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선비 놀이 5 귀거래사를 다시 들춰 보다
진시황 이래 중국의 역사는 어쩌면 전쟁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이 오늘 날에도 중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것은 그가 처음 손에 넣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현재에도 경탄을 금할 수 없는 만리장성이나 병마용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능묘 등
거대한 토목사업의 유산보다는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중국은 하나여야 한다는 통일정신아 아닐까 한다.
거의 대륙에 가까운 규모에 이르는 중국이 한 나라로 통일된 것은 북방민족과의 대결이나 황하
양자강의 치수사업 등 유럽처럼 분열된 작은 나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으나 신석기 시대 이후 중국대륙에 존재했던 수 천 수 백 개의 작은 나라들이 점차 서로 응집하여
마침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된 것과 그렇게 되어야 근본적인 평화가 찾아온다는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은 진시황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춘추전국 시대 이래 오늘 날까지 통일을 명분으로 한 전쟁은 시시때때로 거듭되었고,
아마도 그 중 가장 첨예한 대결은 한나라의 멸망 이후 백 여년간 계속된 수나라의 천하통일 이전까지 거듭된 전쟁, 즉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가 아닐까 싶다.
그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소설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소위 삼국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오랜 위(魏) 촉(蜀) 오(吳)의 지루한 전쟁이 끝나고 사마의의 아들들이 위나라를 찬탈한 진(晉)의 시대가 되면 북방의 소위 오랑캐들이 처들어와 또다른 전운이 세상을 감싸게 되고
전쟁에 지친 진나라 사람들은 전쟁 대신 치사한 평화를 채택하여 예물과 공주를 바치는 행위로
국정을 안정시키게 된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결과 수많은 지식분자들은 아예 국가 혹은 체제에 대한 염증을 갖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고립시키는 풍조가 생기게 된다.
위로는 진시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로초를 찾는다는 핑계로 망명한 서불(徐市)과 한고조와 여태후로부터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신선사상을 핑계로 은둔한 한(漢)의 건국 일등 공신 장량(張良)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 도피사상은 이 동진(東晉)시대부터 대유행을 한 듯하고 그 선봉에 도연명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팽택현령이란 자리를 팽개치고 고향마을로 돌아가 자발적 가난과 은둔의 삶을
노래하여 후세의 중국과 조선 선비들의 전범이 되었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의 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도화원기(桃花源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이 전하며
그 글에 묘사된 그의 소박한 전원생활은 2020년 현재까지도 적어도 한국사람 주로 퇴직 남성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귀거래혜(歸去來兮)여! 전원이 장무하니 호불귀리오?(田園將蕪胡不歸)
기자이심위형역이었으나(旣自以心爲形役) 해추창이독비하리오(奚惆悵而獨悲)
오이왕지불간이나 (悟已往之不諫) 지래자지가추요(知來者之可追)
실미도기미원이니(實迷塗其未遠) 작금시이박비로다(覺今是而昨非)
이것은 바로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첫 구절로 대충 해석하면 이렇다.
자, 이제 돌아가자, 고향 논밭에 잡풀이 무성해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내 고귀한 정신을 밥벌이(육체)의 노예로 삼았으나 어찌 원망하고 홀로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후회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리 오지 않았으니 이제는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내 삶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미루나무를 심어 세상으로부터 시야를 차단한 뒤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였다. 요즘 말로하면 속세의 스트레스보다는 가난하지만 편안한 삶을 선택했으니
애들 어느 정도 키워 놓으면 시골가서 채소나 가꾸면서 살고 싶다는 무수한 월급쟁이들의 꿈과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은퇴후 전원생활은 여러 가지 여건 상 그리 쉽지 않은 듯하다.
시골에 아버님이 남겨준 집이나 논밭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간단하다지만 주택을 거주목적이 아닌 투자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요즘 사람들이 서울의 아파트를 팔아 시골에 전원주택을 산다는 것은 여간한 결단이 아니면 하기 싶지 않을 것이다.
시골집은 사는 즉시 가격이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서울의 아파트는 전세를 주어도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니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윳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 전원생활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보통은 밭을 사서 농막(農幕)이란 이름의 작은집을 마련하고 라면 끓여 먹을 정도의 간단한 살림도구만 갖추고 자신의 기존 집에서 출퇴근하며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조금 외곽에 멋진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차량을 이용하여 도시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일찍이 전원을 꿈꾸며 30대 시절에 이미 자그만 밭뙈기를 장만해 두었었지만,
두 애들 키우고 아들녀석 장가보내고 그 놈 살 집을 작게나마 마련해 주다보니 막상 내 땅에 집을 지을 경제적 형편이 못되어 아직 귀촌귀농을 하지 못하고 아내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다.
아버님이 사시던 집이 가까이 있으나 이미 소유권이 장자인 형에게 상속되었고
수도권에 사는 형님은 내가 소유권이라도 주장할까봐 그러는지 그 집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살게 하고 있다.
교직 출신자 중에는 유난히 그런 귀거래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교사란 직업 자체가 아예 출세지향적인 인물이 할 일이 아니고
게다가 먹물(?)은 조금 들어 그런 겉멋을 부리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수학선생을 하다 년전에 퇴직한 후배가 강릉 연곡면에 자그만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있어
이따금 채소류를 갖고 와 집 앞에서 툭 던져주며 ‘농약 하나도 안 쳤수’하며 돌아가곤 했다.
그 친구가 이번에 밭에 조그만 농막을 지은 바 있어 심심해 못 견디던 몇 몇 지인들과
그 농막에 <방림원(芳林園)>이라 마왕퇴 백서체로 서각한 현판을 달아주었던 바
그 날 세레모니를 위해 야매 선비가 야매 한시 한 편을 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芳林園序 (방림원서)
連谷長峴行無盡 (연곡장현행무진)
松杏深處多勝景 (송행심처다승경)
退仕小橋變園丁 (퇴사소교변원정)
斯堆造成桃源境 (사퇴조성도원경)
연곡면 진고개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데
소나무 살구나무(송림리와 행정리) 깊은 골에는 경치 좋은 곳도 많구나.
교직에서 물러난 소교(밭주인의 호)는 농민으로 변신하여
이 언덕(퇴곡리)에 무릉도원의 풍경을 만들었구나.
그러고 나니 풀꽃평화운동이라는 환경단체를 만들어 동강의 비오리와 민둥산 갈대와 지렁이와
논 등에 상을 주며 이 땅의 환경운동에 새로운 획을 그은 뒤 스스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여 풀꽃평화연구소를 춘천의 외진 곳인 서면 툇골에 별서(別墅)처럼 지어놓고 사시는 왕풀님이라는 별명을 가진 화가님이 최근 집을 새로 개축한 것이 생각났다.
새 집 이름을 ‘종달새’라고 하셨다니 봄 하늘을 치솟는 노고지리처럼 자유스러워 지신 모양이다. 같이 환경운동에 매진하다 같이 은퇴하여 뒷집에 사시는 최모 소설가가 전한 새 집 건축의 소식을 듣고 함께 인문공동체 활동을 하시는 지인이 칼을 들어 현판을 새기고 그 틈에 나는 또 한 번 둔한 붓을 들어 자가복제형 글을 지었다.
退谷深處留耆老 퇴곡심처유기노
造小屋名天鳴鳥 조소옥명천명조
問主何事棲碧山 문주하사서벽산
莞笑微吟行散步 완소미음행산보
爲王草鄭相明畫伯新築別墅竣工 위왕풀정상명화백신축별서준공
溟州洞寓居 野魅書 명주우거 야매서
글씨도 못나고 내용도 천하여 차마 족자나 액자를 만들어 전달할 형편도 주제도 못되
나 나름 풀이를 해 보면 다음과 같다.
툇골 깊은 골에 기노(나라에 공헌하고 은퇴한 70세 이상 분)가 머무시니
작은 집을 만들고 천명조(하늘서 우는 새, 즉 종다래)라 이름 지었다네.
주인에게 무슨 까닭에 이 푸른 산에 깃들여 사느냐 물으니 (이백의 시 살짝 도용)
빙그레 웃기만하고 나직이 노래를 읊조리며 산책길에 나서네.
왕풀 정상명화백님의 별서 신축준공을 축하하여 명주동 누추한 집의 야매(들귀신) 짓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