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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달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으뜸빛
-문학의 향기와 전통의 손맛 물씬 '한국대표 선비문화마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1리의 재령 이씨 집성촌인 두들 마을은 현대 문학의 거장 이문열의
고향이며, 그의 작품 세계의 모태가 되었으며, '언덕위에 마을'이라는 뜻으로 석계 고택과 석천서당,
안동장씨 유적비,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모여 있다.
두들마을은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 개척한 재령 이씨 집성촌으로 석계선생이
살었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해 전통가옥 30여채와 한글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장씨유적비,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겨 놓은 동대·서대·낙기대·세심대 등 유묵도 뚜렷하게 보이며,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 되었다.
일찍이 석계 선생이 영해로부터 와서 정착한 후 크게 문풍이 일어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으며, 석계 선생의 아들인 갈암 이현일과 손자인 밀암 이재 등이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전했고, 근세에 의병대장을 지낸 나산 이현규,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운서 이돈호와 이명호, 이상호 등의 독립 유공자 마을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의 훌륭한 어머니로 지정된 정부인 장씨의 얼이 살아 있는 마을로 맹자나 정자의 어머니,
혹은 신사임당에 비견할 만한 정부인 장씨 '장계향(1598~1680)'의 뜻을 잇고 기리기 위한 유적비와
전통한옥체험관 등도 마련되어 있으며, 전통한옥체험관에서는 정부인 장씨가 쓴 양반가의 음식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의 요리 조리법 가운데 오늘날 입맛에 맞게 현대화한 양반가의 7첩 반상음식을
맛볼수 있다.
△ 석계고택(石溪古宅)과 석천서당(石川書堂)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인 석계고택은 조선 인조(仁祖)와 현종(顯宗) 때의 학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 인조 18년(1640)에 세운 고택으로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이곳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장씨는 부덕(婦德)과 학문을 갖춘 인물로 신사임당(申師任堂)에
비견(比肩)되는 분으로 이문열 장편소설 '선택'의 주인공이 되었고, 아들인 이조판서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은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를 계승했다.
고택은 4칸 규모의 '一'자형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와 5칸 규모의 '一'자형 맞배기와집인 안채가
'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최근에 신축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새웠으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러 사랑채는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마구와 고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사랑 마루 주위에는 판벽으로 둘러 마루방으로 꾸몄으며
후면에는 감실을 설치하였고,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부엌·안방·대청·상방이 연접해 있고 안방 옆의
마루 후면에는 판벽을 둘러 고방을 설치했다.
상방의 우측벽에는 상·하방 사이에 문꼴을 내어 문을 달았는데 밖으로는 세살문을, 안쪽으로는
판장문을 설치하였으며, 안방에는 코쿨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안채 역시 가구는 삼량가의 간결한
구조로 320년이 넘은 유서 깊은 집으로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석천서당(石川書堂)은 석계 이시명(1590∼1674)이 네 아들과 함께 생활하던 곳으로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었으며, 재령이씨 석계파종중 소유이며 문중에서 관리한다.
조선왕조 인조 때 문인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이 1640년(인조 18년)에 이곳으로 이주할 때 네 아들과
더불어 낙기대(樂飢臺)위에 터를 잡고 석계초당이라 하였으며, 아들 모두가 문장이 뛰어나고 경학(經學)에
밝아 당시 유명한 문인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후손들이 1831년에 이 서당을 지었으며 1891년에 중수하였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천서당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 선생이 영해에서 석보로
이사와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들과 유림이 중건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이 되었다.
사후에 1676년(숙종 2) 상을 마친 넷째아들 이항재(李恒濟)가 돌아와 선업을 이었는데 이항제가 죽은 뒤 그
유적지를 그대로 둘 수 없어 자손들과 유림들이 초당을 중건하고 석천서당을 창건한 뒤 1891년(고종 28)에
중수하면서 2칸을 더 지었으며 석천서당에는 수산수진수창(首山粹辰酬唱) 석계기(石溪記), 과석계유허유감
(過石溪遺墟有感), 갈암차운(葛菴次韻) 석천서당 중수기 등이 있으며 서당고(書堂庫)에는 안릉세전(安陵世典),
석계선생문집(石溪先生文集), 정부인안동장씨실기(貞夫人安東張氏實記), 정묵제선생문집, 항제선생문집,
영천집 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석간고택
경북도문화재 자료 제603호 (2013.3.18.지정)
영양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아들중 넷째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좌해공 이수영이 후진양성과 강학을 위한
살림집인 정침과 독서공간인 정사이며 현재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로 유명하다.
좌해공 이수영은 1832년(순조32년) 석보면 화매에서 학문연마와 심신 수신에 노력하고,수양에 심혈을 기울리기 위해
형제들과 시를 짓고 유람을 하였다.
1852년(철종3년) 태백산에서 돌아온 이수영을 위해 문중형제와 친구들이 8칸(서실4칸,살림집4칸) 규모의 집을 지어
주어, 살았으나, 1859년(철종10년) 산불이 나서 불타버렸다.
그 후 1883(고종20년)제자들이 이수영을 위해 원리리에 살림집을 지은후 강학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여산정사"라고
명명하였다.여산정사는 뒷 산인 광려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한국전쟁(1950년)이 끝난후 이문열의 조모가 집안 친척인 이철호에게 집을 팔고난뒤 여산정사는 석간정사 및 정침이라
하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석간고택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간고택은 사랑채.안채.고방채가 있다.살림집인 정침은 정면4칸,측면 5칸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며,
독서실인 정사는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좌해공 이수영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아들 항재 이승일의 7세손으로 1800년대 가학을 이어 정리하고 기록한
학자이다.석천서당,광록초당,남악정을 중수하도록 했다.저서로 좌해유고9권과 부록2권이 있다.^-^
*좌우명"공경함으로서 안을 바르게하고 옳음으로 밖을 곧게 한다"
-출처:석간고택 문화재 지정 실태조사서
△ 남악정(南嶽亭)과 유우당( 惟于堂)
남악정은 퇴계의 학통을 이어온 숙종조의 성리학자요, 이조판서를 지낸 문경공 갈암(葛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선생이 1676년에 초가를 2칸 지어 남악초당(南岳草堂)이라 하였던 것을, 1822년 후손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였다.
갈암은 14세 때인 1640년에 부친인 석계 선생을 따라 석보면에서 14년 간 지낸 후에 1653년에는 다시 수비면에 들어가
띠집을 짓고 과거에 응시한 것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3칸 규모의 평대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했으며, 대면 전면에 걸어둔 홍도문(弘道門)이란현판은 숙종대왕의 어필(御筆)이라 한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으며 툇간의 주위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설치했고 가구는 종량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오량가의 장혀수장 집이며, 처마는
홑치마로 좌우에 문을 달아 3면에서 출입이 가능하여 내·외부 공간이 연속되는 건축상의 특징을 가진 집이다. .
유우당은 순조 33년(1833)에 이상도(李相度1773~1853)가 건립한 가옥으로, 장자인 이기찬(李箕燦)의 호를 따라 당호
(堂號)를 유우당으로 하였으며, 이 집은 석보면 주남리에 세운 집으로 후손인 이돈호(李暾浩)가 현 위치인 두들 마을로
이건 했는데, 이돈호는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해 독립 운동에 이바지 하였으며, 조카인 이병각(李秉珏)은 항일애국시인으로
활약했다.
유우당은 원리마을의 가장 깊은 곳에 배산하여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정침인 유우당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자형
건물로 좌측 헛간과 우측의 사랑마루는 좌우로 돌출되어 양날개잡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사랑방 옆의 사랑마루는 우측으로 돌출되어 날개가 되었고, 사랑방과 사랑마루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고 여기에
다시 퇴를 내어 헌함을 둘렀으며, 사랑방 뒤로 중방을 두어 사랑방과 통하게 했고 중방 뒤로는 고방이 익사를 이루며 안채와
연결되어 있고 중문간 좌측에는 외양간과 아랫방, 헛간이 연접되어 있는데 헛간은 날개가 되어 우측의 사랑마루와 함께
양날개집이 되어있다.
아랫방 뒤에는 부엌이 익사를 이루며 안체와 연결되어 있고 안채는 앞마당을 향해 전면이 개방된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을, 안방의 후면에는 반 칸 규모의 도장방을 둠으로써 반 칸 가량이 전명으로 더 돌출되어 채광에 유리하게 했으며
대청우측에는 건넌방을 두고 건넌방의 전면에는 4자 폭의 건넌방으로의 출입, 외부로의 통로, 그리고 전면 고방 상부에
있는 다락으로 출입하는 기능을 가진 통로를 둬 사대부들의 예학(禮學)사상과 엄격함, 그리고 도덕성을 느낄 수 있는
고택이다.
△두들마을 세심대
수신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심대'는 두들마을 들머리에 흐르는 주남천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명인지사,선비,은자들이 대자연을
감상하던 곳으로서 특히 '세심대'에서 동쪽을 향하여 조망하면
눈 앞의 30리 전방 산천경관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어 심신이
상쾌하여 잡념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이다.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언덕 바위에 각자
했다고 한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밎 역경.
*두들마을 낙기대樂飢臺
<시경詩經>"형문衡門"에
"누추한 집에서 느긋이 쉴 수 있으니,
졸졸 흐르는 냇물을 보며 굶주림을 잊고 살만하다
衡門之下 可以樓選 泌之洋洋 可以樂飢"는 말이 있다.
여기서 '형문衡門'이란 기둥 두 개를 세우고 한 개의
횡목을 가로지른 허술한 문을 뜻하는 것으로 흔히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일컬을 때 쓰인다.따라서
'낙기樂飢'란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자연을
즐기는 은자隱者의 집이라는 뜻이 된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에 '낙기대樂飢臺'
가 있으며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용리 부용동정원에
'낙기란樂飢欄'이 있다.
*衡門 = 누추한 집
누추한 집에서도 한가로이 쉴 수 있네
졸졸대는 샘물에도 굶주림을 달랜다네
고기 먹는다해서 황하의 방어라야될까
아내를 얻는다해서 제나라 강씨라야될까
고기 먹ㄴ느다해서 황하의 잉어라야될까
아내를 얻는다해서 송나라 자씨라야될까
#어진 사람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자
몸을 숨기면서 부른 노래이다.
제나라 강씨와 송나라 자씨는 제후의
집안을 가르치고 황하의 방어와 잉어는
맛 있는 물고기를 말한다.
*대臺 언덕바위
옛 선비들이 바위를 좋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삼라만상중에서 가장 항구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자연계의 꽃과 풀이 본래의 의지를 지키지 못하고
계절과 타협하고 굴복하나 바위는 모든 것을 초월
하여 태초의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정형기기자 jeonghk@kyongbuk.co.kr
추가자료------------------------------
*선비정신과 삶
1.체인體認 온몸으로 인식하고
2.체찰體察 온몸으로 성찰하며
3.체험體驗 온몸으로 시험하고
4.체행體行 온몸으로 실천한다.
*세심대洗心臺
연못,누정,당,대 등 여러 곳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세심洗心'이라는 말은 <역경>"계사상전繫辭上傳"의
"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에서 나왔는데,말 그대로
"심중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낸다."는 뜻이다.
마음속의 더러움이란? 일신의 안위와 재물을 탐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인간의 부정적 속성이라 할 것인데,
이런 마음을 씻어내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면서 심신
을 수양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덕천서원에 세심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정기亭記에서 이 정자의 이름에 대한
유래를 밝히고 있다.그리고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에도 세심정이라 이름한 정자가 있는데, 이곳은
조선 중종,명종 때의 학자이며 조광조의 수제자로
이름 높던 조욱이 기묘사화의 여파로 이곳에 은거
하며 제자들과 더불어 도학을 강론하던 유서가
깊은 정자이다.또한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강
건너 보이는 유성룡의 옥연서당 경내에 세심재
洗心齋가 있으며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옥산서원 독락당 부근에는 퇴계 이황이 세심대
洗心臺라는 글씨를 새긴 암반이 있다. 경북 구미시
오태동에도 세심당이 있다.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언덕에 항재 이숭일이 새긴 세심대가 있다.
세심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 징심대澄心臺가 경주시
월성군 양동마을에 있다.
*낙기대樂飢臺
<시경詩經>"형문衡門"에
"누추한 집에서 느긋이 쉴 수 있으니,
졸졸 흐르는 냇물을 보며 굶주림을 잊고 살만하다
衡門之下 可以樓選 泌之洋洋 可以樂飢"는 말이 있다.
여기서 '형문衡門'이란 기둥 두 개를 세우고 한 개의
횡목을 가로지른 허술한 문을 뜻하는 것으로 흔히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일컬을 때 쓰인다.
따라서 '낙기樂飢'란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자연을 즐기는 은자隱者의 집이라는 뜻이 된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에 '낙기대樂飢臺'
가 있으며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용리 부용동정원에
'낙기란樂飢欄'이 있다.
<시경詩經> "형문衡門"
*衡門 = 누추한 집
형문지하 가이루지 비지양양 가이락기
衡門之下 可以樓遲 泌之洋洋 可以樂飢
기기식어 필하지방 기기취처 필제지강
豈其食魚 必河之魴 豈其取妻 必齊之姜
기기식어 필하지리 기기취처 필송지자
豈其食魚 必河之鯉 豈其取妻 必宋之子
누추한 집에서도 한가로이 쉴 수 있네
졸졸대는 샘물에도 굶주림을 달랜다네
고기 먹는다해서 황하의 방어라야될까
아내를 얻는다해서 제나라 강씨라야될까
고기 먹ㄴ느다해서 황하의 잉어라야될까
아내를 얻는다해서 송나라 자씨라야될까
#어진 사람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자
몸을 숨기면서 부른 노래이다.
제나라 강씨와 송나라 자씨는 제후의
집안을 가르치고 황하의 방어와 잉어는
맛 있는 물고기를 말한다.
*안빈락도安貧樂道
가난한 처지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道를 지켜 즐긴다는 말이다.
도문적유학관으로 볼 때 구도자求道者의 적극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송宋나라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내용에서 그가 진정한
안빈락도安貧樂道를 즐겼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말하는 안빈락도安貧樂道는
'달 아래 고기 낚고 구름 속에 밭을 갈아 먹고 못 남아도
그칠 적은 없어라' '노계 박인로'(인조 14년)가 76세에 지은
'노계가'의 일부이다.
선비는 '가난'을 마다 하지 않고 존재의 '맑음'을 추구했던 청빈사상
淸貧思想으로 안분지족安分知足,안빈락도安貧樂道를 즐겼다고 생각된다.
*안분지족安分知足
安分知足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宋나라 '홍매'가 저술한 '용재수필'三筆人當知足의
"其安分知足之意終身不揄"라는 대목에서 유래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에 뜻을 두고 평생토록
변심하지 아니해야 한다."
*선비정신과 삶
1.체인體認 온몸으로 인식하고
2.체찰體察 온몸으로 성찰하며
3.체험體驗 온몸으로 시험하고
4.체행體行 온몸으로 실천한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에 있는 세심대 모습>
*경주 안강 세심마을
세심대洗心臺
관어대觀漁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창랑정' 모습>
*석란정,창랑정,천하정,취영정 모습
*낙기대樂飢臺 낙기정樂飢亭
남명 조식 선생의 낙기정樂飢亭
석계 이시명의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이 새긴 낙기대
남명 조식 선생의 세심정
퇴계 이황 선생님이 새긴 세심대
영양석간고택
경북도문화재 자료 제603호 (2013.3.18.지정)
영양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아들중 넷째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좌해공 이수영이 후진양성과 강학을 위한
살림집인 정침과 독서공간인 정사이며 현재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로 유명하다.
좌해공 이수영은 1832년(순조32년) 석보면 화매에서 학문연마와 심신 수신에 노력하고,수양에 심혈을 기울리기 위해
형제들과 시를 짓고 유람을 하였다.
1852년(철종3년) 태백산에서 돌아온 이수영을 위해 문중형제와 친구들이 8칸(서실4칸,살림집4칸) 규모의 집을 지어
주어, 살았으나, 1859년(철종10년) 산불이 나서 불타버렸다.
그 후 1883(고종20년)제자들이 이수영을 위해 원리리에 살림집을 지은후 강학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여산정사"라고
명명하였다.여산정사는 뒷 산인 광려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한국전쟁(1950년)이 끝난후 이문열의 조모가 집안 친척인 이철호에게 집을 팔고난뒤 여산정사는 석간정사 및 정침이라
하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석간고택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간고택은 사랑채.안채.고방채가 있다.살림집인 정침은 정면4칸,측면 5칸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며,
독서실인 정사는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좌해공 이수영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아들 항재 이승일의 7세손으로 1800년대 가학을 이어 정리하고 기록한
학자이다.석천서당,광록초당,남악정을 중수하도록 했다.저서로 좌해유고9권과 부록2권이 있다.^-^
*좌우명"공경함으로서 안을 바르게하고 옳음으로 밖을 곧게 한다"
-출처:석간고택 문화재 지정 실태조사서
*2분스피치용 스토리로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