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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3. 천개의 고원(1980)에 관한 대담(Entretien sur Mille Plateaux, 1980)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39-52(P.250)
I. De l’Anti-Oedipe à Mille Plateaux 9.
1. Lettre à un critique sévère 11
2. Entretien sur L’anti-Oedipe (avec Félix Guattari)24
3. Entretien sur Mille Plateaux 39-52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이 책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도대체 무엇을 쓴 것이냐?
들뢰즈가 벩송의 물질과 기억을 중요시 했다는 점에서 시작해보자. 이 저술은 기억을 의식 차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를 설명한다. 기억은 의식의 총체이면서 현실화의 노력이며 미래에 예상참여하는 활동력이다. 이 동력은 무엇이라고 개념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공간화될 수 없고, 신체의 어떤 부위에 위치화할 수 없으며, 고체도 아니고 정지도 아닌 점에서 흐름이며 진동이다. 그럼에도 기억이라고 표현한다.
기억은 벩송의 언어학적 의미에서 실사(substantif)에 상응한다. 물론 벩송은 실사라는 개념은 실체처럼 대상화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 개념이 고정이 아니라 작동하는 권능이라는 점이다. 벩송은 명사를 실사라고 하지만, 우리는 실사로서 세 종류가 있다고 본다. 명사(생명체)로서 실사, 형용사(노랗다)로서 실사, 실행으로서 실사(움직이다)이다. 이 셋을 상층과 심층이라는 위상적 도식에 비유하면, 동사는 심층, 형용사는 표면, 명사는 상층이다. 이 셋에 하나는 더 보태면 집합론에서 여집합 파이(φ)와 닮은 아페이론이 있으며, 이 또한 실사이며, 고대 그리스 철학의 휠레에 닮았다. – 이점에서 벩송의 사유가 고대 유물론에 가깝다 데모크리토스의 사고는 유물론이 아니라 원자론이다. - 이 네 가지의 활동성(역동성)의 총체가 벩송의 기억이라 본다. 추억들이란 이 기억 총체 중에서 이 세 가지 중에서 단면, 또는 어떤 측면, 또한 어떤 정지의 부분일 뿐이다. 기억의 총체는 철학의 문제이다. 그 총체의 내재성으로 흐름이 무의식이다. 의식의 총체에서 무의식은 실사로서 표면에 표출되기 직전까지 활동하는 것이며, 이로서 의식 내재성을 무의식이라고 하고, 현재의 작동과 미래에 참여하려는 힘과 노력을 기억이라 부르자.
기억의 활동성(역동성)이 생명체 전체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 과정이 지구 역사 45억년에서 35억년의 활동성이다. 35억년의 기억의 흐름은 현재에도 작동 중이다. 휠레의 활동으로부터 지구의 움직임을 포함하여, 휠레가 ‘움직이고 있는 중’인 것이 파이(φ) 또한 무의식의 흐름(아페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35억년 전에 생겼다고 하는 생명체는 자기의 모습을 거의 무한정하게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인 것이 현실에서 생명체의 종들의 전부인 셈이다. 무수히 많은 가지들을 포함하는 다발들 중에서 한 줄기가 인간이란 종도 있다.
기억 총체의 흐름에서 효과화하는 과정에서, 방식(양태)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겉모습에서 색깔, 온도 등으로 드러나는 감정과 감각은 형용사라 하자. 이는 변화의 실사(형용사)를 이룬다. 그리고 생명체가 각각의 고유한 형태와 모습을 가진 것을 명사(형상의 실사)라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세 가지 실사 이외에 무의식의 총체(인, 철, 마그네슘 등 무기물을 포함하는)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자신의 과거 기억을 되돌아 볼 수 있는 탐구와 연구를 했고, 게다가 이질적 반복이지만 실험과 검증을 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도 생명역사 35억년 중에서 겨우 200여년 정도이다. 지금까지 탐구에서 그나마 연구가 조금 되었다고 여기는 것이 신석기 마지막으로 빙하기가 끝나는 1만년 전으로 한다. 인간에 대한 명사와 형용사는 아직도 규정되지 않았다. 인간을 슬기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쩌면 도구적 인간이 무기와 도구를 구별하면서 사용하고 개념으로 만드는 시기이며, 기껏해야 기원전 1000년 경으로서 철기문화의 시작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동일물을 생산하는 시기에 관념의 고정성(페라스)을 사고 했다고들 한다. 그런데 무의식으로서 기억은 여전히 흐른다.
도구적 신체를 만드는 습관적 기억은 신체의 곳곳에 잘 갖추어져 있다. 손의 엄지 손가락이 다른 동물과 특히 다른 기억 형태를 만들었다. 형용사적 변화에 대해서도 어느 시기를 절단하여 분류와 구별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이 얼마되었을까? 여기에서 일상적 기억 또는 통상적으로 생활에 맞게 변화에 대한 단면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개체 또는 개별에 대한 도구적 이해를 넘어서 거푸집 통해서처럼 동일한 도구를 만들면서 명사적 대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 대상을 떠올리는 방식은 습관적 기억보다 추상적인 것으로서 동일 반복 가능한 추억을 사고(기억)이라 할 것이다. 동일반복에서 관념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자.
4가지 분류에서 흐름의 기억과 추상의 사고(기억, 관념)라는 두 위상 부분을 토파내면, 신체적 추억들과 도구적(추론적) 사고(개념들)가 남는다. 철학사에서는 이 두, 신체적이고 추론적인 추억-기억 활동(사유활동)을 지성 또는 오성의 역할로 다루는데, 이는 두 추억-기억 활동은 추억들의 조합에 가깝다. 달리 표현하면, 신체적 추억들과 사고의 추억들(개념들)이다. 사고의 추억이 관념으로 발전했다면, 신체적 추억은 언제나 흐름의 무의식의 작동의 연관 속에 있다.
들뢰즈가 이런 구분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네 가지 위상적 구분을 플라톤의 선분에 비유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선분의 비유는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 벩송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DI, 2장), 따라서 들뢰즈도 인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들뢰 그가 가타리를 만나면서 무의식의 생산적 작동이 실재하며 또한 어마하게 거대하며 부정할 수 없는 권능으로 현존하며, 현실과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사유한다. 이런 사유를 심층의 사유라 한다. 그런데 왜 생명체에서는 심층의 권능은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신체적 추억과 추론적 사고가 우리 인간들에게 지배적인 것으로 되었는지를, 간단하게 파악한 것 같다. 즉 도구적 지성 또는 추론은 공간적 사유의 유용성과 편리성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이고, 이를 습관으로 지니고 사회에서도 관습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이 익숙함을 신앙처럼 받드는 것이 변증법이며, 도식상으로 네 가지 중에 하나를 버린(생산하는 무의식) 삼위일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그 일체의 꼭대기에 한계(페라스)를 절대적 실체로 놓고서 그 실체로부터 거꾸로 현실과 미래를 공간상으로 펼쳐서 헤아리고 계산하며 예측할 수 있다고 보는 지성(속좁은 이성)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성은 추상적 사유 체계를 만들고, 이의 도움으로 사회와 국가의 권력 체제는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두목의 체계에서, 국가 그리고 제국으로 변형한 것이다. 이런 국가 또는 제국의 억압과 강압은 무의식을 배제하였고(칸트의 휠레 배제), 심지어는 악마화 하였다. - 휠레의 배제에서 파쇼가 등장한다 - 체제상으로 상층은 심층에게 공포를 심어서 (사유) 체계와 (지배) 체제에 복속하거나 투항할 것을 강제하였다. 기억의 총체로서 무의식은 이에 저항하고 봉기하는 사건들을 죽 생산하고 창안하여 왔으나, 관념의 기록들이 실사의 입말을 묻어 버렸다. 아마도 들뢰즈는 가타리를 만나서 무의식의 무한한 또는 굉장한 생산하는 권능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무의식이 생산적 권능이지, 타나토스라는 것이 없다는 것도 자연의 권능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이런 권능이 인류에게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도덕론에서 니체를 통해서 발견하고 확신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의 넘쳐나는 생산하는 권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 즐겁고 유쾌한 삶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두 철학자는 아페이론의 흐름을 ‘노마드’라고 부르기도 하고, 리좀, 다양체, 탈주선이라고도 할 것이다.
무의식의 생산적 권능은 부정성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분명하게 변증법은 싫어(détester)한다고 하며, 절대(자)라는 관념은 추론적 개념이나 착각을 넘어서 망상(또는 차란)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제 두 철학자가 서로서로 무의식의 긍정적 생산 또는 내재적 기억에 의해 창의성이 발현된 경우들을 그들 나름대로 이야기해 보았을 것이다. 제1장이 리좀이다. 생명체의 기억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러면 왜 2장에서 프로이트가 분석한 늑대인간을 들추어 냈을까? 그들 둘이서 작업한 앙티-외디푸스의 4장에서 정신분석학 대신에 분열분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미 정신분석학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명사의 실사 개념이 하나라고 하게 되면, 그 하나가 마치 절단되어 단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깨어버리고자 한다. 이러한 하나로서 개인이라는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상층의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개인주의라는 말도 상층의 지배 수단이다. 변증법에서 추상의 하나로서 신을 만들고 그 추상관념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그에 빌붙은 성직자를 만드는 것과 같이, 하나를 섬기는 지식인, 하나를 님으로 믿는 신앙자의 고백을 듣고 검열하는 정신분석가를 비판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또는 모든 인간은 종들의 내재성을 공감하고 공명하는 것이 먼저이다. 삶이 먼저다. 총체적 기억은 누구에게나 들어 있어서, 개인을 하나로 쪼개는 것은 이미 사물 또는 생명 없는 물체로 다루는 것을 전제로 하며, 쪼개진 개인과 개인사이의 다시 연결하는 방식도 물체와 물체 사의 조합(레고 작업, 원자로적 작업)으로 간주하여 개인 속에서 무의식의 거대함을, 기억의 굉장한 힘을 무시 또는 무화시키는 것이다(알라딘의 마술 램프에서 등장하는 검은연기 실사, 마왕). 모든 생명체는, 물체의 결합과 달리, 겉으로는 여전히 물체처럼 떨어져 있지만 세 가지 실사뿐만이 아니라 무의식(기억총체)의 파이가 작동하여 공감과 공명의 파동과 결이 연관을 맺고 있다. 하나라는 절단되고 잘려진 개체로서 생명체라는 것은 없다. 이런 문제의 제기는 이 책 속에서 넘쳐난다.
상층은 이미 표면과 단절로서 심층과는 연관조차 갖지 않는다. 단지 심층의 탈주선(용출선)을 두려워하여, 인민에게 먼저 공포와 고통(고독)을 심는 작업을 한다. 인민의 생산하는 욕망을 가로막는 교육제도도 마찬가지로 그런 행태를 취하고 있다. 푸꼬는 감옥, 병원, 병영을 분석하면서, 이런 상층으로 향하는 속좁은 이성 또는 지성이 만들어 놓은 사회체가 점점 광기로 되어가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광기가 국가에서 제국으로 변형을 정당화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내몰기를 제국이 정당화한다. 이런 사회체의 억압구조와 광기를 일제를 이어서 제국이 우리나라에 심어 놓았다. 이러한 사고의 습관적 추억은 일제의 잔재이며, 일본이 독일 철학에서 절대자의 신앙을 우리에게 심은 것은 일부이며, 넓게는 전반적인 법률 구조를 심었고 그 속에서 사시를 통과한 자들은 당연하게 물들 수밖에 없다. 윤석열, 최재형, 이만희, 전광훈 등도 용출선을 배제하고 죄악시한다. 박정희군부시절 인혁당과 남민전이 처형을 당해야 했고, 현 정부에서 이석기가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이들이 민주화과정에서 항거하지 않고 독방에서 공부한 것이 사회체에 포로라기보다 투항한 자들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심층의 생산성, 역동성, 되기, 탈주선 등의 용어를 제기하면서, 철학을 또는 학문을 인류사에서 - 철학을 탈레스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 – 사건들의 내용과 실재성을 펼쳐 보인다. 들뢰즈는 철학을 상층에서 추론을 적용하기보다 심층에서 사유를 발생과 생성하는 쪽에 서서, 어떤 경우에, 어디서, 누가, 어떻게 라는 드라마적 방법으로 전개한다. 이 책에서는 연대순이 아니지만 그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아래와 같이 배열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가 빨라질수록, 무의식의 표출이 더 많은 경우들이 생기고, 더욱 짧은 기간에 용출들이 많아진다. <덧붙인다면 1953년 디지털, ... 2015 스마트폰 ... 2019 코로나 펜데믹... >
저자들은 시대 순서의 의미보다, 평면들의 다양성을 보라고 할 것이다. 추억이라는 무수히 많은 평면들 중에서 특이하게 표면으로 올라온 평면이 고원이다. 이런 고원들 사이의 통로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기억의 총체로서 무의식이 생산하는 권능을 발휘할 때 나올 수 있는 사건들이 있다. 사건들이 그 시대의 집약적 문제거리라기보다, 시대에 여러 문제거리들 중에서 이 시기에 나타나는 특이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1730년에 왜 여러 가지 되기(이미지)들이 등장했을까? 나로서 도구로 등장만큼이나 신체의 무의식의 표출은 강했기 때문이라 여긴다. 이 시기 도구의 새로운 발명의 시기이다. 그만큼이나 신체의 역능이 다양하다는 것이 생성될 수 있다. - 2019년 12월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은 단지 인간이 도구의 사용에 의해 지구를 피폐시킨 것에 대한 반성만이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되기(생성)이 출현하고 있는데 내가 모를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아무리 미세한 생명체도 자기의 다양체를 발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게 될 것이다. 우리 신체는 죽어서 미생물들에 의해 분해되는 것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이 질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신체가 쇠하여 질병에게 완전히 지게 되면 세상을 마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삶이 먼저라고 할 때, 삶은 심층에서 무의식의 총체와 더불어, 신체, 사고, 추론의 추상으로 과정을 함께 이루는 것이다. 이제 추상의 추론으로부터 교육하던 것을, 무의식으로서 기억의 총체로부터 가르칠 때가 되었다. 신은 35억년동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자연의 자기 생산, 무의식의 창조적 생산이 35억년을 이끌어 온 것이다. 어쩌다 이 기나긴 지구와 생명 역사에서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관념인 신, 그 신에 매여 인간이 광기에 빠져서 배제와 배척을 만들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분단을 당연시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도 남의 신에 의해서 말이다. 이제 쓰여진 글(규약)보다 입말을 통해 흐르면서,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새로운 삶의 창발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인민은 그 역할을 실행하는 작동이며, 따라서 전쟁기구에 대항하는 전쟁기계이다. 정신분석학, 규준(코드), 쓴 글에 매인 자들을, 자연을 배우고 자연과 함께 하도록, 자연 속으로 하방 해야 할 것이다.
거울에 먼지를 잘 닦자는 신수(神秀, 606-706)선사에 대해, 해능(慧能, 638-713)선사의 기억총체로서 거울에는 먼지가 없다는 비유는 유효하다. (3:40, 54RKC: 4:35, RK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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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 이상: {책들뢰1990담판협정21PP13B} 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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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뢰1990담판협정21PP13
I. 3. 천개의 고원(1980)에 관한 대담(1980)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39-52 (P.250)
- 3인의 대담자와 들뢰즈: 데캉(Christian Descamps, 1944-)CD, 막기오리(Robert Maggiori, 1947-)RM, 에리봉(Didier Eribon 1953-)DE, 해방(Liberation), 23 oct. 1980.
대담자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CD1에서 의 책의 전반적 내용에서 고원들이란 사건들을 주제로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CD2에서 책이 표현이나 분석이라기보다 인상을 보인 점에서 유명배우의 방식이 아닐까? 그만큼이나 즐거운 지식을 위한 도박(내기)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RM1. 구조주의 언어학과 다른 방식으로 당신들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CD3. 물리학 등 다른 학문의 용어를 빌려와 얼굴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은유가 아닌가?
DE1. 역사학의 풍경과 달리, 생성의 “지도그리기”는 고원들 사이에 통행로가 있는가?
RM2. 고원들을 이어줄 길들이 있을까? 누더기의 이음일까? 그럼에도 철학적 체계인가?
DE2. “지도그리기”의 영토에서 국가는 홈파인 공간을, 전쟁기계는 매끄러운 공간을 ... 그런데 탈주선이 필연적으로 해방적인 것이 아니잖아요.
DE3. 제목에서 날짜가 허구[우화]라면, 누구들이 지도를 정립 할 것인가?
천개의 고원(1980)은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말하는 지혜와 지식의 책에 속할까? 나로서는 철학책에 속한다고 보며, 그렇다고 인류학, 사회학, 음악, 언어학, 문학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수필 같은 책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동에는 의식의 심층이 작동하여 여러 변형들과 사건들을 창조하는데, 이 책은 그 심층의 무의식이 분명하게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무의식으로서 활동을 기억이라 한다면, 기억이 만들어낸 추억들은 무수히 많지만, 사건으로써 또는 시대 상황으로써 인간에게 주의를 끈 것을 시기와 날짜를 꼽아서 표현한 것이다. 표현이라기보다 사건의 인상을 메시지로서 이야기하는 간접화법의 대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라는 무의식에 층위가 없지만, 서술하기 위해 층위들을 구별한다면 어떤 층과 다른 층 사이의 구분선이, 지질학적 표현으로, 분명하게 있을 것이고, 그것을 표면에서 거꾸로 들어가 보면 층위의 구분(단절)이 하나의 평면으로 되어 있다고 하기보다, 지질의 변동처럼 단층과 새로운 층의 솟아남도 있을 수 있듯이, 층위들을 하나의 순서로 배치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저자들은, 층위들에 있는 유물들의 성격에 따라 배치를 한 것 같다.
사회체라는 관점에서는 층위들의 이질적 차이를, 마치 사회의 평면을 구성하는 방식처럼 또는 국가의 형성과 변형처럼 연관시킬 수도 있다. 평면에서 홈을 내는 방식에 따라 국가 또는 지배 체제를 구성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에 저항하는 흐름도 다른 양태를 지닐 수 있다. 매끈한 공간에서 작동하는 전쟁기계는 홈패인 공간을 통해 지배하는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방식을 창안해 내려 한다. 새로운 방식을 또 다시 재편하여 동일한 체제를 만들려는 외적인 힘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두 저자는 창안과 창발의 노력에서 삶의 진솔함과 실재성이 있다고 여긴다. 구체제는 고착되고 정태적이 되어, 자연의 본래 모습 즉 자연의 권능을 억압하고 강제하려 한다. 그러한 강압적 방식이 지성의 도구적 입장과 근친성과 연합성을 이루며 지배를 강화한다. 인간의 자유, 인민의 해방은 강압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권능을 실현하는 방향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나온다. 이 과정은 공간적 사고에서보다 지속적 사유에서, 개념의 원자와 파편을 통한 조합하는 조직을 이루기보다, 감화의 진동과 결을 통한 음악적 조화와 혼성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국가 그리고 제국의 조직을 무너뜨리고 노마드의 길을 여는 탈주의 길이 가능할까? 질문자 중에 에리봉(DE)은 회의적인 것 같다. 어쩌면 답은 간단할 수 있다. 위계의 사회제도가 아닌, 삶의 터전의 활성화의 방식을 먼저 사유하고 활동하면 될 것이다. 사는 것이 먼저이며 철학은 다음이다. 삶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까지이지, 삶에서 도구를 통한 이익을 확대 생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삶의 양식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편리와 유용성의 행태에 앞서, 자연과 생태와 함께하는 삶을 사유하면서 행위를 창안해 나간다면 바꾸지 못할 것도 없다. 인간은 자기의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 그리고 지구의 과거도 탐구할 줄 알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과거의 두께에서 만큼이나 유추하면서, 새로이 창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동물이다. 만들어진 것을 다루는 사고를 먼저 기준(코드)로 둘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면서 사유하는 과정을 그리고 방향을 다양하게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삶도 8천만과 재외 8백만이 함께, 이 자연의 토지와 생태를 잘 탐색하며 탐구하여, 새로운 모습을 만든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소중한 임무일 것이다.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라고 소리 내어 운율을 맞추면서 조율하여 나간다면, 음악의 조화와 공명을 이루듯이 우리 스스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실현할 수 있고, 그 힘이 인민들의 입말과 노래로서 퍼져서 함께 즐겁고 유쾌하게 지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54RLB)
***목차
I. De l’Anti-Oedipe à Mille Plateaux 9.
1. Lettre à un critique sévère 11
2. Entretien sur L’anti-Oedipe (avec Félix Guattari) 24
3. Entretien sur Mille Plateaux39
# I. 3. 천개의 고원(1980)에 관한 대담. 3. Entretien sur Mille Plateaux39-52
- 3인의 대담자와 들뢰즈: 데캉(Christian Descamps, 1944-), 막기오리(Robert Maggiori, 1947-), 에리봉(Didier Eribon 1953-), 해방(Liberation), 23 oct. 1980.
CD1. – 따라서 당신들의 천개의 고원(1980)이 어떻게 배열[배치]되었어요? 이 책은 단지 전문가들에게 말 거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이것은 용어의 음악적 의미에서 다양한 선법(divers modes)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본질들을 전개했던 장(章)들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상층을 구축한 것이 아니다]. 요약해 보면, 1914년, 그것은 전쟁의 해이고 또한 「늑대인간」의 정신분석이 있던 해이다. 1947년, 아르또(Artaud, 1896-1948)가 기관없는 신체(CsO)를 만난 해이다. 1874년, 도르비이이(Barbey d’Aurevilly, 1808-1889)가 단편 소설을 이론화한 시기이다. 1227년, 징기스칸(Gengis Khan, 1162-1227)이 죽은 해이며, 1837년은 슈만(Schumann, 1810-1856)의‥…. 이 날짜들은 여기서 사건들이며, 어떤 진보로 표기되어 있는 연대표 없이도, 주목할 만한 표시들이다. 당신들의 고원들은 우발사고들로 가득 차 있‥…. (39)
그것은 깨어진 고리들 일체와 같다. 각각은 다른 것들 속에 침투할 수 있다. 각 고리 또는 각 고원은 자기의 고유한 기후(氣候, 기상氣象)를, 고유한 음정과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개념들로 된 책이다. (39)
반대로 우리는 사물의 사정들에(aux circonstances) 관심을 갖는다. 어떤 경우에,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등? (39)
아마도 사람들은 사물들의 현존, 인격들 또는 주체들의 현존을 잘못 믿고 있는 것 같다. 천개의 고원이란 제목은 인물[인격]들도 사물들도 아닌 이런 개별화들에 귀착한다. (40)
CD1-m. - 주역의 효들에 대한 의미와 내용을 6겹으로 겹쳐서 설명할 때, 하나의 고리가 형성될 것이다. 이 고리들을 물밑 8쾌와 수평위 8개를 겹치면 64괘 인데, 그 속에서 분자와 같은 것이 효(爻)로 볼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64괘중에서 흥미있는 예시로서, 이 책에서 14장 즉 14괘를 설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것을 먼저 드러낼 수 있었는지는 지구와 생태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전쟁, 사회의 투쟁과 전투 등에 따라 달리 드러났을 뿐일 것이다.
2017년의 촛불을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괘로 볼 수 있듯이 2019년의 코로나의 쾌는 전지구적이다. 이 전지구적 생태계의 변역(變易)에 대해 온갖 이론과 해석, 그리고 분석과 설명들이 난무한다. 인간의 언제나 생명체에 대해서는 한치 앞은 내다볼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비결정론이 있기에, 가상적 예언과 예견이 판을 친다. 준안정을 기다림은 조신과 조심이다. 이에 비해 창조적 권능을 지닌 젊은이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
2019년 12월 30일, 비선형계의 확장: 생태계 – 이는 벩송이 창조적 진화 3장에서 수류탄의 터지고, 그 조각이 또 터지고 그 조각이 또 터지는 과정이 생명(의식)의 진화과정 또는 전개과정으로 설명한 예에 비유할 수 있다. 비유에 속지 말자. 이는 다발과 그 어느 한 가지(주역의 살, 서죽筮竹)의 비유에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사회체에서 도덕적 행위의 양태들에 옮겨 보면, 주사위 놀이와 닮았다.
2020-2021년에 우리 땅에서 문제는 여러 톱니바퀴들 중에서 대선정국에 맞물려 있는 톱니가 있는데, 크게 보아 두 바퀴가 있다. 하나는 질병의 방역, 다른 하나는 부동산 문제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방역으로 위상을 유지하고 있고, 다음 대선정국에서 승계와 새로운 계책 사이에서 어느 바퀴가 더 많이 맞물려 돌아갈지는 아직은 모른다, 생명계의 현실은 여전히 비결정론이다. 인간도 그런 종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들뢰즈가 드라마 방법을 말할 때, 어떤 경우, 어디에서, 언제, 누가, 어떻게 등에 관심을 말한다. 우리들이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54RKJ)
CD2. – 오늘, 일반적으로 이 책은 – 특별하게 이 철학적 책은 – 낯선 상황에 있다. 한편으로 영광의 이인승자전거가 시대의 분위기로 세워진 ‘책 아닌 것(non-livres)’으로 유명하게 한다[그래도 책이고 애벌레들이 우글거린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일종의 무기력한 표현의 이름으로 작업하는 분석을 거절하는데 참여한다.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는, 중요한 것이 표현이라기보다 인상(limpression)이라고 하며 앞서나간다. 하나의 철학책, 이것은 어려운 책이기도 하고, 동시에 또한 완전히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며, 즉 그것을 필요로 또는 갈망하는 한에서 엄청나게 개방된 도구상자이다. 천개의 고원는 인식의 효과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매 주마다 우리 시대의 걸작들을 발견한다는 풍문(소문)들 가운데서, 그 작품으로 여론의 효과 즉 인기끌기작업의 효과를 만들지 않고서, 어떻게 그 책을 소개하는가? 만일 사람들이 그날의 여론주도층들[능력있는자들]의 소란한 소리(소문)를 듣는다면, 사람들은 개념들을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잡지들과 학술지들로 구성된 물밑-문화의 유행이 그것을[개념을] 대신할 것이다. 제도적으로 위협 받고 있는 철학은, 즉 놀랄만한 실험실인 벵센(파리8대학)은, 이전되어 있어 보인다[68년 이후 파리시 교외에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과학, 문학, 음악, 인종학의 상투어구(ritournelle, 반복구)로 가득 차 있으면서, 개념적 작품이기를 바란다. 이 책은 현실태(en acte)이고 – 그리고 여론 주도적으로(puissamment, 강력하게) - 마치 [니체의] ‘즐거운 지식’처럼 ‥… 철학의 회귀로 향한 도박(un pari, 내기)이다. (40-41)
G.D: 복잡한 문제이다. 우선 철학이 철학 교수들에게 예약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철학자라는 자는 철학자가 되고자 하는 자이며, 다시 말하면 개념들의 질서에서 매우 특별한 창조들에 관심을 가지는 자이다. (41)
모든 젊은 작가들은 어떤 것을 창조하는 중에 있다. 이들은 지레 질식될 위험에 처해있다. 작업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선진국들에 알맞은 문화동화(acculturation, 문화변용)와 반대-창조(anti-creation)의 체계가 완전히[굳건히] 서있기 때문이다. (41-42) [ BTS의 6주 연속 빌보드 챠드 1위는 어떤 사건일까? 미국으로 문화 동화의 현상일까? (54RKJ)]
CD2-m. - 철학이 대학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자료의 총체에 관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연관들을 탐색하다가, 이 시대 이 땅에서, ‘뭣이 중한디’라고 하면서, 서죽(筮竹)을 하나 솟아나게 하며 시대의 균열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균열을 내거나 솟아나는 것이 유명배우로서 인기전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새로움은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몇몇 관심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서술 되었다고 하더라도, 도구적 삶의 틀에서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밑으로 흐르는 권능과 노력은, 가녀린 또는 소수자로서 연대와 동맹을 통해 이어져 오다가, 삶에 도움 또는 이용 가능한 것을 느낀 인민들에 의해 문화의 한 장으로 위상을 차지한다. 즉 다발 속의 서죽같은 한 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형성이 시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나서는 시간적으로 추억들의 축적 속에 실재성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생활에서 편리를 위한 일반 개념이 통용되지만, 조금 더 깊이 있게 동맹과 연대를 하는 삶에서는 감화작용과 기억이 함께 가는 동지와 벗들(아미들)에게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누벨바그 이후의 많은 분야와 연대성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RM1. – 사람들은 천개의 고원 속에 언어학에 주어진 중요성에 놀랄 수 있고, 심지어는 언어학이 앙띠-외디푸스 속에서 정신분석학이 유지했던 중심 역할을 하지 않는지를 자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학에 전념했던 몇몇 장들(제4장,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04. 20 novembre 1923: Postulats de la linguistique, 제5장, 몇 가지 기호체계들에 관하여§05. 587 av. J.-C.-70 ap.: Sur quelques régimes de signes)의 과정에서, 개념들이 마치 진술의 집단적 배치의 - 이 배치가 어떤 방식으로 다른 고원들을 관통한다. - 개념들처럼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당신들이 촘스키(Chomskya, 1928-), 라보프(Labov, 1927-), 엘름슬레브(Hjelmslev, 1899-1965), 방브니스트(Benveniste, 1902-1976) 등의 이론들에 관해 실효 있게 한 작업은 언어학에게 확실하게 비판적 기여를 한 것으로 쉽게 간주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럭저럭 느낀다: 당신들의 수고가 언어 속에서 과학적인 지대들을 - 이 과학적인 지대들을 의미론, 구문론, 음운론, 그리고 다른 “..론들(iques)”이 경계를 정할 수 있었을 - 분간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들의 수고는 오히려 언어학의 소위 주장들을 - 입말은 자기에게 가두게 한다고, 또한 즉 발설된 것들과 기표들, 발설작업들과 주체들을 연관시킨다고 - 고발하는 것이다. 어떻게 언어학에 일치된 중요성을 가치 있게 평가해야 하는가? 라깡식으로 채색된 기표의 독재에 반대하여, 또 구조주의에 반대하여, 앙띠-외디푸스이래로 이끌어온 투쟁을 계속하는 것인가? 또는 당신들은 아주 단순하게, 언어학의 “바깥에서(en-dehors)”에만 관심을 갖는 별난 언어학자들(des drôles de linguistes)인가? (42-43)
G.D: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몇 가지 주제를 분간해 낸다. 1) 언어에서 명령어의 지위, 2) 간접화법의 중요성(그리고 실재적 중요성이 없는, 창피한 절차로서 은유[비유]의 고발) 3) 연속적인 변이의 지대들을 이용하여 불변적 상수들과 심지어는 언어학적 변이들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음악 그리고 목소리와 음악의 연관, 이것들은 천개의 고원에서 언어학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 (44)
RM1-m. - 논리실증주의와 구조주의가 언어학에서 어떤 차이를 갖는가? 전자는 앵글로 색슨에서, 언어를 원자와 분자로 구성하는 문장(proposition, 명제)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프랑스 구조주의에서 청각과 연관하여 음소와 음절이 이루는 진술(énonciation)을 다루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둘은 의미론과 기호론의 차이 이상으로 철학적 근거를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사고 속에서 관념(이데아)이 최소의 단위로서 주어짐으로서 진위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 반면에, 후자에서는 생활에서 입말로 나오는 것을 원자(음소)와 분자(음절)로 구분하여, 입말에 내포된 추억들의 감화들을 연관시키려 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삶의 영역에서 입말의 활용론(pragmatique)을 제기할 것이다.
이는 삶에서 언어(laguage)가 지시보다 명령에 가깝다는 것이며, 실재적 삶에서 ‘배워서 익히라’라기보다 따라해 또는 그렇게 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종교는, 크리스트교의 교리의 언어는, 특히 묵시록은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삶은 연속적 흐름이라, 언어처럼 원자와 분자로 구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들의 조합도 아니다. 명령을 받는 삶은 일상적 행동에 연관되지만, 새로운 창안에는 심층의 흐름이 혼성하여(composer) 발산하는 내용들이 있다. 이 심층의 솟아남은 개인 인격의 발산일 것인데, 추억들의 질적 융합이라 간접화법(narration)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정해진 누구하고 대화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기의 주장을 설정하는 명제차원도 아니고, 자기와 연관 속에서 생산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것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기에 진술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이런 화법이 간접화법이라 한다면, 내재적 권능의 흐름과 인격적 노력의 결합으로 출현하는 입말 또는 이미지가 있을 것인데 이런 서술을 간접화법이라 한다면, 간접화법은 이데아(관념)와도 관계없고, 음소 또는 음절과도 다른 출현의 방식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추억을 다룰 때 원자론적 입장이라면, 라깡은 구조주의 입자일 것인데, 들뢰즈/가타리가 활용론이라 하는 것은 내재성의 발현으로서 활용론이 될 것이고, 이는 시뮬라크르에서 내재성의 다양한 가지들이 혼성되어 압축되어 등장하는 것으로, 이데아와 원자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관념과 명제의 차원은 시각적(visuel)이다. 발설(언설)에서 음소와 음절은 청각적(acoustique)이다. 전자에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그림이론 또는 원자명제 등을 말할 수밖에 없다면, 후자에서는 미분화/세분화로 분류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리라. 중국의 한자를 개념(관념)으로 삼을 경우에 전자의 논의에 빠지기 쉬운데, 우리나라는 입말이 우선이라 후자(청각적)의 학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전자에서 그림이론은 이미지가 표상 현상처럼 밖에 있는 것과 연관이 많은데 비해, 후자에서는 음악이론과 닮아서 이미자가 추억-지각 또는 감화작용에 연관이 더 클 것이다.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입말을 통해서 전개한 것이 1995년 천리안 세대의 ‘덩달이 효과’일 것이다. 이 효과가 일반화의 과정을 거쳐서, 천지인(아, 이, 어, 어제, 이제, 아제)의 글자로서 이미지를 확장하는 중에 시각적 효과가 덮친 것이, 스마트폰의 등장일 것이다. 과정에서 단계를 일반화하기 전에 중첩과 혼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이돌(소녀시대, HOT, BTS)의 음악이 아닐까 한다. (54RLA)
CD3. – 당신들은 은유들(metaphores)을, 또한 비유들(analogie)을 매우 강하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당신들의 “검은 구멍들(trous noirs)”, 현대 물리학에서 빌려온 이 용어는, 사람들이 다시 나오지 못하고 사로잡힌 공간들을 묘사한다. 이 검은 구멍들은 흰 벽(mur blanc)의 용어와 이웃한다. 당신들에게서, 얼굴(un visage), 그것은 검은 구멍으로 뚫린 흰벽이다. 이런 것으로부터 얼굴성(la visagéité)이 조직화된다. 그러나 좀 더 나가보면, 당신은 흐릿한 일체를, 열린 체계들을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가장 동시대적인 과학들과 당신들의 이웃하기는, 과학자들이 이런 종류의 저술을 가지고 어떤 용도로 만들 수 있는지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여기서 은유들을 본다는 위험에 처하지 않는가? (44)
CD3-m. - 들뢰즈의 대구(對句)적 서술(간접화법) 은유나 비유가 아니다. 도덕과 종교, 사회와 공동체에서 상호연관은 과학의 용어로 잘라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사회체에서는 이런 경계 없이 흐릿한 연관들이 서로 대립 또는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 모습은 명제나 설명으로 될 수 없는 얼굴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얼굴은 입코귀눈이 구멍이 뚫려 있고 뺨과 이마의 평면(벽)이 있다는 것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구멍은 고유한 기능과 방식들이 있다. 입과 혀는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로서 맛보고 먹는다는 것이고, 요즘에는 사랑의 작업도구이기도 하지만, 말을 한다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입은 입말을 표출하는 중요한 깊이(구멍)이다. 이에 비해 눈은 사물의 재는 중요한 기구이다. 귀는 입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소리를 듣지만, 필요에 따라 거리와 방향을 재단한다. 코도 귀와 다른 방식이지만 재단하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기관들이 각각이 다른 기계들과 특이한 방식으로 삶에서 같이(함께) 작업 한다. 이들의 조합 또는 혼성의 방식은 한 인격을 드러낸다. 역사에서도 자연과 풍토(영토)는 여러 사정들의 조합과 혼성일 것이라고 하며, 은유와 유비가 아니라, 사건들에서 드러난 점들을 보면, 각각은 영토에서 드러낸 놀이위상(장면)이 특이하고 또한 다르다. 이 놀이 위상들의 각각은 얼굴이 있고 풍경이 있다. 이 풍경은 동일반복이 아니라 이질반복이다. 이 이질반복으로 생명체의 각각의 고유성을 성립시켰다. 식물들의 각각은 모습(형상)도, 꽃의 색깔(형용사)도, 자라는 길이와 년한도, 꽃피는 시기도, 꽃도 열매도 다르다. 오랜 영토(토지)에서 구멍과 벽의 조율로서 얼굴성을 드러낸 것이다. 인간도 누구의 자식이라기보다 영토의 얼굴성을 드러낸 것이 개인 인격, 즉 특이성일 것이다. (54RLB)
DE1 – 당신들이 역사가들의 작업들을, 특히 브로델(Braudel, 1902-1985)의 작업들을(그러나 사람들은 정당하게 그의 풍경을 위한 관심을 안다), 이용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들이 규정된 자리[위치]를 역사에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공간을 특권화하고, 당신들은 생성들의 “지도그리기(cartographie, 지도 작성)”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고원에서 다른 고원으로 이행 수단들 중의 하나는 갖지 못하는가? (45-46)
DE1-m – 자연은 무작위(hasard)로 생성들을 만들고 풍경을 표출한다(요소의 조합에 의해 필연성을 주장하는 원자론자들이 있고, 어째거나 개별적인 것들은 모든 것의 일부이라는 유기체적 스토아적 관점도 있다). 그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사의 공동체는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얼굴을 만들고 인격을 형성한다. 인격성을 개인에 두기보다, 공동체의 인격성을 서술로서 나열하면 풍토(영토)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열은 연속성이 없는 불연속성이다.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쓴글을 만들면,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인 것으로 여긴다. 그 표면적 역사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많은 내면적 역사(유물, 유적)들도 있다. 아마도 들뢰즈는 공동체의 인격성에는 새로운 지도그리기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며, 역사라는 것도 생성들의 과정으로서 지도 그리기의 한 방편으로 여겼으리라. 흐름에서 표면으로 표출에는 여러 다른 모습일 것인데, 자연 또는 토지위에서 삶의 터전은 그 터전에 맞는 특이성을 드러낼 것이다.
역사와 인간사에서 터전을 공간화 시켜서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 내재적 지속의 연관에서 드러난 방식과 양태들에서 달리 서술해야 할 것이다. 이로서, 역사 속에서 방식과 양태가 드러난 고원들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 한 고원에서 다른 고원으로 이행은 거의 불가능하다. 생명체로서 인간은 불가역성이기 때문이며, 지구의 역사 또한 불가역적이다. 한 토지에서 삶의 방식과 양태가 다른 토지(영토)에서도 동일 반복이 일어날 수 없다. 단지 사람들은 도구적 입장에서 이곳(적도)에 도로를 닦고 자동차가 다니듯이, 저곳(툰드라)에서도 도로를 닦고 자동차를 몰 수 있다고는 한다. 그 도로들은 배열상 같아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 자동차도 겉보기에 같아 보이지만 풍토에 따라 견딜 방식으로 달라야 한다. 물론 모습(얼굴)에서 입눈귀코가 있듯이 자동차에 엔진과 기어와 제동동치가 있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해명의 토대에 따라서, 토지와 문화가 영토에 따라 다른 반복을 한다는 것을 저변에 깔고 있다.
가지들 사이의 이행은 어렵고 힘들다. 추억들의 양적 차이와 세분화의 길을 오래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연대와 동맹을 가능하다. 그 가능성은 무의식의 흐름과 같은 기억의 실재성이 이질적이지만 심층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황인, 흑인, 백인이라는 다발 속의 가지들은 어쩌면 직립원인의 공통뿌리(리좀)에서 솟아오른 또는 탈주한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54RLB)
RM2 – 천개의 고원의 “폭발된(éclatée)” 형식, 그 작품의 연대기는 아니지만 날짜가 있는 조직화, 작품의 참조의 다양성과 다의성, 가장 변화스럽고 겉으로는 불규칙한 이론들의 종류들과 영역들에서 빌려온 개념성의 놀이판, 이것들은 적어도 장점이다. 이것들은 반(대)-체계(anti-système)의 현존에서 결론 내리게 해 준다. 천개의 고원은 산맥을 이루지는 않지만,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의 길들과는 반대로, 천 개의 길들을 생겨나게 하고, 도처로 이끈다. 특히 반-체계, 누더기[조각무늬 데기], 절대적 흩어짐(dissipation absolu), 이것이 천개의 고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반-체계는 아주 달리 가는 것 같다. 첫째로 왜냐하면 천개의 고원은, 당신들 자신들이 활지에 선언했던 것처럼(n° 49, 1980년 신판), 유일한 철학적 장르에 속하며, “단어의 전통적 의미에서 철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왜냐하면 책의 전시관 방식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비체계적인 저술은 그럼에도 어떤 “세계의 통찰(비전)”을 번역하며, “실재(un réel)”를 보게 또는 흘낏 보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실재는, 현대 과학적 이론들을 묘사하고 제시하기를 시도하는 실재와, 근친성이 없지 않다. 셋째로 천개의 고원을 철학적 체계로 보는 것이 그 만큼 매우 역설적인가? (47-48)
GD 오늘날 철학적 사유는 그만큼 많은 역할을 결코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언론도 온전하게 하나의 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모든 사유에 침범(une offense)하기 때문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리베라시옹이 이런 문제에 전념해야만 할 것이다. (49)
RM2-m 철학서적을 논문처럼 서론, 1장, 2장, 3장, 결론으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구태의연하다. 아니 그런 작품은 논리실증주의의 원자론적 그림이론에 속할 것이다. 삶이 먼저이고 철학은 다음이다. 무엇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인가는 8가지에서 16가지로 넘어서면 분류와 구별이 어렵다(이상하게도 16가지의 경우의 수에 관한 논의를 아무도 다루지 않는다). 64괘 중에서 올해에서 내년으로 가는 대선에서, 어떤 괘가 가장 적합하고 중요한지는 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선정국을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64가지 중의 하나의 모습으로 경과를 총괄적으로 설명하거나 또는 표현하는 양태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현실에서 코로나, 부동산으로 보이지만, 남북관계, 교육, 의료, 불평등, 여성주의 등등에서 어떤 문제제기가 제기되어 인민들의 눈과 귀를 쏠리게 할지는 그 선거 끝날 때(2022 3월)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점을 치듯 먼저 괘를 말하는 것이 좋게 말해서 예언자적 견해일 것이지만, 사기꾼의 짓일 것이다. (54RLB),
DE2 – 사람들이 되돌아가는 것에 내가 좋아했을 법한 관점들이 있다.
당신들이 사건에 부여한 것은 좀 전에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고 나서 당신들이 역사에 지리학을 일치시키는 것은 특권적인 문제이다. 그러면 당신들이 정교하게 만들고자 원한 “지도 그리기(cartographie, 지도제작)” 속에서 사건의 지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왜냐하면 당신들이 영토에 연결하는 것이 공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국가의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국가의 장치는 속박(la contrainte, 강압)으로부터 홈패인 공간을 세운다면, “전쟁기계”는 탈주선 위에 “매끈한 공간”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경고하기를, 매끈한 공간은 우리를 구출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탈주선[용출선]은 필연적으로 해방적(libératoire)이지 않다고 한다. (49-50)
GD: “지도(carte)”에는 다양한 선들로 전형들이 있다. 선들은 도면과 입체 위에서 어떤 특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선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공간들이 있다. (50)
DE2-m. - 에리봉의 질문에서 국가 장치가 속박 또는 강압을 넘어서 공포를 심는 경우들도 있다. 사실상 나찌의 파쇼의 행위는 공포를 심었다. 우리의 박정희 군사정권과 그 다음의 군사정부들도 공포를 심었기에 파쇼라고 했다. 그런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런 제도와 장치들에 대항하는 인민의 저항과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위에서 작동한다. 심층의 흐름을 ‘평면’으로 표현하여, 매끈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활동을 일으키는 저항과 봉기는 기존의 국가기구의 방식과 절차와 다르기 때문에 매끈한 공간을 달린다. 박근혜를 탄핵한 촛불 시위는 매끈한 공간이었다. 이 매끈한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곧 인민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탈주선이 필요조건이라면, 새로운 공동체를 창안하는 것이 충분조건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매끈한 공간에는 내재적 권능이란 64괘의 각각에게 거의 동등한 자격으로 역할하면서 연대하는 힘들이 작동할 경우이다. 그게 쉽지 않다. 매끈한 공간에서 중요하게 제시되는 8괘의 가지들 정도라도 연대와 동맹을 이룰 때, 해방적이 될 것이다. 이 8괘가 서로 연대하는 과정은, 역시 비유이지만, 64개의 경우의 왕복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왕복운동의 과정에서, 힘들은 강도를 높이고, 의식(기억)은 확장되는 것이다. 자연의 토지와 삶의 터전(생태)에는 이전의 규약(코드)을 넘어서 64연관의 활동성이 두께와 강도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지도 그리기’는 가능하고 구체적 활동으로 활용론의 그림이다. .
DE3 – [탈주]선들, 생성들, 사건들‥… [그리고] 우리들도 있는데, 아마도 날짜들에 관련하여 출발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각 고원의 제목은 날짜를 포함하는데: <13장 기원전 7000년-포획장치(§13.0. 7,000 av. J-C: Appareil de capture)>, <제7장 0년 얼굴성(§07. Année Zero: Visagéité) >‥… 허구적인 날짜들을 당신들이 말했는데, 그러나 누구들이(qui) 사건에, 상황들에 귀착하며, 아마도 누구들이 우리가 말했던 지도제작을 확립하는가? (51)
DE3-m. - 무의식은 현재에 드러난 의식이외 과거 의식의 총체로서 기억을 의미한다. 기억은 추억들이 아니다. 선들, 생성들, 사건들은 추억들의 장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기억으로 현재도 존속하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떤 것들 또는 어떤 인물들을 말한다. 어떤 것으로 1만년전의 지층들은 지층 하나하나가 추억의 단면과 같지만, 지층의 생성과 마그마의 분출과 지층의 균열과 단층 그리고 새로운 층의 중첩(덮힘)과 같은 과정은 추억들이라기보다, 고고학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있는 기억이다. 기원전 7천년전의 포획장치는 집단 행위의 조직화에 대한 관점일 것이고, 포획 사냥과 울타리 목축에는 이중성이 있다. 지금도 식민지 정책은 포획장치의 다른 판본(버전) - 키워서 잡아먹자는 - 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시기와 날짜를 말하는 것은 서죽 한줄기의 성립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류사에서 활과 리라가 같은 시기와 날짜를 꼽을 수는 없지만, 또는 전쟁과 노래하는 평화 사이를 구별할 수 없지만, 같은 사건으로서 양면성이 있다. 허구적 또는 우화적 이야기로서는 아폴론 리라와 아르테미스(디아나)의 활이, 전쟁도구와 생활도구로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데,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 한배의 쌍둥이라는 설화만으로 사건이나 상활에 귀착시킬 수 없다. 그럼에도 남매의 설화에 관한 유적과 유물이 있다면 시기와 날짜를 말해 봄직도 하다. 이런 방식의 지도제작은 설화의 서사적인 사건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의 전승물로 카상드라를 데리고 왔을 때, 아가멤논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남편을 살해했다. 살해의 이유에는 트로이 전쟁에 갈 때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딸인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남편을 살해한 어머니를 살해하는 아들 오레스테스는 신탁의 무녀들에 의해 무죄의 평결을 받았다는 설화에서 엥겔스는 모권시대에서 부권시대로 전환기라는 이야기를 끌어냈다. 아마도 트로이 전쟁의 발단에서, 아가멤논의 동생인 메넬라오스의 아내(헬레나)가 납치당한 사건을 시기와 날짜를 정하여 역사적 이야기의 고원을 만들면, 그 내용에는 전쟁과 아킬레스와 디오니소스까지 내용으로 풍부하게 엮을 수 있을 것이다. - 들뢰즈/가타리는 고원의 날짜를 지칭하면서, 국가장치적이고 교육적인 이야기(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삶이 어떤 경우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생각해보자고 하는 것이리라. 헬레나의 납치는 철학사의 무의식과 연관 속에 – 상층의 소유문제와 아름다움(미)로 연관시킬 수 있을 지라도 - 들어올 수 없을 지라도, 리라와 활은 인류사에서 인민들의 삶과 연관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설화의 기원이 유적 같은 것과 시기가 있다면, 아마도 들뢰즈/가타리는 한 고원을 설명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54RLB)
GD: “1730년대에 늑대요술장이(Loup garou)가 넘쳐난다.” (52)
(lu 54LMF)(9:30, 54RKD) (10: 13, 54R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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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 징기스칸(Gengis Khan, 1162-1227)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孛兒只斤 鐵木眞 패아지근 철목진)
1808 바르베 도르비이이(Barbey d’Aurevilly, 1808-1889)의 단편소설 「진홍색 커튼(Rideau cramoisi)」(1874)에서 모든 것은 “뭔가가 일어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물음을 향해 있다.(MP, 236, 368)
1810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독일 피아니스트, 작곡가. Davidsbündlertänze (1837) 1837년에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와 우정을 이었다.
1889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철학자이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1896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의 시인, 연출가. Le Théâtre et son double, 1938에서 잔혹극(« théâtre de la cruauté »)의 개념을 발명했다.
1899 예름슬레프(Louis Hjelmslev, 1899-1965), 덴마크 언어학자. 소쉬를 이어받으려 했다.
1902 방브니스트(Émile Benveniste, 1902-1976) 시리아 태생 프랑스 언어학자. 일반 언어학과 비교 문법학 전공. Problème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1966) et 2(1974)
1902 브로델(Fernand Paul Achille Braudel, 1902-1985) 프랑스 역사가. 아날학파(« l'École des Annales ») 대표적 인물.
1905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1907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 프랑스 소설가, 문학비평, 철학자.
1915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프랑스 철학자, 문학비평가, 기호학자.
1918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이다.
1924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와 연관된 철학자, 특히 포스트모던의 비판 사용 때문에 유명하다.
1924 만델브로(Benoît Mandelbrot, 1924-2010), 폴란드출신 프랑스-미국 수학자. 프락탈이론 전문가.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1925 샤뜰레(François Châtelet, 1925-1985) 철학사가, 정치철학. 파리 8대학 교수.
1925 페이예(Jean-Pierre Faye, 1925-) 프랑스 작가, 시인, 철학자. 독일철학 특히 니체에 관심
1927 라보프(William Labov, 1927-) 미국 언어학자. 사회언억학 창설자 중의 한사람. [음운론에 속한다.]
1928 촘스키(Noam Chomskya, 1928-) 미국 언어학자. 발생언어학 창시자.
1930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프랑스 정신분석가, 철학자. 라보르드 진료소(à la clinique de La Borde à Cour-Cheverny, Loir-et-Cher) 사망했다.
1930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1930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년 10월 31일 파리)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이다. 철학뿐 아니라 문학, 회화, 정신분석학 등 문화 전반에 관심.
1930 세르(Michel Serres, 1930-2019) 프랑스 철학자, 과학사가.
1930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프랑스 사회학자.
1932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2018) 프랑스 도시계획가, 수필가.
1944 크리스티앙 데캉(Christian Descamps, 1944-) 프랑스 철학자 작가. 조르쥬-퐁피두 센터에서 철학 세미나를 이끌었다. 그는 문학 격주간지(La Quinzaine littéraire)의 편집위원이었다. 오늘의 프랑스 사상(Les Idées philosophiques contemporaines en France 1960-1985, 1986)
1947 막기오리(Robert Maggiori, 1947-)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 철학자, 편집자, 번역자(이탈리어로) 언론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도하에 박사학위. 해방(Liberation)지에서 30년 기자.
1953 에리봉(Didier Eribon 1953-) 프랑스 사회학자 철학자. 아미앙 대학 교수. 미셀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Paris, Flammarion, 1989) 들뢰즈/가타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들뢰즈에 대한 저술은 찾을 수 없다.
(lu 54LMF) (11:02, 54RKD) (11:29, 54RLC)
첫댓글 [올해 일주일전에 서울 어디선가 매미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마포 아파트 단지 속에서도 매미 소리를 곧 들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오늘(2021 07 12)에서 처음 들었다. 서울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데 일주일 이상이나 걸릴까? - 잠자리는 이보다 훨씬 일찍 등장했었다. (54R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