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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수정 1961),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러셀도 루소의 중요성을 안다. 그 유명한 볼테르도 그리고 많은 백과전서파 계몽주의자도 선택하지 않고 루소를 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러셀은 영국인이 프랑스인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 이상으로 루소에 대한 반감이 있다. 물론 그가 벩송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듯이 말이다. 그는 휴머니스트와 휴머니떼르를 구분하지 않으려는 것 같고, 또한 리베랄리스트와 리베르테르를 구분하지만 왜 리베르테르가 직접민주주의와 연결되어 있는지 깊이 사유하지 않은 것 같다. (50TKB)
**루소는 형이상학의 탐구없이 인성론을 통하여 심층의 흐름을 이해하고 거기서 분출하는 철학을 전개한 드문 철학자이다. 게다가 몽테뉴와 데카르트 이래로 200여년 동안 철학도 불어로 쓰여졌고 많은 외국서적들이 불어로 옮겨져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로코코 시대에 드물게 새로운 시대정신을 관통하였던 철학자이다. (50TMI)
*1991년엔가 본 영화로 소련 영화인데 제목이 “택시운전사”라고 생각했는데, 구글에서 찾아보니 룬긴(Pavel Lounguine 1949-)의 Taxi Blues(1990)일 것 같다. 당시에는 이 영화는 소련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강건함과 힘의 세상에서 부드럽고 유연함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강렬한 힘의 섹스보다 섹스폰의 재즈가 더 성적 매력이 있다 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물론 영화에 속에 모스코바 도심에 코카콜라?의 입간판이 들어오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 루이 14세의 권력의 강력함보다, 또는 로꼬꼬의 겉치장보다, 인민의 부드러운 심성(파스칼의 섬세정신)이 샘처럼 또 루소의 마음 속 깊이에서 용천처럼, 심층이 솟아나는 분위기를 민감한 사람이 느꼈을 것이다. / 아마도 작년 이맘때 광화문의 촛불은 심성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아서 솟아나와 아직도 도심을 넘어서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 말로 매끈한 공간이 확장되어 장(場)으로써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50U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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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루소 287-309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흄보다 한 살 어리다]는 18세기 프랑스어의 의미에서는 철학자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소위 철학자라고 부를 만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287) [러셀은 로크에게 이런 소리를 해야 한다. 내재성의 철학을 철학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앵글로색슨 철학이 소위 말하는 철학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루소는 낭만주의의 아버지로서 인간의 정서에서 인간 외의 사실을 추리하는 유(類)의 사상체계를 처음으로 세웠으며, 군주의 전통적인 전제 정치를 반대하는 가민주주의(pseudo-democratic)인 독재정치 철학을 고안해 낸 사람이기도 하다. (287) [직접 민주주의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 그는 약간 맛이 간 것 같다.]
당시 이후로 스스로를 혁명가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두 파로 나누어졌다. 즉 루소를 따르는 사람들과 로크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 현대의 히틀러는 루소의 후예이며 루스벨트와 처칠은 로크의 후예이라고 하겠다. (287) [루소의 영향은 정치적으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이후 파리꼬뮨(1871)을 거쳐서, 혁명의 전통에 속하는 인민주권의 레닌(Lenin, 1870-1924)과 마오쩌뚱(모택동, 毛澤東 1893-1976)에 있다. 로크의 후예로는 영미 정치가들로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나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뿐만 아니라 국가주의의 주창자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도 도조 히데끼(東條英機 동조영기, 1884-1948)도 이편에 속한다.]
루소의 전기는 그의 고백록(Confessions, 1770)에 자세히 더구나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비굴함이 없이 자기 자신에 의해 서술되었다. (287)
[[그의 생애에 대한 러셀의 곡해는 파랭이들의 특성대로 기록되었다. 여기서 그의 글 대신 메(Georges May, 1920-2003)의 자료로 대신한다.]]
*1726(열넷) 판화의 일에 5년 도제의 계약을 하다. - 아버지 이삭이 재혼하다.
<제네바에 되돌아온 그는 우선 한 재판소 서기 집에, 그리고 나중에는 판화가 장인 집에 도제로 들어갔다. 노동시간 이외에는 그는 작은 행운 덕분으로 보세에서 약간 배웠던 교육을 계속했다. 만족할 수 없는 독서가로서 그는 우연히 그의 손에 떨어질[잡힐] 모든 것을 삼켜버렸고[읽어냈고], 그가 번 작은 임금을 대서점 주인인 트리뷔(Tribu) 부인 집에 소비했다. - 메(Georges May), 루소(1961), 제1장 1절. > [책읽기 좋아한 루소]
*1728(열여섯) 쟝 자끄는 제네바를 떠나 안시(Annecy)에 가다. 거기서 마담 바랑스(Françoise-Louise de Warens 1699-1762)(29살)를 만나다. 그리고 튀린(Turin, it. Torino)에 가서 프로테스탄트를 버리고 카톨릭 교리를 배우다.
튀린에 머물면서 마담 베르셀리스(Vercellis)의 하인 노릇을 세 달 하다가, 구봉(Gouvon) 백작의 시중을 들다.
<그녀(마담 베르셀리스(Mme Vercellis, s.d.)가 막 세상을 떠나는 시기에 루소의 생애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들 중의 하나가 일어났다. 그는 장밋빛과 은빛 색깔로 된, 게다가 이미 낡아버린 작은 리본을 차지했는데, 그는 그것을 젊은 하녀인 마리옹(Marion, s.d.)에게 우정의 담보로 주기를 바랐다. 그 좀도둑질이 들켰다. 루소는 이에 대해 죄없는 마리옹(Marion)을 고발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몰아부쳤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은 서투른(경솔한) 도둑인 그는 훨씬 더 서투른[질 나쁜] 비방자로 드러났다. 그의 거짓말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젊은이는 나쁜 행위 때문에 후회(un remords)로 신경 쓰이게 되었으며, 그 후회는 그의 생애에 마지막 날들까지 그의 양심을 시달리게 할 것이다. 만일 50살의 그 루소가 17살의 루소에 의해 아주 가볍게 범해진 범죄 때문에 위안을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그가 동일한 인간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일까? 이런 의문이 또한 그를 괴롭게 할 것이다. - 메(Georges May), 루소(1961), 제1장 1절.>
“이 비참한 순간부터 나에게 그 이상의 죄악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가련한 여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때 그것은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내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에 나에게 안겨 준 그 물건에 대한 죄책감을 나에게 벗겨 주었다.” (288-289) [루소가 마리옹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가지고 있었다. 그 심정이 그를 통속적 이익에 뛰어들지 않고 살게 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 벩송이 말하는 양심의 가책은 처벌을 통해서 벗어나기보다, 공동체에 합류하는 도덕성을 유지하는 차원으로 남을 수 있다.]
*1731(열아홉) 가짜 그리스 정교 수도원장(archimandrite)의 대리인이 되었다. 그는 파리로 갔다가 마담 바랑스의 가까이에 있는 샹베리(Chambery)에로 되돌아간다.
*1737(스물다섯) 성년이 된 루소는 어머니의 유산을 받으러 제네바로 간다. 그는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 몽펠리에로 가서 의사 피즈(Fizes)의 진찰을 받는다. 그리고 마담 라르나즈(Larnage)를 만난다. 루소의 고백에는 이 부인이 그에게 쾌락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때 그는 그리스도의 성소를 순례하는 중에 있는 수도원장(그리스정교)의 서기가 되고 또 한 때는 스코틀랜드의 왕권신수설론자 뒤딩(Dudding)이라는 가명으로 어떤 부잣집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다. (289) [사랑에 빠진 이 여자가 마담 라르나즈 이다.]
*1743(31살) 루소는 [뒤빵(les Dupin)가에 머물다] 베니스 대사의 지위에 오른 몬테그(Montaigu 1692–1764/1777)씨 비서가 된다. 리용, 마르세이유, 제네바, 파두아를 거쳐 베니스로 가다.
*1744(32살) 몬테그씨와 불화로 루소는 파리로 온다.
*1745(33살) 루소는 세탁하는 젊은 하녀 테레즈 르바쇠르(Thérèse Levasseur, 1721-1801)와 내연의 관계를 맺다. / 그는 오페라 끼있는 뮤즈들(Muses galantes)를 완성한다.
*1750(38살) 디종 아카데미는 과학과 예술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를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그의 문학적인 첫 성공은 말년[중년]에야 이루어졌다. 디종(Dijong) 아카데미에서는 “예술과 과학은 인간에게 이득을 주었는가?”라는 주제에 관한 그의 가장 우수한 논문에 상을 주었다. 부정적인 주장으로 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 ...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스파르타 찬미자이며, 아테네의 반대자이다. 그는 일곱 살 때에 풀루타크의 영웅전을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리쿠르고스(Lycurgos)의 생활을 존경하였다. (290)
*1751(39살) 루소는 먹고살기 위하여 음악 악보를 복사하다. 마담 프랑꿰이(Francueil)에게 편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육원에 맡긴 이유를 설명하다.
*1754(42살) 루소는 테레즈와 함께 제네바로 귀국하여 칼빈주의에 귀의하다. 제네바 시민 자격을 회복하다.
*1755(43살)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토대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5)을 쓰고, 볼테르와 이 주제에 대하여 편지를 교환하다.
슈브레뜨(Chevrette)에 있는 마담 데피네(d'Epinay)에 거주하다. -[11월 1일 리스본의 지진. 희생자 5만 이상이었다]
“첫째 사람이 한 조각의 땅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이것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단순하여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시민사회의 실제의 창시자이다.” “비참한 혁명으로 말미암아 야금술(冶金術)과 농업이 생겨났다. 곡물이야말로 불행의 상징이다. 유럽은 가장 불행한 대륙이다. 그곳은 대부분의 곡물과 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명을 버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 선하며, 야만인은 배불리 먹고 나면 자연과도 평화롭게 어울리고 그의 모든 동류(同類, [인간])들과 친하였던 것이다” (292) [불평등기원론에서]
볼테르의 답장 .. / “나는 당신이 윤리에 대하여 쓴 새 책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를 모두 바보로 만들어 버리려는 기도(企圖)에 그처럼 기지(機智)가 동원되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 독자들은 당신의 책을 읽고 네 발로 기어 다니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60년 동안이나 그런 습관을 잊고 있던 나로서는 불행하게도 다시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캐나다의 야만인들을 찾아다니는 일에 종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병이 유럽의 외과의사를 필요로 할뿐더러 그 고장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좋지 못한 행동을 목격한 야만인들도 이제는 우리와 다름없이 악에 물들어 있을 테니까요” (292)
<반대로 둘째 담론[불평등 기원론]은,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 편파적인 불평등을 생성하게 하는 사회적 제도들의 패해들을 고발했고, 그 책의 헌정사는 제네바 공화국에게 부여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문학에 속하는 것이었고, 그러나 이것은 또한 12년의 간격이지만, 「파리조에게 보낸 편지」의 반박이자 속죄이었다. 이게 전부다가 아니다. 이 담론이 쓰여지고 난 뒤, 루소는 떼레사를 동반하여, 제네바를 향하여 떠났다. 제네바에서 그는 그의 어린 시절의 종교에서 되돌아 갈 것이고, 시민 자격을 되돌아 갈 것이다.- 메(May), 루소(1961), 제1장 3절.>
<몽모랑시의 여섯 해 동안에(1756년에서 1762), 마치 영원한 농촌 또는 산촌의 전원적인 것처럼, 오만하고도 호의적인 뮤즈의 변덕에 의해 중단 없는 목가적 여가인 것처럼 상상한다는 것은, 따로 떼어낸 고백록의 몇 쪽들을 믿는 것에 관한 부정확한 것일 것이다. 이는 전혀 반대로, 정신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시련의 여러 해였다. 왜냐하면 우정과 사랑에서 여러 커다란 위기들의 시기였다. 우선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Poème sur le désastre de Lisbonne, 1756)에 관하여 1756년에 볼테르와 논쟁이 있었는데, 루소는 「볼떼르에게 보낸 섭리에 관한 편지(Lettre à Voltaire sur la Providence, 1756)」로 응답했다. 그리고 디드로가 1757년에 그의 사생아(Le Fils naturel, ou Les épreuves de la vertu, 1757)에서 나온 불쾌한 문장에 관하여, 디드로와 하찮은 불화가 있었다. 마침내 맹렬하고 복잡한 위기가 터졌다. 그 위기에는 마담 우드또를 향한 그의 사랑이 긴 논쟁의 구실이었고, 그리고 마담 에피네와 특히 에피네의 애인 그림(Grimm, 1723-1807)씨와 갑작스런 단절의 구실이었다. 이어서 이 큰 위기의 여파들이 몰아닥쳤다. 우선 1757년 마지막 날들 중에 나온 달랑베르가 백과전서 제7권을 위해 쓴 「제네바」 항목에 관한 달랑베르와 논쟁이었다. 그러고 나서 볼테르와 결정적인 단절이었다. 즉 루소가 볼테르에게 1760년 6월 17일에 마지막으로 쓴 “나는 당신을 증오한다(Je vous hais).” 때문이다. 메(May), - 루소(1961), 제1장 3절.> [불화 4년만에 볼테르와 결별하였다.]
볼테르(1694-1778)는 루소를 “해로운 미치광이”로 취급하고, 루소는 볼테르를 “사악한 나팔, 날씬한 천재, 야비한 영혼”이라 평하였다. .. 루소는 볼테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1760년 편지) / “나는 사실 당신을 미워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사랑해 주기를 원했던들 나는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감정 - 나의 가슴에 가득 차 있던 - 중에서 다만 당신의 훌륭한 천품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는 존경과, 당신의 지각에 대한 사랑만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재주 이외에의 존경할 만한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닙니다.” (294) [김정은(1984-)을 ‘미치광이(Mad man)’라고 하였는데, 북측은 트럼프를 ‘노망난 늙은이(dotard)’라 한다. 트럼프(1946-)가 ‘미치광이 이론’(madman theory)으로 남측이 IMF 이후로 20여년 동안 어렵사리 벌어 논 부를 한 입에 날것으로 먹어치우려 한다고 보면 ‘야비한 영혼’이란 말도 들을 것이다. / 둘은 거의 40년 차이가 나는데... ]
이제 우리는 루소의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그의 소설 누벨 엘로이즈(Nouvelle Héloise)가 1761년에 나오고, 에밀(Emile, 1762)과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 1762)이 1762년에 나왔다. (294)
*1762(50살)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 1762), 에밀(Emile, 1762)이 나오고, 경찰은 이것을 압수하고, 소르본느 대학은 고발하고, 의회는 단죄하였다. 루소는 신체구금의 형을 선고받고, 스위스로 달아나서, 이베르동(Yverdon)에 도착하다. / 에밀(Emile)이 파리에서 불타다. 에밀(Emile)과 마찬가지로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도 봉인되었다. 제네바도 루소를 신체 구금형을 언도하였다.
*1764(52살) 산에 대한 편지들이 있으며, 식물학에 관심을 쏟다. / 12월에 익명으로 된(사실상 볼테르가 쓴), 그리고 제네바에서 나돌았던, 시민들의 감정(Le sentiment des citoyens)라는 글에서 루소가 자식들을 내버렸다고 폭로하였다. / 루소는 고백록(Confessions)을 쓰기로 결심하다.
*1765(53살) 모띠에에서 쫓겨난 루소는 셍 삐에르 섬에서 두 달을 지내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달아났다가, 파리로 되돌아오다. / 흄(Hume)에 의해 영국에 초대받다.
제네바 종교회의에서는 그의 두 책을 불살라 버리고, 그가 제네바에 오면 체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체포를 명하고, 소르본 대학과 파리고등재판소에서는 에밀(1762)을 정죄하였다. / 드디어 프레데릭 대왕이 그를 측은히 여겨 철인 왕령의 일부인 뇌샤텔 근처에 있는 모티에에 와서 거주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3년 동안 살았다. 그러나 1765년에 모티에의 마을 목사가 .. 고발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흄(Hume)이 그를 도와주었다. (295)
*1767(55살) 영국왕(George III)은 루소에게 연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루소는 영국의 우톤(Wootton)을 떠나, 아미앙(Amiens)을 거쳐, 플뢰리-수-뫼동(Fleyry-sous-Meudon)에 있는 미라보(Mirabeau)자작 집에, 그 다음에는 꽁티 공(le prince de Conti)의 집에 머물다. /루소는 그의 친구 뒤 페이루(Du Peyrou, 1729-1794)[유언 집행자]와 불화가 생기다.
*1768(56살) 루소는 마담 나다이악(Nadaillac)에게 고백록의 수고본 일부분을 보냈다. 떠돌이 삶을 살면서, 리용(Lyon), 그르노블(Grenoble), 샹베리(Chambery) 등을 거쳐, 부르광(Bourgoin)에서 머물다.
- 음악사전(Dictionnaire de musique, 1768)(1755년부터 쓰기 시작했고, 1767년에 파리에서 출판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표지에는 1768년으로 되어 있다.]
*1769(57살) 루소는 몽껭(Monquin)에 머물고, 한 순간 고백록(Confessions)을 그만두고자 생각하였다(4월). 그러다가 (11월)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식물 표본과 식물학 작품을 없애려 했다.
*1770(58살) 그는 마담 나다이악에게 수고본을 되받아서 고백록(Confessions)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것에 대해 비밀스레 독서회를 가졌다.
그는 매일 같이 버크(Burke)를 만났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은 버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식어 버렸다. / “그는 자기 마음을 좌우하거나 자기 이해(理解, understanding)를 지배할 만한 아무 원칙도 갖고 있지 않으며 마음이 완전히 들떠 있다.” (295) [만났다는 근거가 없다. 루소가 언급한 인명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영.위키에는 “고백록”을 읽고 평한 것이라 한다.]
*1774(62살) 독일 작곡가 글뤽(Gluck)와 친교 관계를 맺고, 루소는 『마을 수호신(Le Devin du village)』을 위해 새로운 작곡을 하다.
산동에서 백련교(白蓮敎)의 우두머리 왕륜(王倫)의 난 발생
*1775(63살) 피그말리온(Pygmalion)이 코메디-프랑세즈(Comedie-Francaise)에서 상연되었고, 대성공이었다.
*1776(64살) 루소는 흄과 함께 파리를 떠나다. 흄과 루소 사이에 약간의 불화가 생기고, 이에 대해 각각은 영어로, 불어로, 상호의 슬픔을 표현하였다. / ㉭ 정조(正祖)(1776-1800)
*1776(64살) 1772년에 시작된, 대화록(Dialogue: Rousseau juge de Jean-Jacques), 이 해 완성되다. 루소는 수고본 원본을 꽁디약(Condillac)에게 보내다. /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La premiere promenade des Re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구성하다. (열 번에 걸쳐서 1778년까지 쓴다.)
루소가 떠나자 흄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느끼는 것이 전부 였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감수성은 내가 달리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고양되었다. 그러나 그의 감수성은 아직도 그에게 기쁨을 주기보다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옷을 벗었을 뿐더러 피부까지도 벗고 나서 드디어 이 격렬하고 거친 부대와 싸우다가 쫓겨난 사람과 같다.” (295-296) [그는 발가벗겨졌으며, 당시 그의 반대파는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1775(예순다섯)년] 12월 4일 그는 데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초대로 영국으로 갈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간단하고 비밀스럽게 파리를 가로질러 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1776년 초의 날들에 흄을 도로에서 만났다. 새로이 불쾌한 실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년 일찍이 그림과 관계처럼, 루소에게 흄은 단어 상으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신성한 의미에서 한 친구이다. 루소는 임시변통 수단에 맞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루소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우정은 다음의 이상에 따라서 이다. 그 이상이란 플루타르코스(Plutarque, Πλούταρχος, 46-125)와 세네카(Sénèque, Seneca, 전4-후65)처럼 그가 사랑했던 고대의 위대한 작가들이 가졌던 그런 이상이다. 그는 흄에게 유보없이 신임하였고 정성을 다했다. 그가 흄을 표리부동(fausset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가 결국 그를 공인된 적들의 반열에 속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는 그것에 대한 상처로 보다 더 잔인하게 괴로워 할 것이다. 50대 이후에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친구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미 친구가 되었던 자들과는 더 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성숙한 나이의 중대한 우정에서 그가 깨달았던 그 실망을 그는 잊을 수도 없었고 용서할 수도 없었다. - 메(Georges May), 루소(1961) 제1장 4절.> [상층의 인간들은 심층의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심층의 인간들은 상층의 인간을 이해하지만 대꾸하려 하지 않는다.] [인도주의자는 인문주의자와 과학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이야기를 해도, 인성에 관한한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다. (50ULD)
{파스칼(Pascal)은 여기서 제외해야 한다. “마음에는 이성이 전혀 알 수 없는 마음의 도리가 있다”고 말한 것은 루소의 방식에 잘 부합되는 것이다.(296)}
우리에게 신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근대 신교도의 대부분은 신에 대한 옛 논증을 무시하고 그들의 신앙의 근거를 인간성의 어떤 측면, 다시 말해서 경외심이나 신비감,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 영감, 느낌 등등에 둔다. / 종교적인 신앙의 이와 같은 변호법은 루소가 발명한 것이다. .../ “오, 부인! 나는 때때로 서재의 은밀한 곳이나 또는 손을 눈에 꼭 대고 있거나 컴컴한 밤이면 신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저쪽을 바라보시오! 땅밑에서 솟아올라 지구를 뒤덮은 모든 안개를 헤쳐 버리고, 이상하게 빛나는 자연의 모습을 바라 볼 때 나의 머리에서 모든 의심의 구름이 걷혀 버립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나의 신앙과 나의 신, 즉 나의 신에 대한 신앙을 되찾곤 합니다. 나는 신을 존경하고 신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현존함에 무릎을 꿇습니다.” (어느 귀족부인에게 보낸 편지, s.d.) (296-297)
“믿고 안 믿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나는 다른 진리와 마찬가지로 신을 굳게 믿는다” (297) [일반적으로 주지주의자들이 믿는 신을 이신론이라고 한다. 루소의 신은 자연 신인 셈이다.]
루소는 자기의 유신론(唯神論)을 크게 강조하였다. 하루는 손님인 성랑베르(생-랑베르(Saint-Lambert, 1716-1803)가 신의 존재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고 해서 파티에 나가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루소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나는 신을 믿소” 모든 면에서 루소의 충실한 제자인 로베스피에르도 이점에 있어서 그의 견해를 따르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의 “최고 존재에 대한 축제”는 루소의 전격적인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에밀 제4권 막간극으로 나오는 「사브와 교구의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은 루소의 신조를 가장 명확하고 기본적인 진술이라고 하겠다. ...(297)
“나는 이와 같은 규범들을 고귀한 철학적인 원천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지워 버릴 수 없은 특징으로서 기록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찾아낸 것이다.” (298)
“하늘에 감사를 돌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모든 가공할 도구(apparatus)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인간일 수 있다. 우리는 도덕을 배우느라고 우리 삶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적은 대가(代價)로 인간적 견해의 거대한 미로 속에서 더욱 분명한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이성은 이기심을 억제하지만 본연의 감정(feeling)[le sentiment]은 공동의 이익에 대하여 봉사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을 지니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따라서 한다.” (298)
내가 보기에는 심정(heart)[le coeur, 심성]을 찬양하고 이성(理性)을 부인하는 것은 진보라고 볼 수 없다. (299) [러셀의 생각이 짧다. 루소는 오성이 행하는 것이 도덕과 형이상학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고, 심성이 있어야 이성도 작동하는 것이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인(natural man)의 가공적(架空的)[가설적]인 성품은 제외하더라도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심정의 정서를 토대로 한 확신을 갖는데는 두 가지 반대가 있다. 첫째는 그와 같은 확신은 사실이라고 간주할 근거가 전혀 없으며, 둘째로 심정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므로 여기서 비롯된 확신은 개인적인 주관(主觀)에 지나지 않는다[인지상정(人之常情)을 생가하자]. (299) [가공적이라기보다 실재적이다] - [러셀도 속 좁은 이성만 생각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간사의 본성임을 알겠나? 심성은 공감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러셀이 벩송을 곡해하고 비판했지. - 공감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생명, 도덕, 공유화(공동체)의 영역이지... ]
불교에서는 자연의 빛은 신의 존재를 계시하지는 않고,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옳지 않다고 선언한다. (299) [러셀이 중국을 갔다 온 것이 맞기는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사실 내가 거기에 있을 때 유럽에서 불교에 관하여 네팔불교와 소승불교가 알려졌어도 중국(대승)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벩송도 라틴어로 쓰인 네팔불교의 번역을 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 불교에서 온 세상을 비춘다(조照) 것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심성의 밝음, 깨달음을 의미한다.]
루소의 정치론은 1762년에 나온 그의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1762)에 서술되어 있다. ... / 그의 학설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치사는 하고 있지만, 대체로 전제주의 국가를 옹호하고 있다. (300) - [러셀은 군주(전제)의 독재와 인민의 지도(독재)를 구분하지 않으려 한 것 같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두려워했을 것 같다. 레닌도 두려워했다고 하지만 역사의 발전을 믿었다고 한다. - 현재 울나라에서 인민독재를 인민재판 비슷하게 인식하는 것도 앵글로색슨의 관점에 쩔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굴종과 예속(영혼 없는 공무원)의 신민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민의 일반의지의 결정은 인민독재처럼 보이지만 (직접)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50TKJ)]
“나는 한 자유국가의 시민이오, 한 군주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공무(公務)에 대한 내 발언의 영향력이 보잘 것 없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투표하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공무에 대하여 배우는 일을 나의 의무로 간주하게 되었다.” (300-301)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그를 얽어매는 사슬이 따른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이라기보다 종으로 더 많이 남아 있다.” (301) [영어 번역이 좀 이상하다.]
그의 “사회계약설”의 개념은 처음에는 로크의 그것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곧 그것은 홉스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01) [억지다. 홉스에서 로크로 정도와 루소의 계열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영국에서 유신론은 무신론의 반대개념이며 크리스트교를 말한다. 루소에서 유신론은 자연신론에 가깝다. 즉 루소는 홉스와 로크에 종교성에서 차히가 있다]
“이 문제는 전 공동체의 힘으로 개인과 각 단체의 재산을 외부의 침범에서 방지하고 보존하는 사회를 – 이곳에서 각자 자기 자신을 전체와 결합시키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며 전과 다름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계약설“의 기본 과제이다.” (302) [홉스와 로크의 다른 점이다. 인민은 자기 권한을 위임하지 않는다. 주권이란 인민주권이다.]
“각자가 그의 모든 권리와 동시에 각 단체의 온갖 양보를 전체적인 공동사회에 돌리는데 있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양보함으로써 모든 조건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남에게 짐이 되게 하면 이득이 되지 않는다. / 양보는 남김없이 해야 된다. 만일 각자가 어떤 일정한 권력을 보유하게 되면, 그 개인들과 인민 사이를 판결할 공공(公共) 권위가 없으므로 각자가 자기 입장에 머물러 있게 된다. 누구나 무슨 일에 있어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이 경우에 자연 상태가 지속될 것이므로 사회는 자연히 무용지물이 되거나 전제군주적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302) [사양지심 예지단야(辭讓之心 禮之端也) - 맹자의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오는 사단설(四端說)]
나중 장(章)에서 .. 그는 말하기를 사회적인 계약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절대적인 통치력을 그 단체에 부여하지만, 역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래의 권리를 누리게 된다고 한다. / “통치자(sovereign)는 그 공동체의 신민들에게 불필요한 구속을 강요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조차 없다” (302)
사회 계약론은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자가 자기의 모든 힘을 중의(衆意)[일반의지]의 최고 지도하에 공공(公共)의 것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자격으로 각자를 전체와 불가분(不可分)의 것으로 대하는 것이다.” (302-303) [부분이 아프면 몸 전체도 아프다.]
사회 계약론에서 나타난 용어 “일반의지(general will)”의 개념은 루소의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통치자는 현재의 존재에 힘입어 언제나 앞으로 있어야 할 존재이다.” .. // ..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도 복종하도록 강요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자유를 누리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305)
자유를 누리도록 강요된다는 견해는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갈릴레이 시대의 “일반의지”[지식일반]는 분명 반코페르니쿠스적(anti-Copernican)이었다.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서 그의 학설의 철회를 강요당했을 때 자유를 누렸을까? 죄수가 옥에 갇히는 것도 자유를 누리도록 강요되는 것일까? 바이런(Byron, 1788-1824)의 시 「해적(The Corsair, 1814)」을 생각해보자. / 깊은 바다의 즐거운 물결 위로, / 생각은 끝없이 치달려 자유를 누리노니. (303-304)
루소의 사유재산에 대하여 로크(Locke)와 그의 제자들의 특징인 그런 심오한 주장은 찾아볼 수 없다. “국가는 국민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모든 재산의 주인이다.” .. 제3권1장에 통치자의 본분 .. “만일 통치자가 통치하려고 하거나 행정관리가 법률을 제안하거나 국민이 복종하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질서 대신 혼란이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국가는 전제정치가 되거나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은 어휘의 차이는 있지만 몽테스키외와 견해가 일치되는 것 같다. (304)
나는 이제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반의지”의 학설에 이르렀다. .. / 그러나 한편 우리도 무엇이 그 뜻의 표시 – 눈에 보이는 – 인지 알기 어렵다. 그리하여 루소는 우리를 어둠 속에 놓아둔다. “일반의지”는 언제나 올바르고,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다같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지와 “일반의지”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304-305)
“일반의지”가 언제나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여러 시민들의 자기 이익(self-intrests) 가운데서 공통되는 것이므로 공동체에 가능한 한도의 자기 이익에 대한 가장 큰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 .. “예를 들면 ‘모든 사람들의 의지와 일반 의지 사이에는 때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후자는 오직 일반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전자는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어서 개별적 의지의 총체만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지는 서로 멸망을 초래하고 일반의지는 그 차이들의 총체로 남는다” (304-305) [안중근의 글씨들 중에 있고, 서울 남산에 비(碑)에 새겨져 있다. /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는 공자가 자로에게 한 말씀으로 논어(論語), 14장 「헌문편(憲問篇)」에 나온다.]
“그러므로 만일 일반의지가 표현 될 수 있으려면 한 국가에 부분적인 사회가 존재해서는 안 되며 각 국민은 단지 자기 자신의 소신만 믿어야 한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실로 리쿠르고스(Lycurgos)에 의해 세워진 독특한 제도였다” (305)
한편 그는 큰 나라의 정부는 작은 나라의 정부보다 강해야 하며, 정부를 통치자가 제어할 필요가 더 많다고 한다. 한 정부의 각료는 세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즉 개인의지, 정부의 의지, 일반의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의지는 점점 더 강화되어야 하지만 보통 점점 더 약화되어 가고 있다. 그는 다시 “모든 것은 남들 위에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정의감과 이성의 소리를 뺏어 버리려고 공모하고 있다.”고 말한다. (306-307) [일반의지의 약화는 정의도 이성도 상실되는 길로 간다.] - [이명박근혜의 길이며, 적폐청산의 과제가 되고 있다.]
루소가 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우리가 이미 찾아본 바와 같이, 옛날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직접 민주제(direct democracy)를 의미한다. (307)
이와 같은 제약으로 말미암아 넓은 지역에서는 전제정부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약이 있지만 그의 민주주의 옹호는 분명히 프랑스 정부로 하여금 이 책에 대하여 완강한 적의를 품게 하였다. (308) [분서/소각(오토다페, un autodafé)를 당하였다고 한다] `
사회 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에서 대부분의 지도자들의 바이블(Bible)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의 운명이 그렇듯이 이 책도 분명히 별로 정독되지 않았으며, 많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도 아직 얼마 이해되지 않고 있다. (308) [러셀의 오해, 책은 구약의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길지도 않고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지도 않다. ] [그리고 이 책은 사회철학의 필독서이며 변혁가들은 정독하고 있다. (50TMI)]
[평가] 그의 철학은 헤겔(Hegel, 1770-1831)에 의해 프러시아의 독재 정치를 방어하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 사실상 그의 첫 열매는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마흔]의 통치였다. 러시아와 독일의 독재는 어느 정도 루소의 가르침의 결과이다. (308) [소련의 스탈린도 나치의 히틀러도 루소와는 별개이다. - 루소는 심층의식인데 비하여 헤겔은 상층의식이다. 그런데 헤겔은 일반의지를 절대지로 환원하여, 역사 철학 속에서 국가(이념)를 창안하게 될 것이다. (50TMI)]
(10:04, 50TLC) (10:21, 50TMI) (11:15, 50ULD)
***************************참조
# 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
3.1 LIVRE I
3.1.1 Chapitre I « L’homme est né libre et partout il est dans les fers ».
3.1.2 Chapitre II – Des premières sociétés
3.1.3 Chapitre III – Du droit du plus fort
3.1.4 Chapitre IV – De l'esclavage
3.1.5 Chapitre V – Qu'il faut toujours remonter à une première convention
3.1.6 Chapitre VI – Du pacte social
3.1.7 Chapitre VII : Du Souverain
3.1.8 Chapitre VIII : De l’État civil
3.1.9 Chapitre IX : Du Domaine réel
3.2 LIVRE II
3.2.1 Chapitre I : Que la souveraineté est inaliénable
3.2.2 Chapitre II : Que la souveraineté est indivisible
3.2.3 Chapitre III : Si la volonté générale peut errer
3.2.4 Chapitre IV : Des bornes du pouvoir Souverain
3.2.5 Chapitre V : Du droit de vie et de mort
3.2.6 Chapitre VI : De la loi
3.2.7 Chapitre VII : Du Législateur
3.2.8 Chapitre VIII, IX et X : Du peuple
3.2.9 Chapitre XI : Des divers systèmes de Législation
3.2.10 Chapitre XII : Division des Lois
3.3 LIVRE III
3.3.1 Chapitre I: Du gouvernement en général
3.3.2 Chapitre II: Du principe qui constitue les diverses formes de gouvernement
3.3.3 Chapitre III: Division des gouvernements
3.3.4 Chapitre IV: De la démocratie
3.3.5 Chapitre V: De l’aristocratie
3.3.6 Chapitre VI: De la monarchie
3.3.7 Chapitre VII: Des gouvernements mixtes
3.3.8 Chapitre VIII: Que toute forme de gouvernement n’est pas propre à tout pays
3.3.9 Chapitre IX: Des signes d’un bon gouvernement
3.3.10 Chapitre X: De l’abus du gouvernement et de sa pente à dégénérer
3.3.11 Chapitre XI: De la mort du corps politique
3.3.12 Chapitre XII: Comment se maintient l’autorité souveraine
3.3.13 Chapitre XIII: Suite
3.3.14 Chapitre XIV: Suite
3.3.15 Chapitre XV: Des députés ou représentants
3.3.16 Chapitre XVI: Que l’institution du gouvernement n’est point un contrat
3.3.17 Chapitre XVII: De l’institution du gouvernement
3.3.18 Chapitre XVIII: Moyens de prévenir les usurpations du gouvernement
3.4 LIVRE IV
3.4.1 Chapitre I: Que la volonté générale est indestructible
3.4.2 Chapitre II : Des suffrages »)
3.4.3 Chapitre III : Des élections
3.4.4 Chapitre IV : Des comices romains
3.4.5 Chapitre V : Du tribunat
3.4.6 Chapitre VI : De la dictature
3.4.7 Chapitre VII : De la censure
3.4.8 Chapitre VIII : De la religion civ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