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천국을 품은 사람 ( 복자 황일광 시몬(1757-1802) >
모진 형벌에 다리가 부러져 들것에 실린 채 형장인 고향 홍주로 압송되는
복자 황일광 시몬(탁희성 화백, 절두산 순교성지 제공)
복자 황일광 시몬은 홍주의 천한 백정이었습니다.
그는 갖은 천대 속에 쓰레기 취급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41세 때 홍산으로 이존창을 찾아가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문득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아우 황차돌과 함께 경상도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오로지 충직으로 주님을 섬기던 그들 형제에게 모종의 역할이 맡겨진 것입니다.
경상도로 간 황 시몬은 그곳 신자들의 애덕 속에 아무 편견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뻐 벅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지요.
그는 신자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곤 했습니다.
“제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습니다.
저 처럼 천한 백정을 이렇듯 점잖게 대해 주시니,
이 세상의 삶이 제게는 천국입니다.
죽은 뒤에 가게 될 하늘 나라는 또 하나의 천국이지요.”
비참하고 멸시당하던 시궁창 같던 삶이 주님을 영접 하는 순간
기쁘고 벅찬 삶으로 변했습니다.
지상의 삶이 이럴진대 천국의 나날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는 찬송과 경배를 그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명도회장 정약종의 집으로 옮겨가
그 튼튼한 몸으로 교회를 위한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습니다.
이후 정약종을 따라 서울로 온 황일광은 마침내 주문모 신부님께 영세를 받고
시몬이란 세례명까지 받는 벅찬 기쁨을 맛보았지요.
1801년 2월, 정약종보다 며칠 앞서 체포된 그는
다리 하나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잔혹한 고문에도
조금의 흔 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그해 11월까지 감옥에서 고문당하면서
황사영이 숨은 곳을 대라는 추궁을 받았습니다.
그가 교회 수뇌부를 오가며 심부름한 정황 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고문에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고
속히 죽어 천국에 가는 것이 지극한 소원”이라며
일체의 진술과 배교를 거부했지요.
조정은 그를 홍주까지 끌고 가서 그곳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자르게 했습니다.
다리가 으스러져 걷지 못하는 그를 들것에 싣고 간 포졸들만 죽을 맛이었지 요.
들것 위에서도 그는 조금의 두려움 없이 명랑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홍주에 도착한 당일에 45세의 나이로 목이 잘려서 죽었습니다.
첫 번째 천국에서의 그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달레는 1874년에 파리에서 간행된 《한국천주교회사》 에서
“교우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가장 훌륭한 지도자 중 의 하나로
경의와 감탄 속에 입에 올린다.”고 적었습니다.
가장 낮고 미천한 자리에 있었던 그가
순교로 온 교회가 기억하는 첫 번째 자리에 당당히 오르게 된 것이지요.
날마다 투덜대고 걸핏하면 남 탓하며,
기도의 기쁨조차 까맣게 잊은 우리에게 그가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의 천국은 몇 개인가요?”
찬송과 경배를 그칠 수 없었습니다.
정민 베르나르도 |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