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카페의 학실한(?) 자극제 역할을 하시는 '상관완아' 님의
글을 대하고 이제하씨를 정리합니다.
이거 이러다가 '정리의 달인'이 되는 거 아닌가 모르거씀돠~~.
우짜둔둥,,, 일단 함께 나누자구요.
김사인 교수의 문학편지2 (이제하/권오룡)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강연일시 : 2003년 5월 23일(금) 19:00 ~ 20:30
김사인(이하 김) : 안녕하십니까? '문학이야기'의 김사인입니다. 날씨도 더운데 이렇게 많이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말씀드렸다시피, 독보적인 문학적 개성과 기품의 작가 이제하 선생님을 모시고, 평론가 권오룡 선생님의 도움 말씀을 같이 들으면서 강좌를 시작할까 합니다. 이제하 선생님 나와 계십니다.(함께 박수) 권오룡 선생님 나와 계십니다.(함께 박수)
시작에 앞서서 그래도 제가 간략하게 몇 가지 사항을 소개 드릴까 합니다. 이제하 선생님께서는 경남 밀양에서 1938년에 나셔서, 주로 유소년기를 마산에서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말경에 서울로 유학을 오셔서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에 앞서서 1950년대의 <학원> 문단 -연세 드신 분들은 아마 <학원>이라는 잡지를 기억하시리라고 믿지만- 이라는 게 참으로 대단했던 시절이었다고 들어서 알고 있는데요. 그 학원 문단을 주름잡던 몇몇 기린아, 요즘 말로 하면 전국적인 스타 중의 한 분이 이제하 선생님이었다고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
그래서 1956년에 동화로 등단하셨고, 이듬해 {현대문학}을 통해서 시로, 또 같은 해에는 {신태양}지를 통해서 소설로 등단을 하셨고, 또 한두 해 뒤에는 신춘문예를 통해서 다시 소설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1973년에 들어서야 선생님의 첫 창작집 {초식}이 간행되었는데, 이 창작집은 문단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주었던 창작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5년에 제9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시는데, 그 수상작이 바로 오늘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하 [나그네])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제하 선생님의 작가적 개성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대표작들, 예를 들어 첫 창작집 {초식}에 들어있는 [초식], [유자약전], 이런 작품들에 비해서 오히려 [나그네]는 선생님 자신이 '한 발 물러서서 창작에 임한 작품' - 어떤 뜻으로 물러서셨는지 다는 모르겠습니만, 짐작컨대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해보겠다는 의욕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이라는 것을 수상소감에서 밝혀놓고 계십니다.
이 뿐 아니지요, 이제하 선생님께서는 음악, 미술, 문학 등 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서 그 독특한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선 이쯤 하고, 진행하면서 또 보충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학평론가 권오룡 선생님께서는 작품에 대한 아주 섬세한 감식안과 빈틈없는 논리로 소문이 나 있는 평론가입니다. 그래서 글의 밀도가 높은 만큼 과작(寡作)이신 평론가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불문학자이시고, 계간 <문학과사회>의 오랜 편집동인이셨습니다.
이제하 선생님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제하(이하 이) : 요즘 소설은 좀 뜸해졌어요. 집(작업실) 근처에 카페를 하나 만들어서 운영하는 데에 재미를 들여서 지내요. 조금 있다가 카페가 안정이 되고 그러면 슬슬 다시 소설을 쓰려고 그래요.
김 : 여러분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는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시리즈가 있는데, 그 시리즈의 등록상표에 해당되는 것이 시집 표지의 시인 소묘(캐리커쳐)입니다. 200권을 훨씬 넘어섰는데요, 그 시집들 표지 그림의 반 이상이 이제하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을 내고 싶은 첫 번째 이유로 그 근사한 캐리커쳐를 드는 분들도 있구요. 또 이제하 선생님의 말(馬) 그림은 아주 독보적인 한 세계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제하 선생님이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최근에 '마리안느'라는 카페를 평창동 쪽에서 운영을 하고 계시고, 또 몇 해 전엔 자작곡과 기타 반주를 곁들여서 음반까지 내셨습니다. 그래서 '참 요즈음처럼 각박한 시절을 이렇게 근사하게 견디는 분도 계시는구나' 하는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권오룡 선생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권오룡(이하 권) : 저도 동감입니다. 이제하 선생님을 항상 뵐 때마다 소설에서도 항상 새로운 모습(경지)을 보여주시고, 가끔 소식을 들어보면 항상 젊고 새롭게 살아가시는 것 같아서 '어쩌면 저렇게 살아가실 수 있을까?' 라고 항상 부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김 : 우리 참석자들의 복장의 차이를 한번 보세요. 이제하 선생님께서는 단연 예술가이시고, 저희 둘은 어디 관청에서 근무하다 나온 사람 같은 복장입니다.(함께 웃음) 이게 아마 이제하 선생님이 평생 잃지 않고자 애써오신 자유로움, 자유에 대한 열망, 이런 것의 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격적인 순서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이제하 선생님께 [나그네]의 한두 페이지쯤 읽어주십사는 부탁을 사전에 드렸는데요. 한 번 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 이 책은 문학동네에서 소설전집으로 나온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라는 표제의 책인데요. 29페이지를 읽겠습니다.
'강릉 시내로 나오자 잘못 내린 터미널 쪽으로 한 마장 가량을 그는 걸었다. 거기서 또 한 번 생각을 바꿔 속초행 표를 다시 끊을까, 이대로 양양에서 갈리는 내설악 쪽 길을 택할까, 그는 주저했다. 속초를 새삼 떠올린 것은 륙색의 사내와 그 작부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들여다볼 수 있으면 경찰서라도 기웃거리고, 진부령을 넘어 원통으로 빠질 심산이었다.
일단 양양까지 표는 끊었으나, 칫솔질을 거른 듯한 개운찮은 심사로 빵과 음료를 아침 대용 삼아 사들고 그는 무연히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신혼길에서는 그렇게나 청결해 보이던 시가지가 십여 년 뒤에 보니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 동안에 도시가 변모했다는 것보다는 두 개의 그 서로 다른 모습이 순전히 자신의 마음 탓이란 걸 조만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짧다면 짧다고 할 수밖에 없는 세월 동안에 그토록 깊이 패인 그 마음의 수렁이라는 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는 헤아릴 길이 없었다.
아내에 대한 연민이거나 아내가 없어진 세상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이 혹은 그 계기였을 수도 있다. 그런 몸을 해 가지고도 아내의 생활력이랄까 삶에 대한 집착은 억새풀처럼 끈질기고 강했다. 몇 번이나 유산을 하면서도 아내는 계속 임신하기를 바랐고, 나가떨어지기 직전까지도 두 손에서 들 것을 놓지 않았다. 자리 보전밖에 안 되는 상태로 해를 넘기기 시작하면서 매사에 신경질이 는 것도 그런 집착의 한 변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느니 나가서 콱 결단을 내 버리겠어…….
눈을 흡뜨고 그런 트집을 부릴 때, 그래 죽어…… 라고 윽박지른 적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말을 진심으로 속에서 뇌까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따위 폭거를 감행할 심사가 어떻게 아내에게 깃들었을 것인가.
"오늘 차 끝났어요. 약수리까지밖에 못 가요." 양양 터미널에 내려 들여다본 창구 너머에서 아가씨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돈을 들이민 채 넋이 빠져 그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여기까지만 읽을게요.(함께 박수)
김 : 역시 인쇄된 소설을 눈으로만 보는 경우와 그걸 소리내서 읽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작가가 썼을 때의 호흡을 살려서 직접 읽어주는 것을 듣는 느낌은 또 다르겠다 싶고요. 읽어주신 부분은 소설 전체의 흐름 속에서 어떤 대목이 되겠습니까?
이 : 이게 노인을 데리고 휴전선 가까이로 간 간호사 일행이 떠나고, 주인공이 자기 아내 뼈를 뿌리려고 강릉, 속초, 원통 이런 쪽으로 헤매는 대목인데, 그 과정에서 죽은 아내에 대한 일종의 회상이 삽입되는데요. 이게 상당히 중요한 모티브가 되지 않나 싶어서 골랐습니다.
김 :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서울에 살고 있는 말단 공무원이죠. 독학으로 5급 공무원 시험을 쳤던(지금으로 하면 9급이나 10급 공무원이 되겠습니다만) 사람이고, 3년 전에 상처를 하구요.
이 : 유골을 무심하게 집안 어디에다 처박아두고 있다가, 휴일을 맞아서 문득 바람도 쏘일 겸해서 동해안 쪽에 유골을 뿌려버리자는 생각에서 길을 떠나는 공무원의 얘기죠.
김 : 읽어주신 김에, 이어서 이 작품의 창작 동기며 창작 과정을 좀 들려주시죠?
이 : 아까 김 선생이 '한 발 뒤로 물러선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이것은 제가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아마 했던 말 같은데요. 이 '한 발 물러선다'는 얘기와 관련해서 이 작품은 내가 그때까지 해오던 어떤 실험적인 장치들이나 시도들을 조금 유보를 한 채,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시나리오 쓰는 듯한 심사로 썼던 소설이에요.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기승전결의 법칙을 따르면서 얘기의 진행을 따라가보자,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사건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보자, 이런 식의 입장을 채택했기 때문에 아마 '물러선다'는 표현이 나왔을 겁니다.
그래서 공무원이 아내의 뼈를 뿌리러 터미널에서 출발해서 강릉, 속초 등지를 헤매고, 나중에 중간에 간호사를 만나서 일탈하는 과정을 쭉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간호사와 헤어지면서 결말이 나는데, 이런 식의 기법을 그때 왜 차용했느냐 하면, 사실은 그때 이 소설을 쓰던 무렵이 1983년인가 그랬어요.
김 : 1985년 {현대문학} 1월호에 발표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 그런데 그 무렵 소위 이념권 쪽으로 상당히 대세가 기울어져 있던 게 문단 풍토였어요. 그리고 그쪽에서 즐겨서 차용하는 기법이 소위 리얼리즘 기법이에요. 아마도 우리 현실을 제일 정직하게, 자세하게, 절실하게 담아내는 기법이 리얼리즘이 아닌가 싶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 리얼리즘이라는 것도 그 범위가 간단치가 않는 거지요. 앞에 붙는 수식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그 무렵에는 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과 구 소련 쪽에서 즐겨 차용하던, 그런 기법으로 상당히 대세가 기울어져 있었어요.
그러면 여태까지 하던 실험적인 기법을 잠시 유보를 하고, 그 쪽 기법을 차용하면서 다른 얘기를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시점이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도 물론 바닥 인생 출신이고, 그런 공감대에서 문학을 해오긴 했습니다만, 그쪽에서 주장하는 그런 것만 가지고는 우리 문학의 활로(돌파구) 같은 게 열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것도 좋지만 여러 가지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생각들이 싹트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럼 당신들이 하는 기법을 나도 한 번 써보겠다는 식의(도전의식은 아니지만) 생각에서 비교적 리얼리즘적인 기법을 차용했지요. 시나리오 같다고 한 것도 아마 그 맥락일 거예요.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원인과 결과가 치달으면서 쭉 연이어지는 기법이 영화 초창기에도 많이 쓰이던 아주 전형적인 기법이죠. 시나리오 쓰듯이 써보자고 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김 : 실제로 이 작품은 영화화되지 않았습니까?
이 : 예, 영화가 됐는데, 시나리오도 이장호씨에게 다시 써줬는데, 그것도 대동소이해요. 내가 이미지를 조금 더 넣었는데, 예산 때문인지 이미지들이 다 사용이 안 되고, 소설과 같은 식으로 영화에서도 진행됐죠.
김 : 그때 주연을 했던 배우가...
이 : 처음에는 안성기씨로 내정이 됐는데, 안성기씨가 그때 주가가 올라서 출연료를 많이 달라고 하고, 이장호씨는 태흥영화사 소속이었기 때문에 예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돈(개런티)이 없으니까 김명곤씨로 대체를 했던 것 같아요. 이보희씨는 원래 내정이 돼 있었구요.
김 : 흥행은 어땠습니까?
이 : 흥행에는 참패를 했습니다.(함께 웃음) 열흘인가 허리우드 극장에 걸렸다가 내렸는데, 이장호씨 작품 중에서 밖에서도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고, 제일 높이 쳐주는 작품이 되어 있습니다. 동경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고, 베를린영화제에서 칼리갈리상도 받고, 서구쪽에서는 시간의 진행이라든지 이런 여러 가지 기법이 알랑 르네([히로시마 내 사랑] 감독)라는 감독과 비교를 해서 논평을 할 정도로 그 쪽에서는 이장호씨 작품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아주고 있어요. 우리 나라에서는 흥행도 참패하고 비디오점에서 대여 순위도 아마 제일 꼴찌일 거예요.(함께 웃음)
김 : 그런데 선생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80년대 우리 문단의 주류적 분위기가 이른바 사회 의식, 역사 의식을 강조하고, 민중 지향적인 리얼리즘 문학 등의 이름으로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이 상대적으로 강조되던 시대인데, 그 무렵 선생님의 앞 작품인 [초식], [유자소전] 같은 작품들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어땠습니까?
이 : [초식]은 그때 이념권 쪽 비평가나 그렇지 않은 비평가들이나 이구동성으로 비교적 호평을 했던 작품이에요. 어떤 비평가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예견했던 작품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던 기억도 나요. 그때가 아주 다급하던 때에요. 박정희 정권이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독선적인 폭정으로 밀어붙이고 재단하고 하면서 사람들을 못 살게 굴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인간의 속에 있는 어떤 강력한 권력 욕망, 권력 의지 이런 것의 아주 노골적인 발로였죠. 그런데 [초식]의 줄거리나 테마가 그 진행을 따라 갔다고 보고, 그래서 이 작품이야말로 저항소설의 하나라고 높이 평가해주는 비평가도 있었고, 김현씨 같은 경우는 그게 상징화되고 예술적으로 잘 변형이 되었다고 해서 그런 쪽에서 호평을 해주고 그랬어요.
[유자약전]은 실험적인 요소가 강해요. 그래서 난해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 위주의 소설이기 때문에 상당히 좋다고는 하면서도 이념권 쪽에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했죠. 이념권 쪽의 논리 속에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지 애매해서 아마 침묵했던 것 같아요.
김 : 그 무렵에(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제하 선생님 소설은 굉장히 읽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는 그 중 아주 수월하게 읽히는 작품이고요, 그런가 하면 마치 이제하 선생님께서 '야, 이 사람들아, 내가 당신들 것 같은 소설 못 써서 안 쓰는 줄 아느냐? 봐라, 당신들 식으로 나도 얼마든지 이렇게 쓸 수 있다', 그렇게 시위를 하신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 : 나도 아주 가난하게 자라왔고, 사회 밑바닥의 인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서 그 무렵에 상당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지금도 많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만, 가령 작가 자신이 심오한 진리나 테마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제대로 찾지 않으면(대중들이 호응을 못 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식의 회의가 그 무렵에 상당히 심각하게 싹트지 않았던가 싶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대중들의 호응이 가능할 형식을 찾아보자는 심산에서 이 작품이 씌어졌던 것 같아요.
김 : 그리고 {용}이라는 창작집 속에 있는 몇몇 작품들도 그런 것이죠?
이 : 예, 그런데 저는 미술대학에서 표현주의라든지 초현실주의라든지 하는, 서구 쪽의 상당히 전위적인 흐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걸 문학 쪽으로 전이시키면서 문학으로 서로 삼투하려는 식으로, 기법을 서로 보완하면서 써왔어요. 그래서 이미지 위주의 소설로 나타나니까 독자들이 어려워했는데, 지금 독자들에게는 아마 어렵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텔레비전이나 영상매체들이 무수한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다반사로 보여주거든요. 광고(CF)를 보면 대부분 초현실적인 이미지에서 따옵니다. 강조하고 왜곡하고 변형시킨 이미지를 가지고 광고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독자들이 내 작품들을 새로 읽으면, 오히려 이미지가 구닥다리라고 괄시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요즈음 독자들은 이미지 쪽에서 상당히 앞서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김 : 그러니 선생님께서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들을 일찍부터 쓰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제 입장에서는 이런 때늦은 아쉬움 또한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70,80년대에 사회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문학을 표방하던 쪽에서 상대적으로 단선적인(홑겹의) 창작 방식과 소설 독법을 고집해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건데요, 이런 생각을 근래에 이제하 선생님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하게 됩니다.
이쯤에서 권오룡 선생님께서는 이제하 문학의 매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좀 들려주시죠?
권 : 글쎄요, 저도 이제하 선생님 소설이라면 대개 어렵게 읽은 기억밖에 없는데, 그런 마당에 매력이나 재미에 대해서 말씀하라고 하시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금방 말씀하셨지만, 저도 이제하 선생님 소설들 중 특히 소설집 {초식}에 수록되어 있는 초기 소설들은, 요즘 환타지를 좋아하는 독서 경향이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읽으면 참 매력있는 작품으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아까 너무 앞서가셨지 않은가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제하 선생님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젊은 독자들에게 참 매력있는 작품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이제하 선생님 소설의 매력이나 재미라는 것은 가장 이제하 선생님다운 특질에서 찾아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가장 이제하 선생님다운 특질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에 있죠. 아마 이 용어는 선생님께서 직접 먼저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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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선생님께서 직접 '환상적 리얼리즘'을 언급하셨다구요?
이 : 예, 첫 창작집인 {초식}을 민음사에서 내놓고, 자기 소설에 대해서 무언가 뭉뚱그려서 타이틀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생각하던 끝에 그런 용어가 나왔어요. 그런데 이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미술 쪽에서는 '빈 환상파'라는 유파가 있었어요, 그림에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하면서 캔버스를 메꾸는 오스트리아 쪽 그룹이었는데, 그때 '환상적'이라는 말이 저의 귀에 익었죠. 그런데 그걸 소설이니까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자고 해서 붙였더니, 비평하시는 분들이 옆에서 '환상'과 '리얼리즘'이 서로 상충하고 상반되는 요소인데, 어떻게 그 두 용어가 짝궁으로 나란히 있을 수 있느냐는 식으로 말하더라구요. 그때만 해도 마르께스도 소개가 덜 되어 있고, 남미 쪽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도 소개가 안 되어 있을 때예요. 그런데 생소한 용어가 나오니까, 그런 식의 언질을 한 비평가들도 있었던 거죠. 그런데 저는 미술 쪽에서 그 용어를 이미 알고 있어서 가져다가 조립을 한 것뿐이었어요. 요새는 그 용어가 아주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용어가 됐죠.
권 :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선생님이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서 사용하신 게 아닌가 여쭤보고 싶었는데, 먼저 잘 설명을 해주시니까 제 질문이 하나 덜어졌네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셨지만, '환상'과 '리얼'이라는 것은 서로 코드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영역인 것 같은데, 그것을 결합시키려고 하셨다는 점에서 뭔가 특이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이제하 선생님의 작가적 자세를 엿볼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것과 결부시켜서 얘기한다면, 이제하 선생님 소설의 매력이나 재미는 무엇보다 깨달음의 재미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제하 선생님 소설을 읽으면 내 속에서 무언가 깨지면서 새로운 눈이 떠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 속에는 우리가 익숙해있는 근대적인 사고 방식(인식론)의 맹점을 찌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근대적 사고방식을 우리가 깨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깨지 못하면 이제하 선생님은 한없이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고, 그것을 깨면 아주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는, 그러니까 어려움과 재미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붙어 있고, 그것을 압축해서 잘 드러내주는 용어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 : 지금 이제하 선생님의 소설 속에 근대적 인식론의 맹점을 통렬하게 건드리는 문제의식이 담겨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 제 경우에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현실을 지칭하고요, 환상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층의 무의식을 지칭하고 있어요. 제 소설의 방법이 그렇고요. 인간의 잠재의식(무의식)에 대한 생각은 미술 쪽의 초현실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는 현실만 가지고는 뭔가 해결이 안 된다고 할 때, 밑으로 더 파고들어가야 되지 않느냐? 밑으로 파고들어가 보면,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겪어왔고, 긴 시간에 걸쳐 쌓여 있는 온갖 한이나 정서 같은 것, 일종의 샤머니즘이 거기 있죠. 표피층을 뚫고 파고들어가야 뭔가 해결되지 않느냐는 관점이에요. 그러니까 '환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층이나 무의식, 잠재의식층이고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지칭하죠.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김 : 샤머니즘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지금도 같은 것인가요?
이 : 예, 같죠. 아직도 우리 쪽에서 파고들어갈 만한 자산이 있다면, 우리 조상들이 겪어왔던 어떤 지층인데, 그 지층이 굉장히 무한한 자원으로 생각되고, 그것을 파고들어가는 일이 요새 서구 사조들과 연결되면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샤머니즘이에요. 서구 쪽에서는 프로이드나 융을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설명하는데, 우리 쪽에서는 '한'이라는 가장 큰 정서가 있고, 한 이외에도 밑에 깔려 있는 정서가 들어있어요. 제가 아직까지 이름은 못 붙이고 있습니다만, 여러 가지 종류의 바닥에 깔려 있는 억눌린 상태인데, 이거야말로 우리가 파고들어가야 될 문화의 보고가 아니겠는가? 이런 느낌이 들고 있어요. 그건 이제 단순한 방법으로는 파악이 안 되고, 우리 나라에서 샤머니즘이라고 하면 제일 대표적인 것이 무당, 접신 이런 것인데, 우리 나라에도 초현실이 있다고 하면, 이런 식의 중재자(하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인 무당이 드러나는 게 샤머니즘의 일반화된 공식인데, 이것이 아마 상당히 좋은 무한한 소재가 아닌가 느끼고 있어요.
김 : 뭔가 그 근처에 삶과 죽음의 진리, 우리 식의 진리가 들어있을 것이라고 보시는 것이네요?
이 : 예, 그렇죠. 그리고 소설 쓸 때, 저는 독자들의 이중적인 논리에 호소한다기보다는 소설 스토리를 끌어가면서 독자들의 잠재의식을 어떻게 건드릴 수 없을까? 이런 식의 갈망(욕망)을 쭉 갖게 되는데, 이 작품에도 보면 몇 군데 그런 부분이 있어요. 나중에 써놓고 보니까 그런 부분이 있더라구요.
김 : 가령 어떤 대목이 그런 부분일까요?
이 : 무심하게 보통 넘어가는데, 나도 무심하게 썼어요. 그런데 주인공과 간호사가 곡절 끝에 눈에 갇혀서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자는 장면이 있어요. 간호사가 받았던 수표를 찢으려다가 자기 방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주인공이 간호사를 안고서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 마음대로 이런 짓을 놀아나면, 아내 죽은 것을 생각하면서 '이 여자도 아내처럼 몇 년 있다가 죽지 않나', 이런 식의 샤머니즘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 여자와의 자리를 일단 보류를 하는 순간(장면)이 있어요.
김 : 저도 그 문장이 아주 요령 부득이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책을 읽으면서 그 대목이 걸리지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이 : 여자가 몸을 던져오는데 왜 남자가 자기 절제를 하느냐는 문제인데, 여기서 놀아나버리면 현실에서 끝납니다. 그렇게 되면 현실에서 둘만의 일로 끝나지만, 뭔가 정식으로 이 여자를 받아들이고, 세속에서 말하는 대로 격식을 갖춰서 제대로 아내로 삼지 못하면, 또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서 여자를 거부하게 되죠. 이 부분이 제가 보기에는 무의식을 건드리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내가 주인공이라고 할 경우에도 반드시 양자택일의 순간이 오지 않나 싶었어요. 하나는 윤리적인 것인데, 여자가 몸을 던져온다고 해도 여자를 마음대로 짓밟을 수 없는 윤리적인 규범이 하나 있고, 그 다음에는 마음껏 놀아보자고 여자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여자가 (몸을) 던져온다고 제멋대로 이쪽에서 일탈을 해버리면 현실에서 끝나지 않나, 욕망에서 끝나지 않나, 뭔가 여기에서 절제를 해준다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범위를 같이 생각하는 공동체적인,더 근원적인 윤리의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여자 쪽에 신이 내려지는데, 사실은 그게 계기가 되는 것이죠. 개인으로만 해결이 안 되는구나, 그래서 여자의 마음의 허점을 파고들어가서 접신이 되는 순간이 마지막에 있어요. 남자에게 몸을 던지면서 여자가 거부를 당하고, 남자는 극도의 자제력으로 막아주는 부분을 독자들이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왜 이럴까, 나 같으면 여자를 좋다고 받아들이겠는데 왜 주저를 하느냐?' 이런 부분이 우리 잠재의식 속의 윤리의식, 전체를 생각하는 절제력과 연관이 되지 않나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권 : 소설의 플롯 상 저는 그 부분을 조금 다르게 읽었는데요. 작가께서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데, 제가 다르게 읽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인공 남자의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죽음이라는 통과제의적 관문으로서의 여행이거든요. 그러니까 남자는 여행을 하면서도 갈팡질팡하고, 정처가 없어요. 집에서 나올 때도 충동적으로 나온 것이지, 딱히 3년 동안 묵혀 놓았던 죽은 아내의 뼈를 그때 꼭 뿌려야겠다는 필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우연에 의해서 끌려와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남자는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서만 지배당하고 있는데, 거꾸로 여자는 모든 것을 다 필연으로 내다보고 있죠. 남자가 거기 오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고, 그러면서 물가에서 관 셋을 짊어진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게 전생의 남편이라는 식으로 되어서, 말하자면 전생, 현생, 후생, 이런 윤회적인 세계관 속에 들어가 있게 되죠.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 여자는 사실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여자가 거기서 결합한다는 얘기는 죽는다는 얘기죠.
그런데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관도 그런 것이겠습니다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세상도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라는 식으로 갈라서 생각을 한다면, 그 너머의 세계와 이 세계 사이에 죽음이라는 관문이 놓여져 있는 것인데, 그 여자는 죽음의 관문으로 가는 하나의 구멍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여자와 결합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런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하더라도 현실 너머의 세계관 속으로 완전히 넘어가서 살 수는 없죠. 잠깐 나 있는 틈을 통해서 그런 세상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현실에서의 삶을 다시 조정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세계로 완전히 넘어간다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 둘은 결합하면 안 되는 것이다, 결합하면 죽는다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 같은 얘기네요. 여자가 결합하면 죽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끝난다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끝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두 주인공(남자와 간호사)이 다 바닥 인생들이에요.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뭔가 깊은 한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서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한이 쌓여 있는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우리 서민들이 나이를 마흔 정도 먹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깊은 슬픔이 밑에 쌓이게 되는데, 둘다 그런 정도의 상태에서 만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남자가 3년 동안이나 방치했던 뼈를 무심히 뿌리러 간다는 것 자체도 얼핏 보면 무심한 짓인데, 그 바닥에 무의식적인, 샤먼한 잠재의식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들 일상 속에 다 그런 잠재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죠. 잠재의식 속에 샤머니즘이 다 내재된 채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죠.
김 :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깊은 차원에서의 인연(연기법)의 뉘앙스인데, 그렇지만 보이는 세계의 편에서 생각을 해볼 때, 이런 궁금증도 개인적으로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근대적인 것, 산업사회적인 것, 도시적인 것(우리 민족의 분단 문제까지 포함해서), 그런 것에 대해서 그것들이 현실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천박성이라고 할까요? 그 누추함에 대해서 심한 혐오감을 작품 속에서 보이고 계시다고 느꼈는데요. 그리고 그러한 현실 타락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들이 '유자'랄지, [초식]의 '아버지' 같은 영적 순결성을 간직한 순수한 영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맞게 읽은 걸까요?
이 : 저는 해방 직후에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나이였어요. 남북이 분단되는 사정들을 쭉 보고 들으면서 자라왔는데, 여기에서 걸핏하면 분단 문제 들먹이고 통일문제 들먹이면서 떠들어댈 때, 이게 저는 노래로 들려요. 자기 방식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합리화를 시키기 위해서 끌어다대는 것으로 들리죠.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해방 직후에 조금만 지혜롭게 마음들을 쓰고, 생각을 깊이했더라면 통일이 될 수도 있었는데, 강대국 틈에 놀아난 거죠.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불가항력적인 강대국의 힘에 밀렸다고는 하지만, 왜 조금만 더 지혜로울 수 없었을까? 인간의 정욕이나 권력 의지, 개인적 욕망, 고집, 이런 것으로 결국 강대국에 빌붙어서 서로 양보를 안 한 게 분단을 만들고 말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건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끼리 해결을 해야 되는 것이죠. 가령 이북이나 남한에서 누가 '그냥 통일해버리자'고 해서 밀고 나가면 되는 일이에요. 무슨 이념이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 여태 안 되고, 거기에 희생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몇 백만이나 되는데, 이게 어느 정도의 한이냐? 이런 문제도 상당히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분단 얘기는, 아까도 말했지만 여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목이 일종의 공공의 윤리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써놓고 보니까, 개인적인 한이 집단적·공동체적인 한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쫓은 것 같아요. 그런데 개인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어떤 공동체적인 공감을 가질 정도의 한이 어느 정도의 두께를 가지면 그렇게 되지 않느냐? 이래서 남자가 여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고, 여자에게 뒤에 신이 내린다는 것은 개인적인 한에서 집단적인 한으로 전이되는 것이죠.
써놓고 해석을 제 나름대로 해보니까, 바닥에는 분단 현실에 대한 일반 대중이나 서민들의 한의 깊이가 쭉 깔려 있고, 읽는 독자들도 그런 채로 읽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분단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로 오는 거예요. 이런 어려운 부분도 '아, 이렇구나'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이해를 한 채 넘어갈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독자들마다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좌우간 해방 직후부터 살고 있는 국민들은 켜켜이 쌓여 있는 상당한 두께의 한을 오래도록 안고 일상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이게 철저하게 맺힌 한이면, 정치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자기들끼리 저절로 통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아직도 모자라는 한인가? 이런 느낌도 있구요.
그리고 통일문제니 분단문제를 하도 입버릇(유행가)처럼 손쉽게 읊어대기 때문에 깊이라든지 절실함이라든지 하는 차원을 갖지 못한 채 시류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느낌도 좀 있었구요.
김 : 7,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의 개혁적인 노력들이 떠오르는데요. 결국, 긴 역사, 긴 시간 속에서 우리 혼의 밑바닥에까지 쌓여있는 응어리(한)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없는 채로 시도되는 사회 개혁, 통일, 분단극복, 현실참여, 이런 것은 우리를 그 근본에서 살리는 힘이 되기 어렵다고 선생님께서는 보시는 듯합니다. 그런 것은 천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꾸 뭔가 정치적인 실천, 집단적인 참여,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부정적이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 :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것도 있는데, 그것을 그냥 목적이나 구호로 삼을 때는 그것밖에 안 남아요. 저 밑바닥을 안 들여다보게 되고. 현실에서 민주적인 대통령을 뽑는 것은 좋은 일인데, 그것만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있죠. 제가 살아오면서 보니까, 사람이라는 게 너무나 뻔하고 굉장히 유한한 존재예요. 그리고 이런 통일문제도, 물론 민주화된 대통령을 뽑아야 되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량으로 내세워야 되지만, 그것만 가지고 해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위의 것, 더 넓게 생각하고 해야 해결이 되지 않나 싶어요.
김 :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여쭤보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문학을 하는 사람, 또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 뭔가 세상을 좀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 운동권 쪽에서는 마구 구호화하고, 세게 외치죠. 그런 방법으로는 우선 독자들에게 말초적으로 자극을 줄지 몰라도, 별로 깊이 있게 스며들지는 못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학은 물처럼 스며들어야 합니다. 조금씩 독자들에게 스며들어서 물이 번지듯이 변화를 시키고, 전체적으로 그런 변화가 올 때 정말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표피적인 것을 두들겨 부수고, 새로 갈아넣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고, 정서를 통해서 바닥에 스며드는 작업이 아닌가 싶어요. 아주 고전적인 어떤 것인데, 과격한 게 아니에요. 혁신적인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을 갈아야 된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문학이라는 것은 그렇게 쓰이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죠. 문학에 사회적 효용의 기능이 있다면, 아마 그런 점일 거예요. 스며들 듯이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 그게 아마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일 거예요. 물론 그것만이 다는 아니지만요.
김 :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서는 오늘 이제하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해보시길 바랍니다. 권 선생님께서 이제하 선생님의 [나그네]에 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권 : 글쎄요, 조금 아까 집착이나 욕망에 관한 얘기가 나왔었고, 선생님께서는 삶의 유한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사실 자연이라는 것은 순환하는데 오직 사람의 삶만 일회적인 것으로, 즉 직선적인 것으로 탄생에서 죽음까지 쭉 이어지면서 끝나버리죠. 그래서 사람의 욕심, 집착은 바로 그러한 순환의 리듬을 잃어버리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그네]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도 이제하 선생님의 '환상적 리얼리즘'에 뒷받침되어 있는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윤회적인 삶이라는 것은 현실에서의 삶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순환된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삶이 탄생에서 죽음까지로 이어지는 일회적인 것으로 끝난다는 인식에서 갖게 되는 욕망이나 집착 같은 것에서 좀더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게 되는 인식의 계기를 순환론적인 깨달음이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추상적인 얘기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나그네]라는 작품이 아주 깊은 차원에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게 아마 어쩌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공동체적 윤리겠죠. 말하자면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선생님께서 리얼리즘으로의 물러남의 자세로 쓴 작품이 [나그네]라고 한다면, 공동체적 윤리에 대한 자각, 사람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고, 삶이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 : 선생님께 우스개 삼아 여쭙습니다. 주인공 남자가 물치 삼거리에서 턱 차를 내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벙벙해 있는 것을 묘사하는 부분에 '전차에 받힌 듯한 얼굴'이라는 표현을 하셨구요. 또 뒤에 가다 보면 이 작품 속에서 문화부 공무원이라고 나오는 남자 일행들에게 불려와서 고스톱 판 옆에 앉아 있는 여성 묘사를 하시면서 '어딘가 솜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고, 간호사에 대해서는 도무지 20대인지, 40대인지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분위기의 사람이라고 묘사하셨는데, 이런 묘사들은 어떤 경로로 작가에게 오게 되나요?
이 : 저는 뭐 소년기부터 우리 근대 작가들 작품을 읽어서 우리말 표현에(형용사라든지) 길들여져 있었어요. '솜방망이로 얻어맞았다'는 표현은 영남 쪽에서 가끔 쓰는 얘기예요. 분명히 콕 찍어서 어떤 상태인지는 말을 잘 못하겠는데, 솜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있어요.(함께 웃음) '전차에 받힌 듯한'이라는 표현은 그 무렵만 해도 이미 전차가 없어진 지가 몇십 년이 지난 뒤였는데, 옛날에는 이런 표현이 있었어요. 어딘가 어리둥절해서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이 어디로 갈지를 몰라서 어리벙벙해 있는 사람을 '전차에 받힌 듯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이걸 쓰던 무렵에는 전차가 없어져버린 뒤였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을까? 라는 의아심을 저 스스로 가졌지만, 이 표현 외에는 적절한 표현이 안 떠올랐어요. 다른 것을 끼어봤는데, 어딘가 어색하고 흡족하지가 않아서 그러면 이걸 그냥 쓰자, 가끔 TV에서 전차 풍경을 보여주니까, 전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충 일반 독자들이 알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가령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마포를 오르내리던 전차를 본 독자라면, 요즘 달리는 자동차에 비하면 너무 느리고 둔탁하게 생긴 것이니까, 그런 차에 떠받혀서 온 사람의 얼떨떨한 표정을 생각할 때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표정이야말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어떤 게 아닐까, 하는 효과가 생각나서 그냥 쓴 거예요.(함께 웃음)
권 : 제가 생각할 때는 비유적 표현에 있어서 아주 자유자재한 것이 이제하 선생님의 문체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컨대 [환상지]라는 소설에 보면, 10년 전에 죽은 아내와 호텔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거기에서 빨래하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10년 전에 죽은 아내와 같이 있을 수 있으며, 또 호텔에 들어가서 빨래를 하는 것은 뭔가? 시간과 공간 두 축에서 모두 뒤죽박죽이죠. 이제하 선생님은 이렇게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을 자유롭게 가져다 쓰는데, 오히려 그런 점에서 [나그네]는 오히려 그런 재미가 상당히 조금 줄어든 작품이죠.
이 : 그걸 어느 비평가는 '낯설게 하기'라고 얘기를 하던데, 미술 쪽에서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런 방법을 즐겨 씁니다. 일상적인 사물을 아주 극사실적으로 묘사를 하면 전혀 안 보던 이상한 물체로 보이는 바로 그런 효과지요.
그러니까 10년 전에 죽은 아내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얘기를 내가 해줄까? 이럴 때에 독자들의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들어가는 것이고, 또 [밤의 창변]에는 서두에 이런 게 있습니다. '중 하나가 오토바이에 수녀 하나를 태우고 산 속으로 들어간다', 중과 수녀라는 뭔가 상반되는 이미지를 한데 끌어모으고, 거기다가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어요. 독자들이 이걸 읽을 때, 어리둥절해지고 낯설어져버리는 것이죠. 이게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낯설게 하기'의 방법인데, 저는 물론 무의식적으로 씁니다.
그림에서 서로 계열이 다른 이미지들이 같이 나올 때 생기는 상당히 충격적인 효과인데, 이런 방법이 요새는 '조폭' 영화에도 많이 나오고 그러죠.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갑자기 들이밀어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 요즘은 아주 일상적인 방법이 되어서 오히려별로 신선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김 : 선생님 또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 작품들에 등장했던 여주인공들 가운데 선생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여주인공은 없으십니까?
이 : {열망}이라고 하는(옛날에는 {광화사}라는 제목으로 나온) 장편이 있어요. 거기에 지호라는 주인공이 화랑을 경영하는 화상이에요. 그 주인공에게 상당히 애착을 갖고 있고요. [유자약전]에 나오는 유자라는 인물은,- 제가 원래 화가가 되고 싶어서 미술대학에 갔는데, 문학병이 드는 바람에 사실은 제대로 된 화가가 못 됐어요. 그림을 그리는 흉내만 내고, 전람회도 몇 번 하기는 했습니다만, 화단 쪽에서는 아직 화가로 인정을 안 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인정을 해주고 안 해주고가 문제가 아니라, 화가가 굉장히 되고 싶었고, 그런 욕망 속에서 소년 때부터 이상적인 어떤 짝이라고 그러나요? 반려자의 이미지가 유자라는 인물로 형상화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애착을 갖고 있죠. 그런데 이 여자는 그림 그리다가 죽습니다. 시한부 인생으로 자기도 모르는 병을 안고서 약간 멜로적으로 죽죠.
김 : 소설 속에서는 스물일곱 살에 위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옵니다.
이 : 요새 영화처럼 죽는다는 얘기를 그렇게 장황하게는 안 하고 죽는데, 며칠 밤을 잠을 안 자고, 죽자 사자 사생결단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미지예요. 그런 여자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까, 그런 상에 대한 이미지가 제가 좋아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아직도 애착을 갖고 있어요.
김 : 그런 인물들 속에는 어떤 백치스러움과 성자스러움 같은 것들이 함께 어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현실 부적응 증세를 드러내고 있구요.
이 : 그야말로 솜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어떤 면이 있고, 또 어떤 면은 치열하고 불타는 면이 있죠.
김 : 일종의 광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예술가들에 대한 형상화가 그 동안에 선생님 작품들에는 많지 않았습니까?
권 : 그래서 흔히 이제하 선생님의 문학이 지닌 한 특징을 '예술가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저 나름의 이해를 말씀드리자면,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이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술가 소설이라고 하는 표현은 선생님 소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심미성의 측면을 지적하는 용어인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심미성이라고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무래도 선생님이 화가이기도 하시기 때문에, 회화적 상상력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길어오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면,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이 세계관의 윤곽을 그려서 보여주는 선이라면, 예술가 소설로 지칭되는 심미성은 그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색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이 : 비교하시는 분들 중에서 예술가 소설이라고 분류를 하는 분들이 몇이 있는데, 제 소설은 커다란 두 갈래가 있는데, 하나는 현실 문제를 샤머니즘적인 방식으로 파고들어가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흐름이고, 또 하나는 이 시대의 예술가 상이라고 할까요? 시대를 견디는 인간 유형이죠. 반드시 예술가만이 아니고, 우리가 질곡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온갖 것을 다 겪으면서 변혁이라든지 변란도 겪으면서 살고 있는데, 이런 시대를 아주 꿋꿋하게 견디는 유형의 인물이 어떤 상일까, 이런 것을 천착해보고 싶어하는 흐름이 있어요. 그 두 가지 흐름이 대체적인 제 소설의 유형인데, 왜 이런 유형을 자꾸 추구를 하는가 하면, 요는 제 자신인 것 같아요. 자신의 자화상을 한 번 그려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이 시대를 얼마나 어떻게 견디는가? 하는 자아의 문제, 이것이 아마 이런 방식으로 표출이 된 것 같고, 그 다음에 자아를 벗어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샤머니즘적인 흐름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뭔가를 천착하려고 하는 두 가지 흐름인 것 같아요. 하나는 자아이고, 또 하나는 자아를 벗어난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런 두 갈래 흐름 때문에 샤머니즘적인 흐름과 예술가적인 유형으로 비평가들이 나누는 것 같아요.
김 : 더 긴 시간을 갖고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만, 시간이 지금 많이 됐죠? 이쯤에서 일단 마무리를 하고요. 실은 이때쯤 해서 선생님께 부탁을 해서 노래를 한 곡 청해 들으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제가 혼자 했습니다.(함께 박수) 그렇지만 지금은 아마 안될 겁니다. 뒷풀이 자리쯤에서 기타가 동원이 되면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볼까 합니다.
이 : 지금은 기타도 안 가지고 왔고, 평창동 '마리안느'라는 카페로 오시면 금요일 8시나 9시쯤 제가 노래를 들려 드릴게요. 노래를 하려면 목청을 가다듬어야 되는데, 요새는 달걀도 안 먹고 그래서요. (함께 웃음)
김 : 이제하 선생님 그리고 권오룡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청중분들께서는 미진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1950년대 우리 근현대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역사였는데, 1950년대 이후 1960,1970,80년대의 불모성을 어떻게 보면 현실적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예술이라는 방편, 문학이라는 방편에 몸을 싣고, 낮은 포복의 배밀이로 견뎌오신 한 탁월한 작가를 오늘 만나셨습니다. 이런 분들의 노고로 해서 비로소 우리 조선말이 드러낼 수 있는 정신의 부피가 이만큼이라도 커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서 우리 문학과 예술이, 또 우리 정신이 홑겹의 것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시인 서정춘 선생을 모시고 뵙겠습니다. (함께 박수)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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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책 소개
책소개
시와 소설,그림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중견 소설가의 소설전집 12권중 다섯번째권. 와우 아파트 사건의 쇼크와 창부 학심이의 죽음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예술가가 등장하는 세태소설 <굴절>을 비롯해 <용>,<소렌토에서> 등 작품 9편을 모았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이제하 소설가, 시인 1937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홍대 조각과와 서양화과에서 수학했다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고, '신태양'에 소설 '황색 강아지', '한국일보'에 소설 '손'이 입선하여 시와 소설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초식', '기차, 기선, 바다, 하늘', '용', '독충'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 '열망', '소녀 유자', '마초를 죽이려고', '진눈깨비 결혼', '능라도에서 생긴 일',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등이 있다. 네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편운문학상, 동리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에 대해 잘 정리된 글 하나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