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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새사람 안에서의 생활의 원칙
[에베소서 4:25-30]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오늘은 에베소서 4장25절에서 30절에 있는 새사람 안에서의 원칙에 대하여 나누겠다. 지난 시간에 그 궤계라고 하는 것은 마귀를 뜻한다고 했다. "그 궤계의 정욕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을 가지고 교통을 했다. 이 다음 구절에 ‘그런즉’ 이란 말이 나온다. ‘그런즉’이라는 말은 ‘새사람을 입었은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새사람으로서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겠다.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말은 어떤 진리나 교훈을 배운다는 그런 뜻과는 아주 다르다.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어디로 들어가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그 구속의 자리 안으로 원위치하는 것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침례이다. 침례는 물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침례이다.
침례는 죽음을 말하는데 물에서 나올 때에 물에 들어갔던 그 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오게 된다. 이것이 죽고 다시 났다는 뜻이다. 나올 때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나온다는 뜻이다. '예수를 옷 입었다'는 말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서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산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스로 죽을 수 없다. 예수의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을 발견하는 것이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없다.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필요를 위하여 다시 태어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말씀처럼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싶었던 사람이다. 얼마나 열심히 살려고 했던 사람인가.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어도 결국은 ‘나’였다. 그리스도와 내가 완전히 바꿔지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바꾸어진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이다. 개는 개의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소는 소의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아담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담으로밖에 살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이다.
우리는 옛사람을 가지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보려고 좋은 교회를 만들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돼지를 깨끗하게 목욕시켜서 잘 지은 돼지우리 안에 넣어두는 것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돼지우리와 똑같아진다. 행위를 아무리 바꾸려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다. 옛사람은 결국 옛 사회를 만들게 된다. 새사람이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발전된 문명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옛사람은 1mm도 바꿔지지 않았다. 조금도 바꿔지지 않았다.
결국은 그 사람이 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죽고 다시 난 새사람, 이 새사람을 입는 생활이 교회생활이다. 어떻게 좋은 교회로 만들 것인지 힘을 쓰는 게 아니고, 새사람이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교회가 된다. 교회생활이 된다. 에베소서의 궁극적인 목표인 새사람은 바로 이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를 '한 새사람'이라고 에베소서에서는 표현하고 있다.
교회생활은 진리이신 예수의 의와 거룩함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교회, 즉 한 새사람을 옷 입고 사는 생활이다. 여기서 진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진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진리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진리는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진리를 말씀하실 때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진리는 예수 자신이다.
제자들은 마지막에 무엇을 봤는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실한 사람을 보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진실한 사람이 바로 진리이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고 말하고 있다. 이 말 앞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라고 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사십 낮 사십 밤을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거기서 돌판을 받아왔다. 그 돌판은 모세 자신이 아니고 모세의 손에 들려진 것이다. 산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보고 모세는 화가 나서 돌판을 던져버렸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모세 자신이 아닌 것이다. 율법은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가르쳐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율법생활을 할 때에 율법을 잘 지키다가 어느 날 무너지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었다. 율법은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은혜와 진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진리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니고 "나를 먹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를 먹는 것은 은혜와 진리를 먹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요한1서에 사랑과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과 빛이 나타날 때에는 은혜와 진리로 나타난다. 태양이 직접 지구에 온다면 다 타버리고 만다. 태양이 우리에게 올 때는 빛과 열로 온다. 우리가 태양을 경험하는 것은 태양 자체를 경험하는 게 아니고 그 빛과 열을 경험하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본질은 똑같다. 옛날에도 사랑과 빛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은 사랑과 빛이신 분이다.
그런데 본질이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는 율법으로 나타나고, 예수를 통해서는 은혜와 진리로 나타나게 된다. 발전소 전기가 어떤 선을 통해 오느냐에 따라 다르게 온다. 전기는 똑같은데 만약에 철사를 통해 온다면 불이 난다. 그런데 구리선을 통해 온다면 가정까지 잘 도달할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는 불이 나는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으로 경험한다. '여호와 하나님' 하면 부드러운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고 심판과 무서움으로 오신다. 그래서 시내산을 표현할 때 흑암과 나팔소리와 번쩍번쩍 빛나는 어떤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러하신 분이 아니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올 때에 그렇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될 때에 은혜와 진리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에 왔을 때에 그분은 곧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로 도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매 우리가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빛이시다.’하는 말은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 안에서 '사랑과 빛'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근원은 사랑과 빛이다. 그런데 그 근원의 표현 즉 육신으로 인격으로 우리에게 올 때는 은혜와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씨를 먹을 수 없다. 씨 안에 완전한 생명이 들어 있다고 하지만 씨를 먹으면 배가 부르지 않다. 그런데 열매를 먹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이 바로 은혜와 진리로 오신 하나님이다. 열매를 먹으면 우리 안에서 에너지가 생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와서 사랑과 빛으로 느껴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굉장히 오해를 받으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제 아버지 하나님이 되셨다. 그 전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사랑과 빛으로 느끼게 되었다. 사랑과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갈 때는 은혜와 진리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교회생활은 근원이신 하나님이, 빛이신 하나님이 은혜와 진리인 예수로 우리에게 오시는 생활이다.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 안에 사랑과 빛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갈 때는 바로 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은혜와 진리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교통이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등대라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원래 일곱 등대는 성소 안에 있는 등대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일곱 등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이 일곱 등대, 일곱 교회 사이를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왕래하신다는 그런 말씀이 있다. 이것은 바로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교회 안으로 끌리는 옷을 입고 왕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끌리는 옷은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봉사를 할 때에 입는 옷인데 예수님이 이렇게 교회 안에서 교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묵상하면서 요사이 우리 형제들이 스카이프를 통해 교통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스카이프를 할 때는 좀 어색했다. 그런데 교제가 깊어지면서 너무 재미 있고 그 안에 물이 흐르듯이 교제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마 일반 교회에서는 우리와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 목사님이 설교하면 설교 듣고 끝이다. 거기서는 일곱 등대 사이에 끌리는 옷을 입고 왕래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스카이프을 통하여 교제를 하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왕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지역을 초월한다. 미주하고도 교제할 수 있고 전국에 있는 형제들하고 전부 다 교제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볼 때 우리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구나! 일곱 등대 사이에 주님이 왕래하시는구나! 하고 교회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성소 안에 있는 이 등대는 기름을 채워야 하고 불똥을 청소해야 하고 심지도 갈아줘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가? 우리 자신이 등불이 된다. 우리 인격이 등불이 된다. 그래서 지금은 표현을 해야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는데 어느 날 보니까 표현을 안해도 그 사람 인격을 접촉할 수 있는, 그 사람 자신이 그 말이고 그 말이 그 사람 자신인, 인격 자체가 등불이 되는 그런 날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은혜와 진리를 경험하고 사랑과 빛을 경험하는가? 이것을 성경에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하겠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우물가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리아 지역 아래에는 유다 지역이 있고 북쪽에는 갈릴리가 있는데 그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이스라엘이 남왕조와 북왕조로 갈라졌다. 북왕조가 북이스라엘이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먼저 망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북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을 이스라엘로 이주시켜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혼합시켜 버렸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종이 되고 말았다. 남쪽에 있는 유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이들은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둘러서 갔다. 왜냐하면 혼혈종인 사마리아인을 천시했기 때문에 그들과 상종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서 수가성에서 물 길으러 온 여인과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다. 그 여자에게 예수님이 물 한 그릇 달라고 하니까 그 여자가 깜짝 놀랐다. 자기들과 상종조차 안 하던 유대인이 물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찌 당신이 유대인인데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하고 여인이 놀라 물으니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알았으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물을 구하였을 것이고 그 사람이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 우물은 깊고 물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주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니 예수는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여자는 정오에 우물에 왔다. 정오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뜨거운 지역이라 그 시간에는 전부 자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우물을 찾아왔는데, 솟아나는 샘물을 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래서 이 여인은 "그런 물을 내게 줘서 다시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니까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이 "네게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 지금 있는 남편도 참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를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자기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의 문이 열린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나를 아는 말씀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열린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하며 비로소 자기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옳습니까? 어떻게 해야 맞는 말입니까? 이 말이다. 아담의 질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어떤 것이 참이냐? 참이 아니냐? 그런 말들이다.
예수님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영과 실재로 예배한다는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가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게 예배가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객관적인 진리를 말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자기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 안에 내가 발견이 된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를 보고 '아!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예배가 되는, 이 사람 자체가 예배인 사람이구나!' 하고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라고 말했고, 예수는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어떤 인격이 접촉된 것이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자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지금도 경험되는 이야기다.
옛날에 지방순회를 갔는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안에서 내 자신이 발견된 간증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 한 자매가 그 간증을 듣고 자기를 이야기를 한다고 느끼고 종교의 세계에서 떠나 완전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인격이 우리에게 접촉이 되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다. 낮에 조용히 물 길으러 오던 사람이 완전히 돌변하게 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사람을 만났다!" 이렇게 외치게 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온 그런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스도라고 말하게 되었는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 여자는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인격을 접촉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이마에 그리스도라고 붙이고 오셨겠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은혜와 진리'이신 그 인격을 만난 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공포하고 오는 줄로 생각하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은혜와 진리'인 그 인격을 만나면 우리는 마음이 열리고 내 인생에 사랑과 빛이 경험된다.
'은혜와 진리'가 자기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사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어둡던 인생이 밝아지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고 이 여자 속에 있는 진리에 대한 의문이 모두 사라졌다.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할 것인가? 사마리아 여자는 계속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찝찝하고 저렇게 해도 찝찝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산이냐? 이것이 참인가, 저것이 참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은혜와 실재인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진리에 대한 모든 의문이 사라지게 된다.
어두울 때 어떻게 하면 밝게 될 것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그런데 간단하다. 불만 켜면 어떻게 해야 되는 방법이 필요 없어지고 만다. 어린 아이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엄마만 오면 다 해결 된다. 아이를 과자로 달래 보고 장난감으로 달래 봐도 안 됐는데 엄마만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 분의 말씀은 바로 이 분 자신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지만 당신도 지금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라고 하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를 예수 자신에게 포함시켰다. '사람이 하나님의 예배다. 어떤 형식이라든가 어떤 방법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당신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당신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당신도 하나님의 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여자 안에는 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빛이 환하게 켜졌다.
예수님께서는 은혜와 진리로 다가왔는데 그 여자 안에서는 사랑과 빛이 작용하게 되었다. 마치 기름에 불이 붙은 것과 같다. 기름에 불이 붙지 않으면 어디에 소용되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불이 붙으니까 환하게 되고 에너지가 나오게 되었다. 원래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그 인생에게 실재인 내용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책가방 속에 쌀을 집어넣어도 맞지 않고 돌을 집어넣어도 맞지 않았는데, 책이 들어가니까 아! 책이 먼저 있었고 책가방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인생의 내용은 바로 은혜와 실재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 중에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있다. 유대인들이 이 여자를 예수님에게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예수님은 그때에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쓰셨다. 무엇을 쓰셨을까?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살리겠는가? 그 생각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살리는 데 초점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살릴 것인가? 율법에 맞는지 틀린지 고민하는 게 하니라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살릴 수 있는가를 고민하신 것이다. 살리는 것이 진짜다.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 하더라도 여자를 살릴 수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진리, 종교, 전통이라 해도 그것이 이 여자를 살릴 수 없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자리를 뜨고 말았다. 어디에서도 자기를 살게 하는 대책이 전혀 없는 자리에서 이 여자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이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이 여자는 누구를 만났는가? 은혜와 진리를 만났다. 은혜와 진리를 맛보게 된 것이다. 이 때 그 여자 안에는 바로 사랑과 빛이 들어오게 되었다. 아! 내가 아버지를 만났구나! 나를 정죄하지 않는 내 부모를 만났구나!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문제는 빛이 없는 게 문제다. 하나님의 빛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은혜와 실재인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도달할 수가 없다. 발전소 전기가 아무리 흘러넘친다 해도 그 전기를 집에까지 도달하게 하는 구리선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구약에서는 철사 선으로 전기를 끌어오려다가 중간에 다 불꽃이 튀어 버려 집까지 전기가 도달하지 못했다.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직접 체험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니까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우리 안에서 발생하듯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민족의 피를 빨던 사람이다. 삭개오는 세리다. 로마의 정책은 식민지 지역에 있는 민족의 사람을 뽑아 세금을 걷게 하고 할당량을 주어 할당을 채우게 되면 나머지를 취하게 했기 때문에 삭개오는 자기 민족인 유대인의 피를 많이 빨았을 것이다. 삭개오는 일제 강점기 때의 친일파 원흉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삭개오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와 접촉하는 사람도 없었다. 돈은 많지만 외로운 사람이었다. 어디에 가도 인정받을 수 없고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동네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 뽕나무에 올라갔는데 예수님이 그를 아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셨다. 그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자기 안에 은혜가 찾아온 것이다. 은혜가 자기 안에 오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자기 안에서 불을 만난 기름처럼 꿈틀거리고 빛이 환하게 비치게 되었다. 그래서 삭개오는 "내가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하는 말이 바로 나오게 되었다. 율법에서는 두 배를 갚는데 삭개오는 4배를 갚겠다고 했다.
우리 안에서 은혜가 넘치면 굳었던 모든 것이 다 풀리게 된다. 나도 자라면서 상처를 입어 복수심이 있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녀도 그 생각이 떠오르면 자제가 안 되었다. 그런데 삭개오처럼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니까 내가 받은 복으로 나의 옛 상처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주 넉넉하게 해결되었다. 그래서 바로 전화해서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고 하니 전화 받는 분이 너무 좋아하셨다.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될 줄 몰랐는데 바로 해결되었다.
삭개오가 은혜와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자기 안에서 사랑이 나가고 모든 것이 해석되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내 마음이 가난해져 하나님을 찾게 되고 결국 내가 예수를 만나게 된 것으로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이 은혜로 연결되었다. 우리 인생이 은혜와 실재인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된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아니하면 매 맞은 것은 매 맞은 것으로 남고, 손해 본 것은 손해 본 것으로 남고, 상처받은 것은 상처받은 것으로 그대로 남는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길 나눠 보면 잘 나가다가도 옛날 상처가 기억나면 바로 그때로 돌아가서 '그놈, 그놈' 하며 이를 갈며 억울한 이야기를 계속 한다.
은혜와 실재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가 바뀌지 않는다. 예수라는 한 인격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빛을 싣고 왔다. 그 인격을 만나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사랑과 빛이 넘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언제 이런 마음을 가졌던가! 하게 된다. 삭개오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동네에 다 풀었을 것이다. 그러니 삭개오를 미워했던 사람들이 삭개오로 말미암아 모두 즐거운 잔치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랑과 빛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은혜와 진리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갈 때에 은혜와 진리로 나가게 된다.
교회 생활은 은혜와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경험되고 이 사랑과 빛이 다른 사람에게 나갈 때는 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은혜와 진리로 나가게 된다. 이것이 교회 생활의 상호교통이다.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이런 상호교통을 하게 된다. 순모임에서 간증을 들으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내가 이렇게 은혜와 사랑을 받았구나! 어두운 내 인생에 빛이 찾아왔구나!' 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 간증을 할 때 그 사람에게 은혜와 빛으로 나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 교통된다.
사랑과 빛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인격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로 오시고, 우리는 사랑과 빛을 갈망해서 하나님께로 또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형제들에게 나아가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 생활이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는데 이웃은 형제들을 말한다. 그래서 풀리지 않았던 모든 관계가 다 풀리게 된다. 형제에게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하지 마라고 할 필요가 없다. 이 은혜를 받게 되면 저절로 형제에게 은혜와 실재를 말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저 사람이 과연 바뀔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경험되게 되면 우리는 바로 옮겨진다. 지난 주에 어떤 형제와 통화를 했는데 그 형제 마음속에 '두고 보자' 하는 꽁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전화하니 ‘형! 나 이제 생각도 안 해’ 하고 얘기했다. 왜 이렇게 바뀐 것인가? 자기 안에 받은 은혜와 말씀이 있으니 다 씻어진 것이다. 그 형제가 참 신기했다. 내가 이래라, 저래라 설명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은혜와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오니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바로 나오더라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이신 분을 만나니까 우리 안에서 사랑과 빛이 작용해서 이제는 세상에서 구습을 좇던 옛사람의 생활이 아닌, 진리와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의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새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그런데 절대 안 된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껏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행위를 고칠 것인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고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바꾸시는 분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존재가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