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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0
창세기 32:13-32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마하나임의 경험을 야곱은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군대를 보여주시며 언약을 따라 일하실 것을 알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을 못 믿고 있다. 아니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어떻게 일하실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만약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의지하였다면 담대하게 에서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계획과 술수를 의지하면서 살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불안하고 두려웠기에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13-15절).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라고 하였는데 “거기서”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 곧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곳에서 “밤”을 지내고 있다고 강조한다.
“예물”은 히브리어로 ‘민하’인데 ‘헌물, 조공, 희생제물, 선물, 소제’라는 뜻이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예물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20절에 보면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20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푼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파르’인데 ‘덮다, 진정시키다, 화해하다, 속죄하다, 역청으로 칠하다’라는 뜻이다. 민수기 25:13, 신명기 32:43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신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얼굴을 덮다’라는 말인데 야곱은 형 에서의 얼굴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 희생제물로 속죄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소유 중에서”라고 하였는데 야곱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이지만 언약의 관점에서는 ‘언약의 아들이 가진 것’으로 진짜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진 것은 자신을 대속물로 온전히 내어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백, 이십, 열”은 두 증인을 나타내고 ‘100’과 ‘10’은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사십”은 광야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려 간다는 의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복음을 보여주는 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야곱은 언약의 아들로서 에서에게 복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에서가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야곱과 어떤 언약의 관계 안에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도 자신의 수단과 방법이 남아 있는 자로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16-20절).
야곱이 에서에게 주는 예물을 세 떼로 나누었다는 것은 삼일 길과 같은 의미이다. 즉 언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신 것이다. 야곱으로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적인 것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자기 언약을 보여주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본문은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화해를 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야곱과 에서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야곱을 언약 안에서 어떻게 이끌어 가시느냐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1-25절). 여기서도 “밤”은 계속 강조된다. 야곱이 여전히 어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 열한 아들을 얍복 강을 건너게 하였다. 그리고 “홀로 남았더니”라고 한다. 모든 것이 빼앗긴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죄인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씨름”이란 말의 히브리어 ‘아바크’는 ‘붙잡다, 씨름하다, 전쟁하다’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라고 말씀한다. 즉 야곱이 걸은 전쟁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걸은 전쟁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히브리어로 ‘이쉬’로 ‘남자, 사람’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남자로서 가족을 책임지고 땅의 것을 쌓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한 남자’가 찾아와 시비를 건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흔히들 본문을 ‘야곱의 기도’라는 측면에서 읽고 해석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걸어온 전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2절)를 보여 주셨던 것이다.
야곱의 투쟁은 그가 원했던 많은 자식과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과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말은 지난 20년간 그가 피땀 흘린 인생의 대가는 하나님이 원하신 복과는 무관함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야곱을 밧단아람에서 이끌어 약속의 땅을 주시는 것이고 그 약속의 땅에서 언약의 자손을 이어가서 궁극적으로 이 땅에 언약의 후손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벅지 관절”을 치셨는데 ‘야레크’는 ‘넓적다리, 허리, 기초, 산출하는 부분, 옆구리, 몸’이라는 뜻이다(창 46:26, 출 1:5).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창 46:26)
하나님께서 야곱의 관절을 치셨다는 것은 그가 몸을 쓰지 못하는 상태로 죽었다는 의미이고 생명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고백은 겉사람 야곱은 죽고 속사람 곧 영의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절)라는 말씀은 야곱이 평생을 죽은 흔적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26-27절).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라는 표현으로 남자가 날이 밝아오자 떠나려고 한 것으로 보아 밤에만 관계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행동은 과거 벧엘에서 밤에 나타난 하나님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28-29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이제 자기 힘으로 언약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 이상 율법이 사람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우리 성경 각주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고 붙여 놓았기에 이렇게 이해하지만 ‘사라’(우세하다, 왕으로서 권력을 쥐다)라는 말과 ‘엘’(하나님)의 합성어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투쟁하신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이름이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 되어 다스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 언약이 야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는 것이다.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3-5)
하나님의 군대로 나타내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에 점령되었다. 야곱과 하나님이 두 진영으로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야곱의 진영으로 들어오셔서 하나의 진영이 된 것이다. “셈의 장막”(9:27)에 거하시겠다고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의 장막으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장막이 되었다. 죽음, 밤의 세력에서 꺼집어내어 하늘의 사람, 빛의 사람, 언약의 아들로 온전히 드러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0절). “브니엘”(히, ‘페누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대면하여 보았으나”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파님’이 두 번 반복된 표현이다. 즉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 가운데 얼굴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 얼굴이 진정한 얼굴이다. 그런데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0-23)
이 말씀에 근거해서 보자면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얼굴을 보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라는 겉 사람이 죽고 속 사람 이스라엘로 살아났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난 것이다.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31-32절). “절었더라”라는 말의 ‘찰라’는 ‘첼라’(갈빗대, 측면, 옆구리, 기둥, 성전의 측면방)에서 온 말인데 ‘구부리다, 절뚝거리다, 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야곱의 정체성이다. 야곱이 현실적으로는 절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성전 벽에 의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제사장 나라가 된다. 그것은 곧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님 왕국이 된다는 의미이이다.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라는 말씀은 먹는다는 것은 그것과 하나 된다는 의미로 본다면 더 이상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는 자들이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예물”은 히브리어로 ‘민하’(מִנחָה)로 희생제물이면서 곧 선물(헬, ‘도론’)이다. 2절에서 “군대”는 ‘마하네’(מַחֲנֶה)이고 “마하나임”(מַחֲנַיִם)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이다. 언약의 아들 야곱을 희생제물로 삼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 언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시는 대속물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군대로 만드시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마하네’와 ‘마하나임’ 안에 ‘헨’(חֵן)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 ‘하나님의 은혜’(헬, ‘카리스’)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야곱이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5절)라고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언약을 이루가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카리스)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도론)이라(엡 2:8)
(202410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