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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조류 독감
마이크 데이비스
세계보건기구가 몇 년 안에 1억 명의 사망자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되는 새로운 전염병인 조류독감의 위협도 쁘라니 통찬과 그녀의 딸 사꾼달라의 이야기를 통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제대로 전할 수 없을 것이다. 열한 살짜리 소녀가 젊은 엄마의 품에 안겨 죽어가던 모습은 정말이지 우리 시대의 ‘피에타’라 할 만한 장면이었다. 내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정부가 조류독감의 절박하고 엄청난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씌어 졌다.
바이러스 학자들이 ‘H5N1’이라는 유전자 번호를 부여한 이 독감아형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97년 홍콩에서였다. 물새에서 인간으로 전이된 바이러스에 의해 당시 감염자 18명 가운데 6명이 사망했으며. 홍콩 시 당국은 모든 가금류를 긴급히 살처분해 이 갑작스러운 첫 번 째 사태를 제압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지하로 잠복했고, 집오리가 ‘조용한 보유숙주’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2003년, 조류독감은 다시 중국과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갑작스럽게 대규모로 등장했다. 연구자들은 H5N1이 더욱더 치명적인 형태로 바뀌고 있음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베트남과 타이에서 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적 공조가 이루어졌고, 2004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1억 2,000만 마리 이상의 닭과 오리가 살처분되었다. 도살된 가금류의 대부분은 소농과 계약 사육자들의 소유였고, 그들은 그 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해버렸다.
세계보건기구는 쁘라니가 사꾼딸라에게서 직접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1997년 최신의 치명적인 아형이 출현한 이래 최초로 조류독감의 인간 대 인간 감염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세계보건기구와 타이 정부는 쁘라니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독감 연구자들은 이 사태가 전 세계로 중요하게 타전되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조류독감의 위기의 핵심은, 지구적 규모의 농업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태적 조건에 확고하게 적응한 치명적인 변종 독감이 새로운 유전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조류독감은 밀집된 도시 지역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 사이에 들판의 불길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인플루엔자에게 강요해온 운명이기도 하다. 인간이 환경에 가한 충격-해외여행, 습기 파괴, 기업의 ‘축산업 혁명’, 제3세계의 도시화와 그에 따른 대규모 슬럼의 성장-은 인플루엔자의 비정상적 변이 가능성을 지구에서 가장 두려운 생물학적 위험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도시 빈곤이 증대하고, 감염성 질병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제약 산업계가 백신 개발을 기피하고, 가난한 나라는 물론 일부 부국에서도 보건 의료 체계가 제 구실을 못하거나 심지어 와해되면서, 우리는 새롭게 출현하는 여러 가지 질병에 끔찍할 정도로 취약해졌다.
-진화의 고속 차선
매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야생 오리와 기러기 수백만 마리가 정기적인 이동을 위해 캐나다와 시베리아의 호수에 집결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그때 번성한다. 연구자들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어린 새들의 창자에서 무해한 상태로 왕성하게 복제되어 많은 양이 물속으로 배설된다는 사실을 1974년 처음 확인했다. 이 바이러스를 다른 새들이 섭취해 집결지에 모인 어린 철새의 무려 1/3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몸에 지니게 된다. 더구나 같은 군집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 마리의 오리 내부에서도 다양한 변종 인플루엔자들이 공존한다.
철새들은 멕시코만 연안과 중국 남부로 이동하는 한 달 사이에 배설물을 통해 계속해서 바이러스를 퍼뜨리며, 그 과정에서 감염이 다른 야생 조류와 가금류로 확산될 가능성도 커진다. 그러나 늦가을이 되면 오리 인플루엔자는 사라진다. 그리고 철새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매년 같은 호수로 돌아온다. 실제로 이런 순환은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오리들이 해를 입지 않고 존속하는 한 인플루엔자도 번성한다.
인플루엔자는 크게 A와 B와 C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유전학적으로 보았을 때 수세기 전에 조류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 군에서 갈라져 나온 듯하다. 인플루엔자 C는 통상 감기라고 부르는 것의 원인이며, 인플루엔자 B는 특히 어린이들이 많이 걸리는 전형적인 겨울 독감을 일으킨다. 물론 인플루엔자 B가 매년 상당한 수의 사망자를 낳기는 하지만, 이 둘은 대유행병의 위협과는 무관하다. 반년 인플루엔자 A는 여전히 야생의 상태이며, 매우 위험하다. 인플루엔자 A의 보유 숙주는 오리와 물새류이다. 그러나 녀석들은 현재 다른 조류와 포유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횡단해가는 초기 단계에 있다. 전염병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플루엔자 A는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하는 질병”이다.
자나미비르와 오셀타미비르가 조류 독감의 급격한 발병을 아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완화해주는 유일한 약물이라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자나미비르는 흡입기가 필요해 투약이 어렵기 때문에 대규모 예방법으로는 경구 복용형인 오셀타미비르 정이 실질적인 유일한 대안이다. 세계 최고의 인플루엔자 전문가들은 긴급 계획을 수립해 오셀타미비르 생산을 늘릴 것을 여러 해에 걸쳐 촉구하고 있다. 오셀타미비르는 현재 로슈 사에 의해 스위스에 있는 단 하나의 공장에서 독점 생산되고 있다.
-빈곤의 발병력
인플루엔자는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미지의 존재이다. 인플루엔자 A는 고열과 마른기침을 특징으로 하는 보통의 감기와는 쉽게 구별되지만, 인후염, 두통, 뼈의 통증, 결막염, 현기증, 구토, 설사 등 엄청나게 다양한 증상을 나타낸다. 인플루엔자에 항생제를 처방하는 일이 만연해 있는 현실은 대다수의 일반 의사들이 바이러스 감염과 박테리아 감염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저명한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플루엔자가 변화무쌍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인정한다. 임상 증거만으로는 인플루엔자와 다른 급성 호흡기 감염증을 쉽게 구분할 수 없다. 실제로 인플루엔자가 급증한 시기에도 실험실 검사를 통해 인플루엔자로 확인되는 경우는 현재 약 절반 정도이다.”
인플루엔자는 기도의 먼지와 세균을 청소하는 섬모상피세포를 파괴함으로써 박테리아의 중복감염을 조장한다. 인플루엔자 A는 폐렴 박테리아와 치명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포도상구균과 폐렴쌍구균이 아주 고약하다. 따라서 박테리아성 폐렴은 인플루엔자 사망의 가장 일반적인, 혹은 적어도 가장 분명한 관계에 있는 원인인 셈이다.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해 다양한 인구집단에서 발생한 가혹한 희생의 유력한 결정 요인은 빈곤과 영양실조, 만성 질병, 동시 감염이었다. 사실 이 전 세계적 대유형병 사태는 각기 다른 전염병들의 집합이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전염병은 각 지역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공중보건 환경에 의해 규정되었다. 인도와 이란 등 일부 국가들에서는 굶주림과 말라리아, 빈혈 같은 보조 요인들이 인플루엔자 및 그 2차 감염증과 치명적인 비선형적 상승작용을 나타냈다.
-그릇된 교훈
인류는 콜레라, 광견병, 장티푸스, 탄저병, 디프테리아, 결핵, 흑사병 등 많은 역사상 위대한 살인자들의 정체가 박테리아라는 것을 밝히는 데 성공했으며, 아직까지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바이러스가 소아마비와 기타 질병의 원인임을 알아냈다.
1916~1917년 겨울, 영국군은 프랑스 에타플의 대규모 주둔지에서 엷은 자줏빛 시아노제가 동반된 급성 폐렴이 급증해 애를 태웠다. 최근 영국의 연구자들은 이 사건이 1918년 여름 대유행병으로 진화한 인플루엔자 아형의 최초 ‘파종’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군의관들은 이 사태를 유행성 기관지염으로 진단했고, 그리하여 18개월 후 같은 증상이 명백한 인플루엔자와 함께 거대한 규모로 돌아오자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유럽의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진짜 병원균을 분리해내거나 효과적인 백신을 만들어내는 것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결국 공중보건 기관은 르네상스 도시국가들이 선페스트를 막기 위해 사용했던 오래된 무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격리와 마스크 말이다. 미국령 사모아와 호주 같은 몇 몇 예외적인 경우는 가혹한 격리 조치를 통해 대유행병을 추방하거나 적어도 녀석의 병독성이 약화될 때까지 그 도래를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인플루엔자의 불바람이 계속해서 타올라 가용한 인간 연료를 모두 소진시켰다. 약 5억 명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의 대유행병 사태는 현대 의학의 철저한 패배였다.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면서 인플루엔자의 위협을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1968년 이후 연구자들은 많은 극적인 발견을 이루어냈다. 바이러스학자들은 처음으로 HA분자와 NA분자의 모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항원 소변이가 점 돌연변이(아미노산 치환)의 결과이며, HA와 NA가 독립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더욱 중요한 성과는, 유전자 재배열이 대유행병을 야기하는 새로운 아형이 탄생하는 거의 확실한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인플루엔자가 오리와 물새류에 자연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연구자들은 드디어 바이러스이 가계도를 규명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조류 숙주에서 항원적으로 상이한 HA 15종과 NA 9종을 확인했다. 이론적으로 총 135개의 아형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인플루엔자의 진화가 주로 새로운 물새류의 HA 단백질이 인간에게 건너오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이제 명백해졌다. 그리고 각각의 범유행적 형태는 치명적인 첫 등장 이후 안정화 단계로 접어들어 온건한 돌연변이를 통해 생존해가는 것이다. 나아가 1957년과 1968년 대유행병의 혈청 연구를 통해 노년층이 새로운 범유행성 HA에 약간의 면역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홍콩의 새들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는 매우 위험하다. 이 바이러스는 혈류를 타고 확산되면서 모든 조직과 기관을 감염시킨다. 뇌, 위, 폐, 눈, 모든 곳에서 과다 출혈이 발생한다. 그러다가 볏에서 발톱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녹아내린다.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가 발생하면 흔히 그렇듯 거의 모든 가금류가 죽었다.
소위 ‘가금류 역병’이라고 하는 이 섬뜩한 병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1878년이지만, 1955년까지는 그 병원균의 정체가 인플루엔자 A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인플루엔자처럼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도 수수께끼같은 녀석이다. 녀석은 상이한 국가, 대륙, 반구의 닭과 칠면조 집단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타오른다. 최근까지 녀석은 비교적 드물게만 발생했다. 1959년부터 홍콩에서 갑작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 1997년 사이에 모두 15번의 국지적인 발병이 있었다. 이 모든 사례에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는 H5와 H7을 지닌 인플루엔자 아형에 의해 발생했다.
1918년과의 유사성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자신의 선조처럼 H5N1도 이제 자신의 병독성을 건강한 성인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11월초부터 12월 말 사이에 나타난 17건의 새로운 발병 사례 가운데 어린이 8명은 다행스럽게도 합병증이 거의 없이 회복했지만, 9명의 10대 및 성인 희생자 가운데 5명은 바이러스성 폐렴과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 안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복제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에 걸맞은 전염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희망적인 요소였다. 대유행병의 불꽃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지는 대화재로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홍콩 당국은 예방 조치로 항바이러스제 리만타딘을 대량 구매했다.
그러던 12월 중순 조류 인플루엔자 유행의 ‘실종된 고리’가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닭들이 농장과 도시의 시장에서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봄철에 소멸했던 가금류 전염병이 이제 도처에 퍼져 있었다. H5N1은 약간의 집오리와 거위를 포함해 도시에 있는 닭의 최소 20% 이상을 감염시켰다.
-혼란스런 이야기
H5N1 바이러스는 물새에서 육상 가금류로, 다시 말해 오리에서 부분적으로 기러기를 경유해 닭으로 적응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반면 H9N2(어쩌면 H6N1)는 메추라기 또는 꿩 같은 다른 육상 가금류에 다가가는 메커니즘을 통해 적응하고 있었다. 수생 철새와 집에서 기르는 새들이 유전적으로 적응성이 있는 바이러스를 육상 가금류에 직접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가금류 산업이 확대되면서 이 과정이 더욱 촉진되었다.
대망을 품은 아형들은 각기 다른 자산을 가졌다. H5N1이 최고로 치명적인 암살자라면 H9N1 변종은 가금류에 대한 병독성이 그리 높지 않다. 때문에 녀석들은 범유행성 전염병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병독성이 약한 닭 바이러스는 탐지와 박멸을 피해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고, 결국 인간 집단을 급속히 감염시킬 수 있는 최적의 유전자 배열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해서 재배열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2003년 홍콩의 연구자들은 이 도시의 생가금류 시장에서 분리된 바이러스 연구를 통해 H9N2가 대유행병이 될 가능성을 보강해주는 추가 증거를 확보했다.
그러는 사이 H5N1이 다시 한번 홍콩을 강타했다. 2001년 2월과 3월에 인플루엔자 감시 네트워크는 시장의 닭, 메추라기, 꿩, 비둘기에서 이 바이러스의 변종 몇 가지를 발견했다. 몇 달 후 한국의 검역기관이 수입된 중국산 오리 고기에서 H5N1을 분리해냈다. 실험실 검사 결과 이 H5N1 유전자형들은 1997년 변종과는 다른 별도의 재배열형으로, 2000년 후반에 거위 바이러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거위 바이러스가 오리에게 건너가 물새에서 기원하는 다른 미지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재배열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연구자들은 새로운 H5N1이 옛날보다 병독성이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12월 H5N1이 녀석의 자연 숙주들을 도륙하기 시작하면서 교과서의 이론이 다시 한번 논파되었다. 거위는 물론이고 오리, 플라밍고, 백조, 해오라기, 왜가리 들이 홍콩 시민들이 즐겨 찾는 두 공원에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인플루엔자의 발병력에 면역성이 있다고 여겨졌던 청둥오리들도 파멸적인 신경계 질병을 앓았다. 죽은 오리들이야말로 이제 물새와 육상 조류 사이에서 H5N1 돌연변이들의 쌍방향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제는 조류의 H5N1 감염을 근절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두 달이 지난 2003년 2월 초, 일곱 살 난 한 소녀가 엄마, 여동생, 오빠와 함께 푸젠성을 방문했다가 급성 호흡기 질병으로 죽었다. 홍콩에서 죽어가던 딸의 아버지도 2월 중순 병에 걸려 죽었다.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지 9일 만이었다. 그의 여덟 살 난 아들도 심각한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지만 결국 건강을 회복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공원의 오리들을 죽였던 H5N1과 동일한 변종에 감염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유전자 판독 결과 놈은 원래의 1997년 변종과 먼 친척뻘이었다. 헤마글루티닌은 동일한 계통에서 유래했지만 내부 단백질과 뉴라미니디아제는 다른 곳에서 진화한 것이었다.
-대유행병의 충격
사스와 인플루엔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스도 비슷한 증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놈은 인플루엔자만큼 불가사의한 녀석은 아니다. 페이리스와 이관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스는 다른 전염병들보다 공중보건 조치를 통해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드러냈다. 우선 사스는 잠복기가 5일 정도이며, 고온과 마른기침이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비로소 전염성이 생긴다. 또 전염력이 최고조에 도달하는 데 10일 정도가 걸리므로, 발병이 수반되지 않는 무증상 감염 사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진행이 느리고 증상이 곧 전염성의 표지가 되는 이런 바이러스에는 가차 없는 차단과 격리라는 구식 정책이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인플루엔자는 완전히 다르다. 녀석은 빠르고 기만적이다. 전염과 발병이 일치하지도 않는다. 감염자는 바이러스를 대량으로 살포하고 다니며, 증상이 나타나기 하루 이틀 전에 전염성이 아주 높다. (물론 장기간의 비활동성 잠복기를 가지는 HIV는 훨씬 더 교활한 놈이다. 감염자가 아무런 증상이나 질환이 없는 상태에서 여러 해에 걸쳐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플루엔자 유행에는 무증상 감염이 잦다. 결과적으로 인플루엔자는 전염성이 더 강하다. 뿐만 아니라 녀석은 ‘R’, 즉 ‘기본 복제 수’가 HIV보다 더 높다. 전형적인 독감의 R이 5~25인데 반하여 사스는 2~3에 불과하다. 사스의 창궐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차단이든 격리든 바이러스의 전달을 절반 정도람 차단하면 된다. 반면 독감 대유행을 통제하려면 감염자들을 거의 100% 격리해야 한다. 따라서 미래에는 전통적인 격리 조치가 1918년만큼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파멸의 삼각지대
인플루엔자 생태학의 관점에서 볼 때 놀라운 것은 개발도상국의 육류 소비 증가분의 무려 76%사 돼지고기와 가금류라는 사실이다. 선진국에서 소규모로 증가한 음식물 소비도 가금류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바이러스에게 공급되는 ‘식량’-가금류, 돼지, 인간-이 극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가금류와 축산물의 산업적 생산을 상징하는 전 세계적 아이콘은 거대 식품 기업 타이슨 푸즈이다. 매년 22억 마리의 닭을 도살하는 타이슨 사는 전 세계에서 대규모의 수직 계열화, 계약 사육자들에 대한 착취, 노골적인 반노동조합주의, 만연한 산업재해, 환경오염, 정치적 부패의 동의어로 자리를 잡았다. 미주리 주, 네덜란드, 타이 어디에서나 농업 지대가 가금류 사육장으로 변했고, 농민들은 닭 관리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가금류의 개체수 밀도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현대 양계 산업의 필수적인 요건은 ‘생산 밀집도’, 다시 말해 사육 농장들이 하나의 대규모 가공 공장 주변에 조밀하게 포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북아메리카, 브라질, 서유럽, 남아시아에 닭이 수억 마리씩 모여 있는 지역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곳은 대개 가금류 농장이나 철새 도래지 인근에 위치한다. 이런 인공적인 광둥도 마찬가지로 대유행병의 도가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산 밀집도가 바이러스 밀집도와 동의어가 되는 것을 아닐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2003년 3월에 나왔다. 과학자들이 중국에서 발생한 비전형적인 폐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바로 그때,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의 한 농장에서 닭들이 죽어나간 것이다. 네덜란드는 칠면조와 거위의 주요 생산국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달걀과 생닭 수출국이기도 하다. 헬데를란트의 닭 사육 농장 수백 곳은 고도의 효율성을 바탕으로 매년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네덜란드 가금류 산업의 중심지이다. 유럽연합의 국제 교역망에서 네덜란드가 차지하는 중심적인 역할과 함께 습지와 야생 조류, 가금류, 도시의 높은 인구 밀도 사이의 이러한 밀접한 연계는 주장강 삼각주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실제로 3월에 발생한 전염병의 경로를 추적한 결과, 한 농장에서 방목한 닭들이 인근 운하의 야생 물새와 접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00년, H6N2 인플루엔자가 캘리포니아 남부의 가금류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이 바이러스이 유전체를 판독한 과학자들은 녀석의 단백질이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의 물새류 계보 양쪽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이 사태는 이전까지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유전자 영역이 이제 서로 연결되었으며, 그 결과 동아시아의 바이러스가 미국에 도착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이 바이러스는 초기에는 별다른 증상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곧 보다 치명적인 유전자형으로 진화했다. 2002년 1월 병독성이 아주 강한 변종이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의 한 농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후 인근의 다른 농장으로 퍼져나갔다. 감염된 닭들은 가금류 가공업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중부의 털록으로 수송되었고, 곧 털록은 폭발적 유행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면서 전염병을 퍼뜨렸다. 세 개의 주요 도로로 둘러싸인 털록 지역이 파멸의 삼각지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은 저병원성과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를 구별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그 감시와 대응에도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유행병을 감시하고 인류의 생물학적 안전을 지키는 중요한 과제보다 농업 기업의 이익이 앞세워져서도 안 된다.
북아메리카의 가금류 산업에서 점점 더 자주 볼 수 있는 인플루엔자로 H5와 H7 아형이 있다. 이 녀석들은 저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에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로 빠르게 진화하는 불길한 추세를 보여준다. 저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를 인간 건강의 심각한 위협 요소로 취급하지 않아서 발생한 대규모 위기 상황이 2004년 2월부터 5월에 걸쳐 브리티시컬러비아 주의 플레이저 밸리에서 일어났다.
전 세계의 공중 보건 체제는 대유행병 조기 경보 체계에 존재하는 맹점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접촉에 대한 포괄적인 점검과 관찰, 감시가 필요하다. 세계 각국의 공중보건 기관에 적절한 시약 키트를 제공해 새로 발견되는 인플루엔자 아형의 정체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덜란드, 캘리포니아, 브리티시컬러비아에서 잇달아 발생한 가금류 전염병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커다란 교훈은, 조류 인플루엔자의 경우에는 지방적인 사건이 언제나 세계적인 사태라는 것이다.
-전염병과 이윤
질병생태학자들은 집약적인 산업적 공장 주위로 소규모 생산자들이 고도로 밀집해 있는 현실이 매우 위험한 상황을 야기한다고 믿고 있다. 전염병학의 견지에서 보면 야외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도화선이며, 공장형 시설에서 고밀도로 사육되는 닭들은 충전된 폭약인 셈이다.
평론가들은 중국 사회에서 과학적, 의학적 ‘투명성’이 단명해버린 이유를 여러 각도에서 추측했고, 국제수역사무국과 세계보건기구는 아시아에서 H5N1이라는 대재앙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가금류 살처분 정책이 계획성 없이 때로는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지는 사태를 몹시 우려했다. 타이에서는 수백만 마리의 닭을 생매장하기 위해 군대의 감시 하에 죄수들이 동원되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소규모 생산자들이 키우던 닭은 의무적으로 도살된 반면 기업이 사육하던 닭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활동가들은 노동자들과 소비자의 건강보다 수출업자의 이익이 우선시되고 있다며 비난했고, 세계보건기구는 정부가 농민과 살처분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의 감염 예방에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성토했다.
사스 발병 당시 능숙한 대처로 세계보건기구의 칭송을 받았던 베트남 정부는 전체적으로 더 협력적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빈곤과 더불어 닭을 뒷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는 식의 분산된 가금류 사육 방식이 바이러스 방화선을 효과적으로 구축하는데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했다. 가난한 농민들은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투계처럼 값비싼 닭들은 숨겼다. 더구나 정부도 농촌 지역에서 분노가 확산되자 살처분 반경을 1.5킬로미터 이상으로-세계보건기구는 3킬로미터를 권장했다- 확대하고 전염병의 숙주일 수도 있는 집오리들을 몰살시키기를 주저했다. 농장 소독과 오염된 장화와 의복을 통해 바이러스가 추가로 전염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지방에서 발병이 진압되자마자 다른 지방에서 또 다른 발병 사태가 부상했다.
정말이지 2월은 가공할 달이었다. 베트남과 타이에서 다시 인간 희생자가 발생했고,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도 추가로 조류독감이 발생했다. 세계보건기구 연구팀은 미국, 유럽, 일본의 연구소들에서 일군의 정상급 과학자들을 충원해 전 세계적으로 대책이 거의 없는 대유행병의 임박한 가능성과 사투를 벌였다. 1997년 개발된 실험 백신은 유전자형 Z에 무력했다. 녀석은 가장 싸고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바이러스제인 애먼타딘에도 내성을 보였다.
더욱더 불길한 것은 그 새 변종이 과학적으로 다른 어떤 인플루엔자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점이었다. 유전자형 Z는 바이러스성 폐렴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감염자 자신의 광포해진 면역계가 폐와 기타 장기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사이토카인 폭풍’을 놀랄 만큼 능숙하게 유발했다. 1997년의 친척과 달리 녀석은 성인뿐만 아니라 유아와 10대들까지 살육했다.
과학자들은 날이 갈수록 녀석이 재배열형 자손이 출현할 것을 두려워했다. 놈들은 세계를 정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나라 캐나다만이 대유행병의 위협에 대처하는 진지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살처분이라는 음산하고 불결한 작업만이 악몽과도 같은 바이러스와 취약한 인류의 숙명적인 조우를 예방하는 희망이었다. 결국 약 1억 2,000만 나리의 닭이 생매장되고, 소각되고, 감전사당하고, 질식사 당했다.
어떤 지역이나 국가에 조류 인플루엔자가 없다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주의 깊게 닭들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