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5(화) ◈ 눅 15: 1-10 잃어버린 양, 주님과 함께 기뻐합니다.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5: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주 해
1.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다.
1) 그런데 이런 제자도를 높은 기준, 즉 꽤나 도덕적이고,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며, 바르고 고고하게 사는 것으로 착각하면 않된다.
2) 복음서의 바리새인들은 워낙 비판을 많이 받지만, 사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꽤나 도덕적이고,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고, 바르고 고고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탄생했고, 사회적으로 이와 같은 평판을 받았고, 그로 인하여 대중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3) 예수님의 제자도를 변형된 바리새인의 삶으로 여기는 오류가 많다.
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또 다른 바리새인의 삶으로 오해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의 태도, 즉 교만이다.
1) 그는 세리와 죄인들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고, 그들을 낮게 보며 멀리하려고 한다.
2)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사랑하셨다.
눅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 들으라고 복음서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교회를 향해 쓰여졌다.
4) 이 말씀은 제자도로 산다고 하면서 바리새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린 자를 향한 말씀이다.
3. 세상 나라는 자연스럽게 끼리끼리가 형성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몸의 지체처럼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기뻐한다.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교제하는 것을 보고 수군거린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교제와 친교를 말한다.
2) 바리새인들은 대 놓고 비방하지 못하고 수군거린다. 왜냐하면 그들도 대중의 존경을 받으려면 죄인을 멀리하되, 죄인을 수용하는 마음이 넓은 자인척 해야 했기 때문이다.
4.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하나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2) 하나님은 바리새인도 죄인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신다.
3) 그래서 2가지 비유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신다.
5. 목자 하나님은 100마리의 양들을 모두 사랑하신다.
1) 바리새인들은 잃어버린 1마리 양인 세리와 죄인들을 버림받아야 할 양으로 보았다.
2) 거룩한 예수님도 세리와 죄인들의 행위가 좋을리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잃어버린 양으로 보시고, 되찾아와 와야 하는 잃어버린 양으로 보신다.
3) 그래서 세리와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면, 이미 의롭게 된 99명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
6. 바리새들의 관심은 율법을 지키고, 나와 어울리는 사람인가에 있다. 즉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99마리에 관심이 있다.
1)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구원에 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이 잃어버린 양으로 보인다.
2) 바리새인의 눈에는 그가 구원받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영혼보다는, 그의 직업, 그의 성격, 그의 단점이 보일 뿐이다.
7. 전도와 선교에 대한 사단의 속임이 있다.
1) 많은 성도들이 열방의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동참한다. 아름다운 일이다.
2) 그러나 같은 교회에 있는 작은 자, 같은 교회에 있는 세리와 죄인들은 영접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하여 수군거린다.
8. 우리의 수준은 수군거림이 당연하다. 않그런척 하는 것 보다는 “내가 수군거리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1)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의 궁극적 관심은 “오직 나”다. 다른 이의 구원, 하나님의 기쁨에는 관심이 없다.
2) 자기를 부인하는 척하면서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하는 척 하다가는 도리어 분노만 쌓인다. 너무 애쓰고 척하면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된다. 그리고 이미 바리새인이 되어 버렸다.
3) 그러므로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안겨야 한다. 이런 죄인을 사랑하시는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을 사랑할 수 없는 나를 주님의 은혜에 부탁해야 한다.
4) 십자가에서 겸손을 배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를 잃어버린 양으로 보게 된다.
9. 엄밀히 보면, 예수님 편에서 죄인들과 세리들을 꾸짖어야 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
1)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 한심한 죄인들, 외식하는 죄인들이 잃어버린 양으로 보인다.
2) 그래서 아무도 영접하지 않는 그들을 영접하고, 아무도 찾아나서지 않는 그들을 찾아나서신다.
3) 그리고 수군거림을 당하면서도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았다고 기뻐하신다.
10. 그리고 수군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하신다.
1) 잃은 양 비유에 이어서 드라크마 비유로 반복하시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신다.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5: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2) 주님은 수군거리지 말고, “나와 함께 즐기자”고 하신다.
11. 내가 세리와 같고 죄인과 같아서, 예수님께로 나가면 오늘날에도 수군거리는 자들이 있다.
1) 나의 죄와 교만이 공개되었다면 바리새인같은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다.
2) 공개되지 않았다면 사단이 수군거리고, 나의 양심이 수군거릴 것이다.
- 그 수군거림의 이유는 합당하다. 죄인이 많고, 손가락질 받아야 함이 옳다.
3) 그런데 그 수군거림 속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 “내가 너를 찾았고,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다. 나와 함께 즐기자.”
4) 이것이 정죄함 가운데 십자가로 나아가는 자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12. 수군거림이 들릴지라도, “내가 너를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말씀을 쉐마하며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자 되길 원한다.
1) 겸손이란, 너무나 양심적이어서 자책하고, 정죄 받고, 주눅 드는 것이 아니다.
- 겸손이란, 주님이 전부가 되는 것, 주님이 만유가 되는 것이다.
2) 주님이 전부가 되면, 사람들과 나 자신의 수군거림은 점점 작아져 가고, “내가 너를 찾았으니 함께 기뻐하자”는 말씀이 전부가 된다. 이것이 겸손이다.
3) 주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자신이 잃어버린 양임을 알고, 주님과 함께 기뻐한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 나의 묵상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만과 한심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예수님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제자도를 사는 이들의 표적은 바리새인들이다. 그런데, 복음서는 믿는 자들을 향해서 쓰여졌다. 제자도의 삶을 통하여 바리새인이 되어버린 이들을 향해 쓰여졌다. 그런데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생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죽어도 바리새인이 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허운석, 김철기 선교사님의 고백이 대단하다. 누구보다 주님의 생명으로 살았으면서도, 자신들이 “왕 바리새인”이라며 가슴을 찢었다. 그렇게 겸손하고 정직하고, 자신을 다 내어주고도 왕 바리새인이라며 회개하며 낮아지고 또 낮아졌다. 그분들이 너무 부럽다. 그 헌신과 대단한 선교의 열매 때문이 아니라, 그 겸손이 부럽다.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삶을 내어 놓고도, 겸손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예수 생명으로 살면서도 회개할 수 있을까? 허선교사님이 남긴 명언은 “니 꼬라지나 알고 겸손하게 사셔”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같다. 내 꼬라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은 대단하게 던졌지만 누가 그 대답을 찾았는가? 나 자신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나 자신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물보다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 때문에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 꼬라지를 아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만 된다. 성령의 역사로만 되어진다. 내가 나를 관찰하면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알 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발견한 그 비참한 존재조차 가면을 쓰고 있는 인간이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가면을 벗은 나를 알 수 없다. 그 대단한 바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을 알지 못하였다. 그 대단한 욥도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을 알지 못하였다. 그 대단한 제자들도 그러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안다는 착각을 버리는 것이 지혜다. 주의 은혜를 조금만 잃어버려도 교만의 독은 퍼지기 시작한다. 인생이 고달파도 교만해지고, 인생이 형통해도 교만해진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했다. 옳고 선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그 잃어버린 양임을 철저하게 자각하지 못했다. 목사가 된 후에도, 복음으로 하늘을 날 것 같은 기쁨이 충만한 때에도, 나의 모든 것을 던져 주를 위해 살겠다고 했을 때에도 여전히 잃어버린 양, 주님이 은혜로 찾아와 주어야 하는 양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통로가 된다고 하여도 나는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없고, 평안하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잃어버린 나를 주님이 은혜로 찾아와 주시길 간구한다. 나 스스로 돌아갈 길을 잃은 잃은 양이니, 주님이 은혜로 찾아와 주어야만 한다. 주님의 어깨에 매달린 채로만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먼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면을 벗은 나는 어떤 모습인지를 아는 은혜를 구한다. 허운석, 김철기 선교사님처럼 내가 왕바리새인임을 알고 가슴 찢는 회개가 부어지기를 간구한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회개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내 영혼을 주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 은혜가 왕노릇해야만, 은혜가 내 영혼을 지배해야만 생명에 이른다. 죄가 더한 곳에 더욱 넘치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주님의 뜻은 잃어버린 양이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사단의 정죄와 내 양심의 정죄를 넘어 은혜의 지배로 더욱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주님의 기쁨에 참여한다. 주님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니, 나도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한다. 참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이시다.
◈ 묵상 기도
주님, 기껏 이 정도의 은혜를 받고, 이 정도의 헌신을 하고, 이 정도의 역사를 경험하고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나의 죄인의 깊이를 알지 못하여서, 그 작은 능력과 헌신과 성취로 금새 높아져 버렸습니다. 세상은 “너 자신을 알라”고 하고, 세상은 도리어 겸손해지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보다 교만하고, 수군거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일반 은총을 입은 자들보다 더 교만해진 저와 교회들을 어찌합니까?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줄만 알지, 내가 바리새인이라고 가슴을 찢는 이가 없으니 어찌합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고, 이것이 우리의 교만함입니다. 주님, 잃어버린 양을 찾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양, 주님의 전적인 은혜밖에 구원의 길이 없고, 생명의 길이 없음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찾아 오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기쁨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하옵소서. 정죄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기뻐하도록, 양심의 소리보다 주님의 말씀이 더 크게 들리게 하옵소서. 그래서 비참한 중에도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주님의 구원을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며 경배하게 하옵소서. 주님, 장재석 집사님의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믿음의 유산이 계승되게 하옵소서. 한필수 집사의 어머니를 끝까지 구원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잃어버린 양들, 사단과 자신에게 수군거림을 당하는 성도들을 찾아내시고, 주님의 기쁨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