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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時 紀元 四二一七(1884)年 十一月 十五日 |
出生地 黃海道 海州邑 東門外 |
居生地 四二一七年 至四二一八年 海州邑 |
四二一八年 至四二三九年 黃海道 信川 淸溪洞 |
四二三九年 至四二四二年 平安道 三和鎭 南浦 |
四二四二年 至四二四三年 俄領(러시아령) 연추 |
四二四三年 至四二四八年 中國 吉林省 |
四二四八年 至四二五二年 俄領(러시아령) 小王營 |
四二五二年 至四二五三年 中國 上海 |
職業 四二二五年 至四二三三年 漢文私塾 修業 |
四二三五年 至四二三七年 農業―●事監督 |
四二三八年 至四二三九年 貿易商 |
四二三九年 至四二四○年 英語 修學 |
四二四○年 至四二四一年 京城法學校 修業 |
四二四二年 至四二四四年 俄語(러시아어) 修學 |
四二四四年 至四二四五年 俄羅斯(러시아)步兵 |
四二四五年 至四二四六年 商業―雜貨商 |
四二四九年 至四二五二年 病院 事務管理 |
四二五二年 至四二五三年 赤十字會 副會長 視務 |
學藝 漢文 法律 俄語(러시아어) |
宗敎 天主敎 |
團體 新韓靑年黨 大韓赤十字會 |
最長技能 病院事務管理 商店業 |
所肯 ●事 及 病院業 |
改名 前名 趙英(조영) |
家族 父 安泰勳(안태훈) 別世 |
母 趙氏 |
兄 安重根(안중근) 別世 |
弟 安泰根(안태근) |
妻 李貞和年(이정화연) |
子 安惠生(안혜생) |
安原生(안원생) |
安珍生(안진생) |
女 安美生(안미생) |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동생 정근, 공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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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7.15. 조광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
한국문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가족적 유대가 남달리 강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부계(父系) 혈족을 중심으로 해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가족 내지는 가까운 친족들은 하나의 혈연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 공동체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던 과정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李相龍) 가문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시영(李始榮)의 집안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 함께 안중근의 집안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대표적 가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안중근의 독립의지는 그의 두 동생들과 조카들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안정근과 그 자녀들
“식민주의는 민족주의의 학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형성은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안중근의 동생들에게 딱 들어 맞았다. 안중근에게는 안정근(安定根, 시릴로)과 안공근(安恭根, 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안중근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의 학교에 입학해서 민족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독립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 동생들과 그 소생들은 남북한 사회에서 각기 높이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우선, 안중근의 손아래 동생인 안정근(시릴로, 1885-1949)은 안중근의 의거 이전에 이미 한씨 부인과 결혼했었고, 그들 사이에는 안원생(安原生) ‧ 안진생(安珍生) 두 아들과 안미생(安美生) 등 네 딸이 있었다. 안중근의 순국 후 안정근은 자신의 가족 및 모친과 안중근의 유족 등과 함께 우선 러시아령 연해주 꼬르지포에 정착했다. 이들의 연해주 정착에는 그 곳의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하여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도움이 컸다.
안정근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노령(露領)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년 11월 중국의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무오독립선언문’의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3‧1운동 후 1919년 10월 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샹하이로 이주했다. 이들의 이주는 안중근의 맏아들 분도가 독살된 이후 안전한 활동근거지를 찾으려던 자신들의 소망과, 이미 샹하이에 집결해 있던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 등의 초청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샹하이에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참여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샹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독립신문>의 발행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간도 교민단(僑民團) 설립, 청산리 전투 보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샹하이에서 1949년에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정근의 자식들도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2남 4녀를 두었다. 그들 가운데 두 아들 안원생(安原生)은 샹하이 교통대학에 다닐 때 중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동한 바도 있었다. 그는 1943년 한독당 계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印支) 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안진생(安珍生)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흥인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그의 차녀 안미생(安美生)은 중국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정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으로 백범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공근과 그 자녀들
안중근의 두 번째 동생은 안공근(安恭根, 요한, 1889-1940?)이다. 그는 원래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하여 교사로서의 생활을 접고, 중형 안정근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뻬쩨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에 머물며 러시아어를 연구했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어 샹하이로 오게 되었다. 샹하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의 확보를 위해 활동한 바 있었다. 안공근은 샹하이로 귀임한 1925년 이후부터 모친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실질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1928년경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샹하이에서 빙과점을 운영한 바도 있었지만, 그 생활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는 1925년 샹하이로 귀환한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샹하이 한인(韓人) 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파생된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1927년에는 유일당 운동에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전민족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안창호, 조소앙, 김구 등과 함께 우파계열의 통일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사직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그 단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및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이 시기 일제의 정보보고서에는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안중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고 평한 바 있었다. 1930년대 그는 이처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최측근인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한다. 그는 샹하이에서 미국 혹은 영국대사관에 통역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소련 영사관 및 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서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정을 중국을 비롯한 외국정부기관 및 조선인 좌파 세력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시켜주던 인물이었다.
안공근은 일제의 샹하이 침공과 유봉길의 의거로 인해 1932년 샹하이를 탈출할 때 자신의 어머니와 처자식 및 안중근의 자녀를 남겨둔 채 김구의 모친만을 모셔왔다. 이 때문에 그는 김구에게서 심한 질책을 당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안공근은 1934년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안공근은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重慶) 시절 김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안공근은 중경에서 샹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해방후 경교장에서. 오른쪽부터 김구의 비서였던 安偶生, 白凡 金九, 金九의 자부(金仁의 부인) 安美生, 張佑植
안공근에게는 안우생(安偶生) 등 두 아들과 네 딸이 있었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광뚱에 있던 국립 중산대학(中山大學)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이때 광뚱에서 발발했던 하룡(賀龍)과 섭정(葉挺)이 주도했던 공산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에는 님 웰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을 비롯해서 40여명의 조선인 청년학생들이 참여한 바 있었다. 이 폭동에 참여했던 조선인 대부분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안우생은 이에 참여하지 않고 몸을 피해 살아남게 되었다. 그는 후일 김구의 영문비서가 되어 해방 조국에서 봉사하다가 김구가 암살된 직후 김구의 주치의였던 유진동과 함께 홍콩으로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안공근의 둘째 아들은 안낙생(安樂生)이었다. 그는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결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안공근의 사위 가운데 하나가 한지성(韓志成)이었다. 한지성은 장인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43년 쯍찡에서 사촌 매부인 안원생이 총간사로 있던 한국청년회의 간사장에 취임한 바 있다. 그는 해방이 되자 북쪽으로 가서 활동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로 내려와서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9‧28때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한편, 안중근의 일족 가운데는 북한에서 활동했던 경우도 확인된다. 즉, 안공근(安恭根)의 맏아들인 안우생(安偶生)은 김구가 암살된 이후 홍콩을 거쳐 북으로 들어가 살다가 1992년 평양에서 사망하여 평양의 통일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안우생은 장녀 안기애와 기철, 기호, 기영의 세 아들을 두었다. 안우생의 장녀 안기애는 1965년경 북한 과학원 출판사 편집부에 수학전문가로 배치되어 일했다. 그의 장남 안기철은 제주도 유격대장이었던 김달삼의 딸과 결혼하여 장모와 함께 평양에서 살고 있으며, 차남 기호는 전쟁 중 홀로 된 고모와 함께 부친을 모시고 평양 신원동 간부 사택에서 살았다. 셋째 동생 기영은 평양 정권의 부주석을 역임한 김병식의 사위가 되었다.
남은 말
안중근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우들은 안중근의 뜻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신고의 길 위에서 땀과 피를 아끼지 않으며 해방의 그날을 위해 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신병을 얻었거나 암살의 비운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한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좌우로 대립되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엮어나가고자 했다. 그들의 염원은 좌나 우가 아닌 대한독립에 있었다.
안중근 가문이 없었다면 일제하 천주교도의 독립운동은 매우 미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의 훈도를 받은 그의 동생들의 독립운동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해방이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민족과 교회 문제를 생각할 때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범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안중근 형제들의 독립운동은 우리 교회사의 귀중한 자산이다.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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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7.15. 조광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안준생과 안우생은 동갑의 사촌형제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최측근 참모역할을 했지만 안준생은 다른 삼촌들과 사촌 형제들과 달리 항일투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해에서 평범한 생활했다.
1907년에 태어난 안준생은 단 한번도 아버지 안중근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형 분도가 7세때 요절함에 따라 사실상 장남으로 성장했지만 이등박문을 사살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면서 다른 친척들과 달리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상해에서 결혼해 1남 2녀의 가장으로 살아온 안준생은 그러나 아버지의 유해 만은 반드시 장남이 찾아 고국에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해방후 귀국하지 않고 공산화된 상해를 떠나 홍콩에 머물다가 김구 암살 직후 홍콩으로 온 사촌형제 안우생과 만나게 된다.
▲ 소설 안중근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사진오른쪽 부터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안중근 둘째 동생 안정근, 안정근의 아들 안원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 안중근의 셋째 동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이다.
안준생은 한국전쟁 당시 홍콩에서 부산으로 귀국했다가 병을 얻어 숨지고 안우생은 김구 암살사건 직후 남한을 떠나 홍콩으로 잠적한 후 평양으로 이주했다. 둘째 안정근은 해방 후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가 1949년 병사했다. ©단지12 닷컴
▲ 안중근의 직계 유족, 사진 오른쪽 부터 안중근 장군의 부인 김마리아, 장손 안웅호, 아들 안준생, 손녀 딸 연호와 선호 며느리 정옥녀.
안중근 의사 부인은 해방직후인 1946년 중국 상해에서 작고하고 아들 안준생은 한국전쟁 중에 홍콩에서 부산항으로 귀국했다가 부산에서 병으로 숨진다.
며느리 정옥녀는 통일이 되면 귀국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다. 현재 안중근 장군 장손인 안웅호는 미국에 생존해 있다. © 단지12 닷컴
안중근 동생 안정근, 청산리전투서 맹활약 1920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참전… “아군, 3일간 한끼도 못 먹어” 임정에 참상 보고 | ||||||||
1910년 봄, 안정근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누이동생 안성녀(安姓女), 형의 유족, 자신의 가족, 안공근의 가족 등 권속 모두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해외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안정근의 첫 망명지는 북만주였다. 다시 얼마 뒤 로서아(露西亞, 러시아)로 옮겨간다. 안정근은 1919년 말 중국 상하이로 이주하기 전까지 정확히 10년간 러시아 땅에서 산다. 안정근의 집에는 수많은 우국지사, 독립운동가 등이 머물기도 하고 다녀가기도 했다고 한다. 송우혜씨의 연구에 따르면 1910년대 초반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광수도 1914년 초 한 달간 안정근의 집에 머문 일이 있다. 박태정 여사는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상하이 시절에도 춘원 이광수·이동휘·이동녕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 그리고 이강 전하(의친왕)도 아버님 집을 찾아왔었다고 합니다”고 말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극도로 빈궁하게 살았다. 그런데 안정근이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을 접대하며 물심으로 지원할 수 있었던 데는 장모 왕재덕(王在德)의 경제적 뒷받침이 결정적이었다. 왕재덕 여사는 홀몸이 된 이후 자수성가로 큰돈을 번 신천의 갑부였다. 왕재덕 여사는 사위 가족의 망명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박태정 여사는 “어머님(이정서씨)은 몰래 국내에 들어와 친정어머니(왕재덕 여사)가 주시는 돈을 옷 속에 찬 돈전대에 숨겨 가지고 가시곤 했답니다”라고 말한다. 러시아 군 입대해 독립운동 망명객 안정근은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머물면서 일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다. 그는 얼마 뒤 러시아군으로 1차대전(1914~1918)에 참전한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안정근이 러시아군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과 ‘불환선인단(不還鮮人團)-시베리아 지방’ 제6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안정근이 러시아군에 자원 입대한 배경에는 일본 측이 러시아 측에 안정근의 체포를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박태정 여사는 안정근이 위생장교로 복무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1919년 3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안정근은 39인의 해외 독립운동가 서명자 명단에 올라 있다. 안정근이 상하이로 이주한 것은 1919년 늦가을이었다. ‘독립신문’ 11월 4일자는 안정근이 임시정부 수뇌부 취임식에 하객으로 참석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안정근이 상하이로 온 이유는 독립신문 기사에 나와있는 것처럼 형의 유자녀, 자신의 장남(원생), 아우 공근의 장남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이때 1916년(호적상은 1918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진생은 어머니와 함께 러시아에 남게 된다. 상하이에서 안정근은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안정근은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를 겸하게 된다. 안정근은 상하이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신한청년당 이사로 활동했고 임시정부 황해도 담당 조사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안정근의 임정 활동 중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북간도 파견위원’으로 현지에 파견된 사실이다. 북간도(北墾道)는 지정학적 위치로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무장독립운동단체들 간의 대립과 알력이 심해지고 이로 인해 현지 여론이 악화되자 임시정부는 두 명의 파견요원을 엄선했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1920년 5월 파견된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독립군 장정 모집, 의민단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지도하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대한국민회, 의민단(의군단), 신민단, 한민회의 4개 주요 단체가 통합된다. 1920년 10월 21일의 청산리전투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쟁이다. 4개 단체 연합부대는 대한국민회 홍범도 사령관의 지휘 아래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안정근은 전투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한다. 그가 보낸 보고서 중에는 ‘…피아 양군은 3일간 전투를 개시하여 쌍방 모두 사상자 300여명에 이르고 아군은 모두 퇴각하여 사방에 주둔 중, 3일간 전투에서 한 끼조차도 먹지 못한 아군의 참상은 형언할 수 없다…’가 있다. 안정근은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이동할 때 지원작전을 지휘했다. 그때 안진생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박태정 여사는 “남편은 어릴 적 청산리전투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나갔다가 마주친 독립군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어머님(이정서)의 손을 잡고 집밖에 나가 있었는데, 돌아오는 독립군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해 무섭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군복은 해어질대로 해어져 거의 누더기가 되어 있었답니다. 고드름이 독립군들의 얼굴에까지 매달려 있어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얼굴에 고드름이 매달린, 흉측한 몰골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북간도 파견위원 활동을 끝낸 안정근은 가족을 데리고 다시 상하이로 온다. 상하이에서 안중근 유가족을 포함한 네 가족이 함께 살게 된다. 안정근은 대한적십자사 최고책임자 활동을 재개하고 한편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안정근은 1925년 자기 가족만 데리고 산둥반도 동쪽 끝 항구도시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이주한다. 신병 치료 때문이었다. 웨이하이웨이에서 투병하며 머문 기간은 1925년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웨이하이웨이 시절, 주목할 만한 일은 안정근이 선단을 건조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박태정 여사의 회고다. “아버님은 어선 사업을 했어요. 기회가 오면 본국에 상륙하기 위해 어선 겸 공작용 선박을 건조시키다가 정보가 누출돼 일제가 현장을 덮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죠.”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중국대륙을 유린해가자 중국 정부로부터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안정근은 또다시 가족을 이끌고 홍콩으로 피난을 간다. 홍콩으로 피신한 안정근은 공작선 건조 구상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믿을 수 있는 가족 중 한 명을 선박 전문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안정근은 1938년 차남 진생을 이탈리아로 보내 조선공학을 공부하게 한다. 베트남까지 피신해 궁핍하게 살아 홍콩 피난 중 안정근 일가는 잠시 안남(현 베트남)으로 내려가 살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 일가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고 60세가 된 안정근은 적십자사 활동과 함께 한국구제총회 회장직도 맡게 된다. 한국구제총회는 만주, 중국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조국 귀환을 지원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을 돕는다. 한국구제총회장 시절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일본군 장교로 있던 일단의 그룹도 있었다. “아버님을 찾아온 일본군 장교 중에는 박정희가 있었답니다. 정일권씨, 문익환 목사도 역시 아버님을 만나고 돌아갔다고 해요. 이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남편이 대사직에 있을 때 남편에게 직접 ‘일본이 망해갈 때 부대에서 이탈해 고명하신 안정근 선생을 찾아 뵌 일이 있다’는 얘기를 했답니다.” 박정희가 왜 일단의 한국인 출신 일본군 장교들과 함께 안정근을 찾아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태정 여사는 “당시 독립운동 그룹에서 일부러 일본군에 사람을 넣었다는 얘기를 어머님으로부터 들었다”면서 “일본군 장교 중에는 독립운동과 관계한 분이 많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또다른 증언이 있다. 안정근의 둘째딸로 김구의 큰며느리가 된 미생씨가 상하이에서 귀국한 것은 1946년. 안미생은 당시 경향잡지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우리 아버지는 일차구주(歐洲)대전에도 출정하셨지요. 그 후에는 조선 내에서 유망한 청년들을 비밀히 모집하며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우리 어머니가 조선에 왕래하시며 그 연락사무를 많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일본장교가 된 사람 중에는 우리 아버지가 일부러 그러케 드려 보낸 이도 많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내정을 살필 겸 일단 유사시에는 필요하게 써보려는 계획이었지요.” 광복이 되고 조국에 새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안정근이 귀국을 미룬 이유는 한 가지였다. 여순에 있는 형님의 유해를 찾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는 장개석과 접촉하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여순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던 중 뇌암이 악화되어 1949년 3월 17일 상하이에서 숨을 거둔다. 중국 신문은 안정근의 죽음을 가리켜 ‘한국혁명원로 서세(逝世)’라고 기사를 썼다. [안중근 유가족의 현재] 파나마·미국·독일 등 각국에 뿔뿔이 흩어져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안춘생(安椿生)씨는 안중근 사촌 형님의 아들이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맏형(안태진)의 손자인 것이다. 안중근 3형제의 유가족이 국내에 없다보니 그동안 안춘생씨가 안중근 유가족을 대표하는 일을 맡았다.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의 동생 태건은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인 봉근(奉根)은 일제 치하 당시 독일에 건너가 살았다.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독일방송에 손기정이 일본인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때 방송국에 찾아가 손기정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정정한 사람이 바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봉근이었다. [안정근 차남 안진생은?] 한국인 최초 조선공학 박사… 어업차관 도입 계기로 외교관의 길 걸어
안진생이 이탈리아 제노아대학에서 조선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45년 7월. 2차대전이 한창일 때는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하는 저항군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박태정 여사에 따르면 안진생은 이탈리아 지하조직의 일원으로 비행기에 포탄을 실어나르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안진생은 미국에서 회사생활을 했는데, 이때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 박사와도 교유를 했다. 1953년 서른여섯 살의 안진생은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를 받고 처음 아버지의 조국땅을 밟고, 1954년 안진생은 서울대 사대 출신인 박태정과 결혼을 한다. 안진생은 해군 대령으로 3년간 복무한 뒤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박태정 여사는 “남편은 그때 한국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고 무척 실망했었다”고 회고한다. 18년간 외교관으로 해외 근무 5ㆍ16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2년 안진생을 찾는다. 이탈리아로부터 어업 차관을 얻어야 하는데 국내에서 이탈리아어를 하는 사람은 안진생 한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안진생을 이탈리아 참사관으로 발령낸다. 이때부터 18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이탈리아 참사관, 프랑스 공사, 네덜란드 대리대사를 지내면서 주로 한국 정부의 차관 협상을 주로 전담했다. 안진생이 네덜란드 대리대사로 있을 당시 일본 대사의 부인은 이토 히로부미의 외손녀였다. 안진생은 일본 대사의 부인과 만났고, 이 기사는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안진생은 이후 자이레 대사, 콜럼비아 대사, 미얀마 대사 등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진생 대사를 만날 때마다 부친 안정근과 얽힌 얘기를 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박태정 여사의 증언이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남편에게 ‘안진생 대사는 숨어 있는 애국자’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매년 가을 남편에게 서신을 띄웠고 추석 때마다 선물을 보내오곤 했습니다.” 안진생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 외교안보연구원 대사직에서 강제로 옷을 벗는다. 그는 이때 충격을 받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다 1988년 12월 24일 숨졌다. 안중근숭모회 김영광 이사는 “안진생 대사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평생을 봉사했다”고 말했다. 안진생은 해군대령 3년과 외교관으로 18년을 지냈지만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용인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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