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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음식은 생각조차 싫은 여름, 뭘 먹으면 좋을까? 당장 냉면이 떠오르지만 금세 배가 꺼지고 헛헛할 것 같다. 게다가 엊그제 이미 먹었다. 그렇다면 물회다. 왜 있잖은가, 여름휴가철 동해안이나 남해안에 갔을 때 먹던, 매콤새콤달콤한 육수에 잘게 썬 생선살과 채소를 넣고 후루룩 시원하게 마시듯 먹던 음식 말이다.
요즘은 과일즙에 고추장과 각종 양념을 더해 숙성시킨 육수를 사용하는 물회가 대부분이지만,
옛날 어부들이나 어시장 일꾼들이 먹던 물회는 잘게 썬 생선회와 각종 채소에 고추장을 넣고 물을 타서 훌훌 마시는 음식이었다.
물회의 시작은 미약했으리라. 실은 너무 미약해서 그 시작을 아는 이도 없다. 추측해보면 과거 먹을 것 귀하던 시절, 바닷가 어부와 어시장 사람들이 팔고 남은 생선을 잘게 썰어서 푸성귀와 함께 고추장에 버무려 허기를 달랬을 것이다. 거기에 밥이 있으면 밥을, 때로 국수가 있으면 국수를 말아서 먹으면 더 좋았다. 이게 요새 말하는 '회덮밥'과 '회국수'였다. 여름이라 입맛 없고 입도 깔깔해 잘 넘어가지 않을 땐 여기다 물을 부어 술술 마셨다. 물회의 탄생이라고 추정되는 과정이다.
대략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물회는 이랬다. 서울 충무로 '영덕회식당'에서 물회밥을 시키면 커다란 사발에 잘게 썬 물가자미(미주가리)·청어회, 각종 채소, 얼음 네댓 덩어리와 함께 고추장 한 숟가락이 담겨 나온다. 여기에 물병에 담긴 찬물을 반 컵 정도 붓고 재료들을 잘 푼 다음 밥을 넣고 비벼서 먹는다. 올해로 26년째 이 식당을 하고 있는 신옥자씨는 "옛날 우리 고향(영덕 강구항)에서 먹던 방식 그대로"라고 말했다.
요즘 흔히 식당에서 팔고 있는 물회는 이런 모양새가 아니다. 고추장과 각종 양념을 미리 풀어넣은, 살얼음이 동동 뜬 발그스름한 육수에 생선회와 채소가 잠겨 나오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음식 전문가들은 이 현대적 물회의 탄생지로 경북에 있는 '물회와 과메기의 도시' 포항을 지목한다. 서울 논현동 '동해별관'은 포항시에서 지정한 '포항물회 전문점' 서울 1호다. 이 식당 대표 김도형씨는 "사과·배·파인애플 등 과일즙에 고추장과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 각종 양념을 넣고 숙성시켜 만든 육수가 환여횟집을 포함, 포항의 대표적 물횟집 몇 군데에서 10~15년쯤 전 개발됐다"면서 "이 새로운 스타일의 물회가 포항을 순식간에 평정했고 이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이제는 물회의 '대세'가 됐다"고 설명했다.
'포항물회 전문점' 서울 1호점인 논현동 '동해별관'의 물회 만드는 과정. 생선회를 떠서(왼쪽) 각종 채소를 깐 사발에 담고(가운데) 살얼음 낀 차갑고 매콤새콤달콤한 육수를 부어 먹는다.
그렇다면 어디서 물회를 먹을까? 서울의 이름난 물회 맛집들을 돌며 두루 맛봤고, 이 중 괜찮은 10곳을 가렸다. 포항·제주·속초·장흥 등 전국적으로 물회로 이름난 지역별로 특징은 무엇이며 어떻게 서로 차이가 나는지도 알아봤다.
그래픽=조선닷컴 미디어디자인팀
고추장에 맹물을 붓고 풀어서 먹는 옛날 스타일의 물회다. 식당에 쌓인 철제 고추장통에는 대기업 브랜드가 박혀 있는데, 주인은 "시골에 통이 없어서 그걸 쓴 건데 내용물은 고향(경북 영덕 강구) 친지분들이 메주로 직접 담근 재래식 고추장"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맛을 보니 주인 말이 맞는 것 같다. 대기업에서 생산한 고추장처럼 가볍고 들뜨는 매운맛이 아니라 깊고 구수하다. 물횟집들이 대개 가자미나 광어 따위 흰살생선만을 사용하는데, 이 집에서는 물가자미(미주구리)와 청어를 섞어 쓴다. 덕분에 복합적이고 깊은맛이 난다. 생선회를 가늘게 썰어서 양념장과 잘 어우러진다. 양념장도 너무 맵거나 달거나 새콤하지 않고 균형이 잘 잡혔다. 점심 직전 만들었는지 어묵볶음, 부침개, 숙주나물 등 물회밥에 딸려 나오는 반찬들이 따뜻하면서 신선하다. 물회밥(8000원)과 회덮밥(5000원)은 점심에만 판다. 저녁에 내는 안주물회(2만원)는 맛이나 담음새는 물회밥과 같은데 양만 더 많다. 막회(2만2000·2만5000원)도 좋다. 중구 충무로4가 56-3 (02)2267-0942
포항시 지정 포항물회 전문점 서울 1호점이지만 물회 전문점이라기보다는 고급 일식당 내지는 횟집이라고 해야 어울릴 고급스러운 식당이다. 매일 올라오는 광어를 비싼 횟집에서 하듯 큼직하고 두툼하게 썰어서 커다란 그릇에 각종 채소와 함께 넉넉하게 담는다. 여기에 과일즙에 고추장과 고춧가루 등을 넣고 숙성시킨 육수를 더해 먹는다. 점심 물회정식 1만6500·2만2000원·점심정식 2만2000원, 저녁 동해정식 5만5000원·동해진미 7만7000원. 강남구 논현동 198-18 (02)3445-7979
놋그릇·놋수저에 도자기 반찬 그릇이 고급스럽고 정갈하다. 돌솥에 지은 조밥만 먹어도 만족스럽다. 물회는 성게·전복·해산물·제철 생선 등이 들어간 명품모둠물회(2만9500원), 전복모둠물회(2만4200원), 성게모둠물회(5월~10월·2만4200원), 식사물회(1만9800원) 네 가지가 있다. 식사물회는 제철 생선을 쓰는데 이날은 광어·도미·농어였다. 고급 횟집처럼 두툼하고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나 동해별관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론 약간 싱겁다. 집에서 만든 듯한 깊고 진한 고추장 양념이 느껴졌는데, 원래는 집에서 직접 담근 고추장을 쓰다가 얼마 전부터 '죽장연'이란 브랜드의 고급 고추장을 쓰고 있다고 한다. 강남구 역삼동 828-53 (02)556-3677
'올드 & 뉴'랄까, 고추장과 양념 육수가 한 그릇에 담겨 나온다. 점심에는 물회밥(1만2000원)에 밥 대신 소면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저녁에는 물회안주(3만5000원)를 주문하면 된다. 매일 반찬이 바뀌는 '오늘의 점심'이 가격(6000원) 대비 맛과 양이 실하기로 이름 높다. 자연산막회(2만5000·3만5000원), 문어숙회(2만5000·3만5000원) 등 강원도 동해안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서울에서 이만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집도 드물다. 성동구 성수1가 2동 13-157 (02)465-7487
강원 고성군 유명 '부부횟집'과 같은 집이다. 강원도 본점과 서울 송파·장안·상계, 경기도 일산 등 5개 지점이 있다. 양념·재료 모두 본점과 같다고. 물회 1인분이 1만5000원인데 2인분 이상 시켜야 한다. 2인분이 셋이 먹기도 충분할 정도로 푸짐하다. 소면 6덩어리(2인분 기준)가 딸려 나온다. 양념장에서 약간 자극적이고 강한 시큼털털한 맛이 나는 건 단점. 마늘 덩어리도 씹힌다. 이날 재료는 가자미·방어·숭어·오징어 등이었고 해삼도 조금 들어 있었다. 송파구 송파동 59-13 (02)415-8881
보통 1만원, 특 1만3000원. 차이는 생선의 양. 다른 곳보다 쌌지만 생선 양도 적었다. 생선보다는 채소 맛이 더 기억나는 편. 무채가 매우 많았는데 시원한 끝 맛이 해장용으로 좋을 듯했다. 그 위에 오이채, 그 위에 숭어 등으로 장식했다. 이날 재료로는 숭어·농어·가자미 등이었는데 두툼하진 않았지만 식감은 나쁘지 않았다. 가자미는 영덕에서 공수하고 나머지는 노량진에서 새벽마다 가져온다. 서대문구 충정로2가 23-1 (02)752-0584
전복(2만원), 도다리(1만5000원), 광어(1만5000원), 영덕물회(가자미·1만원) 등 네 가지 물회가 있다. 한 가지 생선만 쓴다. 주인은 "각 생선 고유의 맛을 살리기 위해 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생선은 영덕에서 올라온다. 찬밥을 줬는데, 주인 말로는 물회를 반쯤 먹은 뒤 밥을 말아 먹으면 톡톡 튀는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그 정도의 환상적인 맛은 느끼지 못했지만 고슬함이 물회랑 잘 어울렸다. 물회보다는 곰치나 과메기 등을 더 추천하는 이가 많았다. 섬진강에서 재료를 공수한다는 재첩국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여의도동 35-5 여의도종합상가 4층 (02)785-0831
독특하게 참치로 물회를 만든다. 참치살 중에서도 뱃살 껍질 등 기름진 부위를 주로 쓴다. 의외로 느끼하지 않다. 차가운 육수에 기름진 참치살이 '긴장'하면서 씹으면 오독오독할 정도로 단단한데, 소고기나 돼지고기 따위 '육고기'와 달리 생선의 지방은 녹는 점이 낮아서인지 씹으면 부드럽게 녹으면서 고소한 맛이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국물이 너무 매워서 아쉬웠다. 참치물회 2만·3만원, 참치정식 1만·2만원. 서울 노원구 중계동 본동 366-14 (02)930-3434
주인 송수현(62)씨는 고향인 강원도 속초에서 20여년간 수협 중매인으로 일했다. 속초에서 10년 횟집을 하다가 4년 전 서울로 상경했다. 매일 속초에서 올라오는 생선을 사용한다. 물회에는 광어를 주로 쓴다. 커다란 유리 볼에 가늘게 썬 생선회를 담고 그 위에 각종 채소를 산더미처럼 올린다. 매운맛과 단맛, 신맛이 둥그렇다기보다는 날카롭게 삐죽 튀어나온 느낌이다. 중자(3만원)면 성인 남성 2~3명이 술안주로 먹기 충분하다. 소면 2덩어리가 딸려 나온다. 점심 식사용으로는 1만2000원에 물회를 낸다. 강원도 동해안에서 잡히는 장치를 매콤짭짤하게 조린 '장치조림'(3만·4만·5만원)이 별미다. 서초구 서초동 1572-9 (02)3471-5431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제주 음식점이다. 자리돔 철이 되면 자리물회(점심 1만원, 저녁 1만2000원)를 낸다. 이 밖에 갈치회·국, 고등어회, 소라회, 성게국 등 제주 전통 음식을 적당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모든 재료는 매일 비행기로 공수한다. 중구 당주동 20-2 (02)737-7484
날이 더워질수록 생각나는 음식, 냉면입니다. 냉면은 본래 추운 겨울이 제철이요 제 맛이라지만, 무더위를 잠시나마 식혀주는 별미로 냉면만 한 게 없지요. 본래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등 이북이 고향이라는 냉면이 어디서 어떻게 내려와 자리 잡은 걸까요. '대한민국 냉면의 계보'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도시별로 이름난 냉면집들을 소개합니다.
평양·평안도 1911년 이미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이 생길 정도로 냉면은 평양의 대중적인 외식이었다. 평양은 물론 평안도 전체가 '냉면의 나라'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냉면은 대중의 일상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겨울에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쨍'한 동치미 국물을 주로 국물로 사용했지만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꿩고기를 이용한 고기육수에 메밀면을 말아낸 냉면도 동시에 존재했다.
함경도 감자나 고구마로 만든 전분 '국수'는 1920년대 함경도의 대중적인 외식이었다. 감자 전분 면발에 식초로 삭힌 가자미회를 얹고 고춧가루, 마늘 등으로 만든 양념을 한 '회국수'는 1930년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흥남지역에서 회국수를 많이 먹었다. 현재 북한에서는 국물 없는 회국수보다 국물이 있는 '감자농마국수'를 더 즐겨 먹는다.
황해도 황해도는 해주와 사리원이 냉면의 중심지였다. 같은 물냉면이지만 황해도 냉면은 평안도보다 면발이 굵고 돼지고기 육수를 많이 사용해 진한 고기맛을 기본으로 하면서 간장과 설탕을 넣어 단맛이 난다. 사리원의 냉면가게들은 1928년 4월 21일에 7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면옥노동조합'을 결성할 정도로 크게 성장한다.
서울 서울의 냉면은 몇 번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 발전해 왔다. 서울에 냉면이 외식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가 되면 서울의 냉면집은 수십 개로 늘어난다. 당시 서울의 냉면은 여름 별식이었다. 서울식 냉면집들은 분단과 전쟁 이후 대거 내려온 평안도 사람들이 만든 냉면집들에 밀려 사라진다. 6·25 전쟁 이후 평안도 실향민들은 남산 일대와 남대문, 영락교회 주변에 정착한다. 평안도 출신들이 운영하는 평양냉면집들은 재료와 기후 차이 때문에 육수는 평안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동치미 국물 대신 주로 맑은 소고기 육수를 사용하게 된다.
우래옥(02)2265-0151, 평양면옥(장충동)(02)2267-7784, 남포면옥 (02)777-3131, 을지면옥(02)2274-6863, 서북면옥(02)457-8319, 을밀대(02)717-1922, 봉피양 방이점(02)415-5527, 능라(판교)(031)781-3989
함경도 사람들은 중부시장과 청계천 오장동 부근에 자리 잡았다. 1953년에 '오장동함흥냉면'이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서울에서 함흥냉면의 질긴 역사가 시작된다. 전성기 때는 오장동에만 20여 개의 함흥냉면집이 있었다. 함흥곰보냉면(02)2267-6922, 오장동함흥냉면(02)2267-9500
인천·백령도 인천에는 6·25 전쟁 이전에도 냉면이 성행했다. 1936년에는 인천의 ‘냉면배달조합’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나올 정도로 냉면은 상당히 보편적인 외식이었다.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사람들은 백령도로 대거 피란한다.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하면서 백령도에는 냉면문화가 꽃핀다. 백령도 냉면이 유명해지자 백령도 출신 사람들이 인천에서 백령도식 냉면을 팔면서 인천에는 백령도식 황해도 냉면이 전성기를 맞는다. 인천의 백령도식 냉면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에 까나리 액젓을 넣어 진한 단맛이 난다. 부평막국수(032)527-1510, 변가네 옹진냉면(032)875-0410, 사곶냉면(백령도)(032)836-0559
옥천(양평) 옥천은 인천 백령도와 더불어 ‘황해도식’ 혹은 ‘해주식’ 냉면 문화가 꽃피운 곳이다. 1952년 황해도 출신의 이건협씨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서 ‘황해냉면’이란 이름을 걸고 시작한 후 현재는 예닐곱 개의 냉면집들이 성행하고 있다. 황해도식 냉면은 면발이 굵고 돼지고기 육수에 간장이나 설탕으로 간을 해서 단맛이 강하게 나는 것이 특징이다. 옥천냉면(구 황해냉면)(031)772-9693, 옥천고읍냉면(031)772-5302
대전 평양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가문의 후손인 박근성씨가 6·25 때 월남해 평안도 출신 피란민들이 자리 잡은 대전 숯골에서 ‘숯골원냉면’을 창업한 것이 대전 평양식 냉면의 시작이다. 메밀을 이용한 면발과 닭육수와 동치미를 섞은 육수를 사용한다. 숯골원냉면 본점(042)861-3288
의정부·동두천 1952년부터 미군 기지가 주둔하면서 의정부·동두천 일대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하게 된다. 평양 출신 실향민이 1953년에 창업한 동두천 ‘평남면옥’은 평양 장터의 냉면을 파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얼음이 가득한 육수는 서울 마포의 ‘을밀대’와 닮았다. ‘의정부평양면옥’은 1·4 후퇴 때 평양에서 피란 온 홍진권씨가 1970년 경기도 전곡에서 냉면집을 창업했다가 1987년 의정부로 옮겨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서울의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이 홍씨의 딸들이 운영하는 집들이다. 양지머리를 삶아 기름을 걷어낸 후 차게 숙성시킨 육수에 약간의 동치미 국물을 더하고 고명으로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이 의정부 평양면옥 계열 냉면집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평남면옥(031)865-2413, 의정부평양면옥(031)877-2282
평택 전쟁 중인 1951년에 피란민 수용소와 미군 기지가 평택에 들어섰다. 전쟁이 끝나고 평안도·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평양식 냉면이 자리 잡는다. 평남 강서에서 냉면가게를 운영하던 실향민이 1953년 ‘강서면옥’을 시작한다. 강서면옥은 1958년 서울로 이전했다. 1930년대 평안북도 강계에서 ‘중앙면옥’을 운영하던 고학성씨의 아들이 1974년 ‘고박사냉면’을 개업한다. 강서면옥과 고박사냉면은 모두 양지머리와 사태살을 삶아낸 육수를 기름을 제거해 맑게 한 후 동치미 국물을 섞고 간장을 살짝 쳐 엷은 갈색이 도는 육수를 만든다. 고복례냉면(구 고박사냉면)(031)655-4252 강서면옥(서울)(02)752-1945
대구 1951년 평양 실향민이 창업한 ‘강산면옥’이 대구 최초의 평양식 냉면집이다. 1960년대 중후반 평양 냉면집 ‘안면옥’ 창업주의 아들이 ‘대동면옥’을, 1969년에는 ‘부산안면옥’이 부산에서 옮겨오면서 냉면이 대구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다. ‘안면옥’은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냉면집이자 그 가족들이 운영하는 최고로 긴 역사를 가진 식당이다. 소고기 양지를 중심으로 끓여낸 맑은 육수에 간장으로 단맛을 더하고 식초를 조금 쳐 동치미같이 신맛이 약간 감도는 맛을 내는 것이 대구식 평양냉면의 특징이다. 대동면옥(053)255-4450, 부산안면옥(053)424-9389
풍기(영주) 경북의 내륙 풍기는 경상북도에서 실향민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다. 휴전 이후 풍기에 모여든 실향민들은 견직물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덩달아 평양식 냉면집들도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견직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냉면집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지금 풍기를 대표하는 ‘서부냉면’은 평북 운산 출신의 창업주가 1973년에 문을 연 집이다. 평안도에서 육수로 자주 사용하던 꿩과 돼지고기 국물을 경상도 사람들이 싫어한 탓에 지금 같은 소고기 육수가 만들어졌다. 서부냉면(054)636-2457
속초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은 1951년 이후 고향과 가장 가까운 속초로 모여들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이던 청호동과 건너편인 중앙동, 금호동에 피란민들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함흥냉면집으로 알려진 함흥 출신이 세운 ‘함흥냉면옥’은 1951년 중앙동에 자리를 잡고 영업을 시작했다. 함흥냉면옥은 ‘속초식’ 함흥냉면을 만들어냈다. 고향과 다른 환경과 재료 때문에 면의 주재료였던 감자 전분이 고구마 전분으로 변했고, 냉면의 성격을 결정하는 꾸미가 가자미회에서 명태회로 바뀌었다. 함흥냉면옥(033)633-2256, 양반댁(033)636-9999, 단천식당(033)632-7828, 대포함흥면옥(033)632-6688
부산 함경도 실향민의 대량 이주로 시작된 부산의 냉면 문화는 특이한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부산의 번성했던 면(麵) 문화가 함경도의 회국수 문화와 만나 ‘밀면’이라는 새로운 면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954년 부산 남구 우암동에 흥남철수 당시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의 대규모 피란촌이 형성된다. 함경도 내호에서 냉면집을 하던 실향민이 고향 이름을 따 1954년에 ‘내호냉면’을 개업한다. 실향민들을 대상으로 한 냉면집이었지만 고향과 다른 기후와 재료 때문에 밀가루 70%에 고구마 전분 30%를 섞은 밀면을 만들어 낸 것은 1959년의 일이다. 밀면은 초기에는 ‘밀냉면’, ‘부산냉면’, ‘경상도냉면’으로 불렸을 만큼 냉면의 영향이 강했다. 내호냉면(051)635-2295, 시민냉면(051)895-8726, 개금밀면(051)892-3466
진주·사천 진주냉면은 19세기 말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옥봉동을 중심으로 ‘은하식당’, ‘평화식당’ 같은 냉면집이 6~7개 있었지만 60년대 말에 거의 맥이 끊긴다. 그런데 최근 진주냉면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새롭게 각광받는 진주냉면은 해물 육수를 기본으로 소고기 육전을 꾸미로 올리고 메밀에 고구마 전분을 섞은 면을 사용한다. 진주 바로 밑 사천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냉면집인 ‘재건냉면’이 있다. 1948년 일본에서 귀국한 창업주가 만든 냉면집이다. 이곳에는 돼지고기 육전이 꾸미로 올라간다. 하연옥(055)746-0525, 재건냉면(055)852-2132
눈도 입도 '맛있는 여행' 떠나요… 소갈비의 역사 속으로
갈비, 순대, 국밥…. 우리가 일상적으로 즐겨 먹는 음식들은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퍼져 나가고 변화해 지금과 같은 맛과 모양이 되었을까요. 음식과 관련된 궁금증을 풀어줄 ‘음식의 계보’를 이번 주부터 격주로 연재합니다.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씨가 씁니다. 첫 회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족 외식, 직장 회식 메뉴인 소갈비를 알아봤습니다.
조선 인조 17년(1639년) 6월 24일자 '승정원일기'에 갈비(乫非)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갈비를 좋아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소갈비 구이가 본격적 외식(外食) 문화로 자리 잡았다. 갈비가 외식으로 등장한 1920년대에 갈비는 대중 선술집에서 먹는 저렴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 이후 고급 식당에서도 파는 비싼 요리가 된다. 불고기, 스키야키 같은 요리와 비슷한 가격에 팔렸다. 갈비찜과 갈비탕은 질긴 갈비를 먹기 위해 만들어졌다. 1980년대 갈비가 가족 외식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양념을 하지 않고 굽는 생갈비는 199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본격적 외식으로서 갈비 문화는 평양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20세기 초 이미 평양에 '평양우'라는, 농사에 쓰는 일소가 아닌 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육우(肉牛)가 있었다. 갈비는 불고기와 더불어 평양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외식이었다.
1929년 잡지 '별건곤'에는 평양에 갈비집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라고 나온다. 평양 갈비는 암소 갈비를 크게 썰어 설탕을 안 쓰고 굵직굵직한 석쇠에 굽는 것이 특징이었다.
간장 양념이 배도록 갈빗살에 지그재그 칼집을 넣는 '다이아몬드 커팅' 등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소갈비 문화의 기본은 부산에서 비롯됐다.
부산 갈비 문화를 이끄는 두 축 중 하나는 국제시장이다. 시장에는 1952년부터 '암소갈비 전문'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릴 정도였다. 국제시장 안쪽 신창동 3가 주변에는 쇠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네댓 모여있다. 1950년대 후반에 개업해 지금도 영업하고 있는 '평양 갈비'는 석쇠에 간장을 기본으로 한 소갈비를 구워 판다.
국제시장과 더불어 부산의 갈비 문화를 쌍끌이하는 지역은 해운대다. 1975년 당시 부산의 쇠고기 소비량은 서울(1인당 3.22㎏)보다 많은 3.38㎏으로 전국 최고였다(1976년 3월 13일자 경향신문).
'해운대소문난암소갈비'는 1964년 지금 자리에서 창업했다. 간장을 기본으로 했지만 생갈비처럼 보일 정도로 살짝만 간한다. 다이아몬드 커팅 유행도 이 집이 주도했다. 갈비집을 창업하기 전 동래 요정에서 일본인들에게 칼집 내는 것을 배운 창업자의 기술이 깃든 조리법이다. 하루 정도 숙성시킨 갈비를 숯불에 전골 불고기 불판처럼 생긴 오목한 철판을 얹고 굽는 것도 이 집만의 특징이다.
해운대소문난암소갈비집 (051)746-0003, 평양숯불갈비 (051)246-6955
수원 싸전 거리에 있던 해장국집 '화춘옥'은 1950년대 중반부터 갈비를 숯불에 구워 팔았다. 화춘옥에서 시작된 수원식 갈비는 길이 12㎝ 정도로 크게 썬 왕갈비를 소금으로 기본 간을 해 굽는다.
1924년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옛날 갈비 고명은 간장을 쓰지 않고 소금을 기본 양념으로'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수원 갈비와 흡사하다. 화춘옥 주변에 갈비집이 한둘씩 생겨나면서 1960~70년대 싸전 거리의 갈비집들은 거리를 형성한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수원에도 불어온 도심지 재개발 덕에 싸전에 있던 갈비집들은 수원지방법원 주변으로 이동하게 된다. 1980년대가 되자 자가용을 가진 '마이카'족이 등장한다. 수원 근처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민속촌 등에서 여가를 보낸 사람들은 수원을 찾아 수원 갈비를 먹고 돌아갔다. 수원 갈비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본수원갈비 (031)211-8434, 가보정갈비 (031)238-3883
1929년 9월 27일자 '별건곤' 기사에 따르면 '3년 전(1927년경) 전동 대구탕집에서 갈비를 구워 팔기 시작한 뒤로 여러 식당이 생겨 사진판에 박은 것처럼 의례이 대구탕·백숙연계·군갈비를 팔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1946~1950년 소위 '해방 공간'에 발행된 신문에는 고급 요릿집에서 파는 갈비탕과 갈비구이, 갈비찜 같은 갈비 메뉴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1953년 창업한 '연남서식당'은 서민적 갈비 문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갈비 기름과 심줄을 제거해 간장으로 간한 양념갈비를 판다. 창업 때부터 서서 갈비를 먹는 방식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본격적 가든형 갈비 문화는 1981년 강남 논현동에 문을 연 '삼원가든'에서 시작된다. 삼원가든의 성공은 1년 만에 강남에 갈비 가든 시대를 연다. 삼원가든 창업주는 강남 땅부자들의 공한지를 싸게 빌려 가든을 지었다. 초기에 서울의 대형 갈비집에서는 수원의 갈비 기술자를 많이 고용했지만 간장을 많이 쓴 서울의 먹거리 방식이 결합해 달달한 간장 양념을 사용했다. 갈비를 양쪽으로 갈라내는 양갈비에 다이아몬드 형태로 칼집을 낸 갈비가 만들어졌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마블링이 가득한 고급 쇠고기가 등장하자 생갈비 문화가 본격화한다.
연남서식당(연남서서갈비) (02)716-2520
경기도 포천 이동의 갈비는 양쪽으로 포를 떠서 가운데를 썬 쪽갈비다. 포천 이동갈비 탄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설은 미군 부대에서 버린 갈비를 주워 포를 떠서 먹으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설은 1950년 9·28 수복 이후 군부대가 많던 포천에 장교를 상대로 갈비를 팔던 집이 생겨나면서라는 것이다.
이동갈비란 간판이 등장한 것은 1963년 일이고, 1976년 이동에 포장도로가 생기면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원조이동김미자할머니집 (031)532-4459
안동·영주·자인·산내·봉계·경주·언양 같은 유명한 경북의 한우 단지가 대구를 중심으로 모여있다.
경상도 사람들은 유독 졸깃하고 탄력감이 넘치는 갈빗살을 최고 부위로 친다. 동인동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찜갈비 골목이 있다. 1968년 '실비갈비집'에서 시작된 이 독특한 갈비 문화는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양재기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은 찜갈비는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대구 계산동·동산동이 있는 대신네거리 주변은 대구 섬유 산업의 핵인 '실가게'가 몰려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1950년대 말부터 고깃집들이 들어서 번성했다. 1961년 대구에 처음 갈비구이를 선보인 '진갈비'와 1970년대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생갈비 명가들이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부창생갈비 (053)255-0968, 국일생갈비 (053)254-5115
영주 시내에는 갈빗살 골목이 있다. 다른 부위는 팔지도 먹지도 않는다. 양념갈비는 먹지 않는다. 오로지 생갈비만을 짝으로 걸어놓고 주문과 동시에 갈빗살만을 발라내 구워준다. 1990년대 초반 본격화한 생갈비 시대와 더불어 생겨나 번성하고 있는 신생 음식 문화다.
축산식육식당 (054)631-1437, 영신숯불회관 (054) 634-4589
안동의 외식 갈비 문화는 1970년대 초반 '구서울갈비'가 마늘 양념한 갈비를 팔면서 시작된다. 안동식 갈비는 대구와 달리 양념을 미리 재워놓지 않고 다진 마늘, 간장 등을 즉석에서 버무려 내는 것이 특징이다.
대구의 안동식 갈비는 마늘과 참기름을 주로 사용하고 하루 정도 재워 놓는 것이 안동의 갈비와 조금 다르다.
구서울갈비 (054)857-5981, 동우한우갈비 (054)858-7977
경남 함양 안의마을과 거창 원동마을은 내륙 갈비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오래된 갈비 문화의 두 축인 갈비찜과 갈비탕만을 판다.
갈비탕에 두꺼운 본갈비(1~3번), 부드러운 꽃갈비(4~8번), 졸깃한 참갈비(9~13번) 부위를 한 점씩 넣어 갈비 전 부위를 맛볼 수 있게 한 것도 특징이다. 찜과 탕의 양념이 대구로 갈수록 강해진다.
대전식당(거창 원동) (055)942-1818, 옛날금호식당(함양 안의) (055)964-8041
조선 중기부터 떡갈비 문화가 시작됐다는 이야기 등 많은 설이 있지만 근거는 없다. 1980년대 향토 음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부정확하다. 1967년 독일 대통령 뤼프케 부부가 방문했을 때 육영수 여사가 이들을 위해 전라도식 갈비구이를 내놓았다는 기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해남 '천일식당'에서 1960년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떡갈비는 갈비를 심줄을 제거해서 양념을 섞어 구웠다. 광주광역시 송정리에서는 돼지갈빗살을 기본으로 소고기를 다져 섞어 구워 낸 갈비를 판다.
송정떡갈비 1호점(광주) (062)944-1439, 천일식당(해남) (061)535-1001
닭고기·육회·멍게… 동네맛 확실한 '따로 또 같이'의 미학
비빔밥이란 단어가 처음 기록에 나온 건 19세기 후반 조리서 '시의전서'에 '부밥'으로 나온 것이 처음이다. 비빔밥의 기원으로는 제사기원설과 농번기 들밥설,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남은 음식을 없애기 위한 설 등이 있다. 과거 비빔밥은 요즘처럼 고추장과 각종 재료를 밥에 얹어 비벼 먹도록 나오기보단, 밥을 국물이나 양념에 미리 비벼 나오는 경우가 많다. 비빔밥은 외식이 본격화된 19세기 후기부터다. '전골집, 냉면집, 쟝국밥집, 설넝탕집'(매일신보, 1912년 12월 12일)과 함께 가장 보편적인 대중 외식이었다.
비빔밥은 옛날에 '교반(攪飯)'으로도 불렀다. 휘저어 섞어 먹는다는 뜻이다.
붉은 육회와 샛노란 달걀노른자, 연둣빛 상추와 주황색 당근 채를 휘저어 섞는다. 진주 천황식당의 비빔밥.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평양의 명물로 냉면과 비빔밥이 등장한다. 평양비빔밥은 ‘다져서 볶은 소고기와 밥을 참기름으로 섞어 그 위에 고기, 녹두나물, 고사리, 버섯, 도라지 등으로 꾸미를 놓고 실닭알(지단)과 김을 얹어 만든다.’(우리민족요리, 2008년, 근로단체출판사)
해주비빔밥은 1925년에 쓰인 ‘해동죽지(海東竹枝)’에 해주교반(海州交飯)으로 처음 등장한다. 교반은 16세기 말에 쓰인 ‘용사잡록(龍蛇雜錄)’에 나온다. ‘남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돼지비계를 넣고 졸이다가 밥을 넣어 볶으면서 나머지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그릇에 퍼 담은 다음’(조선의특산료리, 2005년, 평양출판사) 꾸미로 닭고기를 사용하는 것이 평양비빔밥과 다르다. 수양산 고사리와 김을 잘게 썰어 사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풍년명절(서울) (02)306-8007
비빔밥의 대명사가 된 ‘전주비빔밥’은 일제 강점기부터 유명했다.(별건곤, 1928년 12월 1일) 1960년대까지만 해도 ?滑聆?비빔밥은 대개 뚝배기에 담아 팔았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꾸미나 고명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1960년 ‘한국관’이 놋그릇에 비빔밥을 담아 팔기 시작한다.
1969년에는 ‘으뜸회관’에서 곱돌을 이용한 ‘전주곱돌비빔밥’을 상표 등록한다. 1970년 신세계백화점에서 ‘팔도강산특산물민속전’이 열린다. 전주비빔밥은 이때 최고의 인기를 얻으며 서울은 물론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다. 전주의 유명 비빔밥 식당들의 분점이 1980년대 초반부터 서울에 진출한다. 그러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외식으로 성장한다. 성미당 (063)287-8800, 가족회관 (063)284-2884, 고궁(서울)(02)776-3211
진주비빔밥은 ‘화반(花飯)’이라 불렀다. 진주 기방문화에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설이 있지만 오래된 자료는 없다. 그보단 장터를 오가던 장사꾼들을 위한 먹거리로 출발한 듯하다.
진주에는 1927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천황식당’이 있다. 고사리, 무채, 숙주나물 같은 나물들과 ‘쏙대기(돌김)무침 붉은 육회’와 ‘엿꼬장’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고추장으로 만든 고추장 육회비빔밥이다. 천황식당 (055)741-2646, 제일식당 (055)741-5591
‘비빔밥(骨董飯)을 먹고 석양을 함께 구경’(김약제일기, 1894년 3월)할 만큼 비빔밥은 서울의 대중 외식이었다. 서울비빔밥은 ‘큰 고기졈을 그냥 노흔 것과 콩나물발이 셋치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노흔 것’(별건곤, 1929년 12월 1일)이었다. 아쉽게도 서울식 비빔밥을 내는 식당은 찾기 어렵다.
우시장으로 유명한 전남 함평에는 육회비빔밥이 있다. 식사를 넘어 안주로 사용됐다.
‘잠간 함평에 와서 일을 보고 오후에 가는 이가 혹 점심을 먹게 되면 대개는 만히잇는 비빔밥집이니 그곳에 들어가 십오전자리 비빔밥 한 그릇에 보통주량을 가진 이면 소주 두 잔만 마시면 바로 목에 넝겨버리기도 앗가울만한 싼듯하고 깊은 맛잇는 비빔밥 그 구수하고 향기 난 소주, 이러기게 함평시장날이면 외촌에 사는 분들이나 근읍에 게신 이들은 시장에 와서 비빔밥에 소주만 먹고 가는 예도 적지 안하며’(동아일보, 1938년 10월 4일)란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대흥식당 (061)322-3953
경북 김천역에서 ‘헛제삿밥을 먹고’(동아일보 1925년 3월 4일)갈 정도로 오래전부터 헛제사밥은 제사가 많은 안동과 주변 지역의 음식문화였다.
안동에서는 1978년 안동댐 건설로 고가옥을 옮기면서 헛제사밥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경상도의 헛제사밥은 콩나물, 고사리 등의 나물과 간장으로 간을 한 소박한 음식이다. ‘헛신위밥’이라 부르기도 한다. 까치구멍집 (054)855-1056
전북 익산 황등면에 있는 황등시장의 비빔밥은 시장 비빔밥의 전형을 보여준다. 1960년대부터 시장 주변에 생긴 비빔밥 중 가장 오래된 ‘진미식당’은 독특한 방식으로 비빔밥을 만든다. 밥과 삶은 콩나물을 소머리로 끓인 선짓국으로 토렴한 뒤 고추장, 깨소금, 참기름, 고춧가루를 넣고 비빈 뒤 소고기 육회를 올려 낸다. 진미식당 (063)856-4422
거제·통영의 멍게비빔밥.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0가지가 넘는 비빔밥이 나온다. 비빔밥은 일본 생선초밥(스시)처럼 무엇을 얹느냐에 따라 무한 확장·변신이 가능하다.
경남 거제와 통영에는 지역 특산물인 멍게를 비벼먹는 멍게비빔밥이 있다. 멍게를 잘게 잘라 소금에 살짝 절여 짜지 않은 젓갈 형태로 만든 다음 납작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다듬어 급랭한다. 손님이 주문하면 사발에 밥을 담고 냉동해뒀던 멍게를 김가루, 깨소금, 참기름과 함께 얹어 낸다. 뜨거운 밥에 사르륵 녹은 멍게를 다른 재료들과 썩썩 비벼 먹는다. 백만석식당(거제) (055)638-3300, 들름집(서울) (02)585-8449
고단함 달래주는 뜨끈한 한그릇… 경상도 사람들의 '소울푸드'
영화 '변호인'에서 돼지국밥은 배우 송강호만큼이나 비중이 크다. 덕분에 돼지국밥이 경상도를 넘어 전국적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돼지국밥은 경상도의 대중식이다.
돼지국밥집은 2013년 4월 기준(부산대 차철욱 교수 논문 '돼지국밥의 탄생과 소비') 부산에 710개, 대구 324개, 경남 795개, 경북 281개 등 경상도에 압도적으로 많고 질적으로도 빼어나다. 돼지국밥이 외식으로 팔리기 시작한 건 1930년대 후반부터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도 먹었음은 분명하다.
돼지고기 문화가 성행하던 이북 실향민이 이남에 전했다는 설(이북에는 돼지고깃국, 돼지갈빗국, 돼지내폿국, 돼지순댓국, 돼지고기냄비탕 등 다양한 돼지 국물 요리가 존재했다)에서부터 경상도 자생설, 일제강점기에 수출하고 남은 잔육(殘肉) 기원설, 6·25 이후 미군부대 꿀꿀이죽 기원설까지 다양하지만 정설은 없다.
영도
영도는 부산에 있지만 주민의 절반 이상이 제주도, 호남, 거제, 통영 출신이다. 이 중 제주 출신이 가장 많다.
1938년 문 열어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돼지국밥집이 이곳에 있다. 바로 '소문난돼지국밥'이다. 울산 출신 할머니가 장사를 처음 시작했는데 초창기에는 제주 돼지를 가져다 도축해 돼지국밥을 만들어 팔았다. 살코기와 뼈를 사용한 약간 맑은 국물이 특징이다. 초기부터 사용하던 돼지머리와 순대가 빠진 것은 최근 부산 돼지국밥의 특징이다.
제주 출신이 1975년에 창업한 '제주할매국밥'과 목포 출신이 창업한 '재기돼지국밥'도 유명하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제주의 돼지 음식과 비슷한 점이 많다. 소문난돼지국밥 (051)416-1546, 재기돼지국밥 (051)418-0526
범일동
옛 삼화고무 담벼락에서 1955년에 장사를 시작한 '할매국밥'은 초창기 돼지머리, 등뼈, 다리뼈를 넣고 끓여 국물을 냈다. 맑은 국물이 특징인 이북식 돼지국밥의 기본형이다. 1990년대부터 부산에 분 고급 부위 유행에 맞춰 돼지머리가 삼겹살로 바뀌었다.
중앙동에서 1953년에 창업한 '하동집'과 토성동의 '신창국밥'은 직간접적으로 이북 실향민의 영향을 받았다. 이북의 돼지고기 문화는 돼지국밥을 세련되게 만들었고, 상업화시켰다. 1960년대 초반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던 서부터미널 주변으로 돼지국밥 집들이 들어섰다. 경상도식 돼지국밥이라 불리는 뼈로 우려낸 탁하고 뽀얀 국물이 중심을 이룬다.
할매국밥 (051)646-6295 마산식당 (051) 631-6906
서면시장 돼지국밥 거리
1948년 연지시장 좌판에서 장사를 하다가 전쟁 이후에 서면시장에 자리를 잡은 '송정3대국밥집' 등이 뼛국물을 기본으로 한 경상도식 돼지국밥을 팔고 있다.
송정3대국밥집 (051)806-5722
부산의 돼지국밥 트렌드 변화
부산의 돼지국밥은 시대마다 빠른 변화를 맞고 있다.
1940~50년대에는 돼지머리, 순대 등을 이용한 돼지국밥을 주로 팔았다. 1960년대 이후에는 지금 돼지국밥집의 보편적인 고기가 된 앞다리살과 내장, 간, 허파 등이 사용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내장과 돼지머리가 점차 사라지고 삼겹살을 사용하는 집이 많아지고 있다. 삼겹살보다 비싼 항정살을 이용한 돼지국밥집이 생겨날 정도로 돼지국밥의 고급화는 가속화고 있다.
쌍둥이돼지국밥 (051)628-7020
서성로 돼지고기 거리
서성로 돼지고기 거리는 대구 돼지국밥의 발상지다. 1940년대 '서성옥'이란 원조집이 있었다. 대구역과 쌀 도매상을 오가던 짐꾼들이 주로 들락거렸고 공구상가가 옮겨오자 노동자들이 많이 이용했다.
1950년대 중반에 영업을 시작한 돼지고기 골목의 터줏대감인 '밀양 돼지고기 식당'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구의 돼지국밥집이다. 돼지 한 마리를 고스란히 사용하는 탓에 고기는 여러 부위가 골고루 섞여 있다. 고기의 부분육이 대량으로 공급되는 1980년대 이전 돼지국밥집들의 특징이다. 뼈를 기본으로 하는 국물과 여러 부위 살코기를 섞어 사용하는 것은 돼지국밥의 원형에 해당한다. 반찬은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새우젓, 된장, 고추, 마늘, 김치만을 사용한다. 밀양돼지고기식당 (053)257-5830
(왼쪽) 대구에선 돼지국밥도‘따로국밥’으로 먹는다. 파크국밥. (오른쪽) 대구 봉덕시장 돼지국밥 거리.
봉덕시장
1980년대 초반부터 형성된 봉덕시장 돼지국밥 식당들은 한결같이 돼지머리를 푹 고아 낸 국물에 돼지머리 꾸미만을 사용한다. 기본양념으로 된장을 사용하는 것도 봉덕시장만의 특징이다. 된장 양념 사용은 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리법이다. 10년 전부터 대구의 소고기 따로국밥의 영향을 받은 '따로 돼지국밥' 이 유행하고 있지만 봉덕시장의 국밥집들은 여전히 국에 밥을 말아주는 토렴 방식이다. 부산을 거쳐 대구까지 점령한 정구지(부추) 무침도 없다. 삼정돼지국밥 (053)473-4810, 파크국밥(대명동) (053)625-0310
진해·마산 진해 중앙시장에는 돼지국밥 골목이 있다. 가장 오래된 '가덕집'이 있는 작은 돼지국밥 골목과 1980년대 초반 형성된 시장 중앙 돼지국밥 골목으로 양분된다. 1980년대 초에 장사를 시작한 '일미식당'은 돼지머리만을 이용한 돼지국밥을 낸다. 돼지머리를 이용한 돼지국밥은 초창기 돼지국밥의 기본 조리법 중 하나다.
1924년 발간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대가리가 으뜸이 되는 것은 껍질과 귀와 코가 다 각각 맛이 좋다'라고 적혀 있다. 일미식당(진해) (055)542-4685, 소문난국밥수육(마산) (055)241-5683
경상도에는 '밀양'이란 간판을 단 돼지국밥집이 유독 많다. 밀양은 부산 대구와 더불어 돼지국밥이 성행한 도시다. 밀양 무안면에는 '동부식육식당'과 '제일식육식당', '무안식육식당'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1940년 창업한 '양산식당' 창업주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집이다.
밀양식 돼지국밥은 특이하게 소 사골과 양지로 뽑은 맑은 국물에 밥을 말고 돼지 살코기를 꾸미로 얹는다. 밀양 시내에는 돼지뼛국물을 기본으로 한 경상도식 돼지국밥집이 많다. 동부식육식당 (055)352-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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