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 단심가 (전문 有)
1. 시조란
고려말기부터 발달한 한국 고유의 정형시이다.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왕조 영조 때에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원뜻은 시절가조,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다. 시조는 문학 부류의 명칭이 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므로,조선 후기에도 그 명칭의 사용은 통일되지 않아 ‘단가’,‘시여’, ‘신조’ 등의 명칭과 혼용되었다. 오늘날,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시조로는 이방원의 ‘하여가’, 정몽주의 ‘단심가’,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등이 있다.
2. 하여가와 단심가
<하여가(何如歌)〉“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조선이 개국하기 전 이방원이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옮은 시조로,포은이 이에 답한 것이 ‘단심가’이다. 설의법,반복법,직유법을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회유하고 있으며,새 나라를 건설하여 백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이방원의 여유와 정치가다운 기질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단심가(丹心歌)〉“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라.”
고려 말에 정몽주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응답하여 옮은 시조이다. 반복법과 점층법이 사용되었으며 ‘일편단심’이 주제이다. 이미 기울어 가고 있던 고려이지만 끝까지 굳은 결의를 지키려는 유학자의 자세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정몽주의 일관된 신념이 잘 나타나있다.
3. 태종 이방원과 포은 정몽주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였다. ‘하여가’를 옮어 포은 정몽주에게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굽힐 것을 권하였지만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하며 이를 거절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지교(후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에서 정몽 주를 살해하며,새 왕조의 건국에 공을 세웠다.)
정몽주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으며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 였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이자 명나라,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였다. 고려의 충신으로서 이방원의 ‘하여가’에 응답하는 ‘단심가’로 유명하다.
4. 생각해볼 거리
① 이방원의 ‘하여가’와 서태지의 ‘하여가’는 공통점이 있을까?
고려 말 이방원의 ‘하여가’에 이은 1993년 가수 서태지의 ‘하여가’라는 곡이 있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서태지의 ‘하여가’는 ‘어찌 하(何),같을 여(如),노래 가(歌)’로 한자가 같다. 이 중 이방원의 ‘하여가’는 ‘고려 사람인들 어떠하고 조선 사람인들 어떠한가. 만수산에 있는 드렁칡조차도 잘 살고 있거늘. 우리도 합심하여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내용이다. 요약해보 면,‘고려 사람이나 조선 사람이나 같으니 합심하는 것이 어떠냐’,혹은 ‘이 임금이나 저 임 금이나 똑같으니 새 왕조의 건국을 받아들이자’는 말이 된다. 서태지의 ‘하여가’에는 ‘변해 버린 건 필요가 없으니 이제는 널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가사가 있다. 해석해보면, ‘이제는 네가 있으나 마나 아무것도 못 느낀다’, 혹은 ‘네가 있으나 없으나 나에겐 상관없다’는 말이 된다. 서태지의 ‘하여가’는, 입으로는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 속으로는 ‘상관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곡에 애절함을 더한다.
이방원과 서태지의 ‘하여가’에는 모두 ‘이것이나 저것이나 똑같다’ 혹은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똑같으니 상관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여가’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이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서태지의 ‘하여가’의 공통점이 된다.
② 단심가 외에도 ‘일편단심’을 주제로 한 시조가 존재할까?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로 마주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켜지고 쓸릴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라.” 이는 《청구영언》,《악학습령》,《해동가요》,《가곡원류》등에 전하는 대은의 ‘불굴가’이다. 자신의 절개와 신념을 굽히지 않겠다는 무신의 곧은 절개가 비유법으로 드러나며,일편단심이 주제이다. 단심가와 불굴가는 단계적으로 의미의 극대화를 이루어나간다. 죽음 그 자체 혹은 그것을 넘어선 극한 상황을 묘사한 것과 가정적인 어법으로 임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조하는 것에서 구조와 의미가 일치한다. 단심가는 직설법을,불굴가는 비유법을 썼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세상에는 포은의 단심가만이 알려져 있고 대은의 불굴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5. 토론거리 -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나?
-> 정당화될 수 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려두면 안 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 최후의 충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려에 대한 충절이 높았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들이 끝까지 이성계를 비난할 수 있었고 이방원은 정몽주를 포섭하거나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이 왕자일 때 정몽주를 찾아가 포섭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정몽주를 제거하게 된 것이다.
또한,이성계가 낙마하여 부상을 당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살려둬야 하는 인물로 판단하고 평소와 같이 맞이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경계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정몽주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음으로, 정몽주가 이성계를 따라 조선 건국에 동참했다 하더라도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이성계 세력의 신진사대부를 정몽주 세력으로 증가시켜 조선 건국에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을 위해 정몽주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