 이후의 여러 시편들
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시와 산문을 ‘시각성’의
차원에서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김수영의 “바로 보마”로 표상되는 미학적 자의식이 현대적 시
각체제의 중핵을 이루는 원근법적 시각장이나 그것을 지배하는 정상성의 체
계, 곧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선의 테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외부에 편재
하는 끔찍하고 비속하고 잔인한 한국사회의 역사적 현실의 제 양상들을 현시
하려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그의 시와 산문 문헌들43) 김수영은 조태일의 「너의 눈앞에 서서」, 「개구리와 파수병」 등과 같은 시편들을 호평하면서 그의“진실한 체취의 힘”을 그 근거로 삼는데, 이것 또한 시와 예술이 현대적 실존의 그 황폐한 진실을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알레고리적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조태일의 체취는 김광협의 그것과는 다른 절망적인 현대의 상상 위에 선 의지적인 것이다. 후자가 고생
을 안할 수 있는 체취를-그리고 고생을 안할수록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체취를-갖고 있어
보이는 데 비해서 전자는 고난 속을 뚫고 갈수록 빛을 발할 수 있는 체취이다. (.....) 투박하고 서투
르고 위태위태한 구절의 연결이 전편을 통해 억지로 이어져가면서, 그래도 끝까지 꺾이지 않고 벅
찬 톤으로 독자의 머리를 후려갈길 수 있는 것은 그의 진실한 체취의 힘이다”(김수영, 「체취의 신
뢰감」, 572~573쪽.)
44)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사물과 사물의 생리와/사물의 수량과 한도와/사물의 우매와 명석성
을/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부분, 김수영 전집 1-시, 민음사, 2003,
19쪽.)
45) 이찬, 「김수영 시와 산문의 진리의 윤리학과 알레고리적 역사의식」, 71~72쪽.
46) 최동호, 「김수영의 문학사적 위치」, 작가연구 제5호, 새미, 1998, 13쪽.
566 한국학연구 제42집
곳곳에서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알레고리 방법론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
성이 이 맥락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바로 보마”의 자
의식이 김수영 제 자신을 향할 때, 그것은 끔찍한 자기모독과 자기혐오를 극
단까지 밀고나가는 마조히즘의 태도와 이미지가 나타났던 것으로 추론된
다.47) 이러한 태도 역시 현대세계의 원근법적 시각장, 곧 이성과 합리성의
시선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부조리하고 비정상적이며 자학적인 장면들을 포
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 이미지나 알레고리 방법론으로 자연스럽
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맥락을 포함한다. 이렇듯 마조히즘의 태도
와 자의식이 도드라지게 형상화된 장면들을 그의 시에서 추려내 보면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
야 하는/내일의 역설 모양으로”(「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부분)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들키거나 하기
가 싫어서가 아니라”(「도취의 피안」 부분)
“적당한 음모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
47)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을 ‘주체의 자아에게 되돌아온 사디즘’(지그문트 프로이트, 「본능과 본능의
변화」, 무의식에 관하여, 프로이트 전집 13,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1997, 331쪽.)이라고 정의한
다. 프로이트는 결국 ‘사디즘’이 대상인 타인에 대해 폭력과 권력을 행사하는 것인데,
그 대상이포기되고 주체에게로 폭력이 행사되는 경우를 ‘마조히즘’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반대하여, 들뢰즈는 “마조히즘(원문:매저키즘:인용자)은 고통에서 체벌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처벌이나 괴로움에서 마조히스트(원문:매저키스트:인용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예비적 쾌감일 뿐이다. 그의 진짜 쾌감은 그 이후 처벌에 의해 가능해진 어떤 것에 있다. 마조히스
트는 쾌감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처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 고통 그 자체는 쾌감의 원인이
아니라 쾌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일 뿐이다”(질 들뢰즈, 매저키즘, 이강훈 옮김, 인간
사랑, 1996, 100쪽.)라고 언급한다. 들뢰즈는 결국 ‘마조히즘’이 죄를 저지른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닮은 아버지를 처벌하는 것이며, 아버지로 상징되는 법과 현실원칙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위의 책, 65~68쪽, 98~99쪽 참조.) 이 논문에서 활용된 ‘마조
히즘’의 개념은 이와 같은 들뢰즈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67
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이여”(「바뀌어진 지평선」 부분)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
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구름의 파수병」 부분)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속돼간다 속돼간다/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
이”(「강가에서」 부분)
위에 인용된 이미지들은 모두 시인 제 자신의 치부와 비겁과 비속을 전경
화한다. 또한 여기서 제시된 “진실” “수치와 고민” “음모” “경박성” “배반”
“나체” “비참한 사람” “가련한 놈” “소인” “속돼간다” 같은 시어들은 현대적
시각체제가 규정하는 정상성의 체계, 곧 이성과 합리성의 주체나 그 시선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 부조리하고 비정상적인 삶의 모습들을 “바로 보”고자
했던 그의 내면적 고투를 배면에서 환기시킨다. 저 시어들은 결국 시인이 감
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직무이자 역할이 현대세계의 일상적 정상성의 체계로
는 결코 보이지 않는 삶의 모순과 억압과 폭력들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데
있으며, 그러한 기묘하고 비정상적인 그로테스크 현상들을 고스란히 살아내
는 것이라고 간주했던 그의 예술가적 실존과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
문이다.
따라서 앞의 이미지들에서 나타난 마조히즘의 충동과 태도는 단지 기괴하
고 혐오스런 자기모멸과 자기학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 한국
사회의 후진적 모더니티에서 기인하는 무수한 삶의 그로테스크 현상들을 충
실하게 응시하고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짓이자 다른 미래와 새로운 삶을
창출하기 위한 헌신적 노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확할 것이다. 김수영의 그
로테스크 이미지와 알레고리 방법론이 미학적 완결성이라는 현대미학의 지
배적 통념을 일그러뜨리면서 새로운 미학의 비전과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 원천으로 자리할 수 있는 까닭 역시,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다. 결국
568 한국학연구 제42집
시인과 예술가란 세계와 제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침을 뱉어”야만 하는, 아
니 “침을 뱉을” 수밖에 없는 그로테스크를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 문헌들 곳곳에서 나타나는 한자어와 일상어와 외국어
와 비속어의 부자연스러운 조합이나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 구성과 배
열 방법 또한 현대 한국사회가 태생적인 차원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역
사적 혼돈 양상과 후진성의 질곡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러한비참하고 낙후된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을 뿐더러 전위적인 형식 실험과 전복
적인 시 스타일의 창안을 통해, 이를 충실하게 소묘하려 했던 것으로 추론되
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시와 산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그로테스크 이
미지와 알레고리 방법론, 나아가 마조히즘의 심리적 태도와 충동은 그의 수
미일관한 “언어의 윤리”와 “미학적 사상”에서 기원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
다.
한국 현대사회의 낙후되고 혼란된 삶의 감각들과 더불어 각각의 상이한
영역들이 서로 어긋나고 갈등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그 폐허의 진실은, 다양
한 형식 실험과 전복적인 스타일의 창출을 통해서만 보다 생생하게 형상화될
수 있었을 것이기 자명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이러한 형식 실험과 전복스
타일의 창출은 곧 그로테스크 이미지의 형상화이자 벤야민의 알레고리 방법
론의 시학적 구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벡터는 마조히즘의 충동이자 태도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5. 나오며
이 논문은 김수영 시와 산문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방법론을 심
구하여 그 배면을 가로지르는 현대 미학의 핵심 문제를 상세하게 해명하고자
했다. 이는 결국 그의 시와 산문을 현대적 시각체제의 양상들인 원근법적 시
각양식이나 시각적 합리성으로 포섭되지 않는 기괴하거나 신비스런 현상들
이나 비가시적인 힘들의 유전과 변이 현상들을 형상화, 또한 이에 대한 방법
론적 자각과 미학적 자의식을 밝혀내려는 시도를 뜻한다. 이 논문에서 논의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69
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로테스크를 우리들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하는 방식, 곧 인식 체계
의 뒷면에서 작동하는 어떤 정상성의 질서와 연관시킬 때, 그것은 기존 사회
질서와 존재 범주에 대한 도전과 전복의 시도로 규정될 수 있다. 또한 그로
테스크를 불가해성의 표지, 곧 우리 의식 내부로 수렴되지 않는 비가시적인
빈틈들이나 기존의 인식 체계로 수렴되지 않는 낯선 것들의 출현으로 규정한
다면, 반드시 함께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현대적 시각체제와 원근법적 시각
양식의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 자체가 이미 주어진 어떤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학습된 방식, 즉 그 사회의 정상성의 체계나 문화적 규범 내용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우리가 나날이 경험하는 일상적 시각
역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학습된 내용을 매개 삼아 이루어진
다는 인식론적 체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곧 어떤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당연시되는 ‘보는 방식’은 그 시대와 사회의 정상성의
체계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듯, ‘보는 방식’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한다.
둘째,
김수영의 시 가운데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시각적 직접성의 차원에서
전경화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끔찍스럽
고 흉물스런 시각적 장면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넘어서 괴물적인 것과 기형
적인 것이 환기시키는 잔혹한 비현실성이 명명될 수 없다는 당혹감, 곧 표상
불가능성이나 이해 불가능성, 그리고 사고 자체의 무능함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김수영의 많은 시편들은 그로테스크의 범주로 수렴될
수 있다. 특히 그로테스크의 어원적 맥락에 깃들어 있는 그로토(grotto)를 삶
과 죽음, 빛과 어둠, 그리고 지식과 무지의 공존이 돌출적으로 감지될 때 느
끼는 불가해성의 표지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김수영의 대다수의 시편
들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는 문제틀을 통해 새롭게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의 시편들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이미지들을 단지 끔찍하고 혐오
스럽고 낯선 것의 출현이라는 충격과 전율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존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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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 관념과 정치적 이데올로기, 나아가 미학적 통념과 지식 체계의 한계와
모순과 맹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미학적 전복과 새로운 미학의 기획이
라는 생성과 긍정의 차원에서 다시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김수영의 산문 문헌들에 나타난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인의 행동”
“폐인이나 광인. 아니면 바보” “굵고 억세고 날카롭고 모진 가시면류관” 같
은 표현들은 시각적 직접성의 차원에서 그로테스크의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 시각체제의 정상성의 원리를 작동시키
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체의 테두리를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
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빠짐없이 ‘신체적으로
잔인하거나 비정상적인’, 나아가 ‘일종의 갈등에 의존하’면서 ‘본질적으로 조
화롭’지 못하고 ‘심각한 일탈감과 소외감의 표현’이라는 그로테스크의 정의
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면모들을 지닌다. 곧 김수영의 산문에는 현대세계에서
시인과 예술가가 그 정상성의 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과 합리성의 타자
들, 곧 그로테스크를 개현시키는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 공화국의 치안과
질서로부터 추방되거나 고통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유가 집
약되어 있다. 또한 김수영의 이러한 사유가 예술적 방법론의 차원으로 나아
갈 때, 그것은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에 관한 정의를 전복시켜 벤야민이 새
롭게 제시한 알레고리와 만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추론된다.
넷째,
김수영이 수미일관하게 유지했던 “바로 보마”의 자의식은 현대적 시
각체제의 중핵을 이루는 원근법적 시각장이나 그것을 지배하는 정상성의 체
계, 곧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선의 테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외부에 편재
하는 끔찍하고 비속하고 잔혹한 한국사회의 역사적 현실의 제 양상들을 현시
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그의 시와 산문 문헌들 곳곳에서 그로테스크 이
미지와 알레고리 방법론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이 맥락 속에 깃들
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로 보마”의 자의식이 김수영 제 자신을 향할
때, 그것은 끔찍한 자기모독과 자기혐오를 극단까지 밀고나가는 마조히즘의
태도와 이미지가 나타났던 것으로 추론된다. 이러한 마조히즘 역시 현대세계
의 원근법적 시각장, 곧 이성과 합리성의 시선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부조리
김수영 시와 산문의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마조히즘의 문제 571
하고 비정상적이며 자학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
이미지나 알레고리 방법론으로 자연스럽게 연접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맥
락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활용된 그로테스크 이미지와 알레고리 방법론, 마조히즘의 심
리적 태도와 벡터라는 새로운 문제틀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단지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낯선 것의 출현이라는 정서적 충격과 전율이라는 심리적 차원에
서 해명하는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적어도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 있어서 이들이 맺는 상호 연동 관계는 기존의
도덕적 관념과 정치적 이데올로기, 그 미학적 통념과 지식 체계의 한계와 맹
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미학적-정치적 대안이자 일종의 이념적 좌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파편화된 삶의
양상들과 더불어 후진적인 현대 한국사회의 혼돈과 모순과 억압의 구조들을
고스란히 현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분투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
문이다.
또한 김수영이 그토록 강조했던 “언어의 윤리”와 “미학적 사상”이란
바로 저 분투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모색의 산물이자 그 실천의 기록물일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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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grotesque images and masochism in
Kim, Soo-Young's poem and prose
Lee, Chan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way in which grotesque images and
allegorical methodology are connected in Kim, Soo-Young's poem and prose,
and clarify major issues of modern aesthetics as the background of that.
Itmeans that he not only secured his aesthetic consciousness but also mastered
the methodology of (post)modern aesthetics and essence of the latest thoughts
from the place where he presented strange and mysterious phenomenons not
subsumed by visual form or rationality based on laws of perspective
representing modern visual system, and invisible forces and senses.
Kim,Soo-Young's several poetries and prose texts could be explained in a way
different from the past researches through the frame of grotesque aesthetics.
This frame will help us to analyze the inevitable context and aesthetic origin
from which horrible, repulsive and strange images are to be presented in his
works. Also it shows us the unknown facts that Kim, Soo-Young's poems and
proses not only used the cutting edge of aesthetic methodologies that made
him uncover the limits and blind points of the existing moral senses, political
ideologies, aesthetic notions and knowledge system but also strived for the
experiment of avant-garde form and the invention of style that can exceed them.
Key words : Kim, Soo-Young, grotesque, visibility, perspective, allegory,
masochism
논문투고일: 2016년 7월 28일∥심사완료일: 2016년 8월 21일∥게재확정일: 2016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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