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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보조자료 - 160727 마산 문화유산 답사회
전라남도 보성군은
역사적으로 마한에 속했으나 백제 근초고왕 때 병합되어 복홀군이라 칭하다가 통일신라 경덕왕때 보성군으로 개칭. 고려 성종 때 패주. 현종 9년(1018) 보성이라 칭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2읍 10면에 인구 46,000여명이다.
순천고인돌공원
선사시대 문화 유적인 고인돌군을 비롯 구석기 집터 신석기 및 청동기 움집 6동과 선돌 등을 주암호수변 17 000평 부지에 야외 전시장 유물 전시관 묘제 전시관 등 전국 최초로 조성된 고인돌 공원이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묘의 일종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 하나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어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총 140기의 고인돌은 순천이 109기 5개 고인돌군으로 가장 많고 보성 32기로 3개 화순 7기로 1개군등 9개 고인돌군은 상호 비교 가능토록 배치 복원했으며 화순지역의 구석기 집터는 타원형으로 문화층에서 기둥구멍 24개 강자갈 네모꼴의 구조물이 있다. 여천송도와 서울 한강변의 신석기 움집과 순천 도룡과 광주 송암동의 청동기 원추형의 움집이 원형대로 복원돼 시대와 지역간의 생활상을 비교할수 있다.
- 고인돌
자연석을 사용하여 지상 또는 지하에 매장시설을 만들고, 지상에 큰 돌을 윗돌[上石]로 놓아 덮개돌[蓋石]로 사용하고, 그것으로 동시에 유력자의 무덤임을 표지로 삼은 한반도 특유의 묘제(墓制).
고인돌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고대국가(古代國家)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구라파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도에는 강화의 부근리·삼거리·오상리의 약 120여 기(基)의 고인돌군, 고창 상갑리·죽림리 등 고창군 전역 205군집(群集) 총 1,665기의 고인돌, 화순 효산리·대신리의 고인돌 500여 기 등이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지석묘라고도 하며,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지배 계급의 무덤이다.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이 수십 톤이 되는 것도 있고, 청동기 유물이 함께 묻혀있기도 하다. 이것은 고인돌에 묻힌 사람이 청동기를 사용했으며,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므로 힘을 가진 지배자였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고인돌을 통하여 당시 사회가 계층이 분화된 계급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 그리고 호남 지방의 2만여 개를 비롯하여 약 4만여 개의 고인돌이 있다.
이에 2000년 유네스코에서는 전라남도 화순, 전라북도 고창, 인천광역시 강화도의 고인돌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서재필선생 기념공원 / 독립문 / 독립유공자추모탑 / 유물전시관 / 사당
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나 농촌의 풍경과 정서를 익혔으며, 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해 3일천하를 이룬 뒤 이의 실패로 망명 미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후 1895년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민중운동을 이끌어 오시는 등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근대화를 위해 열정을 다하시다 1951년 병석에서 우리나라 명운을 통탄하며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선생의 생전 위업을 기리고자 1992년 사업을 시작하여 사당건립, 송재로 개설, 실측모형의 독립문 건립을 통해 유적지로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각공원 조성, 유물전시관 건립, 생가 등이 복원되어 명실상부한 기념공원으로 가꾸어 졌다. 특히 서재필선생 생전의 유품 800여점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이 개관되어 국민교육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 주암호와 조각공원
보성군의 접경지역으로 호수가깊고 넓을뿐 아니라 보성에서흘러내린 보성강과 화순군의 동북천 및 용덕천이 합류되어 장쾌한 호반경관을 연출하고 있어 바다와는 또다른 낭만을 맛볼수 있다. 제암산 깊은 골에서 시작된 차고 맑은 물줄기는 보성 사람들의 목을 축이고 기름진 들녘을 넉넉히 적시면서 정자강과 명경지수의 보성강을 따라 주암호에서 남도의 주요한 식수원을 이룬뒤섬진강을 거쳐 남해로 흘러든다.
순천시 주암면 대광리와 구산리를 잇는 협곡에 지난 1984년 10월17일 착공해 1990년 4월부터 담수하기 시작한 주암 다목적 댐으로 인하여 보성, 순천, 화순 등 3개 시군에 걸친 거대한 인공호수가 조성되었는데, 우리군 문덕면 용암리와 덕치리, 죽산리 주변에 아름다운 호반 경관이 펼쳐져 있다.
* 벚꽃길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대원사 벚꽃길은 1980년에 조성하여지금은 터널을 이루어 매년 봄에 꽃이 피는 시기에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어 수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고, 더욱이 이 길은 2004년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할 정도로 전국적으로도 아름다움이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국가지정문화재인 대원사까지 벚꽃길이 이어져 있어 티벳박물과, 대원사 관람을 통한 불교체험을 할 수 있어 더욱 더 운치를 더해준다.
* 티벳불교박물관
• 전화 : 061-852-3038
수미광명탑은 티벳양식의 불탑으로 거섭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금을 입히고 탑신부에는 백옥을 장식한 15m에 달하는 매우 화려한 탑이다. 맞은 편의 박물관은 전통 티벳사원 양식으로 건축 되었으며, 티벳불교자료와 오래된 티벳사원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티벳불교자료와 오래된 불교탱화, 보석으로 쓴 불경, 밀교법규, 세밀화 등 티벳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1천여점의 종교예술을 만날 수 있다.
- 티벳불교
티벳불교는 라마교(Lamaism).
라마(Lama)는 덕이 높은 스승을 의미한다. 라마는 환생에 의한 계승을 원칙으로하고, 라마앞에 붙는 접두어는 큰 라마에 대한 존칭인데, 최고 지위인 '딜라이 라마'의 딜라이(Dalai)는 몽고어로 바다를 뜻한다. 티벳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관음(觀音)의 정토(淨土)라고 생각하는데, 그 통치자인 딜라이 라마를 관음의 화신(化身)으로 믿고 있다.
티벳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에서 고도로 발달한 교리와 밀교수행의 최종단계를 계승한 것으로 인도의 불교가 멸망한 뒤에도 독자적인 발전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대한 '티벳 대장경'과 티벳인이 남긴 저작에 있어서 티벳불교는 불교의 막대한 보고(寶庫)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티벳불교 유적과 미술품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져 인류 최대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달라이라마
티베트의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주
몽골어로 큰 바다를 뜻하는 '달라이'와 티베트어로 영적인 스승을 뜻하는 '라마'가 합쳐진 말로, '넓은 바다와 같이 넓고 큰 덕의 소유자인 스승'을 뜻한다.
티베트불교의 종파인 겔루크파(황모파)의 수장인 법왕의 호칭으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통치자이다.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입적하기 전에 환생할 장소를 예시하거나 신탁에 의해 환생할 달라이 라마에 대해 예시하기도 한다. 예시의 내용을 가지고 고승들은 후대 달라이 라마가 될 아이를 찾게 된다. 전대 달라이 라마가 환생했다고 여겨지는 아이는 그것을 확인할 시험을 치르게 된다. 전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기 전에 사용하던 염주와 유품들을 섞어 놓고 물건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최종 결정은 라싸의 조캉사원에서 행하는 의식을 통하여 선택된다. 이렇게 선택된 아이는 달라이 라마로서의 자질을 갖출 교육을 받고 18세가 되면 정식으로 달라이 라마에 즉위한다. 전대 달라이 라마 입적 후와 다음 달라이 라마가 즉위하기까지의 기간 동안은 티베트 승려 중에서 가장 덕이 높은 사람이 섭정이 되어 달라이 라마의 역할을 대행하게 된다.
2012년 현재 14대 달라이 라마는 텐진 가초(Tenzin Gyatso)로,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운 인물이다. 1935년 티베트 암도 지방의 농가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라모 톤둡이었다. 두 살 때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았으며, 1940년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공식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1년 '티베트 평화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을 통치하기 시작하자, 1959년 3월 중국 공산당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달라이 라마가 세운 인도 다람살라의 망명정부는 티베트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티베트의 외교ㆍ군사적 독립 대신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중도노선을 취하였다. 그리고 2001년 7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초대 총리를 뽑아 그로 하여금 망명정부를 이끌게 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퇴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2001년 8월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어 갈 첫 직선 총리로 삼동 린포체(Samdhong Rinpoche, 1939~ ) 전 국회의장이 선출되었고 2011년까지 망명정부를 이끌었다. 삼동 린포체의 뒤를 이어 그해 8월 롭상 상게(Robsang Sanay, 1968~ ) 총리가 취임하였다.
* 대원사 - 봉황이 깃든 천년 고찰
- 극락전 / 명부전 / 자진국사부도
- 태안지장보살상 / 붉은모자동자상
- 아도영각 / 황희영각 / 김지장전 / 부모공덕불
- 산신각 / 수관정 / 야단법구터 / 연꽃 연못
* 대원사극락전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87호
지정일
1981.10.20
소재지
문덕면 죽산길 506-8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규 모
정면 3간, 측면 1간, 맞배지붕
재 료
화강암
시 대
조선시대
대원사극란전은 천봉산 봉우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둔 정남향을 하고 있는 사찰로서 6·25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10여동의 건물들이 유존되고 있었으나 여순사건때 모두 불타버리고 거의 폐허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당시 극락전 건물만 남아있게 되었다. 사찰의 연혁을 보면 오랜 전통을 갖고있어 조선사찰사료에 의하면 초창(初創)은 신라지증왕시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후로 고려시대에 와서는 조계 제오세 원오국사(圓悟國師)가 중건하였고 조선조로 넘어와서는 영조 43년에 중건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 양벽면 상단에 관음보살상과 달마상이 있다.
* 명부전
조선시대(1776년, 조선 영조 42, 乾隆 31)에 색민(色敏)을 수석 금어(金魚)로 하여 명부전 봉안용으로 조성된 불화로 지장보살도 1점, 시왕도 10점[秦廣大王, 初江大王, 宋帝大王, 五官大王, 閻羅大王, 變成大王, 泰山大王, 平等大王, 都市大王, 五道轉輪大王], 사자도 2점[監齋使者, 直符使者] 등 모두 13점. 9폭으로 장황(粧湟). 을 보관중에 있습니다.
조성 이후 계속 보성 대원사 명부전에 보존되어 오다가 1946년에 불화는 광주덕림사로 옮겼고2003년 대원사로 돌아 와 200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4월 30일 보물 제 1800호로 지정.
현대[1948~한국전쟁기]에 이르러 지장도를 봉안한 지장전[명부전] 등이 불에 타고 극락보전만 남아 있다가 중창불사를 하였고. 벽화가 잘 남아 있는 극락전과 자진원오국사의 부도가 전라남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 대원사자진국사부도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35호
지정일
1973.04.21
소재지
문덕면 죽산길 506-8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규 모
총고 2.6m
재 료
화강암
시 대
고려시대
대원사(大原寺)에는 이기(二基)의 부도(浮屠)가 있는데 일기(一基)는 사찰(寺刹) 입구에 있는데 1982년 유실되었고, 자진국사(慈眞國師) 부도는 극락전 바로 오른편 원내에 유존(遺傳)되고 있다.자진원오국사는 송광사 제5세 국사로서 서기 1215년에 태어나 충렬왕 12년(AD 1286년)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을 조계산 송광사에 머무르면서 종사를 크게 떨쳤으며 한때 이곳 대원사에 주석(住錫)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부도의 조성도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대원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지정번호
보물 제1800호
지정일
2013.04.29
소재지
문덕면 죽산길 506-8
수량/면적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총 9폭
소유자(소유단체)
조계종
대원사 티벳박물관 소장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는 조선 영조 42년(1766년)에 조성한 것이다. 화기에 따르면 지장보살도는 비구나 묘성스님등이 돌아가신 어머니 정씨 영가를 위하여 대시주가 되었으며 시왕도의 지주자들도 대부분이 스님들로써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공덕을 빌고자 불사에 동참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탱화를 그린 금어(金魚 : 불화가)는 모두 18명 인데 모두 스님들로 구성되어 있다.대원사 티벳 박물관에 소장된 9폭의 조선 불화는 전라남도 문화재 전문위원의 심의를 거쳐 2004년 6월 12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66호로 지정 되었었고, 그 후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총 9폭에 대해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의 심의를 거쳐 2013년 4월 29일 국가지정 보물 제1800호로 승격 지정 되었다.
- 메타스쿼아길
- 이순신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다.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臣)’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동안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년(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선조 9)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부침이 심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이었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년(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인간의 주요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나 직위의 획득과 관련된 측면이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면 권력이나 재력도 그만큼 팽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년(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월 13일). 그는 나흘 동안(4월 16~19일)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 방진관
시설물 현황
• 위 치 : 보성군 보성읍 새싹길 81-10
• 규 모 : 1,031㎡(건축연면적 175.45㎡/안채, 사랑채)
• 준 공 일 : 2009. 7. 3.
전시․연출 현황
• 전시실 구성 : 4실
• 기 념 관 : 이순신 영정, 열선루 복원 예상도, 충무공 일대기 등
• 이순신실 : 난중일기 10일간의 행적, 1950년대 보성읍 전경사진 등
• 방 진 실 : 온양방씨 족보, 각선도본 전선, 충무공 팔사품 등방씨부인실 : 정경부인 교지, 이충무공전서중 방부인전 일화및 삽화 등
• 건물외벽 : 『방진관』현판, 방부인전에 나타난 방씨부인의 여성상 주련
• 담장외벽 : 이순신의 보성 12경길 그림타일 부착
* 한국차 박물관
• 규 모 : 지하 1층, 지상 5층
• 면 적 : 6,911㎡(대지면적), 1,263.11㎡(건축면적), 4,598.22㎡(연면적)
• 개 관 일 : 2010. 9. 11.
• 소장유물 : 224점 52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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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차박물관은 천혜의 차밭 경관과 인접하고 차에 대한 풍부한 컨텐츠를 담은 차 전문 박물관이다. 1층에 차를 이해할 수 있는 차 문화실, 2층 차의 발자취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시대별 차 도구 전시실인 차 역사실, 3층에 체험공간인 차 생활실로 구성하여 차의 모든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보성차와 더불어 한국차에 대한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차 문화 교류의 공간이다.
- 세계차 식물원
- 다향의 빛 / 시다의 여인상 / 소리체험관
- 천체천문관 / 청소년수련원 / 리조트
* 김구선생 은거기념관
쇠실마을은 보성에서도 깊은 골짜기에 속한 안동김씨의 집성마을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 지도자였던 백범 김구선생이 청년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하수인인 쓰치다를 맨손으로 죽인 후 체포되어 인천 감영에 있다가 탈옥하여 삼남지역으로 잠행하면서 찾아든 마을이다.
백범은 1898년 여름 무렵 이곳 김광언씨의 집에서 40여일 동안 은거하면서 지역민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어지럽던 시대의 그의 은거를 도왔던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광복 후 1946년 9월 보은의 방문을 하면서 더욱 빛나게 된다. 현재 쇠실마을에는 김구선생을 은거했던 김광언의 집이 남아있으며, 후손들은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김구선생이 건네준 역사책과 글을 보존하고 있다. 그곳에 백범선생의 정신을 기르고자 "백범김구은거기념관"이 만들어 졌다.
- 은거하신 집
* 해평리 석장승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55호
지정일
1984.02.29
소재지
득량면 해평리 564-2
규 모
상원당장군 고 230cm
재 료
화강암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보성군
이 석장승은 해평리 양(海坪里 朝陽)마을 초입 노변 좌우에 나란히 서 있다. 옆에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이 마을은 득량만 방조제(得糧灣 防潮提)로 얻어진 대간척 평야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이다. 윗마을은 정자골, 아랫마을이 벅싯골이며, 옛날에는 해창(海倉)이 있었다. 우측 높은 곳의 돌담사이로 서 있는 것이 여상(女像)인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고, 길건너 낮은 쪽 상석 위에 낮게 선 것이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으로 남상(男像)이다. 하원조장군은 관없는 민머리이고 이마엔 굵게 파인 주름살이 완만한 U형으로 두 줄 그어져 있다. 위로 치킨 눈썹아래로 눈꼬리가 관자놀이까지 치켜져 있고 퉁방울 눈은 쌍꺼풀로 쌓여 있다. 폭이 18Cm나 되는 커다란 주먹코엔 콧구멍이 선명하게 새겨져있고 윗입술이 불거진 긴 입을 지긋이 다물고 있다. 양쪽귀는 아주 선명하여 정교하게 새겨졌다. 굵은 다발 수염은 왼쪽가슴께로 휘어졌으며 두께 50Cm, 둘레 175Cm이다. 몸통전체는 사각 기둥형이다. 크기는 높이 230Cm, 가슴쪽의 폭 50Cm, 상원주장군은 관이 없는 민머리에 얼굴은 평면에 가까워 양감(陽感)이 적다. 이마엔 주름살이 선각되었고, 눈썹은 갈매기 모양으로 연결되었다. 원형의 굵은 눈 사이로 세개의 코주름이 새겨지고 코는 방망이 모양으로 넙죽한데 콧구멍이 뚜렷하다. 약간 벌린 입술사이로 치아가 희미하게 새겨졌으며, 수염은 없고 턱에는 인동문(忍冬紋)을 닮은 무늬가 새겨져있다. 이 장승은 해창(海倉)과 연관하여 주민들은 조세수송이 무사함, 바다에서의 안전, 마을의 액막이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원래는 '절골'의 개흥사(開興寺) 입구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고 전한다. 결국 이 장승은 불역(佛域)을 수호하는 기능에서 해창(海倉)과 연관한 관변장승 또는 공공장승의 역할을 하다가 해창의 기능이 다하고 간척지가 생긴 이후로 순박한 주민들의 평안과 액막이의 역할까지도 담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해창마을은 예전에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국사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밥을 얻어 먹는 마을신(神)은 위의 벅수들이었다.
- 장승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으며, 전국에 분포한다.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의 성기(性器) 숭배에서 나온 것,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 목장승은 솟대[蘇塗]에서, 석장승은 선돌[立石]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장성·벅수·법수·당산할아버지·수살목 등의 이름이 있다.
장승의 기능은 첫째 지역간의 경계표 구실, 둘째 이정표 구실, 셋째 마을의 수호신 역할이다.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에는 그것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고을 및 거리를 표시하였다.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표시도 없으며, '천하대장군'류의 표시도 없고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서 주로 액병(厄病)을 빌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남상(男像)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전면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상원대장군(上元大將軍)'이라 새겨 있으며, 여상(女像)은 관이 없고 전면에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하원대장군(下元大將軍)' 등의 글이 새겨 있다.
장소에 따라 채색·형상·크기 등이 다르나 모양이 괴엄(魁嚴)한 점만은 일치한다. 장승에 쓰는 장군명에는 민속적인 신명(神名)이 등장하는데 동쪽에 있는 장승에는 동방청제축귀장군(東方靑帝逐鬼將軍), 서쪽에는 서방백제축귀장군(西方白帝逐鬼將軍), 남쪽에는 남방적제축귀장군(南方赤帝逐鬼將軍), 북쪽에는 북방흑제축귀장군(北方黑帝逐鬼將軍)이라고 써서 세워, 축귀하는 민간 신앙의 성격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장승을 서낭당·산신당·솟대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며,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에는 제사를 지냈다.
* 보성 비봉리 공룡알화석산지
최초발견일: 1998년 9월
발견지역: 득량면 비봉리 선소마을, 청암마을, 일원
- 공룡-중생대 트라이아스기 후기에 시작하여 백악기말까지 번성했던 육상 파충류의 한 집단. 'Dinos'는 'deinos'라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무시무시한, 강력한'이라는 뜻을 가지고있으며, 'saur'는 그리스어 'sauros'에서 파생된 것으로 ‘도마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생대에 번성했던 파충류에는 공룡 외에도 수중에서 생활하던 수장룡, 하늘을 날아다니던 익룡이 있으며 모두 백악기 말에 멸종하였다.
*** 보성답사 여정 시정표
* 마산박물관 - 0 ' 0 K
- 고인돌공원 - 116‘ 164.5 K
- 서재필기념공원 - 6‘ 5.5 K
- 대원사 - 14‘ 8 K
- 방진관 - 45‘ 34.3 K
- 한국차박물관 - 12‘ 8.2 K
- 김구선생은거기념관 - 16‘ 10.9 K
- 해평리석장석 - 15‘ 8 K
- 비봉공룡알화석산지 - 14‘ 8.4
* 마산박물관 - 138‘ 177.6 K
* 벌교홍교 * 벌교 도마교 및 석비
* 봉천리5층석탑 * 옥마리 5층석탑
* 계산리 3층석탑 * 우천리 3층석탑
* 반석리 석불좌상 * 유신리 마애여래좌상
* 봉능리 석조인왕상
* 백민미술관 * 우종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