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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65권
6. 변현성품 ⑨
6. 무학위(無學位)
6.1. 아라한과(阿羅漢果)
1) 아라한향(阿羅漢向)과 금강유정(金剛喩定)
세 번째(불환) 향(向)ㆍ과(果)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네 번째(아라한) 향ㆍ과에 대해 건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계의 수혹 중에서
초정려의 1품 내지
유정지의 8품을 끊은 이를
모두 아라한향이라고 한다.
上界修惑中 斷初定一品
至有頂八品 皆阿羅漢向
그리고 제9품의 무간도를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 하며
번뇌 멸진의 ‘득’과 구행하는 진지(盡智)로써
무학의 응과(應果)를 성취한다.
第九無間道 名金剛喩定
盡得俱盡智 成無學應果
논하여 말하겠다.
불환과의 성자가 증진하여 색계와 무색계의 수소단의 혹(惑)을 끊을 때, 먼저 초정려의 1품(상상품)의 혹을 끊고, 이로부터 나아가 마지막으로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의 8품(하중품)의 혹을 끊을 경우,58) 그 명칭이 바뀌어 ‘아라한향’이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설해진 아라한향 중에서 유정지의 혹을 끊는 제9품의 무간도(無間道)를 역시 또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이러한 선정은 견고하고 예리하기가 금강석과 같아서 이것에 의해 능히 파괴되지 않는 어떠한 수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정지 제9품 이하의 번뇌는] 앞에서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에, 일체의 혹을 파괴하지는 않을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일체의 번뇌를 능히 파괴하는 공능을 갖고 있다.59) 다시 말해 이것은 이미 가장 미세한 품류의 혹도 능히 없앤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무간도 중에서 오로지 이러한 찰나의 [도]만을 극상품(極上品)이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그래서 [금강유정은] 일체의 수면을 능히 영원히 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비록 견도 중에도 역시 유정지의 번뇌를 능히 끊는 무루의 대치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그러한 [견소단의] 9품의 혹은 1품으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러한 번뇌의 세력은 미약하고 저열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견도는 이미 미열한 혹을 대치하는 도였기에, 일체의 수면을 능히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일체의 수면을 능히 파괴하는] 공능을 갖는 것이라면, 무엇이 장애하여 파괴하지 못하는 것인가? 따라서 그것(유정지의 견혹을 끊는 무루도)을 금강유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온갖 수면 중에서 무사혹(無事惑)은 쉽게 끊어지기에60) 견도로써 그것(유정지의 번뇌)을 대치하더라도 ‘극상품’이 이름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유정지의 번뇌를 끊는 견도를] 금강유정이라는 명칭으로는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밝힌 금강유정은 일체의 유사혹(有事惑) 중에서 최후의 품류이자 지극히 끊기 어려운 미미(微微)한 품류의 번뇌를 능히 대치하기 때문에 일체의 수면을 능히 파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이러한 [선정의] 힘에 의해 능히 일 찰나 동안에 일체 혹이 끊어짐으로써 무루의 이계득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1-1) 금강유정의 다양한 차별
이와 같이 논설되는 금강유정은 오로지 여섯 지(智) 중의 한가지와 상응할 뿐이니, 이를테면 네 가지 유지(類智)와 멸법지(滅法智)와 도법지(道法智)가 바로 그것이다. 즉 4성제를 반연하는 16행상은 모두 9지(地)에 근거하여 [생겨난다는] 사실이 뜻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의 차별에도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설한 것이다.61)
먼저 미지정(未至定)에 포섭되는 것에는 쉰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ㆍ집류지는 유정지의 고ㆍ집제를 관찰하여 비상(非常) 등과 인(因) 등의 행상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여덟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며, 멸ㆍ도법지는 욕계의 멸ㆍ도제를 관찰하여 멸(滅)ㆍ정(靜) 등[의 행상]과 도(道) 등의 행상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역시 여덟 가지의 차별을 성취한다. 멸류지는 8지(地, 4정려와 4무색정)의 멸제 각각을 개별적으로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滅ㆍ靜ㆍ妙ㆍ離)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서른두 가지를 성취하며, 도류지는 8지의 도제를 모두 총체적으로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道ㆍ如ㆍ行ㆍ出)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네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니, 8지의 번뇌를 대치하는 유지품(類智品)의 도는 동류(同類)로서 서로의 원인이 되어 필시 그 모두를 반연하기 때문이다.62) 즉 멸류지는 오로지 [각각을] 별도로 반연하지만 도류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수면품」에서 이미 모두 성립시켰다.63)
이처럼 미지정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 쉰두 가지가 있듯이, 정려중간과 4정려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공무변처(空無邊處)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스물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쉰두 가지 중에서] 멸ㆍ도의 법지품 여덟 가지를 제외하고, 아울러 아래 네 [정려]지(地)의 멸제 각각의 네 행상(滅ㆍ靜ㆍ妙ㆍ離)에 대한 관찰을 제외한 것과 상응하는 [금강유정이] 바로 그것이니, 무색계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에는 필시 법지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울러 하지(즉 4정려)의 멸제를 반연하는 유지품(즉 멸류지)도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의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이치상 어긋남이 없으니, 도제는 [8지의] 총연(總緣)이 된다고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경우는 앞의 경우(미지정)와 동일하기 때문에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스물여덟 가지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식무변처(識無邊處)에 포섭되는 것에는 스물네 가지가 있으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것에는 오로지 스무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앞의 [공무변처의 스물여덟 가지에서] 다시 하지의 멸성제의 경계인 네 행상과 여덟 행상에 대한 관찰을 제외한 것으로, 그 순서에 따라 앞의 경우에 준하여 마땅히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64)
그런데 여러 유정들 중에는 3무색정의 단계[地]에도 하지의 멸제를 반연하는 유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앞에서 말한 것(28가지)에 열여섯 가지(4정려지 각각의 멸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것)를 더한 것이 존재하고, 식무변처의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것(24가지)에서 스무 가지(4정려지와 공무변처의 멸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것)를 더한 것이 존재하며, 무소유처의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것(20가지)에 스물네 가지(4정려지와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의 멸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것)를 더한 것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설하면, 무색정의 단계에 근거하는 금강유정에는 일흔 두 종류가 존재한다.65) 혹은 다시 백서른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66)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도류지(道類智)의 품류는 8지(상2계)의 도제에 대해서도 역시 각기 별도로 관찰하기 때문에 앞의 6지(미지정ㆍ중려중간ㆍ4정려)에 각각 여든 가지가 존재하고,67) 공무변처에는 오로지 마흔 가지가 존재하며, 식무변처에는 서른두 가지가, 무소유처에는 스물네 가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멸류지의 품류는 8지의 멸제에 대해 개별적으로 관찰[別觀]하는 경우도 있고 전체적으로 관찰[總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앞의 6지 중에 각각 백예순네 가지가 존재하며,68) 공무변처에는 오로지 쉰두 가지가 존재하고, 식무변처에는 서른여섯 가지가, 무소유처에 스물네 가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도류지 반드시 [8지의 도제를] 전체적으로 반연[總緣]하지만, 멸류지는 개별적으로 반연한다”고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기 때문이다.69)
그리고 존자 묘음(妙音)은 이와 같이 설하였다. “금강유정에는 모두 열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정지(有頂地)의 견ㆍ수소단의 혹을 끊는 무간도에 포섭되는 열세 찰나가 바로 그것이다.”70)
그러나 이 역시 옳지 않으니, [견혹을 끊는 고ㆍ집ㆍ멸ㆍ도의] 네 가지 유지인(類智忍)과 [수혹을 끊는]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즉 하하품에서 상중품)는 극상품(極上品, 즉 상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진지(盡智)와 아라한과(阿羅漢果)
이러한 선정(금강유정)은, 이미 유정지(有頂地) 제9품의 혹(惑)을 능히 끊었으므로 이러한 ‘번뇌 멸진[惑盡]’의 득(得)과 구행(俱行)하는 진지(盡智)를 능히 이끌어내어 일어나게 한다.71) 즉 금강유정은 바로 이러한 단혹(斷惑) 중의 최후의 무간도이며, [이러한 도에 의해] 생겨난 진지는 바로 단혹 중의 해탈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정에 의해 인기된 진지는 제9품의 번뇌 멸진의 ‘득’과 구행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이러한 ‘멸진[盡]’이라는 말은 일체의 [번뇌의] 멸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제9품이나 그 밖의 혹에 대해 모두 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멸진’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즉 금강유정은 온갖 번뇌 멸진의 ‘득’과 구행하는 진지를 능히 이끌어내어 일어나게 하였으며, 이것은 일체의 번뇌 멸진의 ‘득’과 최초로 구생(俱生)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72)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번뇌가 멸진하여 소의신 중에 이것이 최초로 생겨났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였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은 진지가 이미 생겨난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바로 무학(無學)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하니, 이미 무학의 응과법(應果法)을 획득하였기 때문으로,73) 또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해 마땅히 닦아야 할 학(學)이 여기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학’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74)
어찌 무학 역시 별도의 다른 과위[別果]를 희구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학의 성자도 역시 근기를 바꾸기[轉根] 때문이다.75)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이러한 [무학의] 단계에서는 일찍이 유학이 별도의 다른 과위를 희구하여 획득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류과는 일래과 등이 아니며, 그 후 일래과 등을 획득하였을 때 예류과 등의 명칭을 버리고 일래과 등이라는 명칭을 얻듯이, [그들은] 모두 별도의 과위를 버리고서 별도의 다른 과위의 명칭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 경우(무학의 아라한)는 그렇지 않다. 퇴법(退法)은 사법(思法) 등이 아니며, 그 후 사법 등을 획득하였을 때 비록 퇴법 등의 명칭을 버리고 사법 등의 명칭을 획득할지라도 [그들이] 별도의 과위를 버리고서 별도의 다른 과위의 명칭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니, 전자든 후자든 모두 아라한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앞의 과위를 버리고 별도의 다른 과위를 획득할 때, 앞의 과위의 명칭을 버리고 별도의 다른 과위의 명칭을 획득한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마땅히 배워야 할 별도의 과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학’이라 이름한 것으로, 앞의 해석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즉 향[도](向道)를 행하는 앞의 과위에 머무는 자가 별도의 다른 명칭의 과위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뜻이 없는 것이다.76)
2-1) 유학과 무학
진지(盡智)가 이미 생겨난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바로 무학의 아라한과를 성취한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이러한 뜻에 준하여 진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인 앞의 일곱 성자를 모두 ‘유학’이라고 이름하니, [그들은] 별도의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학(學)을 수습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성자의] 본성의 상태[本性位]에 머무는 이거늘, 어찌 유학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배우려는 뜻[學意]이 아직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학법(學法)의 ‘득’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이다.77)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무학을 아라한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온갖 자리(自利)의 행과, 학(學)을 수습하는 것이 이미 성취되어 [이제] 오로지 마땅히 다른 이에게 이익 되는 일만을 행하기 때문이니, 예컨대 계경에서 “스스로를 조복(調伏)시키지 않고서 능히 다른 이를 조복시키는 이 같은 일은 어디에도 없다”고 설한 바와 같다.
혹은 세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이생(異生)과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이 바로 그들이다. [이 중의] 이생은 비록 계ㆍ정ㆍ혜의 3[학]을 배웠을지라도 여전히 능히 진리[諦]를 참답게 관찰하지 못할 뿐더러 바른 학[正學]을 버리고 삿된 학[邪學]을 짓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유학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온갖 유정으로서 이미 능히 진리를 참답게 관찰하고 바른 학에서 물러남이 없는 이를 ‘유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세존께서는 유학자(有學者)에 대한 결정적인 뜻을 나타내기 위해 ‘학’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여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부처님이 담파(憺怕)에게 “마땅히 배워야 할 바를 배워라. 마땅히 배워야 할 바를 배우는 이, 나는 오로지 이러한 자만을 설하여 유학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78)
그리고 계ㆍ정ㆍ혜의 3[학]을 이미 잘 배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모든 이를 ‘무학’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들은 바로 일체의 유학과 이생으로부터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하기 때문에 ‘응공(應供, 즉 아라한)’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계ㆍ정ㆍ혜 세 가지에 대해
만약 이미 잘 닦고 배웠다면
필경 근심의 때[憂垢]를 여의었을 것이니
세간의 복전(福田)이 되기 충분하다네.
그렇다면 학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유학의 성자가 획득한 무루의 유위법을 말한다.
무학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무학의 성자가 획득한 무루의 유위법을 말한다. 그러나 [열반 등의] 온갖 무위법은 비록 무루일지라도 유학법이나 무학법이라고는 이름하지 않으니, [그들에게] 획득된 것이라면 이생 등의 소의신에도 역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며, 만약 획득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유학과 무학에게 계속(繫屬)되지 않기 때문이다.79)
이와 같은 유학과 무학의 성자에는 모두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보특가라가 성취되는데, 향을 행하는 자[行向]와 과위에 머무는 자[住果]에 각기 네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80) 그러나 명칭상으로는 비록 여덟 가지가 있을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오로지 네 가지 과위에 머무는 자와 초과향(初果向, 즉 예류향)의 다섯 가지만이 있을 뿐이니, 뒤의 세 가지 과위의 향(向)은 앞의 과위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점차적으로 과위를 획득하는 자(즉 次第證)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며, 만약 배리욕(倍離欲)과 전리욕(全離欲)의 성자라면 견도위 중에 머물 때 일래과향과 불환과향이라고 이름하지만, 앞의 과위(즉 예류과와 일래과)에 포섭되지 않는다.81)
어떠한 까닭에서 진지는 오로지 무학에 [포섭된다는] 것인가? 유학의 성자도 역시 “나는 이미 지옥 등을 영원히 다하였다”고 스스로 알기 때문에 [유학에도 포섭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번뇌] 멸진의 득(得)과 구행하는 것을 바야흐로 진지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82) 즉 예류과 등의 계위에는 여전히 번뇌가 남아있어 이미 [번뇌] 멸진의 ‘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역시 또한 진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계경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온갖 유학의 성자는 8지(支)를 성취하지만, 만약 10지를 성취한 이라면 아라한이라 이름한다.”8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존자 사리자(舍利子)는 대장자(大長者) 급고독(給孤獨)에게 “그대는 이미 정지(正智)와 정해탈(正解脫)을 모두 성취하였다”고 말한 것인가?
[이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으니, 그가 능히 온갖 악취로 나아가는 사지(邪智)와 사해탈(邪解脫)을 성취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참된 대치도를 밀의(密意)로서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유학은 10지(支)를 성취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
무지(無智)가 남아있기 때문에 마음이 완전하게[善]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8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경에서는 “온갖 유정으로서 불정증(佛證淨)을 성취하는 자는 모두 다 이미 정견(正見)을 획득한 자이며, 내지는 이미 정해탈을 획득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
견(見, 즉 성제현관)이 원만한 자에 대해 이와 같이 설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어긋남도 과실도 없다.85)
그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모든 유학의 성자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지와 정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는 [정지와 정해탈의] 갈래를 설정하지 않는다”고만 설하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갈래를 설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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