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매체 읽기 | 김민정
영화는 불귀의 객이 된 그들 넋을 위로하네,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
1948년 겨울의 제주, 주민과 군인, 한쪽은 죽어야 했고 한쪽은 미쳐야 했다.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이하 <지슬>)는 그들 죽어야 했던 자들, 미쳐야 했던 자들을 흑백의 화면에 불러다 놓았다. <지슬>은 60년 세월이 훌쩍 흘렀건만 아직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역사, 제주 4․3사건 그때 그 사람들 이야기이다.
3월 1일 제주도에서 20일쯤 먼저 개봉, 한 달이 안 돼 1만 관객이 <지슬>을 보았다. 섬에서의 바람이 뭍으로 불어와, 4월 12일 현재 10만 관객이 <지슬>을 보았다. 4월 3일 당일에 누적 관객 7만 돌파, 사흘 뒤에 8만을 돌파했다니 이 바람이 어디까지 갈까 궁금하다. 5만 관객이 봐도 흥행이라고 하는 독립영화. 상영관이 얼마 안 되는데 교차 상영까지 해야 하는, 독립영화에서 10만이면 1,000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 <지슬>의 열풍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
제의로서 영화
<지슬>은 학습영화도 선동영화도 아니다. 또 상업영화도 아니다. 제주 사람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제의로서의 영화라 해야 할 것이다. <지슬>이 제주 4․3사건을 처음 다룬 영화도 아니고, 감독이 제주 4․3사건을 처음 영화로 다룬 것도 아니다. 오멸 감독은 그의 세 번째 영화 <이어도>에서 처음으로 제주 4․3사건을 다루었다. 감독의 어느 인터뷰를 보면 <이어도>는 그 혼자 보고자 만들었던 영화란다. 그 당시 감독이 있어 4․3을 영화로 찍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고민으로. 제주 4․3사건을 은유적으로 다루었던 <이어도>의 실험 이후, 감독은 그의 네 번째 영화 <지슬>을 찍을 수 있었다. 비로소 제주 사람으로서 제주의 아픔을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어도>에서 감자의 싹이 튼 것이다.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다.
제의로서의 영화 <지슬>은 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고, 장마다 신위, 신묘, 음복, 소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영혼을 모셔 앉히다’라는 의미의 신위(神位). 영화는 1948년 11월 ‘빨갱이의 섬’ 제주에서 죽어야 했고 죽여야 했던 자들을 불러다 놓는다.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의 신묘(神廟). ‘귀신이 남긴 음식을 나눠 먹다’라는 의미의 음복(飮福). 감자를 품고 죽은 어머니. 지금은 살아 있고, 또 살았으면 좋겠는 이웃들에게 어머니 품에 있던 감자를 나눠 주고, 어머니 잃은 아들은 그들 몰래 운다. ‘신위를 태우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다’라는 의미의 소지(燒紙). 붙여 놓은 제목들이 내용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장과 장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있을 수 없는 숏들도 있다. 갈팡질팡하다 길을 잃은 숏들은 아니다(그렇다고 철저히 계산된 숏도 아니다). 떼어다 전시회를 해도 좋을 이미지 숏들은, 정서적 힘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감독이 또 불러다 놓은 불귀의 객이 있으니, 김경률 감독이다. 김경률 감독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을 찍다 죽었다. 오멸 감독은 김경률 감독을 불러다 놓고 함께 <지슬>을 찍었다. 그래 영화에 총괄지휘로 김경률 감독이 올라 있다. 죽은 자로서 무엇을 찍었을까, 우리는 <지슬>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을까?
영화 시작하고 30분쯤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할지도 모르겠다. 감당할 수 없을 슬픔이 밀려올 것에 지레 겁을 먹고. 그랬으면 아마 어찌하지 못할 슬픔으로 몇 날 며칠 밤마다 뒤척여야 할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지방을 태운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그들 넋을 위로하고, 잔뜩 슬픔의 겁을 집어먹은 우리들을 위로한다. 겪지 않았다고 상처 없을까. 산 자든 죽은 자든 그 상처를 보듬고, 이제 영화는 제의가 된다.
비극미와 해학
제주 4․3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영화 <지슬>로는 알 수 없다. 설명해 주고 해설해 주지 않으니 불친절하고 의식 없다 할 수 있다. 감독이 불러다 놓은 것은 그때 그 ‘사건’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이다. 그때 그 사건이 그 사람들에게 뭔 짓을 했나를, 우리는 그저 볼 수 있을 뿐이다. <지슬>은 역사를 재현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불귀의 객이 된 그들을 불러다 놓고, 감독은 영화를 찍었다. 그래 <지슬>에서는 웃음과 슬픔이, 그것이 마치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함께하는 것이다. 비극적인데 어처구니없어(천진난만하다 할까) 웃음이 나고, 웃고 있는데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하다. 웃음이 슬픔이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한데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한데 있는 것처럼.
구름으로 덮여 알 수 없는 섬, 연기로 형체를 잃은 초가, 마루에 널브러져 있는 제기들. 초가의 방 웃궤에는 알몸의 여자 시신이 아무렇게나 구부러져 있고, 군인 둘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를 깎아 먹는다. 사람의 피 냄새 배어 있는 칼로. 괴이하고도 괴기스런(?) 장면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슬>은 공포영화였던가?) 이제 카메라는 산 속으로 좁은 구덩이로 이동. 산 속 좁은 구덩이에는 주민들이, 그야말로 옹기종기 앉아 있다.
구덩이에서든 동굴에서든 주민들은 관객을 마주하고 앉아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돼지 이야기며 총각 이야기며 어찌 보면 순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는다. 웃지 않을래야 웃지 않을 수 없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하는데, 뭔 저런 소리들을 하고 있나. 또 쓸데없이 왜 티격태격하나. 그러니까 <지슬>의 해학은 비극에서 발생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해학으로 비극은 더욱 비극이 될 것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 한데 있을 것 같지 않은 것들을 감독은 자연스럽게, 마치 그러한 것처럼 버무려 놓는다. 삶이 그러한 것처럼.
낯섦
우리에게 <지슬>은 왜 낯선 영화일까? 무엇이 영화를 낯설도록 하는 것일까? 이야기가 낯선 것도 아니고, 이야기하고 있는 삶이 낯선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영화에 대해, 또 역사를 다룬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지슬>에서 볼 수 없으니 낯설다 하지 않을까?
제주 4․3사건을 다룬 것만으로도 평가해 줄 수 있지, 라고 별 기대 없이 보았는데 재미있으니(영화적으로) 놀라울 것이고, 듣도 못한 말, 보도 못한 얼굴들인데(스타는커녕), 재미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것이다. 스펙터클로서의 역사, 신파로서의 역사 아니어도 영화를 보고 웃고 울고 감동할 수 있다니, 그 역시 낯설 것이다.
지역의 예술이 뭐, 소박하고 투박하지, 그렇지만 그쯤이야 하고 인심(혹은 인상) 좀 쓰고 보려는데, 절제되고도 세련되니 겸연쩍을 것이다. 중심과 변방의 사고, 어찌 부끄럽지 않을까. <지슬>의 그들은 변방에서 영화를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할 수 있는 것들로 하고 있을 뿐이다. 살고 있는 그곳에서, 그곳의 사람들(산 자든 죽은 자든)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서울이 아니라 제주에서 먼저, 영화를 개봉하는 것도 당연하다. 제주의 결과 몸짓이 살아 있어 회화적이고도 연극적인 영화, 제주의 말이 살아 있어 서울말 자막이 붙어 줘야 볼 수 있는 제주의 영화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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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읽고 보고 들으며 또 걸으며,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