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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그 에코토피아의 길 스크랩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고서...
남궁효 추천 0 조회 285 12.09.24 19:4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고서...

 

지난 일요일(8/16) 오후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를 보았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김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고, 그저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띄엄띄엄 본 적은 있습니다. 그의 영화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한 마디로 “찝찝하다” 이지요. 하지만 세계 영화제에서는 그는 상당한 인정을 받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황금사자’상을 받았다고 하길래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잔인한 청부업자 이강도(날강도라 해도 좋을...이정진)의 모습으로 시작되어서 보기에 불편했습니다. 원금에 10배의 이자가 붙어버린 급전 채무를 갚지 못한 청계천 작은 공장 운영자들의 절망적인 눈빛. 그 손과 발을 깨뜨리고 부러뜨려서 상해보험금을 타서 뺏어먹는 과정은 김 감독이 말한대로 잔혹한 자본주의의 날 것을 생생히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때 엄마라 하면서 나타난 여자(조민수)는 순수하고 뉘우치는 모습으로 무작정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이강도에게 달려듭니다. 패륜적(?) 행위를 거치고서야 차츰 엄마를 발견하게 된 이강도는 여전히 가혹한 방법으로 돈을 받아내지만 기타를 치는 기계공의 부성애를 보고는 갈등하게 됩니다. 영화는 여기서 빠르게 이강도의 정신적 변화와 엄마의 계획된 행동을 보여주면서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더군요.

 

이강도의 빚 독촉으로 자살한 청계천 장인(상구)의 어머니였던 엄마라는 여자는 이강도의 반인간적 잔혹한 청부업자 행위에 복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이강도의 경계벽을 뚫고 들어가 모성애로 사로잡습니다. 엄마라는 여자는 이강도를 움직이는 채권주를 찾아가 얻어 맞는 상황을 휴대전화로 강도에게 알리고, 자신이 이강도에게 잔혹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 의해서 복수당하는 것처럼 꾸며서 급기야 자살하기에 이릅니다.

 

이강도는 엄마라는 여자를 땅에 파묻으면서 땅속에서 자신 때문에 자살한 청계천 공인의 주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시신에는 엄마가 짜서 만든 스웨터가 입혀져 있었지요. 두 시신과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보던 이강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고, 자기로 인하여 불구가 된 피해자를 찾아가서 그의 트럭 밑에 누워 자살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서양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김기덕 감독은 그들의 정서나 감수성, 혹은 미학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피에타>의 전개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청부업자의 잔혹한 “인간 백정” 활동에서 엄마라는 여자의 접근과 만남이 급격하게 모성애적 모자감응의 형태로 전환되었고, 마침내는 엄마라는 여자의 의도된 계획이 드러나면서 대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강도는 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죄를 씻고 그 영혼은 맑아져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서구적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제목도 <피에타>인 만큼...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미술양식이기도 하지요. 미켈란제로의 조각상이 대표적이라네요.]

 

김기덕 감독은 돈만 추구하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잔혹함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모성애요, 기독교적인 구원론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종교적 구원론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시대적 특징을 꼽아보니 ‘폭력성’, ‘자본주의’, ‘기독교’라는 키워드가 떠오르게 됩니다. 서양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가고, 그 충돌로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그 폭력과 고통과 비인간적 잔혹성에서 종교적으로 구원을 바라는 시대가 19세기와 20세기의 세계사이면서 동시에 일제 식민지, 해방과 분단, 6.25 전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남북한 체제 건설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가 겹쳐집니다.

 

<피에타>는 감독의 말대로 ‘폭력성’, ‘자본주의’, ‘기독교적 구원’을 짧은 장면 속에서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것이 서구 평단에서 좋은 반응을 얻게 되는 바탕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국내에서는 여전히 “찝찝하다”, “불편하다” 그러네요. 그 까닭은 아마도 먹고 소비하는 것을 보면 세계적인 듯한데, 자본주의 체제의 잔혹한 비인간성에 대해서는 차별과 배제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외면되어 왔던 탓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이지 3년전의 “용산 참사”라든가 최근의 “쌍룡차 사태”를 보노라면, 김기덕의 영화 보다도 더욱 잔혹한 현실이 도처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을 보고도 정치는 기업의 일이라면서 외면하고, 언론은 세입자나 노동자 보다는 개발업자나 기업가의 견해를 더 많이 보도하면서 마치 경쟁에 탈락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로 치부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휴식과 여가를 위한 영화관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김기덕의 영화는 불편하고 찝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15세 때부터 청계천 노동판에서 생계를 이어갔으며 30세에 프랑스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는 김기덕 감독의 특이한 경력은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틀에 갇히지 않았고, 날 것 그대로 연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듯도 합니다. 그래서 서구 평단의 찬사와 달리 국내 평단은 냉담해왔는 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서구인들은 자본주의의 잔혹함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피에타>는 살신성인적인 (가짜) 모성애를 통하여 어찌 보면 환타지 같은 비약적인 전환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기독교인들에게 성모 마리아를 연상케 하는 듯 합니다. 사람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르겠습니다. 제가 감독이라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스스로 자문해보았습니다.

 

폭력-자본주의-기독교에 대항하여 평화-인본주의-동학이 쉽게 떠오릅니다. 예컨데 평화의 섬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를 보다 신중하게 내다보고, 영토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중.일이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하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노조파괴 전문’ 컨설팅사에 관한 기사가 올랐습니다. 기업과 노조는 반드시 상생의 원리에 따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돈을 숭배하지 않고 인간관계를 우선시하고 연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마침 2012년이 유엔이 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입니다. <녹색평론>126호에서 협동조합을 대안적 삶의 형태로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각계 각층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물결처럼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학교에서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는 생활협동조합이 갖춰져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동학은 천상 세계에 관한 환상이 없습니다. 오직 현실세계뿐입니다. 그래서 교(敎)가 아니라 학(學)이라고 표방했습니다. 수운 선생은 서양과 동양의 도는 같지만 학은 동학이라는 말씀을 했지요[道則同, 學則東學].1만년 인류문명사에서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서양 철학의 이단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는 신을 부정하고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의 말씀 몇 귀절을 옮겨 봅니다.

 

“유일자, 완전자, 부동자, 충족자, 그리고 불멸자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 모두를 나는 악이라 부르며 인간 적대적이라고 부른다! 불멸의 존재, 그것은 한낱 비유에 불과하다! ... 불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비유는 일체 덧없는 것들에 대한 찬미가 되어야 하며 정당화 되어야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41쪽)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해가고 있는 자들이며 이미 독에 중독된 자들인 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 지쳐있다.” (18쪽)

 

“너희들이 세계라고 불러온 것. 그것도 너희들에 의해 먼저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가 너희들의 이성, 너희들의 이미지, 너희들의 의지, 너희들의 사랑 안에서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 너희들이 지복을 누리도록. ... 너희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어떤 것이나 비이성적인 어떤 것에 뿌리를 두고 있어도 안된다.” (141쪽)

 

동학도 그렇고 니체도 인간의 문제를 인간이 이성적으로 해결해나갈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냥 인간의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보다 고귀한 계율은 없다고 봅니다. 천상 세계가 없는 기독교! 가능할까요?

 

얼마 전 TV 에서 “쌍룡차 노동자” 희생 가족들을 찾아가 그들의 애환을 듣고 눈물 흘리는 문재인 대선 후보를 보았습니다. 잔혹한 자본주의 체제에 희생당한 분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정치인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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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9.25 06:03

    첫댓글 언제 들어도 청량제 같은 말씀, 늘 감동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말만 들었지, 그 스토리가 어떤 것인지 들려주시니, 기회 있을 때 한 번 보고 싶어집니다. 서양인들의 세계관에 가까이 다가간 것은 그들에게 선택은 되었을지라도 우리나라와 같이 경쟁에서 이긴자만이 미화되고 칭송되는 사회에서는 이단아로 취급받기 딱이겠지요. 그래서 그런 패배자들은 기독교의 천국이 구원을 바라면서 '참아라'를 강요받는 사회,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있는 자들이 더 기독교에 몰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본주이이고, 그걸 조금 넘어서면 나를 둘렀싸고 있는 자연과 주변 생명들이고, 그게 나를 존재케 하는 건데...

  • 작성자 12.09.27 11:23

    하이구,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김 대표님의 소감이 저의 부족함을 잘 메꾸어주고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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