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바게트 '제빵 기사'에 관한 뉴스를 보다 보니
옛 친구들이 떠오른다.
나도 한때 제빵 기사였다.
옛 친구들이란 같은 학원에서 배운
동창생들이다.
캐나다로 살러가기로 생각하고 보니
내가 가진 '기술'이 하나도 없었다.
뉴욕에 가서 보았던 빵집이 떠올랐다.
고려당이 한국에서는 망했어도
뉴욕에서는 대박이 났다.
제과점이 아니라 '베이커리카페' 전통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빵을 중심으로 페이스트리와 커피, 수프를
먹는 커피점과 식당의 중간 개념.
나는 커피에 관심이 있어서
빵을 배우기로 했다.
그래서 등록한 곳이 서교동에 있는
리치몬드제과학원이었다.
그곳에 갔더니 젊고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교를 갓 졸업하고 온 친구들,
직장 다니다가 온 친구들,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자 하는
내 연배도 더러 있었다.
반은 조 단위로 움직였고,
먼저 온 학생이 각 조의 리더였다.
매일 주어진 과제에 따라
밀가루 반죽을 치고, 양 손으로 굴려
성형하고, 빵과 과자를 구워냈다.
별별 것을 다 만들고, 나중에는
피자까지 구웠다.
늘 오븐에서 바로 나온
뜨끈뜨끈한 것을 먹으니
맛이 좋았다.
베이커 일이라면 금세 적응하고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에 국가자격증을 따기 위해
필기, 실기 시험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필요없었는데
그래도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시험을 다 봤다. 필기는 턱걸이 하고,
실기는 재수 끝에 제빵기능사는 통과,
제과기능사 자격증은 끝내 못 받았다.
토론토에 와서 베이커리카페 구인광고가 보이길래
얼른 지원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학원과 현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학원에서는 놀면서 해도 빵이 만들어졌는데
베이커리카페의 주방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일이 정말이지 고되고 힘들었다.
늘 오븐 옆에서 일을 해야 하니
손과 팔뚝은 덴 자리 투성이였다.
폴란드 출신의 베테랑 베이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전 5시에 출근해 8시간을 일하고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었다.
잠자다가 손가락 관절이 아파서 잠을 깨곤 했다.
글루코사민을 아무리 먹어도 소용없었다.
손가락은 늘 절반쯤 접힌 채 있었다.
너무 아파서 그랬다.
요리사나 베이커나 남자가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쪽 직업은 손맛 못지 않게 체력이 중요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베이커리카페를 하지 못한 뒤에도
가끔씩 리치몬드학원 동창생들이 떠올랐다.
그 어린 친구들은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해내고 있을까 하고.
한 달에 한번씩 하던 우리 반 회식은 정말 재미있었다.
재주꾼들이 많았고 잘들 놀았다.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는 것 같았다.
나이 많다고 배척하지도 않았고
형, 오빠라 부르며 잘 따랐다.
고교를 갓 졸업하고 온 우리 반 반장 재섭이는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으면 30대 중반
장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름은 잊었어도 다른 친구들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