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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교사단 부산지역단 원문보기 글쓴이: 19기/ 혜연정 /주분남
■ 해인사의 1번지 원당암 ■
《유튜브는 각전마다 구체적인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해인사 일번지 원당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당암은 「해인사 1번지」 같은 상징적인 암자입니다. 해인사와 형제처럼 역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당 앞에 보물 518호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는 석탑과 석등에도 암자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습니다.
《원당암의 주법당 보광전 》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518호》
신라 애장왕(哀莊王)은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부처의 가호(加護)로 여기고 해인사의 창건을 발원한 순응(順應)대사를 몸소 크게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집을 지어 절 공사를 독려하고 정사(政事)를 보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원당암이라는 것입니다.
《혜암 대종사께서는 해인총림 방장(93~96),
조계종 제10대 종정스님으로 추대 》
암자가 다시 활기를 찾게 된 것은 혜암(慧菴)스님이 머무른 이후부터였다고 합니다.
혜암스님은 해인사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해인총림 방장('93년~'96년)스님을 지내시고 1999년 4월에 조계종 제10대 종정스님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또한 원당암에서는 스님들과 똑같이 일반인들도 여름과 겨울에 한 철씩 안거(安居)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국내 제일의 재가불자 참선도량으로 변모되었습니다ㆍ
《미소굴》
해인사 원당암은 신라 애장왕 (서기 803년)때 해인사를 창건하기 전에 원당암을 제일 먼저 지은 후
왕이 친히 왕래 하면서 해인사를 축조 창건 하였다고 합니다.
《해인사에서 원당암 가는길》
《무생교》
《무생교 다리주변의 돌》
《종무소》
《공양간과 달마선원》
《미소굴 올라가는 계단》
《미소굴 계단에서 내려다보고서....》
《운봉교》
《미소굴》
《원당암의 전망대1번지 운봉교에서 바라본 달마선원 인데 공사전의 모습입니다ㆍ사진 캡쳐 해 왔습니다 》
《달마선원》
《지금은 공사중이라 안에는 못들어 갔습니다 》
《공양간 》
《달마선원에서 내려오면서....》
《내려오면서 ......》
원당암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자리라고 전해지며 무생교 옆의 크고 둥근 바위가 봉황의 알이라 일컬으며 옛 이름이 봉서사로 칭하여 온 적도 있었습니다. 또 나라를 위해 기도를 드렸던 원찰이라고 해서 원당(願堂)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원당암 창건이후 수많은 선현 대덕 큰스님들의 수행처가 되었으며 재가 불자님들의 기도처가 되었습니다. 근세에 조계종 10대 종정과 해인총림 6대 방장을 지내신 혜암 대종사께서 주석하시던 곳이었으며 지금 현재에는 해인총림 9대 방장이신 벽산원각 대종사께서 주석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보광전으로 갑니다》
《심검당과 영당 》
《보광전과 심우당》
《보광전 앞마당 전각들이 다보입니다 》
저의 은사이신 혜암 대종사께서 처음 원당암에 오셨을 때에는 법당과 요사채등 4동의 건물만 있어 작은 암자에 불과 하였는데 혜암 대종사께서 스님들의 수행 또한 중요하지만 재가불자들의 수행도 철저히 잘 할 수 있는 도량을 만들어서 참선 할 수 있는 도량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석 하시었던 염화실을 비롯해 재가불자가 참선할 수 있는 달마선원과 후원, 요사채등을 불사를 하시어 사격을 갖추어서 안거와 산철결제, 첫째 - 셋째주 토요일 철야용맹정진의 도량으로 만들어 재가불자님들의 참선 수행처가 되어 끊임없이 용맹정진하는 도량이 되었습니다.
《현재 해인총림 방장, 벽산원각 대종사께서 주석하시고 계십니다ㆍ》
《보광전》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518호》
《심우당》
《영당》
《염화실》
《무설전》
《무설전을 돌아나와서 보이는 영단》
《심검당》
현재 해인총림 9대 방장이신 벽산원각 대종사께서는 혜암 대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재가불자님들이 더 힘써 수행정진 할 수 있도록 법당과 달마선원, 영단, 심우당등을 중수불사를 새롭게 일신 하시면서 재가불자님들을 재접하며 주석하고 계십니다. 원당암 영단에는 선망부모 조상영가님들의 만년위패를 모시어 매월 보름 미타재일에 선망부모의 조상영가 천도재를 잘 모셔 드리고 있고 백중과 중양절에는 천도재를 크게 모시어 선망부모 영가님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고 기도정진하고 있습니다.
●원당암 건립배경●
고대에 속하는 유물은 대부분 원당암이라 불러지는 산내(山內) 속암(屬庵)에 있다. 물론 청량사라고 불려지는 가까운 거리의 사찰에도 중요한 석조유물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지만 이보다는 원당암이 해인사와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 절의 본래 이름이 봉시사(鳳棲寺)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대에 와서부터 각간(角干) 위홍(魏弘)의 원당(願堂)으로 되었기 때문에 원당암이라고 하는 별칭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소굴에서 바라본 가야산 설경》
그것은 진성여왕과 각별한 관계에 있던 각간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2년(888)에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혜성대왕 원당으로 삼았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당암의 전망대1번지 운봉교에서 바라본 가야산 전망 설경 해인사의 대장경판들 지붕이 보입니다ㆍ》
또한 진성여왕은 즉위 11년이 되는 897년 6월에 왕위마저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북궁(北宮) 해인사에 머물다가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웃한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습니다.
또한 진성여왕은 즉위 전에는 이미 북궁공주(北宮公主)라고 불려졌고, 또한 이때의 북궁은 신라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해인사를 가리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려오면서도 자꾸만 가야산 설경들을 담아봅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원당암에 있는 중요 유물들은 대체로 진성여왕 대에 와서 위홍을 위한 원당으로 지목되면서부터 이곳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작은 888년에서부터 897년에 이르는 약 10년 사이의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소굴의 내부 전시관》
이곳에 현존하는 중요 석조 유물로는 보물 제 518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그리고 배례석을 비롯하여 보광전의 축대 등을 지목 할 수 있습니다.
《원당암의 다층석탑》
이들은 모두 보광전 전방에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먼저 석탑은 특이한 청석탑입니다.
이같은 청석탑은 국내에서 흔치 않은 이른바 점판암 계통의 석재를 이용한 공예적 소탑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탑 역시 현재의 총 높이는 240cm에 지나지 않습니다.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포함하여 3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대리석 탑신부를 마련하였고, 탑신의 네 모서리에는 독립된 석주를 배치하여 상부 옥개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초층 탑신부는 공간을 형성하여 내부에 사리 장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초층 탑신 상부에는 각층에 옥개석을 받쳤던 탑신석이 본래부터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석탑의 체감률이 거의 없어 옥개석을 포개 넣은 듯하다.
곧 연화문 갑석 위에 모두 10매의 옥개석을 차례로 쌓아 두었고, 최상부에는 약간 불완전한 노반이 놓여져 있습니다.
《원당암의 석등》
그리고 석등 역시 특이한 형태였다고 짐작됩니다.
곧 점판암을 이용한 희귀한 자료로서, 견고한 화강석 간주(竿柱)를 이용하여 시각적으로 단조롭게 처리되었다. 불을 켜는 화사석은 결실되어 알 수 없으나 이 석등의 본래의 모습은 우아한 기품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것은 간석을 받치고 있는 6각 점판암의 하대석 역시 6면에 6엽의 복련을 아름답게 조각하였고, 시원하게 솟은 6각의 간석 위에는 연화문을 지닌 상대 받침석과 옥개석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석등의 화사석이 없어져 현재는 전테 높이 180cm에 불과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됩니다. 그것은 점판암과 화강석을 혼용하여 높이 솟은 화강석 간석 위에 화사석을 배치한 혼용의 석재를 이용하였고, 또한 하대석 아래의 화강석 지대석은 이 석등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적 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상하에 적용된 연화문 조각은 그 기품을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원당암의 배례석 》
다음으로 청석탑 좌측에 있는 배례석은 보광전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이 돌 위에서 예배하는 상징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고 생각됩니다. 건립 초기부터 이렇게 길이로 놓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배례석의 상부 판석 중앙에는 직경 22.5cm의 연화문을 두텁게 양각하였고, 다시 7.5cm의 연꽃 자방(子房)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 위에서 예배하기에는 매우 불편할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을 향하여 길게 놓이는 배례석도 있으므로 배례석의 용도는 그 위에서 예배하기보다는 향료와 촛대 등 의식 용구를 배치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곧 배례석이 위치하는 곳이 석탑의 전면인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에 의식 용구를 놓고 법요(法要)를 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곧 큰 법요 때에는 그 전방 누각 건물에서 의식을 집행한 조선시대 이후의 사례로 보아 더욱 그러합니다.
이 배례석의 전체 길이는 93cm에 폭 47cm, 그리고 높이 33cm의 한 돌로써 제작되었습니다.
배례석의 측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은 전후에 각각 두 구 그리고 측면에 한 구를 새겨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크기로 미루어봐서도 배례석 위에서 직접 예배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원당암의 축대》
끝으로 원당암의 주된 법당인 보광전의 축대를 주목 해야겠습니다. 이 축대는 보광전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특이한 작품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보기 어렵다. 그 높이는 약 40cm에 불과한 나지막하지만 정성이 스민 품격 있는 작품입니다. 상부에는 아름다운 몰딩과 연꽃모양을 지닌 머릿돌을 넓은 판석으로 배치했고, 그 아래 면석은 폭 약 51cm, 높이 약 27cm의 아름다운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안상의 형태는 배례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이같이 보광전의 축대에까지 안상과 연화문을 새겨 존엄을 표현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 것 역시 어쩌면 진성여왕의 여성적 섬세함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진성여왕의 작은 원당으로 여성스럽게 꾸며져 있습니다 》
이상 보광전의 석조물의 성격은 모두 위홍 각간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여 조성한 진성여왕의 배려가 도처에 엿보인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곳의 중요 석조물은 모두 신라 왕실의 배려 아래 조성되었음은 물론, 그 가운데에서도 청석탑을 비롯하여 석등, 배례석 그리고 보광전의 축대에 이르기까지 그 조형 양식 등은 모두 자그마한 원당적 성격을 배경으로 하여 조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혜성대왕 원당이 곧 진성여왕의 원찰(願刹)이었던 시대적 배경속에서 이룩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영당》
《원당암의 만년위패》
《해인사의 창건 》
한편,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공주가 난치병에 걸렸을 때
‘순응’과 ‘이정’이라는 두 스님이 기도 해서
낫게 되자 애장왕이 크게 감동하여 세운 절입니다.
애장왕은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별궁을 지어 정사를 보면서 해인사 공사를 직접 감독하며 국태민안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애장왕의 별궁이 있던 장소가 지금의 원당암이라고 합니다. 즉, 해인사의 창건의 역사와 함께 하는 해인사 암자가 바로 원당암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이 서라벌(경주) 북쪽에 있어서 애장왕이 정사를 보던 원당암을 '북궁(北宮, 북쪽의 궁궐)'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보광전》
《보광전 법당내의 목조아미타 삼존불,
보물 제2072호》
해인사에는 16개의 산내암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암자가 원당암입니다.
애장왕 이후 원당암은 신라 3대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인 진성 여왕이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진성 여왕은 각간 위홍을 깊이 사랑했는데,
각간 위홍이 죽자 슬퍼하며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왕위를 양위한 뒤 원당암에 와서각간 위홍의 위패를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원당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신라 애장왕과 진성 여왕의 원당(願堂:개인의 소원을 비는 도량)
이었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원당암은 가야산 제1봉인 상왕봉이 보이는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보광전 법당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외에도 해인사의 11분의 고승진영들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 유형문화재 제552-1~12까지 초상화 진영 아홉분과 위패형 진영 두분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
원당암의 중심 불전은 보광전입니다.
시방 세계를 향해 널리 두루 진리의 빛을 비춘다는 뜻의
‘보광전(普光殿)’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원당암 보광전은 정토 도량답게 예불을 마치고
'나무아미타불' 정근(염불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 나라에 ‘나무아미타불’ 정근을 하는 도량은 많지 않은데, 원당암의 뿌리 깊은 정토신앙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원당암은 1887년 ‘원당정토사(願堂淨土寺)’라 칭하며 중창 불사와 함께 <염불만일회>를 결사하여 '나무아미타불’ 염불 기도를 대중들이 함께 올린 유서깊은 정토 도량입니다.
《보광전 앞의 다층석탑. 보물제518호》
보광전 앞에는 독특한 석탑이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석탑인데,
기단부와 몸통을 벼루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점판암’이라는 검은 돌로 조성하였습니다.
검은 점판암으로 된 흔치 않은 아담한 석탑을
볼수 있는 흔치 않은 도량이 원당암입니다.
《조계종 제10대 종정 혜암스님의 진영》
《공부히다가 죽어라. 유명하죠》
해인사는 조계종정이자 선승이자 3000배로 유명했던 성철 스님이 주석했던 도량입니다.
성철 스님 입적 후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분이 해인사 방장 스님인 혜암 스님입니다.
혜암 스님이 하셨던 유명한 명언이 “공부하다 죽어라”입니다. 혜암 스님이 무서운 정진력으로 참선 수행을 했던 미소굴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원당암 바로 아래 달마선원이 있는데,
재가자들도 하안거와 동안거를 할 수 있는 선방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정토 도량으로 열심히 염불했던 수행 도량이 지금은 열심히 참선하는 선수행 도량으로 바뀐 것이 재미있습니다.
《자유선택 이라 일행중 같은시간대 참배는 두사람 뿐이었습니다 ㆍ》
가야산의 맑은 기운 속에
우리 민족이 세계에 자랑할만한
불교 문화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해인사!
그리고, 가야산의 맑은 기운 속에
차분히 염불하고 좌선할수 있는 좋은 수행 도량 원당암! 입니다
《감사합니다》
🔶️해인사의 일번지 원당암🔶️해운대 반야선원 🔶️불기2568(2024)1월21🔶️공부하다 죽어라 🔶️삼보종찰 중에 다녀왔습니다 🔶️
https://youtube.com/watch?v=0ibnNoUaJKU&si=-RfQC5Y3kXNcWp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