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시 [1]
밀행2
소금 독 속에서 기다란 먹갈치가 염장된 대가리를 흔드는 밤.
염장된 눈구멍에서 돌소금이 버썩거리는 밤.
이 밤도 어머니는 목구멍에 쩍 들러붙으신다 산낙지처럼.
이 밤도 나는 우적우적 어머니의 머리를 씹어드린다.
-김언희 '밀행2' 전문 (계간 '작가와 사회' 2009년 가을호)
왜 그렇게 어긋나기만 했을까. 어머니란 이름 속에 들앉아 있는 것들은 너무 늦게야 보인다.
독 같고 짠내 같은 것들이 목구멍에 쩍 달라붙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다.
세상은 소금독이고 어머니란 존재는 염장도 안되는지.
그래서 '나'는 밤마다 '어머니'께 잡히는가.
그리하여 산낙지를 씹듯 오래 '씹어드'려야 하는가.
지상에서 혹은 천상에서 오늘도 '밀행'에 들어 캄캄하게 밥이 되고 찬이 되는 이여,
밤을 건너가는 목구멍 참으로 아프게 하시는구나.
2009. 11. 4. 부산일보
권애숙/시인
※권애숙 시인은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및 1995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차가운 등뼈 하나로' '카툰세상' '맞장 뜨는 오후'를 냈다.
맛있는 시 [2]
아름다운 소풍
당신이 반 오면
내가 반 간다
수많은 날 중 하루를
당신이 반 오고
내가 반 간다
당신과 내가 만나야 할 곳은
출렁출렁
푸른 영혼의 강가
당신이 반 오고
내가 반 가는 속도가
하얀 꽃잎 되어 나부낀다
새들은 구름처럼
뭉게뭉게 날아다니고
당신이 반 오면
내가 반 가는 시간은
물 댄 동산처럼 행복하여라
-박선희 '아름다운 소풍' 전문 (계간 '시인시각' 2009년 가을호)
아름다운 만남은 '당신이 반 오'고 '내가 반 가'는 거리며 시간이다. 꽃잎이 나부끼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속도다. 가을이 깊다. 수많은 날들이 갔다. 먼 누군가를 향해 특별한 하루를 만들자. 반반이 아니면 어떠랴. 조금 더 가거나 조금 더 기다린다 해도 합일 지점인 거기, '푸른 영혼의 강'은 '나'와 '당신'이 함께 만드는 것인데. 권애숙/시인
2009. 11. 11. 부산일보
당신이 반 오고 내가 반 가는 그날은 특별한 하루이며 아이처럼 소풍 가는 날이며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란 걸 알기에 그날을 아끼며 소중히 기다립니다. [려니]
소중한 것일수록 자꾸 아끼는...[먼바다]
맛있는 시[3]
현재
나는 그곳 가는 길에 형상 없는 바람이 되어 불었다.
휴게소에서 원두커피 한 잔 살 동안만 얼굴이 생겨났다.
돈을 지불하는 동안 입술에서 공기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은 바람들이 버스 의자마다 앉아 있었다.
나도 현재의 뒷면처럼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커다란 여름의 얼굴을 보며 내내 달렸다.
버스는 바람을 배달하는 상자 같았다.
창밖의 풍경은 빠르게 넘겨지는 책장 같았다.
너무 가볍게 부는 바람이라
펼쳐지는 페이지마다 깊이 읽지 못했다.
끝없는 여름 겉표지의 흘림체를 읽을 뿐이었다.
수많은 풍경을 넘기다 보면 숨겨진 나를
만날 거라는 생각만 골똘했다.
그곳에 도착해 의자에서 일어서자
얼굴이, 몸이, 발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이내 어둠에 지워졌다.
그곳은 자정이 깊었고 나는 또
한 페이지 넘겨졌다.
산다는 게 속임수 같았다.
-박춘석 '현재' 전문 (계간 '시와정신' 2009년 여름호)
산다는 게 이렇다. '바람' 같은 존재는 너무 가볍고 '현재'라는 버스는 너무 빠르다. 생의 길목에서 골똘해보지만 이내 저물녘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속고 또 속더라도 살아내야지. 기대와 희망으로 세상은 풍경을 만들고 삶의 이면은 깊어지리라. 권애숙/시인
2009. 11. 25. 부산일보
산의 푸른 젖꼭지를 물고
외딴집이 엎드려 잠들고 있었다
날마다 조금씩 산이 되는
그 집 뜰에는
갓 눈뜬 강아지
산자락을 걷어차고 있었다
길끝남.
개앙?
돌아가시오
녹슨 철조망
가시 끝에 매달아 놓은
왼손으로 쓴 글씨
- 홍정숙 '외딴집' (시집 '어느 날 문득', 시문학사, 2008년)
삶은 때로 오른손의 익숙함을 버리고 불편한 왼손을 택하는 것. 세상과 소통을 끊고 싶어 외따로 앉는다. '길끝남./개앙?/돌아가시오' 마지막 통보 같은 경고문도 내건다. 하지만 산의 젖줄을 물고 있으니 산을 닮고 산자락 차 대는 강아지를 키우니 그 품 또한 깊을 터. 자연과 동화되는 외딴집은 마지막 깃들고 싶은 그리움이다. '개앙'은 그냥의 사투리. 권애숙/시인
맛있는 시[5]
누항의 시/김석규
줄곧 젖는 일에만 이력이 난 가난의 우산이여
품 팔고 늦게서야 돌아온 지아비를 위해
밥상을 눈썹 높이로 받쳐 들고 들어오는
빈처여 조강지처여 젖어 해진 치마를 입고
이 하루도 살아서 무사히 버티었구나
희미한 불빛이지만 새어나가게 창을 열자
모자란 곳은 별빛이 내려와 채울 것이니
꿈이 있는 밤을 어찌 짧다고만 하겠느냐
비가 새는 지붕일지라도 더 없이 푸른 하늘이여
-김석규 '누항의 시' 전문 (월간 '현대시' 2009년 12월호)
가족이란 서로에게 우산이 돼 대신 젖어주는 것. 지성으로 더운 밥상을 준비하는 빈처가 있어 지아비는 힘든 줄도 모르고 오늘도 품을 판다. 살아 버티는 자들만이 꿈을 꿀 수 있다. 그 꿈 나눌 줄 알기에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다. 어둑한 밤의 골목 끝에서 우리 누항의 희미한 창이라도 열자. 별빛인 듯 누가 달려와 함께 환해질지도. 비 새는 지붕 밖 푸른 하늘이 되어 주는 것, 그게 조강지처 같은 사랑이다. 권애숙/시인
맛있는 시[6]
실습선 세미나실 책상에 올려놓은
둥근 볼펜 한 자루 자꾸 흘러내린다
김민선 항해사 그 모습 지켜보다
선실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주워
가로로 올려놓는다, 항해 중에는
모든 것이 5도쯤 기울어져 있다며
항해의 기본은 바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 이라며
그의 말대로 책상에 남은 둥근 펜!
기울기를 견디는 5도 만큼의 마찰력
그쯤 기울어져 있어야 바로 서는
선상船上의 수평, 또 다른 삶의 수평
메인브릿지 프런트 글라스 앞에 서서
먼 수평선 위에, 다시 펜을 놓아본다
이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어떤 기울기를 찾아, 나를 놓아본다
*부경대 실습선 가야호(1737T)는 원양승선실습과 연안 탐사를 위해 항해 중이다.
-이민아, '가야호 실습일지-5' 전문 (계간 '신생' 2009년 겨울호)
고통 없이 완성되는 생은 없다. 더도 덜도 말고 기울기 '5도쯤'. 기울기를 견뎌내는 힘으로 배는 나아간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킨다. '삶의 수평'도 '선상船上의 수평'과 다르지 않다. 내 삶의 현 위치는 어디쯤인가. 얼마만큼의 기울기가 나를 바로 서게 할까. 실습은 없다. 항로를 이탈하지 않고 무사히 항해하기 위해선 그 지점을 찾아 지혜롭게 기울어져 견뎌내야 한다. 권애숙/시인
용비어천가 제Ⅱ장 - 뿌리
저 질긴 뿌리는 우물 한 모금 물고 잠이 들었으리
첨벙, 차르락 두레박 내리는 소리,
먼 변방까지 삐걱이는 물지게 소리,
세상을 져 나른 뿌리의 가파른 심장 뛰는 소리,
작은 소리의 물결이 꿈결을 짚어오리
우물은 바닥의 바닥까지 젖꼭지를 물린 채,
나무뿌리로부터 우듬지까지 이어 달리리
물방울이 종을 울리는 나무가 품은 집 한 채,
범종소리 아득한 산방에서 우물은 오래오래 소용돌이 치리
더 깊고 맑아져야 만나는 뿌리의 경전,
출렁, 햇살이 양동이 내려놓을 때,
한 발 더 깊게 흙 속으로 내려서리
-전다형 '용비어천가 제Ⅱ장-뿌리' 전문(부산작가회의 사화집 '숲은 어디에 있나', 시와사상사, 2009년)
그저 열매를 다는 나무 없고, 그저 바다에 이르는 물 없다. 근본이 깊고 질긴 것들은 먼 변방까지 저를 퍼내고 바닥까지 제 젖꼭지 물릴 줄 안다. 뛰는 심장 소리 이웃으로 나눌 줄 안다. 새해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먼저 한 발 내려서고 다가선다면 더 맑아지고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뿌리 같은 경전은 세상을 오래오래 소용돌이치게 한다. 권애숙/시인
세상은 아직도
어른이 다된 나를 받아쓰기 시간 속에 묶어둔다
이젠 사전 한 구석에서
읽혀지지 않은 채 버려진 에로스, 아가페
그것들을 제대로 받아쓸 뿐 아니라
응용도 제법 하는데
백 점을 허락지 않는 낱말 하나 있다
나는 오늘도 받아쓴다
사랑,
받아 쓴 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탕
또 사탕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먹으면 더 달콤한
제기랄
오늘도 받아쓰기는 빵점이다
- 원무현 '받아쓰기' 전문 ('올해 꼭 읽어야할 詩', 요산문학관, 2009)
'사랑', 참 듣기 좋은 말이다. 그래서 참 많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쩌면 빵점짜리 받아쓰기 수준일지도 모른다. 써놓고 보면 비슷한 '사탕'처럼. 참 쉽고도 어려운 게 사랑하는 법이다. 하고 또 해도 백점을 못 받는 게 사랑이다. 조금 안다고 다 안다 말하지 말자. 세상은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고 우리는 힘겹게 받아내야 한다. 남의 것 빼앗아 먹는 게 더 달다고, 달콤한 사탕발림은 또 우리를 홀릴지도. 권애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