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銀魚)
고기 잡이는 여름이 제격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물놀이와 함께하면 더 어울린다. 가뭄에 강물이 줄어 정강이 밑 발목에 겨우 닿을 정도면 안성맞춤이다. 맨 손으로 물에 노니는 고기를 잡는 일은 누가 봐도 저렇게 해서 가능할까 싶을 정도다.
체육 수업이 있는 날과 동아리 활동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운동장에서 큰 길을 따라 걸으면 오 분 거리다. 주변 사정에 밝은 녀석들은 논두렁 사이 지름길을 달려 곧장 강에 닿는다. 강물이 줄어 열 개가 넘는 다릿 발이 서 있는 강폭에 백사장이 길게 드러나 있다.
태양에 달궈 진 모래는 걸을때마다 발바닥을 송곳으로 찌른 듯 하다. 한 곳에 머물 수 없다. 종종 걸음으로 물속에 발을 담근다. 너나 없이 벗은 웃옷이 뱀 허물처럼 뒹군다. 하나 둘 팬티만 입은 채 강물에 뛰어든다. 고기 잡는 도구는 오로지 맨손과 기다란 몽둥이 하나다. 비가 오래도록 내리지 않아 강물은 바닥이 훤히 보인다. 가마솥에 장작불을 피운 듯 얕은 강물은 미지근하기까지 하다.
은어는 극동 지역에서만 산출되는 연어류에 가까운 물고기다. 몸은 가늘고 길다. 옆으로 납작하고 빛깔은 약간 어두운 청록색을 띤 회색이지만 배쪽으로 갈수록 밝아진다. 하천의 바닥이나 자갈과 모래로 된 맑은 물에서 여름철을 보내며 자란다. 가을이 되면 알을 낳는다. 은색에 가까운 비늘을 가졌고 머리는 세모 난 모양이다. 비린내 대신 수박 냄새가 나는 고기다. 여울진 곳에 사는 은어는 무리를 지어 영역을 형성하여 일정한 반경 안에서는 다른 은어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이 습성을 이용하여 씨 은어를 활용한 낚시도 한다. 바다와 강을 번갈아 다니는 어종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은어 잡이에 나선 아이들은 인원을 나누어 고기 몰이를 하는 쪽과 몰아온 고기를 잡는 편으로 구분을 한다. 시작은 느리게 흐르는 강물 바닥에 몽둥이를 내리치면서다. 어깨에 둘러 메었다가 있는 힘을 모아 휘두른다. 이 소리에 놀란 은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때 한 마리씩 물고기를 쫓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내달리던 은어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돌연 멈춘다. 이때 물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 앉으면 어느새 사타구니 사이에 숨어든다. 손아귀에 잡힌 은어는 미끈거리지만 비늘조차도 촉감이 부드럽다. 코를 막고 고개가 저절로 돌려지는 여느 물고기와 달리 은근히 냄새까지 즐기면서 맡는다.
뙤약볕 아래 놀이와 은어 잡이는 어느새 지친다. 지금껏 잡은 은어를 모아 씨알이 작은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을 쓰고, 굵은 녀석들은 풀 섶에 숨겨 두었다가 읍내 식당에 팔기도 한다. 일찍이 은어 잡이 알바를 한 셈이다. 잡은 물고기는 구이와 튀김, 회로 먹는다. 비린 냄새가 없어 맛을 본 사람들이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을 정도다.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강물 따라 펼쳐진 은어 잡이는 백사장에서 하는 오래 달리기 훈련이나 마찬가지다. 한여름 모래 바닥은 달군 불판이나 다름없다. 얕은 물이지만 땀에 배인 몸을 씻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따가운 발바닥과 그늘 없는 한 낮의 백사장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왕 버들 한 두 그루를 만나면 축 늘어진 몸을 기댈 수 있어 두 팔 벌리고 드러눕는다.
황강에서 은어 잡고 뛰놀던 기억은 먼 이야기가 되었다. 멀지 않은 강 위쪽에 댐이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유달리 큰 물이 자주 있었다. 여름이면 한 해가 멀다 하고 강둑을 넘어 논밭을 휩쓸었다. 그런데 댐을 만든 후 도리어 큰 물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몇 년에 한 번 수문을 열어 강 아래로 물을 흘려 보낼 뿐이다. 뿜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보려고 구경 나오는 이들이 댐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속에 맺힌 한을 떨쳐내듯 허공으로 솟은 물은 방울 방울 아래로 아래로 퍼져 내린다.
강은 산이 되었다. 강바닥에 자리한 자갈과 모래를 헤아릴 정도였다. 그런데 물의 흐름이 끊어지고 물 길이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던 물길에는 댐 공사의 자국이 그대로 눌러 붙었다. 큰 물이 사라지면서 모래와 자갈이 뒹굴던 자리에는 흙이 쌓여 풀과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면서 작은 나무는 숲을 이루었다. 숲에는 산속에 머무는 야생 동물이 보금자리로 터를 잡았다.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모래는 노래 가사에서 찾아진다.
무한히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던 강은 겉모습 뿐만 아니라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힘줄까지 헤집어 놓았다. 하나 하나 쌓인 그림책은 빛이 바랜다. 강을 오르내리며 뛰놀던 백사장은 여러 가지 물놀이 시설이 들어서고 캠핑장이 대신하였다. 한여름의 축제로 사람들을 잠깐 불러 모은다. 떠들썩한 풍경은 한갓 지나가는 바람이다. 강에는 자연 상태의 은어는 거의 사라졌다. 기관에서 해마다 수십만 마리의 양식 치어를 방류한단다. 예전의 자연환경은 우리 곁을 떠났다. 동심이 깃든 황강의 환경이 사라졌다. 달라진 환경만큼 사람들도 새로운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생물이 떠난 자리는 머지않아 인간도 터전을 잃게 마련이다.
마음껏 뛰놀며 작은 재미를 안겨 준 백사장은 이제 돗자리 만한 크기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 그림자가 길어진 날의 은어 몰이는 사진 속에서 찾아진다. 꾸밈 없고 남을 짓밟는 경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서로를 아끼고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손을 내밀어 안아 주었다. 막힘과 두려움을 멀리했다. 예전의 놀이터를 찾아가는 일은 아예 멀어진다.
자치단체는 지역의 존립 자체를 걱정한다. 노령화와 인구 자연 감소는 지역이 활력을 잃었다. 아이 울음 소리를 듣는 것보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 숫자가 앞선다. 여러 가지 사람을 유입하려는 방책을 쏟아 내지만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어디를 보아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형편이다. 이 모두 서로의 이익을 좇은 결과가 아닌가. 고향을 떠났다가 중년을 넘긴 나이에 되돌아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편에서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어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마주 앉아 도란도란 지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가로 막힌 벽이 하나 없다면 더 바랄 것이 있으리요. 멀리까지 걱정할 여유가 없다. 당장 눈 앞에 닥친 일이 발목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