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滿朝鮮
一 然(1206~1289)
前漢의 朝鮮傳云 自始燕時로 常畧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燕 因始略得此地也)하고 爲置吏築障이라 秦滅燕에 屬遼東外徼라가 漢興에 爲遠難守하여 復修遼東故塞하고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하여 屬燕이라
『前漢書』 「朝鮮傳」에 이르기를 “일찍이 燕나라 때부터 眞番과 朝鮮(안사고는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하여 차지하였다.”라고 하였다.)을 침략하여 차지하고 이곳에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다. 그 후에 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킴에 요동군 변방에 이 땅을 예속시켰다. 漢나라가 일어남에 이 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아(안사고는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라고 하였다.) 燕나라에 예속시켰다.
* 浿水: 燕나라 때 조선과의 경계로 지금의 淸川江이다.
燕王盧綰이 反入匈奴하니 燕人魏滿이 亡命하여 聚黨千餘人하여 東走出塞하여 渡浿水하여 居秦故空地上下障이라
燕王 盧綰이 漢나라를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니, 연나라 사람 魏滿이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빠져나온 후,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터의 上下 地境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 노관(盧綰): 한 고조(漢高祖)와 한 동네, 같은 날에 태어나 자라면서 함께 배우고 서로 아꼈던 사람. 고조가 군사를 일으킬 때 장군이 되어 장도(藏荼)를 깨뜨린 공으로 연왕(燕王)에 봉해졌음.
* 흉노(匈奴):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말까지 활동했던 유목 민족 및 그들이 세운 국가를 일컫는다. 전국시대부터 진, 한 등을 침략했는데, 이러한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을 이은 것이 만리장성이 되었다. 431년에 멸망하면서 중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하여 王之하여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在樂浪郡浿水之東)이라 以兵威로 侵降其旁小邑하니 眞番‧臨屯이 皆來服屬하니 方數千里러라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라
위만이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와 옛날의 燕과 齊에서 망명한 자들을 예속시켜 왕이 되어 王儉(李奇는 地名이라고 하였고, 臣讚은 王儉城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에 도읍하였다. 위만이 군사의 威力으로 주변의 조그만 읍들을 공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되어 영토가 사방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이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顏師古는 위만의 손자 이름이 右渠라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眞番‧辰國이 欲上書見天子나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이라 元封二年(紀元前 109年)에 漢使涉何로 諭右渠나 終不肯奉詔라
진번과 辰國이 漢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가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하였다.(안사고가 말하기를 辰國은 辰韓이라고 하였다.) 원봉 2년에 한나라에서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何ㅣ 去至界 臨浿水하여 使馭로 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하고 卽渡水馳入塞하여 遂歸報하니 天子ㅣ 拜何爲遼東之部都尉라 朝鮮은 怨何하여 襲攻殺何라
섭하가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는 驅從을 시켜서 자기를 호송하러 온 조선의 비왕 長(안사고가 말하기를 長은 沙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하였다.)을 찔러 죽이고,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보고하니, 漢天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부의 도위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襲擊하여 사하를 죽였다.
天子遣樓舡將軍楊僕하여 從齊浮渤海하니 兵五萬이라 左將軍筍彘ㅣ 出遼하여 討右渠하니 右渠ㅣ 發兵距嶮이라 樓舡將軍은 將齊七千人하고 先到王儉이라 右渠ㅣ 城守한데 規知樓舡軍小하고 卽出擊樓舡하니 樓舡ㅣ 敗走라
천자가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서 齊에서 배를 타고 발해로 건너가 조선을 치게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 순체가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를 토벌하니, 우거는 지세가 험한 곳에서 군사를 내어 막았다. 누선장군이 齊의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음을 정탐해서 알고, 곧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이 패하여 달아났다.
僕이 失衆遁山中獲免이라 左將軍도 擊朝鮮浿水西軍이나 未能破라 天子爲兩將未有利하고 乃使衛山으로 因兵威往諭右渠하니 右渠ㅣ 請降하여 遣太子獻馬라
누선장군 양복이 군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해 죽을 면했다.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 서군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군의 형세가 유리하지 못하다 여기고 위산을 시켜 군병의 위력을 가지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니 우거가 항복을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人衆萬餘ㅣ 持兵하고 方渡浿水한데 使者及左將軍이 疑其爲變하여 謂太子 已服이니 宜毋持兵이라하니 太子亦疑使者詐之하여 遂不渡浿水하고 復引歸라
萬餘명의 병력이 병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인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병기는 가지고 오지 마시오.” 하니 태자도 또한 사자가 자기를 해칠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報天子하니 誅山이라 左將軍은 破浿水上軍하고 迺前至城下하여 圍其西北이라 樓舡도 亦往會居城南이나 右渠堅守하여 數月未能下라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군사를 격파하고 곧바로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서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왕검성 밑으로 와서 군사를 합쳐 城南에 주둔했으나, 우거가 견고하게 수비하여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天子以久不能決하니 使故濟南太守公孫遂로 往正之하고 有便宜將以從事라 遂至하여 縛樓舡將軍하고 並其軍與左將軍으로 急擊朝鮮이라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않으니 옛 제남태수 공손수로 하여금 치게하고 모든 일을 편의를 따라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가 이르러서 누선장군을 묶어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군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朝鮮相路人‧相韓陶(陰)‧尼谿相參‧將軍王唊(師古曰 尼谿地名 四人也)이 相與謀欲降이나 王不肯之하니 陶‧唊‧路人이 皆亡降漢한데 路人은 道死라
조선의 상 로인과 상 韓陶(陰)와 니계상 참과 장군 왕겹(안사고는 니계는 地名이고 이들은 모두 4명이라고 하였다)이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와 왕겹과 로인이 다 도망가서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로인은 도중에 죽었다.
元封三年(紀元前 108年)夏에 尼谿相參이 使人殺王右渠하고 來降이나 王儉城은 未下라 故로 右渠之大臣인 成己ㅣ 又反이라
漢武帝 원봉 3년 여름에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서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으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거의 대신인 성기가 또 자기 나라를 배반했다.
左將軍은 使右渠子長‧路人子最로 告諭其民하여 謀殺成己라 故로 遂定朝鮮하고 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이라 <三國遺事 卷之一>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長과 로인의 아들 最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타일러 成己를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