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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6]
살며 생각하며
순 한글본 『용담유사』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다
『허선행의 한글아리랑』 중앙대교당 출판기념회
운암 변종제(신인간사 대표)
5월 15일 오후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출판기념회의 매개 도서인 『허선행의 한글아리랑』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은 많은 사람들 중에는 고려인들도 있었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유학 와 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날은 마침 스승의 날이자 제625돌 세종대왕 탄신일이었다. 책의 저자(조철현)는 우리 『신인간』 잡지 편집위원이다.
그런 인연으로 출판기념회를 중앙대교당에서 갖게 됐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축사를 하기도 했다. 축사에 나선 사람은 네 분으로, (나를 제외하곤) 모두 쟁쟁한 인사들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정길화),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승하), 독일 철학박사 학위자인 사단법인 글로벌 블레싱 상임대표(김진) 등과 함께 축사를 하게 된 나는 그 자체만으로 영광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지난 1월에 읽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용담유사』를 떠올렸다. ‘수운이 지은 하느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도올 선생께서 『용담유사』를 현재의 우리말로 재구성한 역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동학사상을 온존하게 후세에 전하고 있는 책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두 권이다. 이들 모두 수운대신사께서 직접 저술한 책이기에 그 가치가 남다르다. 그 중 『동경대전』은 순 한문으로 쓰였고, 『용담유사』는 순 한글로 지은 4․4조 가사이다.
수운대신사께서는 ‘깨우침’의 극대화를 위해 『용담유사』를 한글 가사로 지으셨다. 대신사님의 그 같은 의도는 적중했다. ‘동학의 노래’로 평가받는 『용담유사』는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가사라 금방 민중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즉, 19세기 중엽 이미 수운 대신사님께서는 우리 한글로 자신의 생각을 민중과 소통하겠다는 위대한 발상을 하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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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세계로 어떻게 뻗어 나아갔는가?
이 날 출판기념회를 통해 처음 선보인 신간 《허선행의 한글아리랑》은 ‘허선행’이란 사람이 30년 동안 우즈베키스탄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과 현지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친 삶의 여정을 다룬 책으로, ‘타슈켄트1 세종학당장의 우즈베키스탄 한국어교육 30년 기록 : 1992~2022’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92년 3월, 전남대 사범대 졸업 직후 은사의 권유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던 한 인물의 30년 기록을 통해 ‘한글 세계화’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직조한 책으로, 당시 27세였던 청년은 이제 57세의 중년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구촌 변방의 언어였던 한국어는 세계 중심의 언어로 바짝 다가서며 ‘꿈(Korean dream)의 언어’로 확장됐다. 그가 떠났던 길을 따라 KOICA 교사들이 미지의 땅으로 파견됐고, 30년 동안 그가 가르친 8,000명가량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 교사가 되어 ‘한글 세계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허선행’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고려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한-우즈벡 수교 30년 발전사, 현지 한인사회 형성사 등을 밀도 있게 다루면서 중앙아시아 한류 열풍과 현지 청년들의 한국어 학습 열기 등도 자세히 담아냄으로써 ‘제2의 허선행’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하는 신간으로, 책의 주제는 ‘우리 한글은 어떻게 세계로 뻗어 나아갔는가?’이다.
‘허선행’이란 인물은 그 젊은 나이에 월급은 물론 생활비 지원조차 한 푼도 없는 그곳으로 왜 떠난 걸까? 또 그곳까지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자비로 구입해서 떠났다고 하는데, 왜 그 같은 험난한 길을 택했던 걸까?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책을 읽어봐야 한다. 하지만 바쁜 사람들을 위해 책의 전반부 내용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광주한글학교 개교 30주년 기획전’은 이번 전시를 통해 광주 전남 지역 인사들이 광주 일보사를 중심으로 기금을 모아 1991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3개국에 한글학교를 건립했다고 소개했다.(41쪽)
• 사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많은 고통이 따랐다.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거쳐 결단에 이르기까지, 또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설득하고 신변 정리를 하기까지, 그리고 자식 고집을 어떻게 꺾으랴,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가 자신의 몫으로 물려준 재 너머 한 뼘 밭 을 팔아 여비와 일 년치 생활비를 마련해 주신 어머님에 대한 감사와 불효자가 된 아픔 에 이르기까지……. 다난했던 지난 몇 개월의 과정을 몇 마디로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75쪽)
• 충격이었다. 급기야 우슈토베 광주한글학교마저 문을 닫았다. 하바롭스크 한글학교와 알 말릭 한글학교에 이어 세 번째였다. 러시아의 하바롭스크 한글학교는 1991년 8월 개교 와 함께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문을 닫았다. 그가 많은 애정을 쏟았던 알말릭 한글학 교 또한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0월 학생들과 작별했다. 이어 1995년 7월 카자흐스탄 의 우슈토베 한글학교까지 사라지자 그는 한 달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가실 줄을 몰랐 다.(139쪽)
• 1996년 대우자동차 공장 준공, 1997년 아시아나항공 취항, 1998년 삼성 가전공장 본 격 가동 등 굵직한 경제교류사가 매년 새롭게 씌어졌다. 그와 비례해 우즈베키스탄 젊은 이들의 코리안 드림 열기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들의 첫 출발은 한국어 공부였다. 대학 의 한국어과 입시 경쟁률이 점차 높아졌고, 덩달아 한국교육원과 세종한글학교의 수강신 청도 급증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의 초급반 신청이 많아 고려인 위주였던 교실 문화에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188~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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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 블라디보스토크 교구장의 이름을 발견하다
책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책 속에서 반가운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허선행의 한글아리랑》 100쪽에 있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내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입니다만, 원동 살 때 김치보라는 분이 1920 년대 초반쯤 경성엘 다녀와서 하는 말이 경성 사람들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노래로 대 화를 나눈다고 해서…….” 이 교장이 잠시 말을 끊고 헛기침을 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더니, 우리 함경도 사람들은 혓바 닥에 뼈가 들었는지 말이 세서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싸움박질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경성 사람들은 싸움박질도 창가를 하듯 아주 나긋나긋하게 댓거리하더라고, 그래서 듣 기가 좋았더라는, 그런 말씀을 종종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불술기(기차) 화통 삶 아 먹은 돼지 멱따는 소리 대신 아리랑 가락처럼 살살 녹는 목소리로 우리를 가르칠 한 국 선생님이 오셨으니, 여러분 참 좋지요?”
이 문장에서 등장하는 ‘김치보 선생’은 1920년대 초반 우리 동학 천도교의 블라디보스토크 교구장을 지내신 분이다. 그리고 책이 소개한 김치보 선생의 경성(서울) 방문 일화는 1922년 4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천도교 청년회 연예단’ 21명을 이끌고 국내를 찾았던 그 얘기라 더욱 반가웠다.
당시 김치보 선생이 이끈 천도교 청년 연예단은 4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8월 10일 돌아올 때까지 원산, 경성, 개성, 평양, 정주, 선천 등 27개 도시에서 총 35회의 공연을 했다. 이때 김치보 선생은 해삼위천도교교구장과 연예단 고문자격이었다고 한다. 1922년 5월호 『천도교회 월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월 21일은 매우 따뜻한 날이었다. 마침 원산으로부터 전보 한 장이 회관에 와 떨어지니 그가 곧 멀리서 온 해삼위 형제로서 보낸 ‘금야칠시입경(今夜7時入城)’이란 전보였다. 네댓 명이 청량리로 향하였다. 남대문 표를 사가지고 구내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차는 와 닿았다. 마침 러시아 학생복 입은 이 한 아름을 발견하였다. ‘아, 이들이로구나!’하고 손을 내밀며 ‘당신 해삼위에서 오신 이 아니요’하고 물으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선뜻 손을 주면서 반가운 중에도 조금은 슬픈 빛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들과 반가운 악수를 서로 교환하고 자리를 정하여 앉은 뒤 서로 그리웠던 손님과 주인의 정겨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일행 중에는 김치보라는 노인이 있다. 7순의 고령이나 씩씩하고 건강 활달하기로는 청년을 능히 압두할 만하다. 시베리아의 대표적 인물로 얼마 전에 노인단 단장으로 천여 명의 두목이 되어 민족을 위하여 공헌한 일이 많다고 하며 지금 해삼위 교구 교구장의 직에 있는 바, 이번에 연예단의 고문으로서 모국의 땅을 죽기 전 한 번 더 밟아보게 되었다 한다.
김치보 씨의 말씀을 듣건 데 본래 평양인으로 청년시대에는 서울에 머물기를 십여 년 하여보고, 구한국시대 관직도 몇 년간 하였다 한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30년 전에 모국을 떠나 멀리 이역을 향하였다고 한다. 지난 십 수 년에 혹은 시베리아 혹은 서북간도에서 별의 별 험난한 일을 겪어보고 최후로 우리 천도교의 올바름을 깨닫고 만년의 위안이나 얻을까 하여 또 이것이 인생으로의 정도임을 깨닫고 작년 봄에 비로소 천도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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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 허선행에게서 김치보 선생의 체취를 느끼다
당시 경성을 찾은 연예단은 중앙대교당에서도 공연을 했다. 대교당이 완공(1921)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나는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허선행의 한글아리랑』 출판기념회를 보면서 책 속에 나오는 김치보 선생의 100년 전 중앙대교당 공연을 떠올리며 묘한 감흥이 일었다. 100여 년 전 연해주로 떠났던 김치보 선생과 30년 전 중앙아시아로 떠났던 허선행 선생이 감동적으로 겹쳐졌고, 김치보 선생이 중앙대교당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청년들을 묵묵히 바라봤을 눈빛과 오랜만에 일시 귀국해 출판기념회 무대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는 허선행 선생의 눈빛이 적절하게 오버랩되며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 김치보 선생은 한 때 백산소학교를 운영하며 민족 교육에 헌신하셨던 분이라 이번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인 허선행 선생이 마치 김치보 선생으로 환생한 느낌까지 들었다. 다음은 김치보 선생이 민족 교육에 힘쓰며 하셨던 말씀으로 우리 동학 천도교가 일찍이 얼마나 귀중한 역할을 많이 했는지를 잘 알게 하는 대목이다.
“1921년 신년을 맞아 제군은 각성하시오. 긴 잠에서 깨어나 자제의 교육에 힘쓰시오. 교육이 없는 사람은 실력이 없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아서 가령 대통령과 같은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여도 하등 효력이 없습니다.”(1921년 1월 1일 신년회 말씀 중)
이날 출판기념회 소식은 많은 언론에도 보도됐다. 연합뉴스TV는 현장 취재를 나와 그날 밤 ‘스승의 날’ 기획 뉴스로 10차례 이상 방송을 함으로써 천도교 중앙대교당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또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동학 천도교와 중앙대교당을 직접 소개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날 출판기념회 참석자들 중에는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이욱헌 전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비롯, 구광일 외교부 서기관, 김익기 동국대 명예교수, 임영상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한영수 고려인의꿈 재단 이사장, 김병학 월곡 고려인문화관 관장, 이상기 아시아기자협회장, 유병욱 순천향대 국제교류처장, 이명학 전 성균관대 사범대 학장 등등 이들 모두는 저자인 조철현 작가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거나 허선행 선생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이날 사회를 본 이다슬 아나운서는 내 축사에 앞서 아래와 같이 우리 동학 천도교와 중앙대교당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축사 마지막 순서로 변종제 신인간사 대표님을 모시고 축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는데요, 신인간사가 발행하는 월간 『신인간』은 1926년에 창간된 국내 최장수 잡지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행사를 열고 있는 이곳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00년 전 '어린이날'을 제정한 세계 어린이 운동의 산실이자 『개벽』과 『신인간』을 창간한 근대 문화운동의 산실입니다. 또 연해주 교구를 통해 1920년 러시아 극동 지역의 신한촌 고려인들에게 한글 보급을 지원한 산실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 속에서 오늘 『허선행의 한글아리랑』 출판기념회를 이 뜻깊은 장소에서 열게 되었는데요, 특히 오늘 행사를 이곳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여러 도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큰 박수로 변종제 대표님을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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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를 통해 동학 천도교의 참 가치를 알리다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축사를 했다.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 받은 신인간사 대표 변종제 인사드립니다. 사회자님께서 천도교와 우리 잡지 『신인간』에 대해 워낙 자세히 소개해 주셔서 제가 드릴 말씀이 없게 됐습니다.(웃음) 사회자님께 감사드리고요, 책의 주인공이신 허선행 선생님과 책을 쓰신 조철현 작가님께 축하드립니다. 조철현 작가님은 우리 『신인간』의 편집위원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뜻 깊은 행사를 이곳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갖게 됐습니다.
대교당 벽 쪽으로 보시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날 행사 관련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은 우리 천도교인으로서 3세 교조이신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님의 사위입니다. 그 분이 100년 전 우리 천도교를 중심으로 어린이날을 만들었습니다. 그 뜻깊은 해에, 또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는 시기에 『허선행의 한글아리랑』 출판기념식을 이곳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갖게 돼 저 역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조철현 작가로부터 책 내용을 미리 들었습니다. 허선행 선생님의 업적은 100년 전 우리 동학 천도교가 했던 바로 그 업적과 정말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중앙아시아로 들어가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신 행보는 조금 전 사회자께서도 소개해 주셨듯이 과거 우리 천도교가 연해주 교구를 지원하며 그곳에서 신문명 운동을 펼쳤던 것과 같은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모국어를 배운 고려인들이 지금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튼튼한 가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익힌 그분들이야 말로 『신인간』이고,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개벽』 1세대들입니다. 오늘 책을 받았으니 좀 더 꼼꼼하게 일고 많이 공부하겠습니다. 우리 한글이 세계로 어떻게 뻗어나갔는가를 다룬 책이라 한글 세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 젊은 학생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 제2, 제3의 허선행 선생님 같은 분이 많이 배출되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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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현 작가, 교령사 방문해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출판기념회를 마친 지 일주일 뒤 조철현 작가가 천도교를 방문해 나의 안내로 교령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 자리에서 박상종 교령님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유산 두 가지가 있다”면서 “그 하나가 한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하늘이라고 말씀하신 동학사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조 작가는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좋은 비유로 빗대 주신 교령님께 감사드린다”면서 “조만간 현지 출판기념회를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하는데, 그동안 변종제 신인간사 대표가 여러 차례 독려한 바 있는 고려인 대상 중앙아시아 포덕에 적극 힘을 보태겠다”고 화답했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민중의 깨우침을 극대화하기 위해 순 한글로 『용담유사』를 저술하신 수운 대신사님의 혜안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또 블라디보스토크 교구장이었던 김치보 선생의 행적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게다가 방송과 언론을 통해 우리 동학 천도교를 알릴 수 있었고, 행사에 참석한 여러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동학 천도교의 가치를 재삼 일깨울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출판기념회를 허락한 중앙총부에 감사드리고, 조철현 작가와의 만남에서 우리 한글의 우수성과 동학사상을 좋은 비유로 빗대 설명해 주신 교령님께도 감사드리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