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격려 - 이케다 SGI 회장과 서원(誓願)의 동지 (25)
생명으로 이어진 도쿄 오타
〘도쿄 오타〙
“오늘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도 정겨운 고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케다(池田) SGI 회장이 도쿄 오타의 동지에게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1973년 4월 29일, 도쿄 오타구체육관(당시)에 벗 5000명이 모였다. 이날의 기념촬영으로 ‘오타의 날’이 생겼다.
먼저 부인부가 촬영을 시작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자리에 앉자 정장 주머니에서 하얀 종이를 꺼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짧은 시를 지었습니다.”
“아내는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짓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말했지만요.”
SGI 회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운 / 고향의 벗들과 / 촬영회.’
‘고향에 / 광포의 원점 / 화창한 5월.’
‘어느 곳보다도 / 생명으로 이어진 / 오타로구나.’
잇달아 읊는 짧은 시는 열 마디나 되었다. 센류(川柳,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5·7·5 조의 정형시)도 ‘덤’으로 한 구절 선보였다.
오타는 신주쿠구 시나노마치로 이사 오기 전까지 메구로구 미타에서 몇 개월 살았던거 빼곤 거의 38년을 보낸, 청춘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전쟁의 참화를 모두 보았다. 또 스승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과 만나 광선유포의 첫 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2월 투쟁’을 지휘했다. 그리고 세계광포를 향한 여행길에 오른 곳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지야에서 가까운 하네다공항이었다.
원점의 형제회
SGI 회장이 촬영회에서 청년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후계자가 되어 학회를 지탱하고 광선유포 투쟁을 이진삼진으로 계속 이어갔으면 합니다.”
‘오타형제회’는 이날 모인 청년부와 미래부에서 시작된다.
그중 한 사람이던 히라무키 마사나오(오모리정의권 지부장) 씨가 말한다.
“그날부터 오타에서 투쟁하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느꼈습니다.”
마사나오 씨는 홋카이도의 몬베스군 출신으로 생후 18개월 때 열차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리고 열한 살 때 입회해, 가난이라는 깊은 숙명과 싸우며 열심히 광포에 앞장서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1972년 스물한살 때 오타구의 히가시고지야로 이사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공장이 많아서 오후 8시 정도만 되도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좋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촬영회로 확 달라진다.
“선생님은 정말로 기뻐하셨습니다. 할머니와 행사 담당요원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습니다.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가족 같은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지도자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미사나오 씨는 SGI 회장이 지은 시를 입으로 계속 외었다.
“그때마다 오타를 생각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올해로 오타형제회 결성 42주년을 맞았다. 지방공무원으로 일하며 경제혁명도 이뤄 자택을 광포의 거점으로 제공하고 있다. 학회가 ‘바닷가에서’를 대표하는 오모리의 땅을 광포의 무대로 지부부인부장을 맡은 부인 유코 씨와 함께 힘차게 달린다.
장남 나오키 씨와 장녀 요시코 씨는 소카(創價)대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또 차남 마사키 씨는 SGI 회장의 모교인 도쿄후지대학교를 다닌다.
“세 아이 모두 어려서부터 선생님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공덕입니다.”
“스승과 우리는 깊은 생명의 유대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을 확신한다면 굉장한 힘을 낼 수 있다고 42년 전,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히라무키 씨의 감사는 그칠 줄 모른다.
고바야시초의 추억
SGI 회장 부부는 1955년 6월부터 11년 동안 고바야시초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았다. SGI 회장은 이곳을 ‘항구’로 삼아 ‘오사카 투쟁’, 제3대 회장의 취임 그리고 세계광포의 여행길을 나섰다.
요시카와 노부코(가마타상승권 지역부부인부장) 씨는 옆 동네인 미치즈카초에 살아 SGI 회장 부부가 이사 온 때의 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1956년 3월, 당시 블록제를 실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반장이던 남편 도미조(작고) 씨에게 이케다 SGI 회장 부부의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카드가 도착했다.
“정말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입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케다 다이사쿠’라는 사람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습니다.”
부부는 수요일마다 열리는 좌담회에 초대하려고 SGI 회장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당시 청년부 실장이던 SGI 회장은 집을 비웠고 가네코 여사가 맞아주었다.
도미조 씨가 “남편분은 안 계신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가네코 여사가 “남편은 바빠서요-” 하고 대답했다.
도미조 씨가 말했다.
“바쁘시겠지만 남편분에게도 좌담회에 나와 달라고 전해 주세요.”
노부코 씨는 회상한다.
“정말로 말도 안 되죠. 하지만 사모님은 굉장한 분이셨습니다. 방긋 웃으시며 ‘알겠습니다. 남편에게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방문하자, 가네코 여사가 “오늘은 남편이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하며 부부를 방으로 안내했다.
“남편은 어떤 분일까 궁금해 하며 기다리자 선생님이 나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좌담회에 초대해 준분들이십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럼 참석하지요. 다음 주 수요일은 힘들지만 그 다음 주 수요일에는 가능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사카 투쟁’이 한창일 때였잖아요. 죄송하기도 하고, 면목이 없었습니다.”
SGI 회장은 약속대로 4월 4일 네기시 준에(가마타상승권 부지부장) 씨 집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날 모인 장년부 일곱 명을 격려했다. “광선유포의 ‘일곱 무사’가 되어 요시카와 도미조 반장을 도와 단결해 싸워주세요.”
노부코 씨가 이어 말했다.
“실은 선생님을 처음 댁에서 뵈었을 때 선생님이 저에게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제목을 적게 부르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목을 많이 불렀으니까요. 그러나 선생님은 가난으로 비굴하고 약한 저의 일념을 꿰뚫어 보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59년에 일어난 일로 그 지도의 의미를 알게 된다. 여섯살인 장녀 게이코 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에 빠진다. 가네코 여사가 노부코 씨를 찾아왔다. “제목을 부릅시다! 남편에게도 전하겠습니다.”
이튿날 찾아뵙자 “요시카와 씨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리고 의연히 말했다. “남편이 ‘이 정도의 일로 신심의 길을 멈추면 안 됩니다’라는 전언을 주셨습니다.”
노부코 씨는 말한다.
“정말 놀랐습니다. 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 후 3일 동안 처음으로 진지하게 제목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딸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일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신심 덕분이다. 선생님과 사모님 덕분’이라는 확신에 불타 절복에 도전하고 학회를 위해 활동하며 뛰어다녔습니다.”
노부코 씨의 회상은 계속 되었다.
“저는 자주 사모님께 ‘가정방문을 함께 가주세요’ 하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면 늘 사모님은 흔쾌히 ‘갑시다’ 하며 앞치마를 휙 벗으셨습니다. 한 번도 바쁘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1979년 SGI 회장이 제3대 회장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분하고 슬퍼서 가네코 여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놀라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오타구 그리고 고바야시초와 미치즈카초가 ‘고향’입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신심근본으로 학회를 지키고 가정이 번영하고 활약하시길 기원 드리겠습니다.”
그 후 2000년 11월 18일 도미조 씨가 작고했다. 학회창립기념일의 아침은 하늘이 활짝 개어 있었다.
“좋은 날씨로 ‘11·18’을 축하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노부코 씨가 병실에서 잠든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도미조 씨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과 사모님의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돼요. 평생 잊어서는 안 돼요.”
도미조 씨는 마지막까지 계속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래요. 그럼 좀 쉴께요.”
도미조 씨는 그대로 잠이 들듯 숨을 거두었다.
2000년 5월, SGI 회장은 고바야시초의 추억을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썼다.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학회원 부부가 사셨다. 비 때문에 집 앞길에 물이 넘치거나 할 때는, 걱정해서 자주 상황을 살피러 와주셨다. 우리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고마운 동지이다.”
요시카와 씨 부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2002년 8월에는 시를 받았다.
“청춘의 그날 그때
우리 집을 지킨 그대들을
어찌 잊으리.”
SGI 회장 부부는 오타의 일을 잊지 않는다. 함께 싸운 동지를 잊지 않는다.
고향의 모든 벗이 행복을 즐기며 상쾌하게 승리의 깃발을 내거는 날을 믿고 기다린다.
태양의 격려 (25) 생명으로 이어진 도쿄 오타.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