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791년 전, 인천에 강도江都란 도시가 있었다. ‘고려의 수도’ 강화도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1232년 몽골이 침입하자 고려왕조는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강화로 도읍을 옮긴다. 몽골제국에 맞서 ‘의로운 항전’을 하기 위한 ‘천도’였다. 강화천도 이후 고려는 유럽까지 집어삼킨 골리앗 몽골에 맞서 38년간 처절한 항쟁을 벌인다. 1270년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으며 항쟁은 끝이 났으나, 다른 나라와 달리 고려는 복식 등 모든 문화를 그대로 유지했다.
인천 강화도가 전시戰時 수도首都로 38년간 고려를 지켜낸 이래, 인천은 ‘호국 보훈의 도시’ 역사를 도도하게 써내려 왔다. 왜란, 호란이 발발한 16~17세기 인천은 왕실의 보장지처保障之處 역할을 했다. 청나라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1656년 월미도에 국왕의 임시 거처인 ‘행궁’을 설치했는데, 유사시 월미도로 피신한 뒤 영종도를 경유해 강화도a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서구 열강이 밀려오던 19세기, 병인·신미양요가 발발했을 땐 격렬하게 싸워 나라를 지켜낸 것도 인천이었다. 병인양요(1866) 때는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쫓아냈으며,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을 때는 광성보에 배수진을 친 채 최신예 함포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 맹렬히 싸웠다. 무수한 조선 군인들이 순국하는 등 희생은 컸지만 중국과 일본도 해내지 못한 서구 제국주의를 인천은 막아냈다.
인천이 늘 전장의 중심이었던 건 지정학적 운명 때문이었다. 인천은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 중간지대에 있어 외국에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었다. 육지와 해양을 연결하는 요충지이자 서울로 가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땅의 9할을 점령당한 최대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낸 땅도 인천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월미도에서 시작한 ‘인천상륙작전’은 3일 만에 인천시청(현 중구청)에서 표양문 임시 인천시장 취임식을 열고 13일 만에 서울을 수복하는 전과戰果를 기록하는 등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는다.
남북 대치 상황. 근래 들어서도 인천은 무수한 희생을 치르며 최전선에서 묵묵히 나라를 지켜냈다. 서해교전, 천안함 피폭, 연평도 포격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한반도 전쟁의 상당 부분을 치러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시가 다음 날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대규모로 계획하고, 2025년엔 참전 8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국제행사로 격상시키려는 이유는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의연하게 지켜온 인천의 ‘나라 사랑 정신과 실천’을 기리기 위함이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올해부터는 그 가치를 되새기고 재조명하는 의미로 대규모 주간 행사로 치러지며 제75주년이 되는 오는 2025년엔 국제행사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광복 78주년. 광성보에서 올려다본 인천의 여름 하늘에 순국선열들의 영령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