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중도의 존재론적체계 - 1.불타의 진리관
1.불타의 진리관
전술한 바와 같이 불타는 당시의 모든 사상을 邪見이라고 배척한다.그리고 자신은 팔정도라는 正道를 통해 正覺을 성취했으며, 따라서 자신이 깨달은 연기법은 正見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불타는 무엇을 기준으로 正邪를 구분짓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자신의 깨달음이 진리에 대한 진정한 인식(正覺)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가 불타의 인식론적 체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와 같은 불타의 진리관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正과 邪의 원어인 'samma' 와 'miccha' 의 뜻을 살펴보면, 'samma'는 일치하는, 통일된 , 결합된(going along with, united, combined) 을 의미하고, 'miccha' 는 상반되게, 전도顚倒되게(contrarily, invertedly)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일치할 수 있는 것이 正이고, 서로 상반되는 것은 邪라고 할 수가 있다. 외도들의 사상이 사견이라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상반된 주장을, 다시 말해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연기설이 정견이라는 것은 연기설이 누구나 일치할 수 있는 모순 없는 견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불타가 자신의 수행법을 正道라 하고, 깨달음을 정각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수행법인 팔정도는 누구나 일치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고, 자신은 그 방법을 통해 누구나 일치할 수 있는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正이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인식을 해도 항상 일치된 인식을 가져다주는, 즉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을 지닌 지식이 진리라고 할 때, 정은 바로 이같은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을 의미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타는 어떤 지식을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그리고 모순 없는 지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다시 말해서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구별할 수 있는 진리의 시금석이 무엇인지가 문제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M.N.95.Canki_Sutta에서 발견된다. 이 경에서 바라드바자라는 바라문이 바라문들의 견해만이 진리이고, 이와 다른 견해는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하자, 불타는 그같은 주장은 한낱 신념일 뿐 진리가 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이에 바라드바자는 자신들의 주장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베다의 전설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타는 신념과 마찬가지로 베다의 전설도 진리의 시금석이 될 수는 없다고 반박하면서 우리가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바라드바자여, 두 가지 결론을 갖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신념, 기호, 종교적 권위를 지닌 전설, 논리적인 추론, 사변을 통한 독단적인 사상의 승인, 이들이 두 가지 결론을 갖는 다섯 가지 법이다. 바라드바자여, 어떤 지식이 전적으로 믿음이 간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든다고 해도,
전설과 일치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잘 추론된 것이라 해도, 사변을 통해 승인한 이론과 일치한다 해도, 거기에는 진실이 없을 수 있고, 공허한 것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한편 전혀 믿어지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고... 사변을 통해 승인한 이론과 틀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진리일 수도 있다.
이 경에서 보여주듯이 불타는 신념이나 기호와 같이 주관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인정되고 있는 지식이나, 모순 없이 추론된 논리에 의해 얻어진 지식 그리고 사변적인 형이상학까지도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이들은 어느 것이나 그와 상반된 견해를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지식을 가지고 그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진실을 수호하는 일이 되지 못하므로,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이 신념에 의한 것이면 '나의 신념은 이러하다' 고 말하고, 자기의 지식이 추론에 의한 것이면 '내가 추론한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즉 진리의 추구에 있어서는 우선 우리의 마음가짐이 진실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그것이 모순 없는 진리인지를 인지할 수 있는가를 묻는 바라드바자에게 불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바라드바자여, 어떤 비구가 마을이나 도시에 의지해 살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거사는
"이 존자는 탐진치에 마음이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안다'고 하고 있거나, 보지 않고서도 '나는 보았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그 비구를 시험해 볼 것이다.
이렇게 시험해 보고 나서 그 비구에게 탐진치가 없음을 알게 되면, 그는 "이 존자가 설하는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현명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법일 것이다. 그것은 탐진치가 있는 사람이 가르칠 수 있는 법이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시험해 보고 나서 그는 그 비구를 신뢰하고 믿음이 생겨, 가까이 가서 법을 듣고, 그것을 기억한 후에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고, 그 법을 승인하게 될 것이다. 법을 승인하면 의욕이 생기고, 의욕이 생기면 힘을 기울이고, 힘을 기울이면서 사량하고, 사량하면서 매진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비구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 최고의 진리(第一義諦)를 작증하고 지혜(반야)로 그것을 통찰하게 될 것이다. 바라드바자여, 이렇게 할 때 진리에 대한 인지가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진리를 인지하고, 또 이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인지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리의 성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라드바자여, 그 법을 따라서 修習하고, 끊임 없이 실천할 때 진리의 성취가 있게 된다.
이 경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불타가 제시한 진리의 시금석은 실천을 통한 체험이다. 체험만이 명증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불타가 논리적인 사유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리적인 사유를 불가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천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적이고 의미있는 것인가를 심사숙고해서 스스로 승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적인 사유는 실천을 위한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타는 진리에 대한 인식이 진리의 성취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불타에게 있어서 진리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며, 실현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통해서 진리는 인식되고 체험되며, 그 진리는 어떤 내용이기에 실현해야 할 당위성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같은 문제에 초점을 두고 불타의 인식론적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댓글 "내가 생각하기로는.." 하고 말해야 할 터인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
논리적으로 잘 추론된 것이라 해도, 사변을 통해 승인한 이론과 일치한다 해도, 거기에는 진실이 없을 수 있고, 공허한 것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쉽게 수긍할 수 있을까요? 요는 상반된 견해를 허용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 그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란.. 이치적으로 맞고, 수행으로 타당함을 경험하고, 삶에서 틀림 없음이 증명되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 다시 말해 진리란.. 밖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