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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오후 두물머리에서 설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돌아온 백형기는 밤10시 서울역에서 그녀를 전송했다. 형기는 그날 밤 새벽녘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 사월 초파일 다음날이지.’ 형기는 설자 생일을 소홀히 한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축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문제와 목회지 결정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과제였다. 이제 주어진 과정을 밟아 가면 새 가정은 이루어질 것이지만 목회지는 달랐다. 신학생들은 가끔 목회지 선정도 시험을 쳐서 합격 여부가 판가름 나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목회자의 자녀이거나 현장의 목회자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적절한 목회지로 이끌림을 받았다. 형기에게는 지금 교육전도사로 일하는 교회 외에는 가까운 목회자 선배가 거의 없었다. 선배들에게 목회지를 부탁해도 잘 성사되지는 않았다.
백형기는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새해 연휴에 고향을 다녀온 이후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임지가 확정되었다면 설자와 데이트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새해 들어 둘째 주일 오후에 담임목사는 백형기를 목양실로 불렀다.
“부모님은 다 평안하시던가?”
담임목사는 고향 안부를 먼저 물었다.
“예, 이번에 가서 성탄절에 우리 교회에 왔던 아가씨와의 결혼을 허락받았습니다.”
“잘 됐군! 그 아가씨는 무슨 일을 하는가?”
“간호사입니다.”
“간호사라면 목회에도 도움이 될 거야. 목회는 환자를 돌보는 것 못지않은 정성과 사랑이 필요한 거니까.”
“아직 목회지가 결정되지 않아 마음이 복잡합니다.”
“그 일 때문에 부른 거야. 서울 화평교회 친구가 수원 신도시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좋은 목회자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했어. 백 전도사가 좋을 것 같아 뜻을 물어보는 것이야.”
“신도시 지역은 목회자들이 모두 선호하는 곳이지요. 교회가 밀집한 지역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그 교회 관계자를 연결해 줄 테니, 현장을 둘러보도록 하게.”
백형기는 이튿날 화평교회 선교부장과 함께 수원의 교회 개척 후보지를 둘러보았다. 이미 그 지역은 교회 십자가가 여기저기 많이 세워져 있었다. 화평교회가 선정한 곳 맞은편 상가건물에도 개척교회가 입주해 있고 몇 집 떨어진 곳에도 교회 종탑이 보였다. 동행한 선교부장은 가까운 곳에 여러 교회가 세워져 있어도 교단이 다르기 때문에 상관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좋은 자리라서 충분한 예산을 들여 교회당을 건축하기만 하면 우리 교단의 교세 확장에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그때는 교단마다 교세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개척교회가 상가건물이나 지하층에서 시작하는 경우와는 달리 처음부터 완전한 건물을 신축한다는 것은 목회자에게는 여간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우리 교회 당회장 목사님으로부터 백 전도사님이 좋은 분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전도사님만 좋으시다면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선교부장은 백 전도사의 뜻을 물었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좋은 지역입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을 통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는 적절한 곳에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자립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큰 교회가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작은 교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숙사로 돌아와 채플 실에서 기도를 계속하며 생각해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건너간 슈바이처를 생각하며 교회끼리 경쟁하는 자리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마음에 들던가?”
그다음 주일 오후에 담임목사가 물었다.
“예, 개척 후보지로서는 좋은 지역이고 지원하는 교회도 처음부터 완전한 건물을 세워서 출발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만 바로 맞은편과 옆으로 가까운 곳에 타 교단에서 개척한 교회들이 몇 개 보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한곳에 교회가 많다고 하지만 1개 교회가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비하면 대도시 지역은 같은 면적에 10개의 마을이 들어섰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인구 밀집 지역에 교회가 많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목회자가 도시지역과 시골지역 가운데 어느 쪽을 선호하는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겠지. 자네를 설득할 마음은 없네! 내가 백 전도사를 잘 아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이번 주간에 가부를 결정해주면 좋겠네.”
백형기는 담임목사의 배려에 답을 하지 못하고 며칠을 지냈다. 그러면서 나를 신도시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나의 불순종이거나 인간의 의지를 너무 앞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괴로워했다. 방학 중에 기숙사에 머물러 있는 신대원생은 모두 1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낮에도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백형기가 내일 오후 부산에서 설자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기숙사 로비에 혼자 앉아 이광희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회지 결정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이때 관리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신학교 기숙사입니다.”
백 전도사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는 부산인데요, 혹시 백형기 전도사님 계십니까?”
전혀 낯선 음성이었다.
“예, 제가 백형깁니다.”
“저는 부산 대영교회 한승호 목삽니다. 전도사님이 1학년 때 한 학기 동안 옆방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네, 한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언제 부산으로 가셨습니까?”
“졸업 후 바로 내려와 대영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지금은 부목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백 전도사님은 어디로 목회지가 결정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기도하며 찾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3년 전에 창립 50주년을 맞아 마산 개발지역에 기념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여건이 어렵기 때문인지 후임 교역자를 아직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백 전도사님이 농촌교회에 관심을 보이던 생각이 나서, 아직 목회지를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떨까 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제저녁에도 전화 받은 분이 방송을 하더니만 전도사님이 안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어제는 제가 외출했다가 밤 11시쯤 들어왔습니다.”
“여전히 농촌목회에 뜻이 있으시면 그 교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는 농촌목회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목회지를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둘러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언제쯤 오실 수 있겠습니까?”
“마침 내일 저녁때 부산에서 약속이 있습니다. 오전 11시쯤 교회에 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이튿날, 백형기는 오전 11시 30분께 대영교회 담임목사를 만나 인사를 드리고 한승호 목사와 함께 마산으로 향했다. 시골 마을 창원을 벗어나 마산시에서 진해 쪽으로 산모롱이를 몇 개 돌았다. 남쪽으로 나지막한 산이 있는 들판에 조그만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소곳한 초가집들 옆으로 현대식 슬래브 집들이 한창 들어서고 있는 마을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산자락 쪽으로 공터를 끼고 자리한 부지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아담한 교회당과 철골 종탑이 서 있고 ‘갈릴리교회’란 간판도 보였다.
“저 교회입니다. 아직은 불비한 것이 많습니다.”
한 목사와 백 전도사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교회당이 참 아름답습니다!”
백 전도사는 시골교회라면 다 쓰러져가는 낡은 목조건물을 연상했다. 그의 고향교회는 윗마을 교회당을 신축하면서 헐어 낸 자재를 가져다 세웠기 때문이다. 갈릴리교회당 옆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내가 있고 교회 뒤쪽에는 잔솔이 우거진 동산이 있었다. 용마산이라고 했다. 백 전도사는 한 목사를 따라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먼지가 자욱한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잠시 기도하고 예배당 안을 살펴보았다. 양쪽 벽면에는 덮개가 씌워진 선풍기가 2개씩 달려 있고 뒷벽 쪽에는 방석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음향시설도 잘되어 있다고 했다. 피아노가 놓여있는 강대상 쪽 옆문을 열어보니 교회당에 붙여 지은 서재 겸 사무실이었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사택과 화장실도 따로 세워져 있었다. 교회 앞에는 기존의 집들과 매립으로 조성된 택지에 띄엄띄엄 시멘트블록 집들이 들어서 있고, 나머지 땅은 논밭이었다. 백 전도사는 이처럼 조용한 시골 마을에 아름다운 교회당이 세워진 것에 감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전도사님, 교회를 둘러보니 어떻습니까?”
한 목사가 백 전도사의 의향을 물었다.
“목회자가 없는 곳이라니, 제가 바라던 곳입니다.”
“우리 교회는 백 전도사님 같은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신대원 졸업생들은 지방으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농어촌교회 교역자 청빙에는 더욱 어려움이 많습니다. 지난해부터 농어촌목회 지망자를 조기에 안수하여 파송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그 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올해 졸업생들 가운데도 농어촌교회 희망자는 전무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교가 대신 불렀던 찬송가에서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란 고백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최근 일부 신학교 지망생들 가운데는 목회를 마치 일반 직장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분들은 신학생이 급증하는 현상을 두고 미래의 북한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목회자 배출만 많아진다면 신학교 스스로가 목회자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불러오겠지요.”
“지금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도시교회에서 목회자 청빙 광고가 나오면 이력서가 100통이 넘게 들어온다고 하잖아요. 이제는 교인들이 청빙 하는 목회자의 면접시험을 보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력서 심사를 통해 뽑힌 4~5명을 차례로 초청해 주일마다 설교를 들어보고, 비교해보고−. 한차례 설교라면 누구나 잘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목회자를 가려서 뽑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이 있는 교회에서는 두루 존경을 받는 목회자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그분이 목회하는 현장을 예고 없이 방문해서 말씀을 들어보고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목회자를 청빙 하는 자세가 되어야겠지요. 저는 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치든 목회자의 이동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두 사람이 운전 중에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부산에 도착했다.
“전도사님, 오후에 약속이 있다는 곳은 어딥니까?”
한 목사가 북부산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물었다.
“해운대입니다. 이달 말 결혼식 준비를 위해 아내 될 사람과 만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이쿠, 축하드립니다! 날짜는 언제지요?”
“이달 28일 토요일 오후 2시입니다. 그저 알고 계시지요. 예식장은 포항교회입니다.”
“예비 신부님이 농촌목회에 동의하셨습니까?”
“한두 차례 그런 뜻을 나누었습니다만 오늘 얘기를 할까 합니다.”
“확정된다면 전도사님은 언제쯤 부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2월 졸업식이 끝나야 되겠지요. 임박한 결혼식 날짜와 함께 일이 한꺼번에 몰려서 마음이 무척 바쁘네요.”
“이번 일이 순조롭게 매듭지어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한 목사는 당연한 수고라며 백 전도사를 해운대 세민병원까지 태워다 주었다.
백형기는 설자를 만나 목회지가 마산으로 결정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설자는 교회가 부산과 가깝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그리고 신혼살림은 당분간 부산에서 하도록 설자 외삼촌과 의논을 했다. 백형기는 새로운 목회지를 소개받고 마음이 평안했고, 그가 서야 할 자리에 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숙사로 돌아온 이튿날 한 목사로부터 교회가 백 전도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형기와 설자는 두물머리 약속 이후 한 달 만인 1월 말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3박 4일 제주도로 신혼여행도 했다. 신혼여행은 설자 외삼촌의 특별한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백형기는 다시 한 달이 지난 22일 졸업식에서 최우수 논문으로 영예의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고, 노회에서 목사안수도 받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