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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어산 만어사(萬魚山萬魚寺)
-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용산리
만어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엔 2km 가량 걸었다. 지금은 절까지 포장되어 있고 주차장도 있다.
만어사는 가람이 큰 편이 아니다. 일주문, 천왕문, 보제루 등이 갖추어진 가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절이다.
밀양에는 3대 불가사의가 있다.
한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나라에 위기가 오면 땀을 흘린다는 사명대사비, 바위를 치면 종소리가 나는 종석이다.
그 종석이 만어사에 있으며, 사찰의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요소가 있다.
코로나19로 갑갑한 상황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찰엔 많은 관광객이 있다. 일요일이다.
<만어산 만어사>가 아니고 <자성산(慈聖山) 만어사>이다. 삼국유사엔 <자성산(慈成山)>으로 나온다.
주차를 하고 올려보니 감나무가 하늘을 덮었다. 까치밥을 넉넉히 남겨 놓았다.
범종각
대웅전 마당이다. 대웅전, 삼성각, 석조 약사불, 삼층석탑 등이 보인다.
삼층석탑 / 보물 제466호.
고려 중기의 석탑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 명종 11년(1181)에 만어사 창건 시 건립되었다.
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나 안정적인 비례와 균형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안내판에서 발췌)
대웅전 마당, 느티나무 아래에 타원형의 돌이 있다.
소원을 빌기 전에 들어본 후 소원을 빌고 든다. 만약 들리지 않으면 빈 소원이 이뤄질 것이라 한다.
호기심에 많은 관광객들이 불전함에 1,000원을 넣고 들어보기를 한다.
남자들은 대체로 다든다. 여자들은 거의 들지를 못 한다.
소원, 사람의 욕심이 아닐까? 그렇지만 소시민이 갖는 소원이야 소박함이니 인정으로 봐주는 것도 좋다. 기분이다.
자연석에 아미타불을 새겼다. 10년 이내에 제작되었다.
미륵전 가는 길에 돌무지를 만난다.
만어사 암괴류 / 천연기념물 제528호, 종석(鐘石)
폭 100m, 길이 500m라고 한다. 만어산엔 이런 암괴류가 곳곳에 있다.
바위를 두드리면 종소리가 나는 돌이 있다. 어느 한 바위에서만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 나는 것도 아니다.
미륵전.
미륵전 안에는 큰 바위가 있다. 마애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미륵불로 여긴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 5m 크기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되어 있다.
만어산은 옛날의 자성산 또는 아야사산(마땅이 마야사라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물고기를 말한다)이니,
부근에 가라국이 있었다. 옛날에 하늘에서 알이 해변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바로 수로왕이다.
당시 나라 안에 옥지가 있었는데, 연못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는 나찰녀 다섯 명이 독룡과 오가면서 사귀었기 때문에
이따금 번개가 치고 비가 와서 4년이 지나도록 오곡이 영글지 않았다. 왕은 주술로 막고자 하였으나 못 하고,
머리를 조아려 부처께 청하여 설법을 한 연후에 나찰녀가 오계를 받아 이후로 폐해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바위로 변하여 골짜기에 가득 찼는데, 각기 쇠북과 경쇠 소리가 났다.
또 살펴보면 대정 20년 경자년(1180)에 처음으로 만어사를 세웠다.
(중략)
가자함(可子函)의 관불삼매경 제7권에 말했다.
(중략)
-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어산불영(魚山佛影)
위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사찰은 수로왕이 창건하였다.(42년~200년) 또는 대정 20년(1180) 창건되었다.
수로왕의 창건 설화는 '가자함의 관불삼매경 제7권'에 나오는 내용과 대동소이한다.(삼국유사)
대정은 중국 금나라 어느 시기 황제의 연호이고, 대정 20년이며 고려 명종 10년이다.
'가자함 관불삼매경'은 검색하여도 나오지 않는다.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일까?
가락국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가락국에 대한 기록은 중국이나 일본에 있다.
가락국에 대한 여러 서적을 읽었지만 상상이나 추측이 많다. 요즘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이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니
어느 시기엔 잃어버린 가야사를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
가락국과 불교에 대한 사료도 거의 없다. 가락국이 있었던 김해지역에 사찰과 관련된 유물이 나온 것이 없다.
그러나 가락국 때 건립되었다는 사찰은 많다.
가락국과 관련 된 사찰, 김해 은하사, 해은암, 장유사, 모은암, 자은암 등 이며 밀양 삼랑진에는 부은사(암), 만어사이다.
지리산 또는 가야산 칠불암도 관련이 있으나 지리적으로 가락국과는 멀다. 지리산에 칠불암(사)이 있다.
천태산 부은사(天台山父恩寺, 태고종)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안태리
천태산 중턱에 있는 부은사, 최근까지는 부은암이었다.(3~4년 되었을까?)
주차장까지 차로 올라오지 않았다. 입구에 차를 대고 400m쯤 걸어 올라왔다.
주차장에서 본 부은사.
부은사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가 1점 있다. 석조 아미타불 좌상이며 요사채 겸 종무소로 사용하는 건물 안에 있다.
아래 약사여래불은 근래 제작되었겠다.
처음 접하는 내용이다. 이런 돌이 국내에서 나지 않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돌은 파사석탑이 들어올 때 같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돌을 근거로 부은사는 '가야 사찰'이며 AD 200년 경에 지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각은 근래 건립되었다. 원래 절은 다른 곳에 있었고 근래 복원하였다고 한다.
천불보전 내부에 선사들의 영정,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도 있다.
2대 거등왕이 부친의 은혜를 기려 지은 사찰이니 당연히 수로왕의 영정이 있어야 한다.
포대화상
마애불 옆으로 '마고석굴'로 오르는 길이 있다. 가는 길에 본 경치이다. 아직 3~40분 남았다.
마고석굴,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와서 수행하였다고......근거가 뭘까? 그냥 전하는 이야기일까?
내려오는 길에 조금 다른 장소에서 일몰을 봤다.
천불보전 뒤에서 본 일몰. 부은사은 일몰 감상의 포인트인 모양이다. 여러 사진가가 해넘이를 촬영하고 있다.
삼랑진의 다리들 위로 해가 넘어가는 시점을 맞출 수 있다면 좋겠다.
용왕당과 산신각
관음전은 주차장 아래에 있다.
이 건물이 가장 오래되어 보인다. 사용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자물쇠가 걸려있다.
영안당, 뭐하는 건물이지?
부도탑이 몇 기 있지만 모두 근래 제작된 것이다. 1기만 빼고.
석종형, 이에 대한 설명은 없다. 조선 말기의 어느 승려의 사리탑일까?
'부은암'은 가락국 제2대 거등왕이 부왕인 수로왕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찰이라 한다.
김해 무척산 중턱의 '모은암'은 거등왕이 모친인 허왕후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찰이라 한다.
김해 진영읍 자암산 자락에 '자은암(자암?)'이 있다. 거등왕 자신을 위해 지은 사찰이라 한다.
부은암을 검색하여 블러그와 카페 글을 읽었다. 백과사전인 대한민국구석구석, 위키백과 등도 읽었다.
다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근거가 없다.
위 부은사, 모은암, 자은암을 가야 3대 사찰이라 하는 것 같다. 또 해동 제일 보은 사찰이라 한다.
가락국과 관련된 사찰은 김해 신어산 중턱의 은하사, 김해 불모산 아래 장유사, 지리산 칠불암, 김해 분산성 해은사,
밀양 만어사와 부은암 등등 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찰은 '만어사', '왕후사'와 '호계사'로 안다.
가락국이 있었던 지역에 사찰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된 적이 아직까지 없다. (어느 교수의 가야 역사서)
가락국은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락국에 불교가 언제 전해졌는지도 모른다.
42년 건국, 48년 허황옥이 인도에서 오면서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장유화상에 대한 기록(월명사사적기)은 1700년 대 월명사 중수기에 나온다. 월명사가 지금 어디인지 모른다.
장유화상에 대한 기록은 장유화상 사립탑에 적혀져 있다. 이 사리탑은 1900년 대 초 건립, 장유화상이 허황옥의 동생.
은하사 판각에 장유화상은 허황옥의 오빠이며 은하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은 모두 1,500년이 지난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도 당시 자료나 전승된 이야기로 기록하였다.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쓰지?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또한 사찰의 창건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지 못 하다.
어느 학자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후대에 각색된 것이 많다고 한다.
요사채 안에 있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인 <석조 아미타불 좌상>을 보려고 기웃거렸다.
"들어 오세요."
그래서 얼른 신발을 벗고 요사채에 들어갔다. 요사채에 삼존불이 있는 곳을 본 적이 없다. 문화재 보호 때문일까?
"스님, 문화재인 불상은 어디 있습니까?"
"성인을 보고 절도 안 하고 뭐 하러 왔노!"
들어오길 권한 나이 드신 승려께서 내게 버럭 화를 내신다.
"스님, 저는 사람에겐 절을 하지만 물상(物像)에는 절을 하지않습니다."
"잘 안 들린다. 크게 이야기해라."
그래서 큰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보청기를 끼고 계신데 80이 넘어보인다.
순간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미안합니다. 가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는데 젊은 승려(40대 초반으로 보인다)가 나와 문화재를 가르쳐 주었지만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는 나에게 젊은 승려는 양해를 구한다. 인상이 좋아 나쁜 기분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절을 나와 내려가는 발걸음이 즐겁지 않다. 인연이 있어 나는 그 요사채로 갔고, 인연이 있어 들어오길 권함에 따라 들어갔다. 믿는 자에겐 목불이든 석불이든 그 형상이 성인인 석가불이겠지만 믿지 않는 나에겐 그저 조각품일뿐이다. 그 불상에 절하든 안 하든 그건 늙은 승려가 간여할 바가 아니다.
오늘 나는 화를 냄으로 악업을 쌓았고 늙은 승려 또한 간섭함으로 악업을 쌓았다.
15년 전, 선배와 동행하여 어느 암자에 간 적이 있다. 선배는 그 암자의 화주이다. 선배 덕에 암자의 주지와 발우공양을 하였다. 처음 해 봤다. 공양이 끝나고 차담이 이어졌다.
"처사님은 왜 불전에 참배하지 않습니까?"
"예,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이 지났고 선배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나는 주지에게 물었다.
"신도가 없을 때 불전에서 뭐 하십니까?"
"불경도 읽고 성경도 읽습니다."
"스님은 신자들 없을 때도 불상에 절을 합니까?"
"안 합니다. 목조각품에게 왜 합니까?"
선배가 들어와 가자고 하여 나왔다.
석가불은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참배하지 말라고. 부처는 마음에 있는 것이고 마음에 있는 부처를 봐야지 나를 형상화한 부처를 보면 마음의 부처를 못 본다고.
그렇지만 사람들은 석가불을 신으로 만들었다. 석가불은 신이 아니다.
얼마 전, 미국인 승려 현각은 한국 불교에 실망하여 떠났다고 했다.
고려 시대에도 '기복신앙'이 되어버린 불교에 실망하여 정화 운동을 하였던 유명한 승려가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나 개신교는 '기복신앙'이 진실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를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토템 신앙'이라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삼랑진시장에 오니 시장은 파했다.
'뻥튀기'를 살까 했는데 아쉽다.
낙동강 둑길을 따라 걸었다.
부은사 뒷산에 달이 걸려있다.
초겨울, 낙동강 찬바람에 떨고있는 달을 위해 즐거운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나는 춤을 추었다.
<Sugar, Sugar>
김해 생림면과 밀양시 삼랑진읍 간엔 다리가 있다. 하나는 기차가 다녔고 또 하나는 사람과 차가 다녔다. 왜정 시대 지어진 다리이다. 지금은 새론 철교와 대교가 생겼다.
부은사에서 본 해넘이.
2020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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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受戒)
:부처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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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이 올바르게 쓰인 겁니까?
수계(受戒)하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을 받다.
(DAUM-국어사전)
수계를 주는 사람
수계를 받는 사람
수계를 하실 스님께서 입으실 금란가사를 잘 모시고 간다.
(불교방송 , 팔관회 행사 진행 과정을 설명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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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지식으로 다시 쓰면,
'수계하다'는 아예 성립될 수 없다.
'계를 받다'라고 하면 된다.
계를 주는 사람
계를 받는 사람
계를 주실 스님께서 입을 금란가사를 잘 들고간다.
(금란가사는 무생물로 인격체가 아니다. 이를 모신다고 표현함은 과잉이 아닐까?)
첫댓글 부은사는 못 가봤네... 언제 한번 가 보고 싶다,,,
지기님 덕에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언제 함 가보소,,,천태산 산행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