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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사전 - 다 2-
♣ 도원가[桃源歌]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武陵)의 어부(漁父)가 길을 잃고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올라가니, 산에 구멍이 뚫려져 있어 들어간즉 전부가 복숭아꽃이요, 촌락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진(秦)나라 때에 모진 정치를 피하여 들어온 사람들로 6백 년이 되도록 바깥 세상과 교통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 하였다.
♣ 도원결의[桃園結義]중국 촉(蜀)나라의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일찍이 도원(桃園)에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어 의형제를 맺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 도원경[桃源境]무릉도원처럼 속세를 떠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을 일컫는 고사성어.
♣ 도원국[陶園菊]진(晉) 나라 때 도연명이 뜻이 고상하여, 전원(田園)에 돌아가 유유자적할 생각으로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는데, 거기에 “내 전원이 묵어가는데 왜 돌아가지 않으랴……삼경(三徑)이 다 묵었으나 송국(松菊)은 그대로 있구나.” 한 데서 온 말이다. 《陶淵明集 歸去來辭》
♣ 도원도[桃源圖]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평대군(安平大君) 용(溶)이 꿈에 무릉(武陵)도원(桃源)에 놀아본 경치를 명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명화(1447).
♣ 도원량[陶元亮]진(晉) 나라 도연명(陶淵眀)의 또 다른 자가 원량(元亮)이다.
♣ 도원송죽황삼경[陶園松竹荒三逕]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三逕)은 묵었으나 송국(松菊)은 남아 있도다.” 하였다. 삼경이란, 한(漢) 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문정(門庭)에 세 길을 내고 송(松)ㆍ국(菊)ㆍ죽(竹)을 심었다 한다.
♣ 도원자[桃源子]진(晉)의 도잠(陶潛)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썼는데, 그 내용이 무릉(武陵)의 어부가 진(秦)나라 난리를 피하여 도원(桃源)을 찾아 들어간 것을 기록하였음. 《陶潛 桃花源記》
♣ 도위[都尉]관직명.
♣ 도위[陶衛]도읍(陶邑)에 봉지(封地)를 받고 왕실에 버금가는 부(富)를 차지한 전국 시대 진(秦) 나라 대신 위염(魏冉)과, 진 나라를 부강케 했던 위앙(衛鞅) 즉 상앙(商鞅)으로, 풍부함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 도위[都尉]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진 박미(朴瀰), 즉 중연(仲淵)을 말한다.
♣ 도위방미[都尉厖眉]도위는 안사(顔駟)로, 한 나라 때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한 무제가 연(輦)을 타고 낭서(郞署)를 지나다가 안사의 머리가 희고 눈썹이 희끗희끗한 것을 보고는 “노인네는 어느 때에 낭관(郞官)이 되었으며, 어찌 그리 늙었는가?”하자, 답하기를, “신은 문제(文帝) 때 낭관이 되었는데, 문제는 문(文)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무(武)를 좋아하였으며,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서는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얼굴이 못생겼으며, 폐하께서 즉위하여서는 나이 어린 자를 좋아하였는데 신은 이미 늙었습니다. 이 때문에 3대토록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낭관으로 늙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감동해서 회계 도위(會稽都尉)로 발탁하였다. 《文選 張衡 思賢賦》
♣ 도유[陶劉]도연명(陶淵明)과 유령(劉伶)으로, 둘다 술을 즐겼다.
♣ 도유[都兪]도유는 아름답게 여기는 찬사.
♣ 도유비[道猶肥]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 “선왕(先王)의 도의(道義)와 부귀의 영예(榮譽)가 가슴속에서 싸우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수척하였는데, 지금은 선왕의 도의가 이겼기 때문에 이렇듯 통통하게 살이 찌게 된 것이다.”는 말이 나온다.
♣ 도유우불[都兪吁咈]도는 찬미하는 말이고, 유는 동의하는 말이고, 우는 동의하지 않는 말이고, 불은 반대하는 말이다. 본디 요, 순, 우 등이 조정에서 정사할 때에 쓰던 말인데, 후대에는 군신간에 온화한 모습으로 조정의 정사를 논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 도유우불제[都兪吁咈際]모두 대답하는 말인데, 도는 감탄사로 ‘아아’의 뜻이며, 유(兪)는 승낙하는 말이며, 우(吁)는 부정하는 말로 ‘아니아니’의 뜻이며, 불은 매우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말이다. 이것은 모두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원만한 의견 교환을 말한 것이다.
♣ 도유유취향[陶劉遊醉鄕]술을 즐기는 도연명(陶淵明)과 유령(劉伶)을 말하는데, 당 나라 왕적(王績)이 지은 취향기(醉鄕記)에 이 사람들이 취향에 놀았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 도은[陶隱]이숭인(李崇仁)의 호. 자(字)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星州).
♣ 도은거[陶隱居]도홍경(陶弘景)을 말한다. 남북조(南北朝) 때 말릉(秣陵) 사람인데 자는 통명(通明)이다.
♣ 도의비[道義肥]옛날 자하(子夏)가 선왕(先王)의 의리와 세속의 부귀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다가 의리의 마음이 승리를 거두면서 살이 찌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韓非子 喩老》
♣ 도의산[陶猗産]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의 재산. 도주공은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 범여(范蠡)의 변명(變名)으로, 화식(貨殖)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세 번이나 천금(千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으며, 의돈은 도주공에게 상술(商術)을 배운 뒤 목축업으로 거부(巨富)가 되었다. 《史記 貨殖傳》
♣ 도이부인사[悼李夫人辭]이 부인을 슬퍼한 노래. 이 부인은 이연년(李延年)의 동생으로, 아름답고 가무(歌舞)에 능해 한 무제의 사랑을 받더니, 얼마 안가서 요절하게 되자, 무제가 그녀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 놓고 잊지 못해 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함. 《漢書 外戚傳》
♣ 도입천요[道入天寥]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전환에 자연스러워 조화가 함께 돌아가므로, 적정한 데 들어 하늘과 더불어 일체가 된다.”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 도자왜[屠子倭]임진왜란 때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상을 하던 왜병을 일컫던 말. 당시 구미 지역에 주둔했던 왜병은 조총이 없이 칼과 활만으로 무장을 했는데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생을 하였으므로 ‘백정왜’라 불렀다.
♣ 도잠[陶潛]도잠은 진(晉)의 처사(處士)로 41세 때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윗사람의 제재가 싫고 전원(田園)이 그리워 재직한 지 80일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음. 《陶淵明集 文 歸去來兮辭 自序》
♣ 도잠건[陶潛巾]진(晉) 나라 때 도잠이 뜻이 매우 고상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와 야인(野人) 옷차림에 갈건(葛巾)을 쓰고 다녔는데, 술자리를 만나면 문득 갈건을 벗어 가지고 술을 걸러 마시고 술이 다하면 다시 쓰곤 했다 한다. 《宋書 隱逸傳》
♣ 도잠녹주[陶潛漉酒]도잠(陶潛)이 머리에 갈건(葛巾)을 썼다가 술이 익으면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서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머리에 썼다.
♣ 도잠오류문[陶潛五柳門]도잠은 진(晉)의 고사로 자는 원량(元亮). 일찍이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어 자신을 말하였는데 여기에 “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집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는 스스로 오류선생이라 했다.” 하였다. 《晉書 陶潛傳ㆍ陶靖節集》
♣ 도잠오작비[陶潛悟昨非]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오늘이 옳았고 어제까지가 글렀음을 깨달았다.” 하며 자신의 용퇴(勇退)를 자축했다.
♣ 도잠취[陶潛趣]거문고는 없어도 취미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인 도잠은 거문고의 음절을 본디 모르는데 항시 줄 없는 거문고를 하나 두고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면 그 줄 없는 거문고를 만지며 노래하기를 “거문고의 취미만 알면 되는 것인데 어찌 수고롭게 줄을 타랴.”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四 陶潛傳》
♣ 도장[道漿]도가(道家)에서 먹는 장물이란 뜻으로 술에 대한 은어.
♣ 도장경[屠長卿]장경은 명(明) 나라 문인 도륭(屠隆)의 자(字). 그는 희곡(戱曲)에 능했으며, 저서에는 고반여사(考槃餘事)ㆍ유구잡편(游具雜編) 등이 있음.
♣ 도장벽지전[叨將璧至前]밤에 야광주(夜光珠)가 창졸히 앞에 닥치면 사람들이 놀랜다. 사기(史記)
♣ 도재귀[倒載歸]술에 크게 취하여 곤드레만드레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동진(東晉)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이 술을 매우 즐겨 항상 주식(酒食)을 싣고 못 위[池上]에 떠서 진탕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돌아오므로, 그때 아이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로 나가느뇨, 고양지로 나가는구나. 해 저물면 거꾸로 실려와서, 잔뜩 취해 정신이 없다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茗艼無所知]" 하였다. 《晉書 卷四十三 山簡傳》
♣ 도재산공[倒載山公]산공은 진(晉)의 산간(山簡)을 이름. 산간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그 곳 토호(土豪)인 습씨(習氏)의 아름다운 원지(園池)에 가 허다히 취해 돌아갔기 때문에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밤낮 거꾸로 실려 돌아가면서, 푹 취해 아무 물정 모르네.” 하였음. 《蒙求》
♣ 도재제패[道在稊稗]장자(莊子)에, “도는 어디에도 있어서, 돌피와 가라지에도 있다.” 하였다.
♣ 도저[道樗]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크기만 했지 옹이투성이라서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죽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도절[陶節]도잠의 정절. 진(晉)의 도잠(陶潛)은 뜻이 고결하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팽택령(彭澤令)으로 부임한 지 80여일 만에 차고 있던 인끈을 풀어 던지고 전리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써 자기 뜻을 나타냈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음. 《晉書 卷九十四》
♣ 도정몰와부[跳井沒蛙跗]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메워진 우물의 개구리는 발등이 겨우 덮일 만한 물을 갖고도 제낙으로 여긴다.” 하였다.
♣ 도정절[陶靖節]정절(靖節)은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의 시호(諡號). 그는 팽택 령(彭澤令)이 된 지 80여일 만에 연말이 되어 상급인 군(郡)에서 감독하는 관리가 왔는데, 의관을 정돈하고 맞이하라 하자 “어찌 시골의 젊은 애들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 하고는 그날 즉시 사임하였다. 하후자(夏侯孜)는 당(唐) 나라 사람으로 자는 호학(好學).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있었는데, 당사(堂史)가 서명(署名)을 하다가 하후자의 품안에 넘어져 죽었으므로 이 때문에 파직을 당하였다. 《晉書 陶潛傳ㆍ新唐書》
♣ 도제[荼薺]씀바귀와 냉이
♣ 도조[刀俎]단두대와 칼
♣ 도조[屠釣]우양(牛羊)을 도살(屠殺)하는 일이나 물고기를 낚는 일을 말한 것으로, 즉 비천(卑賤)한 사람의 일을 이른 말이다.
♣ 도종의[陶宗儀]자는 구성(九成), 호는 남촌(南村).
♣ 도주[陶鑄]도주의 도(陶)는 범토(笵土)를 이름이요, 주(鑄)는 주금(鑄金)을 이름이니, 다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재를 만들어내는 뜻으로 쓰여졌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요순(堯舜)을 도주(陶鑄)한다는 말이 있음. 다시 말해, 질그릇 만드는 사람이 손으로 만져서 질그릇의 형상을 만들 듯이, 무쇠 그릇 만드는 사람이 무쇠를 녹여 부어서 무쇠 그릇을 만들 듯, 그 사람을 교양하여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 도주[盜酒]진서(晉書) 필탁전(畢卓傳)에 “필탁이 이부랑(吏部郞)으로 있으면서 늘 술에 젖어 직사(職事)를 폐기하였었는데, 하루는 이웃집 동료 낭(郞)의 집에 술이 익자 탁이 취한 김에 가서 술을 훔쳐 마시다가 관리자에게 붙잡혔다. 주인이 아침에 보니 필 이부(畢吏部)였으므로 포박을 풀어 주고 같이 술을 마셨다.” 하였다.
♣ 도주[道州]청도(淸道)의 고호임.
♣ 도주[陶朱]춘추 시대에 월(越)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던 것을 범려(范蠡)라는 사람이 힘과 충성을 다하여 강국을 만들고, 원수인 오(吳) 나라를 정복한 뒤에 자기는 조그만 배 하나를 타고 강과 호수로 떠나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 이름을 고치고 목축업에 전심하여 다시 큰 부호가 되었다.
♣ 도주공[陶朱公]도주공은 춘추 시대 월(越) 나라 사람인 범려(范蠡)의 변명(變名)이다. 범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섬겨서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으나, 구천의 사람됨이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안락은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배를 타고 제(齊) 나라로 가서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수천만 금이나 모았다. 제 나라에서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정승을 삼고자 하자, 그는 다시 모았던 재물을 다 흩어 나누어 준 다음 도(陶)로 가서 도주공이라고 자호하고는 또다시 수천만 금의 재물을 모았다.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 도주공[圖周公]무제가 늙어서 어린 아들 불릉(弗陵)을 장차 후계자(後繼者)로 삼으려 하여 신하 중에 가장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곽광(霍光)에게 불릉을 부탁하려고 화공(畵公)을 시켜 옛날 주공(周公)이 어린 임금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조회 받는 그림을 그려서 곽광에게 주었다.
♣ 도주노도[陶朱老饕]도주(陶朱)는 도주공(陶朱公)의 준말로, 춘추 시대 월(越) 나라 대부 범려(笵蠡)의 별칭이다. 월왕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도(陶) 땅으로 들어가 주공(朱公)으로 행세하며 거금(巨金)을 벌어 번번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 도주몽[刀州夢]진(晉) 나라 때 왕준(王濬)이 집의 대들보 위에 칼 세 자루가 매달려 있는 데다 다시 칼 한 자루가 더 매달리는 꿈을 꾸고는 흉조(凶兆)라고 여기었다. 이의(李毅)가 이를 해몽하기를, “삼도(三刀)는 주(州) 자가 되고, 거기다 또 칼 한 자루가 더해졌으니, 당신께서는 익주(益州)를 맡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왕준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다. 《晉書 卷42 王濬列傳》
♣ 도주민[道州民]도주(道州)의 백성들에 대해 읊은 시의 제목. 백장경집(白長慶集) 풍유(諷諭)에 보임.
♣ 도주시구[道州詩句]당(唐) 나라 때의 직신(直臣) 양성(陽城)이 직간(直諫)을 했던 관계로 도주 자사(道州刺史)로 좌천되었을 적에 매우 선정을 베풀어 큰 업적을 이루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백거이(白居易)가 도주민(道州民)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양성의 선정을 크게 격찬한 것을 가리킨다. 《唐書 一百九十四》, 《白樂天詩集 卷三》
♣ 도주의돈부[陶朱依頓富]도주공과 의돈의 부유함이라는 말로, 단한 부자를 뜻하는 고사성어.
♣ 도주지부[陶朱之富]도주공(陶朱公)의 부(富)란 뜻으로 큰 부를 일컫는 고사성어.
♣ 도죽[桃竹]대[竹]의 일종인데, 일명 도생(桃笙)이라고도 한다.
♣ 도증주인[盜憎主人]도둑은 주인이 밉게 마련이다. 즉 자기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다.
♣ 도지신서[桃枝神荼]신서는 악귀(惡鬼)를 물리치는 신(神). 산해경(山海經)에 “창해(滄海)의 도삭산(度朔山)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뻗은 가지를 귀문(鬼門)이라 하여 모든 귀신들이 이곳으로 출입하며, 이 위에 신서(神荼)ㆍ울률(鬱壘)이라 하는 두 신이 있어 나쁜 귀신을 잡아서 호랑이에게 먹인다.” 하였다.
♣ 도진[島鎭]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의 철산(鐵山) 가도(椵島)에 개설했던 군진(軍鎭)을 말한다.
♣ 도진[道眞]무릉도원을 처음 찾아 들어갔다는 어부 이름으로,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다.
♣ 도처사[陶處士]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도잠(陶潛)은 국화를 아주 좋아하였다.
♣ 도처선화당[到處宣化堂]가는 곳마다 대접을 잘 받음을 이르는 말이다. 宣化堂은 관찰사가 사무를 보는 政堂을 말함.
♣ 도척[盜跖]춘추 시대,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함.
♣ 도척포인간[盜跖飽人肝]옛날 도척이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간(肝)을 꺼내어 회(膾)를 쳐서 먹으며 천하를 횡행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六十一》
♣ 도천지수[盜泉之水]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둑 도字가 들어있는 이름의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결코 부정한 짓은 할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도철[饕철]탐욕스럽고 잔인하다는 전설상의 괴물.
♣ 도청도설[道聽塗說]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길에서 말함. 말을 들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말해 버림. 또는 근거 없이 나도는 소문.
♣ 도총부산행[都摠府山行]도총부에서 번(番)드는 군사들의 군장(軍裝)을 점검할 때, 부당한 방법으로 군사들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것.
♣ 도출신구부[圖出神龜負]복희씨(伏羲氏)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 황하(黃河)에선 용마(龍馬)가 도(圖)를 지고 나타나고, 낙수(洛水)에선 신구(神龜)가 서(書)를 지고 나왔다 한다.
♣ 도출천하언[圖出天何言]하늘이 직접 말하지 않고 하도(河圖)를 나오게 하여 역학(易學)을 알려 주었다.
♣ 도탄[塗炭]진흙과 숯불. 전하여 몹시 더러운 곳을 말한다.
♣ 도탄지고[塗炭之苦]진구렁에 빠지고 숯불에 타는 듯한 고통. 가혹한 정치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당하는 심한 고통.
♣ 도퇴교[桃椎屩]당 나라 주도퇴(朱桃椎)가 산 속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항상 짚신을 삼아 길거리에 갔다 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짚신을 보고 “주 거사(朱居士)의 신이다.” 하고 쌀로 바꾸어 갔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六 朱桃椎傳》
♣ 도투[挑鬪]도발하여 싸우다.
♣ 도팽택[陶彭澤]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로서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던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 도포석[陶匏席]도포는 뚝배기와 바가지로, 조촐하고 검소한 술자리를 뜻한다.
♣ 도필[刀筆]문서(文書)나 기록하는 하급 역리(役吏)를 가리킨 말이다.
♣ 도필[刀筆]옛날 중국에서 종이가 발견되기 전에 대쪽에 문자를 기록하던 붓과 그 틀린 것을 깎아내던 칼.
♣ 도필리[刀筆吏]칼이나 붓을 다루는 낮은 관리.
♣ 도하반[徒何反]이는 도 자의 ‘ㄷ’과 하 자의 ‘ㅏ’를 합쳐 ‘다’로 발음한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고금인명표(古今人名表)에는 경치(景瑳)의 치에 대한 음을 자하반(子何反)으로 기재하고 치(瑳) 자는 치(差)로도 쓴다고 되어 있는데, 도하반은 글자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 도하상[渡河象]하수를 건너는 향상(香象)을 이름. 열반경(涅槃經)에 “저 급히 흘러가는 하수에 능히 코끼리가 떠가는 것 같다.[如彼駃河 能漂香象]"하였고, 전등록(傳燈錄)에는 “부처 곁에 함께 있어 듣고 이야기한 똑같은 법에도 증(證)한 바가 천심이 있어 비하자면 토끼ㆍ말ㆍ코끼리 세 짐승이 하수를 건너는데 토끼는 건너면 뜨고 말은 절반이 빠지고 코끼리는 철저히 흐름을 끊고 가는 것과 같다.”라 하였음. 문자를 철저히 평하는 데 인용하여 씀.
♣ 도해[蹈海]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는 뜻. 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그가 조(趙) 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 나라 군대가 조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 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 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 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 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한다. 《史記 卷十八》
♣ 도해[倒薤]서법(書法)의 일종임.
♣ 도해고절[蹈海高節]전국 시대 때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진(秦) 나라에서 황제를 자처하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蹈東海而死]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3》
♣ 도해지[渡海枳]남쪽에서 자라는 귤을 청수(淸水)와 회수(淮水) 북쪽에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한다.
♣ 도행[跳行]글을 쓸 때에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구절(句節)은 평두(平頭)보다 한 자 또는 두어 자쯤 높이 올려서 쓰는 것을 말한다.
♣ 도행역시[倒行逆施]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함. 곧 도리(道理)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며 상도(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을 뜻한다.
♣ 도헌[都憲]도헌은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의 별칭이다.
♣ 도현[道玄]당(唐) 나라 때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을 가리키는데, 불화(佛畫)와 산수화(山水畵)에 뛰어나 화성(畫聖)으로 알려졌다.
♣ 도협[倒峽]두보(杜甫)의 시에, “시의 수원(水源)은 삼협물을 거꾸로 한 듯”이란 글귀가 있는데, 삼협은 양자강(揚子江) 상류(上流)의 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이다.
♣ 도형인[禱衡人]당 나라의 한유(韓愈)를 가리킴. 한유의 알형악묘시(謁衡嶽廟詩)에 “내가 정히 가을 비 내리는 계절을 만나 음기만 깜깜하고 맑은 바람 없기에 조용히 맘속으로 기도해 응험이 있었으니 어찌 정직으로 감동시킴이 아니리오. 잠시 후엔 음기 걷히고 뭇 봉우리 나와서 우뚝히 하늘 괴는 높은 산을 우러러보네[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黙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掃盡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 한 데서 온 말로, 즉 한유는 성심으로써 형산의 구름을 걷히게 했다는 것이다.
♣ 도혜[桃蹊]복사꽃 길은 “복사꽃과 오얏꽃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고 찾아와 그 아래에 자연히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下自成蹊]”는 도리성혜(桃李成蹊)의 고사를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贊》
♣ 도호극시[桃弧棘矢]도호(桃弧)와 극시(棘矢)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 극시는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 옛날에 피사(避邪)의 도구로 쓰였음. 좌전(左傳) 소공(昭公) 4년 조(條)에, “唯是桃弧棘矢以除其災”라고 보이는데, 그 주에, ‘桃弓棘箭所以禳除凶邪 將御至尊故也’라 하였음.
♣ 도홍[陶泓]도홍은 벼루를 가리킨다. 한유(韓愈)가 붓ㆍ먹을 의인화(擬人化)해서 쓴 모영전(毛穎傳)에 보인다.
♣ 도홍경[陶弘景]남북조(南北朝) 때 말릉(秣陵) 사람인데 자는 통명(通明)이다. 1만권의 서적을 독파하였고 금기(琴棋)ㆍ도술ㆍ음양ㆍ오행 등에 밝았다.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숨어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렀다. 본초(本草)에 주를 달고 혼천상(渾天象)을 만들었으며 제대연력(帝代年歷)등의 저술이 있다. 특히 솔바람 소리를 좋아하여 뜨락 가득 소나무를 심고는 매번 그 소리를 들으면서 좋아하였다. 《南史 卷76 隱逸列傳下 陶弘景》
♣ 도홍경[陶弘景]양(梁) 나라 사람. 자는 통명(通明). 호는 화양은거(華陽隱居), 또는 화양진일(華陽眞逸), 시호는 정백선생(貞白先生). 젊었을 때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읽고 양생(養生)의 뜻을 품음.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함. 천성이 저술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였음. 또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지리(地理)ㆍ의술(醫術)ㆍ본초(本草)에 정통하였음.
♣ 도화랑[桃花浪]도화랑은, 복숭아꽃이 필 때 시냇물이 불어나서 위로 오르는 물결이다. 도화랑이 일 때면 용문(龍門)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데 넘으면 용이 되며 용이 될 때에는 우레가 고기의 꼬리를 불태워 없앤다고 한다.
♣ 도화미[桃花米]오래 묵어서 붉게 변질된 쌀을 이름.
♣ 도화부인[桃花夫人]식후(息侯)의 부인인 식위(息嬀)를 말한다. 식위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채 애후(蔡哀侯)의 충동에 의하여 초왕(楚王)이 식 나라를 멸망시키고 식위를 빼앗았다. 식위는 초왕과 살면서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말을 않고 살므로 초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하였을망정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左傳 莊公 十四年》
♣ 도화수[桃花水]3월 경 복숭아꽃이 필 무렵에 얼음이 풀려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말한다.
♣ 도화수[桃花水]북제(北齊) 때에 노사심(盧士深)의 처 최씨(崔氏)가 복숭아꽃으로 아이의 낯을 씻으면서 빌기를, “붉은 꽃과 흰 눈[白雪]으로 아이 낯을 씻어 곱고 빛나게 한다.” 하였다.
♣ 도화수창[桃花水漲]복사꽃 필 무렵 불어난 봄 강물을 가리키는 말.
♣ 도화원수[桃花源水]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어부가 복사꽃 떠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이상적인 세계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 독견[獨見]남들이 견득(見得)하지 못한 것을 혼자만이 견득하는 것을 이름.
♣ 독견[獨繭]누에고치 하나의 실만으로 지은 옷을 말한다.
♣ 독곡[獨谷]조선 초기의 문신 성석린(成石璘). 독곡은 그의 호.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조선 왕조 창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뒤에 대제학을 거쳐 영상(領相)에 이르렀다.
♣ 독곡가[讀曲歌]악부(樂府)의 오성가곡(吳聲歌曲)의 이름이다.
♣ 독교낙아각[毒蛟落牙角]초(楚) 나라 검사(劍士)인 차비(佽飛)가 강을 건널 때, 두 마리의 교룡이 배를 습격하자, 그 목을 베고 물결을 잠잠하게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淮南子 道德訓》
♣ 독누[篤耨]칠과(漆科) 소속의 식물(植物). 줄기에 상처를 내면 수지(樹脂)가 나오는데 독누향(篤耨香)이라 하며 약용으로 쓰임. 《本草》
♣ 독대[獨對]본래는 군주가 수시로 홍문관 입직원을 편전으로 단독 소입하여 사관(史官)이 불참한 가운데 자유로이 강론함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대신(大臣), 혹은 명소 (命召)된 신료가 단독으로 문대(問對)에 참여하는 것을 모두 독대하고 하였다. 독대에서는 국가의 대사가 간간이 논의되어 그 결과로 정국에 대파란을 초래 한 예도 있으니, 경종조의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좋은 예이다.
♣ 독락당[獨樂堂]독락당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사랑채로 현재 경주(慶州) 안강(安康)의 옥산리(玉山里)에 있으며, 회재를 모신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안쪽 계곡에 위치해 있다.
♣ 독락원[獨樂園]송(宋) 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에서 파면된 뒤에 만든 원명(園名)인데, 사마광 자신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 독련[獨憐]유독 사랑스럽다.
♣ 독로[獨勞]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대부가 공평하지 못하여 유능하다고 나만 일을 고달프게 시키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 한 데서 온 말로, 그 내용은 바로 부역을 나가는 사람이 자기 부모는 봉양할 겨를이 없이 항상 부역에만 시달리게 됨을 원망하여 노래한 것이다.
♣ 독록편[獨漉篇]진(晉) 나라 때의 악부(樂府) 불무가사(拂無歌辭)의 이름으로, 혼란한 세속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첫 구절이 “獨漉獨漉 水深泥濁 泥濁尙可 水深殺我”로 시작된다.
♣ 독립[獨立]어버이 모심을 말함.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시거늘……[他日又獨立]”에서 나온 말임.
♣ 독립당시[獨立當時]공자(孔子)가 홀로 서 있을 때에 그의 아들 이(鯉)가 뜰 앞을 지나니 공자가, “너는 시(詩)를 배우고 예(禮)를 배우라.” 하였다.
♣ 독목불성림[獨木不成林]홀로 선 나무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 여럿이 힘을 합쳐야 일이 된다는 의미.
♣ 독무지기사연명[獨無知己似淵明]국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도연명(陶淵明)처럼 돌보아 가꾸어 주는 사람 없이 홀로 피었다, 홀로 진다는 말이다.
♣ 독반제인[獨返齊人]한 아내와 한 첩을 데리고 살던 한 제(齊) 나라 사람이 밖에만 나가면 주육(酒肉)을 실컷 먹고 들어오는데, 물어 보면 모두 부귀한 사람들과 술을 먹었다고 하므로, 한번은 그 아내와 첩이 서로 약속을 하고 그가 가는 곳을 미행해 보니, 그는 끝내 동곽(東郭)의 묘지(墓地)가 있는 곳에 가서 여기저기서 남은 제물(祭物)들을 빌어서 먹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 독배[牘背]문서(文書)의 이면(裏面)을 말하는데, 사기(史記) 주발세가(周勃世家)에 “발(勃)이 천금(千金)을 옥리(獄吏)에게 줌으로써 옥리가 독배에 써서 보이기를 ‘공주(公主)로써 증거를 삼는다.’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죄인(罪人)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 독배[牘背]억울하게 고발당한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 때 강후(絳侯) 주발(周勃)이 모반죄(謀反罪)로 고발당해 하옥(下獄)되고 나서 어찌할 줄을 모르자, 옥리(獄吏)가 주독(奏牘)의 뒷면[牘背]에 “공주(公主)를 증인으로 내세우라.”고 써서 가르쳐 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 독보[獨步]홀로 걸음. 어떤 분야에서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앞서감. 즉,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빼어남
♣ 독부[獨夫]악정(惡政)으로 인심을 잃은 외로운 임금을 지칭. 은(殷)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紂)가 무도하여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남으로써 주는 한 사람의 남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데서 온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우리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지만, 우리를 학대하면 원수이다.’라고 했다. 독부 수(受)는 크게 위압을 일삼고 있으니, 그대들 대대로의 원수이다.”라고 하였다. 수(受)는 은(殷) 나라 끝 임금인 주(紂)의 이름. 《書經 周書 泰誓下》
♣ 독불견[獨不見]악부 가사(樂府歌辭)의 하나. 양(梁) 나라 때 유운(柳惲)이 처음 지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상심하는 뜻을 서술한 것이다
♣ 독불장군[獨不將軍]혼자서는 장군이 되지 못함. 일은 혼자 하기 어렵고 여럿이 같이 해야 함. 또는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
♣ 독비곤[犢鼻褌]쇠코잠방이. 베로 허리 전면을 덮고 뒤로 돌려 매었다. 《漢書 司馬相如傳 犢鼻褌注》
♣ 독서망양[讀書亡羊]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버림.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다른 일에 정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 《莊子 騈拇篇》
♣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남. 책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여러 번 반복해 읽다보면 저절로 뜻을 알게 됨
♣ 독서삼도[讀書三到]남송 때 주희가 한 말로 책을 읽을 때에는, 口到(구도)로서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을 것, 眼到(안도)로서 눈으로써 읽을 것. 心到(심도)로서 마음을 집중하여 읽는다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 독서삼도[讀書三到]독서의 삼법. 즉 입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아니하고[口到], 눈으로 딴 것을 보지 않고[眼到],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고[心到] 반복, 숙독하면 그 참뜻을 깨닫게 된다는 뜻
♣ 독서삼매[讀書三昧]독서에 마음을 집중하는 경지.
♣ 독서삼여[讀書三餘]책 읽는 좋은 시기에 대해서 한 말로서 일년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겨울철, 하루에 마지막으로 남은 밤, 밖에서 일할 수 없는 비가 오는 날을 말한 것으로 이처럼 남은 시간을 이용하면 독서나 공부가 잘 되는 것이라 하였다.
♣ 독서상우[讀書尙友]책을 읽어 위로 성현들과 벗함. 독서를 통해 옛 선현과 사상적인 공감을 하여 마치 살아있는 인물과 만나 사귀듯 함
♣ 독서상우[讀書尙友]책을 읽어서 옛날의 현인을 만남
♣ 독서상우[讀書常友]책을 읽음으로써 옛 현인들과 벗이 될 수 있다는 뜻.
♣ 독서파만권 하필약유신[讀書破萬卷 下筆若有神]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나니 붓을 들어 글을 짓는 것이 신들린 듯하더라”하여, 자신의 공부를 술회하였음.
♣ 독성[獨醒]‘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혼자 깨어 있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라 하였다.
♣ 독성불여포조취[獨醒不與餔糟醉]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세상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만 깨어 있노라"고 하자, “어찌 술지게미라도 먹으면서 세상과 함께 어울려 지내지 않느냐.” 하였다.
♣ 독성인[獨醒人]속류(俗流)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초사(楚辭) 어부(漁父)에, “온 세상이 모두 탁하거늘 나 홀로 맑으며, 뭇사람이 모두 취했거늘 나 홀로 깨어 있다.” 하였다.
♣ 독수공방[獨守空房]부부가 서로 별거하여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지냄을 이르는 말.
♣ 독숙공방[獨宿空房]빈 방에서 혼자 잠. 부부가 별거.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지냄. 독수공방(獨守空房)
♣ 독안룡[獨眼龍]애꾸눈의 영웅 또는 용맹한 장수, 애꾸눈의 고덕(高德)한 사람이란 뜻의 고사성어.
♣ 독야청청[獨也靑靑]홀로 푸르고 푸름. 홀로 높은 지조와 절개를 드러냄.
♣ 독옥[櫝玉]자공(子貢)이 묻기를, “여기에 미옥(美玉)이 있다면, 독에 넣어 감추어야 합니까, 충분한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까?”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팔리기를 기다리는 자이다.” 하였다. 《論語 子罕》
♣ 독옹[禿翁]늙어서 머리가 빠지고 정계에서 실권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보영(寶嬰)을 비난하면서 붙인 호칭이다. 《史記 魏其武安侯列傳》
♣ 독왕[獨往]세속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상하 사방을 드나들고 온 천하를 유람하면서 홀로 오고 홀로 가는 것을 나 자신의 삶이라 한다.[出入六合 遊乎九州 獨往獨來 是謂獨有]”하였고, 회남자(淮南子)에 “강과 바다, 산과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천지를 가볍게 여기고 만물을 작다랗게 여기면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江海之士 山谷之人 輕天地 細萬物而獨往也]”라고 하였다.
♣ 독우[督郵]속현(屬縣)을 순찰하면서 관리의 성적을 조사하는 관리. 지방 감찰관. 찰방(察訪)의 별칭이다.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가 나오자,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衣冠)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므로, 도잠이 말하기를 “오두미(五斗未)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小人)을 섬길 수 없다.” 하고 그 즉시 팽택령을 그만두고 돌아가 버린 고사가 있다.
♣ 독우[督郵]평원독우(平原督郵)의 준말로 나쁜 술을 가리킨다. 사문유취(事文類聚) 연음부(燕飮部) 주(酒)에 “진(晉) 나라 환온(桓溫)에게 술맛을 잘 아는 주부(主簿)가 있었는데, 그는 좋은 술은 청주종사(靑州從事)라 하고 나쁜 술은 평원독우(平原督郵)라 하였다. 청주에는 제군(齊郡)이 있고 평원에는 격현(鬲縣)이 있으니, 제군을 맡는 청주 종사는 배꼽[臍] 아래로 내려간다는 뜻이고, 격현을 맡는 평원 독우는 가슴[膈]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제군의 제(齊)와 격현의 격(鬲)은 제(臍)나 격(膈)과 음과 모양이 같으므로 한 말이다.
♣ 독우청주[督郵淸酒]술의 은어(隱語)로서 탁주(濁酒)는 평원독우(平原督郵)라 하는데, 평원에 격현(鬲縣)이 있었다. 격(鬲)자는 격(膈)자와 통하는데, 탁주를 먹으면 흉격(胸膈)에까지 밖에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뜻이요, 좋은 청주(淸酒)는 청주종사(靑州從事)라 하는데, 청주에는 제현(齊縣)이 있다. 제(齊)는 제(臍)와 통용(通用)하는 글자로서, 좋은 청주는 배꼽[臍]까지 내려간다는 뜻이라 한다. 독우(督郵)는 평원 지방의 과직 이름이요, 종사(從事)는 청주(靑州) 지방의 관직 이름이다.
♣ 독원[獨園]급고독원(給孤獨園)의 준말로,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 독의[獨倚]홀로 서다. 외로이 살다.
♣ 독의루[獨倚樓]두보(杜甫)의 시에, “공업은 자주 거울을 보고, 행장(行藏 身世)은 홀로 다락에 기대었네[勳業頻看鏡 行藏獨倚樓].”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 독창근제[督昌覲帝]고려 창왕(昌王)이 중국 명 태조(明太祖)를 직접 찾아가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 당시 신흥 제국인 중국 명(明) 나라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여 명에서는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자기들이 차지하겠다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최영(崔塋)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요동정벌(遼東征伐)을 착수했는데,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으로 그 계획이 좌절되고 최영이 밀려난 후 이성계에 의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이색(李穡)은 주장하기를, “지금 국가 관계에 틈이 생겨서 왕과 집정(執政)이 친조(親朝)를 않고서는 해결할 수가 없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가 없으니 늙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하고는 자청하여 경사(京師)에 갔었음. 《牧隱集 行狀》
♣ 독천장오[瀆川藏汚]신하의 잘못을 너그럽게 감싸 안는 임금의 덕을 말한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의 “강과 못이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산과 숲이 독충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川澤納汚 山藪藏疾] 임금도 그렇게 포용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독표[獨豹]거위를 말함.
♣ 독학모귀요[獨鶴暮歸遼]옛날 정령위(丁令威)라는 사람의 고향이 요동이었는데, 신선이 되어 갔다가 천(千) 년 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학(鶴)이 되어서 돌아왔다 한다. 그래서 요양백탑(遼湯白塔) 위에 앉아서 노래한 시가 있다.
♣ 독항구[督亢溝]백구하의 옛 이름.
♣ 독항도[督亢圖]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기름진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 연 태자(燕太子)가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고 자객(刺客) 형가(荊軻)를 보내며, 신물(信物)로 독항(督亢) 땅을 바치겠다고 지도(地圖)를 함에 넣어 보내었는데, 형가가 지도 밑에 감추었던 비수(匕首)로 진시황을 찌르려다가 실패하자,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연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史記 刺客列傳》
♣ 독항이강린[督亢餌强隣]독항도는 곧 독항구(督亢溝)의 지도이고, 강한 이웃이란 곧 진(秦) 나라를 가리킨다. 전국 시대 연 태자 단(燕太子丹)이 자객 형가(荊軻)를 시켜 독항구를 바치겠다 하고 독항도 속에다 비수검을 감추어 가지고 진 나라에 들어가 시황(始皇)을 죽이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史記 卷八十六 刺客列傳》
♣ 독행[篤行]독행은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의 “말이 충성스럽고 진실하며 행실이 후하고 근실하면……[言忠信 行篤敬……]"에서 나온 것임.
♣ 독현[獨賢]불공평하게 자기 혼자만 애쓰는 심정.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의 “대부도 많은데 불공평해라, 나만 혼자 잘났다고 뛰어다니니.[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 독혼노어[讀混魯魚]노(魯) 자와 어(魚) 자를 분변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주 무식(無識)함을 이른 말이다.
♣ 돈[暾]해가 처음 뜰 때 온화하고 밝은 모습.
♣ 돈간[敦艮]주역(周易) 간괘(艮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인데 ‘성실한 머묾’을 뜻한다.
♣ 돈견[豚犬]자기 아들을 남에게 말할 때 낮추어 ‘돈견’이라 하는데, 그 유래를 보면, 오대(五代) 때에 양주(梁主) 주온(朱溫)이 진주(晋主) 이극용(李克用)의 죽음을 틈타서 진나라를 치다가 극용의 아들에게 크게 패하자, “자식을 낳거든 이아자(李亞子; 극용을 말함)처럼 낳아야 한다. 내 아들은 돼지나 개이다.” 하여, 후세에서 자기 아들을 겸사(謙辭)로 말할 때에는 ‘돈견’이라 한다.
♣ 돈돈[沌沌]물결이 잇닿아 치는 모양, 어리석고 분별이 없는 모양, 모든 사물이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 모양. 빙빙 도는 모양
♣ 돈돈[惇惇]어질고 순후한 모양
♣ 돈돈[旽旽]잘못된 발음, 바른 뜻과 음은
♣ 돈돈[暾暾]햇빛이 구석구석 비치는 모양, 불빛이 환한 모양
♣ 돈물[惇物]돈물은 남산 부근에 있는 산 이름인데, 일설에는 남산은 토산물이 많이 나기 때문에 남산의 형용사라 하기도 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에 “종남산과 돈물산에서 조서산(鳥鼠山)에 이른다.[終南惇物 至于鳥鼠]" 하였다.
♣ 돈복[敦復]선(善)으로 회복하는 데 돈독히 한다는 뜻. 《周易 復卦 六五》
♣ 돈시[敦詩]이시백(李時白)의 자(字)이다.
♣ 돈아[豚兒]자신의 아들을 일컬음.
♣ 돈어[豚魚]돼지와 물고기, 곧 감각 작용이 둔한 생물. 또는 사람을 대할 때 예절이 없는 것.’돈어도 믿었다.’ 함은, 인애(仁愛)와 신의(信義)가 지극하여 돈어와 같은 미물에까지 미쳤다는 말이다.
♣ 돈우[돈우]벌레 이름. 매미 비슷하면서 좀 긴 벌레인데, 알을 깔 때면 반드시 풀잎에다 누에 같은 알을 까고 그 알을 누가 가져가면 반드시 그 가져간 곳으로 어미가 찾아온다고 함. 《異物志》
♣ 돈장[敦牂]고갑자에서 지지(地支)가 오(午)에 해당하는 해를 가리킨다.
♣ 돈장우병문[敦牂遇炳文]돈장은 구갑자에서 오(午)를 뜻하고 병문은 병(丙)을 풀이한 것으로, 병오년을 가리킨다.
♣ 돈점[頓漸]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설로서, 혜능의 남종(南宗)은 돈오성불(頓悟成佛)을 주장하고, 신수의 북종(北宗)은 점점수증(漸漸修證)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傳燈錄》
♣ 돈제일주[豚蹄一酒]돼지 발굽과 술 한 잔이라는 말로, 작은 물건으로도 많은 물건을 구하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다
♣ 돈제풍년축[豚蹄豊年祝]돼지 발목을 차려 놓고 풍년을 빈다는 말인데, 밑천을 적게 들이고 큰 것을 얻으려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史記 滑稽傳》
♣ 돈황[燉煌]돈황은 서역(西域)으로 현재의 감숙성(甘肅省) 서부에 있었던 지역이다.
♣ 돈흡[敦洽]전국 시대 진(陳) 나라의 추녀(醜女). 《呂氏春秋 過合》
♣ 돌돌[咄咄]돌돌은 돌돌괴사(咄咄怪事)의 준말로, 뜻밖의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놀라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은호전(殷浩傳)에 “은호가 조정에서 쫓겨난 뒤 담소하고 음영(吟咏)하는 일을 끊지 않았으므로 자기 식구들도 쫓겨난 데 대한 유감의 기색을 전연 볼 수 없었는데, 온종일 허공에다 ‘돌돌괴사’라는 네 글자만 쓰고 있을 뿐이었다.” 하였다.
♣ 돌돌[咄咄]뜻밖의 일에 놀라 지르는 소리
♣ 돌돌괴사[咄咄怪事]돌돌괴사는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을 말하는데, 즉 내가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 후회하는 뜻이다. 동진(東晉) 때 은호(殷浩)가 모함을 받고 조정으로부터 먼 곳에 추방당하였으나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하루종일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만 쓰고 있었다 한다. 《晉書 卷七十七 殷浩傳》
♣ 돌돌서공[咄咄書空]뜻밖의 일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돌돌(咄咄)은 돌돌괴사(咄咄怪事)의 준말로 놀랍고 괴이한 일이라는 뜻인데, 진(晉) 나라 때 은호(殷浩)가 임금에게 파출(罷黜)되고 나서도 담영(談詠)을 평상시와 같이 하므로, 집안 식구들도 그에게서 임금에게 유방(流放)된 데 대한 유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종일토록 공중에다 ‘돌돌괴사(咄咄怪事)’ 네 글자만을 썼다. 돌돌괴사는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이라는 말로, 이유 없이 임금에게 유방(流放)당한 것을 탄식하는 뜻이다. 《晉書 卷七十七 殷浩傳》
♣ 돌돌은호[咄咄殷浩]돌돌(咄咄)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소리. 진(晉)의 도독(都督)이었던 은호(殷浩)는 환온(桓溫)에게 미움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자 종일토록 공중에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를 썼다 한다. 《晉書 殷浩傳》
♣ 돌돌향공서[咄咄向空書]돌돌괴사(咄咄怪事)는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이란 뜻으로, 진(晉) 나라 때 은호(殷浩)가 조정에서 쫓겨난 뒤로는 종일토록 허공에다 ‘돌돌괴사’ 네 글자만 쓰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七十七》
♣ 돌불검 석불난[突不黔 席不暖]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戲)에 “성철(聖哲)들은 세상을 구제하기에 항시 급급하여 늘 천하를 주유하느라 공자(孔子)가 앉은자리는 따스해질 겨를이 없었고, 묵자(墨子)가 사는 집에는 굴뚝에 그을음이 낄 여가가 없었다.” 하였다.
♣ 돌불연불생연[突不燃不生煙]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곧 어떤 소문이든지 반드시 그런 소문이 날만한 원인이 있다는 뜻.
♣ 돌제[突梯]각이 없고 원만함.
♣ 동가[東柯]동가는 중국 진주(秦州)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는 골짜기 이름인데, 두보(杜甫)가 약초를 캐며 노년을 보내고 싶다면서[採藥吾將老] 읊은 ‘동가는 기막히게 좋은 골짜기[東柯好崖谷]’라는 시가 있다. 《杜少陵詩集 卷7 秦州雜詩》
♣ 동가[董賈]한(漢)의 동중서(董仲舒)와 가의(賈誼).
♣ 동가구[東家丘]동가구는 동쪽 집의 공구(孔丘)라는 뜻으로, 즉 노 나라 사람으로서 공자의 서쪽 이웃에 살던 한 어리석은 자가 공자가 성인인 줄을 모르고 “저 동쪽 집의 공구를 내가 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本姓解ㆍ傳習錄》
♣ 동가미오[董家郿塢]간사한 자가 재물을 쌓아 두고서 노년을 즐기는 장소를 말한다. 동가는 한 나라의 동탁(董卓)을 가리킨다. 동탁이 초평(初平) 3년에 미(郿)에다가 오(塢)를 쌓고는 만세오(萬歲塢)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높이가 7장으로 장안성(長安城)과 같았으며, 그 안에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72 董卓傳》
♣ 동가부서가귀[東家富西家貴]제(齊) 나라의 한 여자가 자기에게 청혼을 해온 동쪽 집은 부자이면서 추남이고, 서쪽 집은 가난하면서 미남이었으므로,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겠다[東家食兮西家宿].”고 한 데서 온 말로, 사람이 이끗을 대단히 탐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동쪽에 가서 먹고 서쪽에 가서 잔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이 집 저 집에서 얻어먹고 지낸다는 뜻이다.
♣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옛날 중국의 한 여인이 재물이 많고 음식이 훌륭한 동쪽 집에서 먹고, 아름다운 사내가 있는 서쪽 집에서 잠자기를 원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로 먹을 곳, 잘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 또는 그런 짓.
♣ 동가홍상[同價紅裳]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말로 같은 값이면 좋은 물건을 가진다는 뜻.
♣ 동가회[動葭灰]후기(候氣)의 법에 의하면, 삼중의 밀실(密室)을 만들고 그 안에 명주[緹]를 펴고서 그 위에 십이율관(十二律管)을 각각 방법대로 안치한 다음, 그 율관에 갈대의 재를 채우고 다시 그 위에 명주로 덮어놓으면, 동지절(冬至節)이 될 경우, 율(律)이 황종관(黃鐘管)에 맞아서 황종관에 들어있는 갈대 재가 날아 움직이게 되는 것 등을 이른 말이다.
♣ 동각[東閣]동각은 동합(東閤)과 같음. 동방(東方)에 있는 소문(小門)인데, 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재상이 된 뒤에 객관(客館)을 세워 동합을 열고 어진이를 영접하여 함께 국사를 의논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재상이 빈객을 초치하여 대접하는 곳을 뜻한다.
♣ 동각관매[東閣官梅]남조(南朝) 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심취했던 양주(揚州) 고을 관아의 매화꽃. 하손이 일찍이 양주에 머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사랑하였는데, 뒤에 이를 못 잊어 다시 양주를 자청해서 부임한 뒤 종일토록 나무 밑을 서성이며 시를 읊었던 고사가 있다.
♣ 동각관매[東閣觀梅]추운 겨울에 매화를 감상하면서 시흥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남조 양(南朝梁)의 하손(何遜)이 양주(揚州) 고을의 매화를 잊지 못한 나머지 다시 자청해서 그곳으로 부임한 뒤 마침 만개한 매화꽃을 보며 하루 종일 그 곁을 떠나지 못했던 고사가 전하는데, 이를 인용하여 지은 두보(杜甫)의 “동각의 관매에 일어나는 시흥이여, 양주 고을 하손도 어쩌면 이와 같았으리.[東閣觀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유명한 구절이 전해 온다. 《杜少陵詩集 卷9 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
♣ 동각로[東閣老]한(漢) 나라 공손홍(公孫弘)이 승상이 되어, 동각을 지어 어진 선비를 맞아들인 고사.
♣ 동각서곤[東閣西崑]동각은 학사원(學士院)의 별칭이고, 서곤(西崑)은 서방의 곤륜군옥산(崑崙群玉山)으로 고대 제왕의 장서각(藏書閣)이 있던 곳이다.
♣ 동각심매흥도시[東閣尋梅興到時]고을 관아에 핀 매화에 시흥(詩興)이 절로 우러날 것이라는 말이다. 남조(南朝) 양(梁)의 하손(何遜)이 양주(揚州) 고을의 매화에 심취하여 하루 종일 그 옆을 떠나지 못한 채 시를 읊던 고사가 있는데,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화배적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에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구절이 있다.
♣ 동각흥[東閣興]양(梁) 나라 하손(何遜)이 동각(東閣)을 개방하고 문인(門人)을 초빙하여 매화를 감상했던 고사를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9 和裵迪登蜀州東亭 送客逢早梅 相憶見寄詩》
♣ 동강[東江]개성과 풍덕군(豐德郡)에 있는 강 이름이다.
♣ 동강[東岡]동강은 김우옹(金宇顒)의 호로, 송사(宋史)를 부연하여 지은 속강목(續綱目)이 유명하다.
♣ 동강[東岡]동쪽의 산 언덕. 세상을 마다하고 은둔하는 곳의 뜻으로 쓰임. 후한서(後漢書) 주섭전(周燮傳)에, “선세(先世)이후로 국가에 대한 공로와 임금의 은총으로 대를 이어왔는데, 어찌하여 그대 혼자 동강(東岡)의 언덕만을 지키려고 하는가.” 하였음.
♣ 동강[桐江]옛날 광무제(光武帝)의 벗인 엄광(嚴光)이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질하며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傳》
♣ 동강구진[東江舊鎭]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설치했던 가도(椵島)의 진영을 말한다.
♣ 동강도[董江都]강도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킴. 그는 처음에 강도의 상(相)이 되었는데 공손홍(公孫弘)의 미움을 받아 교서왕(膠西王)의 상(相)으로 좌천됨. 무제(武帝)에게 상주(上奏)하여 유교(儒敎)를 국교로 정하게 한 것으로 유명함. 저서에 춘추번로(春秋繁露)가 있음.
♣ 동강도[董江都]동중서(董仲舒)가 한 무제(漢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이 되었기 때문에 동 강도라고 한 것이다. 《漢書 卷 56 董仲舒傳》
♣ 동강수[桐江叟]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을 말한다. 광무제(光武帝)의 절친한 벗으로서, 동강(桐江)에 숨어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었다. 《後漢書 卷83 嚴光傳》
♣ 동강신정[東岡新亭]옛날 동진(東晉)의 명사(名士)들처럼 난세(亂世)를 개탄하는 우국지정(憂國之情)이 솟구친다는 말이다. 진서(晉書) 왕도전(王導傳)에 “주의(周顗)가 신정(新亭)에 앉아 탄식하기를 ‘풍경은 똑같은데 강산은 모두가 바뀌었구나.’ 하니, 참석한 이들 모두가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 동강칠리탄[桐江七里灘]전당강(錢塘江)이 동려현(桐廬縣)을 지나는 부분의 이름. 한(漢) 나라 때 광무제(光武帝)의 친구 엄광(嚴光)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살면서 낚시를 했다는 곳.
♣ 동객[峒客]옛날 황제(黃帝)가 공동산(崆峒山)에서 신선인 광성자(廣成子)에게서 도를 닦았다는 고사가 있으므로, 도인(道人)의 뜻으로 쓰인다.
♣ 동갱[銅坑]매화가 많이 나는 곳임.
♣ 동경[同庚]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말로, 동갑(同甲)과 같다.
♣ 동경[東京]경주(慶州)의 별칭이다.
♣ 동경[東京]동경은 낙양(洛陽). 전한(前漢)의 도읍지인 장안(長安)을 서경(西京)이라 한데 대하여, 후한(後漢) 시절의 도읍지를 이른 것.
♣ 동계거사[東溪居士]저자의 아우인 산광(山光)의 호가 동계(東溪)이다.
♣ 동계공[東溪公]이백의, “동계공(東谿公)의 유거(幽居)에 제(題) 한다.”는 시가 있다.
♣ 동고[東皐]동고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의 호이다.
♣ 동고동락[同苦同樂]같이 괴로워 하고 함께 즐거워 함.
♣ 동고서소[東皐舒嘯]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고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에 다달아 시를 짓는다[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는 귀절이 있다.
♣ 동고소[東皐嘯]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登東皐以舒嘯]"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공원자건[董公元自健]한(漢) 나라 동탁(董卓)이 임금을 폐(廢)하고 새 임금을 세우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원소(袁紹)가 성을 내며, “천하에 건장한 자[健者]가 어찌 동공(董公)뿐이냐.” 하였다.
♣ 동공이곡[同工異曲]표면은 다른데 내용이 똑같다는 뜻으로, 경멸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 동곽[東郭]전국 시대에 은자(隱者)인 동곽자기(東郭子綦)를 말한다.
♣ 동곽리[東郭履]매우 가난하다는 뜻의 고사성어.
♣ 동곽지랑[東郭之良]제(齊) 나라 사람이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사는데, 매일 나가 술과 밥을 실컷 먹고 돌아와, “부귀한 사람들과 함께 먹었노라.” 자랑했다. 처첩이 의아하여 남편을 뒤쫓아 가 보니 그가 동곽(東郭) 묘지(墓地)에 가서 제수(祭需)의 나머지를 빌어먹고 오는 것이었다.
♣ 동관[冬官]공부(工部)를 동관(冬官)이라 한다. 주(周) 나라 때 육관(六官)의 하나로 토목(土木)ㆍ공작(工作) 등의 일을 맡은 관직명인데, 그 일이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적혀 있는데 육부(六部)를 천지(天地)ㆍ사시(四時)로 배열하여, 이부(夷部)는 천관, 공부는 동관이라 칭한다.
♣ 동관[冬冠]술[酒]의 별칭. 추운 겨울에 모자를 쓴 것처럼 따뜻하다는 뜻이다. 이규보의 시에, 술은 무서운 추위도 견딜 수 있어[酒能防凜冽] 항간에서 이것을 동관이라 한다네[俗諺號冬冠] 그대 같은 대머리는[禿首如吾子] 추위를 막아 보지 않으려나[能無備禦寒] 하였다.
♣ 동관[彤管]자루에 붉은색을 칠한 붓을 말한다. 고대에 후부인(后夫人)의 공과(功過)를 기록하던 여사(女史)의 붓으로, 적심(赤心)을 나타내기 위하여 붉은 대롱의 붓[彤管]을 썼다 하는데, 일반적으로 여인의 문묵(文墨)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 동관[東觀]한(漢) 나라 때 궁중(宮中)에 있던 관명(觀名)인데, 주로 교서(校書)와 장서(藏書)를 하던 곳이다.
♣ 동관귀래[童冠歸來]성인의 기상을 나타낸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가 제자들의 소회를 물었더니, 증자가 ‘관자(冠者) 5~6인과 동자(童子) 6~7인으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소풍하고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가 허여하였다.” 하였다.
♣ 동관기[彤管記]동관의 기록. 여사(女史)가 붉은 대롱의 붓을 잡고 후비(后妃)의 언행을 하나하나 기록한 것을 말한다.
♣ 동관청금[彤管靑衿]동관은 시경(詩經)의 패풍(邶風) 정녀(靜女) 편을 가리키며 청금(靑衿)은 정풍(鄭風) 자금(子衿) 편을 가리키니, 이는 정녀 편의 ‘靜女其戀 貽我彤管’과 자금 편의 ‘靑靑子衿 悠悠我心’이라 한 대문에서 따온 것이다. 소서(小序)는 한(漢)의 위굉(衛宏)이 찬한 것으로 시경(詩經) 각 편의 머리에 붙인 서문을 말한다.”정녀는 그 당시의 무도한 임금과 부덕한 부인을 풍자한 것이며, 청금은 난세가 되어 학교가 폐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을 따른 정현(鄭玄)의 전주(箋注)에 “동관은 붓대를 붉게 칠한 붓인데 옛날에는 여사(女史)가 이 붓으로 왕후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곧 정덕(靜德)과 미색(美色)이 있고 또 옛법을 행하여 임금의 훌륭한 배필이 됨을 말한 것이며, 청금은 푸른 옷깃을 가리키니 이는 곧 청금을 입은 학생을 그리워한 것이다.”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주자(朱子)의 집전(集傳)에는 모두 음분시(淫奔詩)로 해석하였다.
♣ 동관한기[東觀漢紀]후한 유진(劉珍)의 찬으로 총 24권인데, 진(晉) 나라 적에는 사기ㆍ한서(漢書)와 함께 3사(史)라 하고 많이 읽혀졌다 함.
♣ 동교[東橋]중국 장안성(長安城)에 있는 파교(灞橋)의 이칭으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 동교[東郊]한(漢) 나라 소광(疏廣)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갈 때 동대문 밖에서 송별을 하였는데, 그때 전송을 나온 수레가 수백 대나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疏廣傳》
♣ 동교별업[東郊別業]별장 전원의 뜻과 같다.
♣ 동교요[董嬌饒]전등여화(剪燈餘話)에 나오는 미인(美人)의 이름이다.
♣ 동군[桐君]동군은 황제(黃帝) 때 사람인데 일찍이 약을 캐며 도(道)를 구하여 동려현(桐廬縣)의 동산에서 살았다. 초목(草木)과 금석(金石)의 성미(性味)를 잘 알아 삼품(三品)의 약물(藥物)을 정하여 약성(藥性) 4권과 채약록(採藥錄)을 저술하였음.
♣ 동군[東郡]동쪽의 고을을 가리킨다.
♣ 동군[東君]봄의 별칭. 봄의 신(神). 봄이 오행(五行)상으로 동방(東方)과 목(木)과 청색(靑色)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제(東帝), 청제(靑帝), 청황(靑皇), 태호(太皥)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 동군미옥절[東君弭玉節]동군은 봄을 맡은 동쪽의 신(神)을 말하고, 옥 부절[玉節]은 곧 봄 소식을 의미한다.
♣ 동궁[彤弓]동궁(彤弓)은 붉은 활인데, 주(周) 나라 때에 제후(諸侯)가 전공(戰功)이 있으면, 천자(天子)가 동궁을 주는 것이다. 주 평왕(周平王)이 진 문후(晉文侯)를 방백(方伯)에 임명하면서 동궁과 노시를 하사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文侯之命》
♣ 동궁[東宮]사시(四時)에 봄은 동쪽에 해당하는데, 주역(周易)의 진괘(震卦)는 장남괘(長男卦)로서 방위로는 동쪽이므로 동궁이라 한 것이다.
♣ 동궁훈업[彤弓勳業]동궁은 붉은 칠을 한 활인데 옛날 제후(諸侯)가 공을 세우면 천자가 이것을 하사했으므로 공훈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 동궤[同軌]좌전(左傳) 은공(隱公) 원년에 “천자가 죽은 지 일곱 달이 되어 장례를 행하게 됨에, 동궤가 모두 이르렀다.[天子七月而葬 同軌畢至]”하였는데, 동궤(同軌)는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하를 통일함에 온 세계가 수레바퀴를 같이하고[車同軌] 글 쓰는 문자를 같이하게 되었다는[書同文] 중용(中庸)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제후들을 가리킨다.
♣ 동귀[東歸]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날이라는 말이다. 옛날 한(漢), 당(唐) 시대에 모두 장안(長安)이 수도였던 관계로 중원과 강남 인사들이 고향을 찾아갈 때 흔히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후 동귀(東歸)를 귀향의 시어(詩語)로 쓰게 되었다.
♣ 동귀석화광[同歸石火光]부싯돌 불빛이 번쩍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짧은 인생을 홀연히 마감했다는 말이다.
♣ 동귀초수[同歸楚水]진(晉) 나라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을 얻어 하나는 자기가 차고 하나는 장화(張華)에게 주었는데, 그 뒤에 장화가 복주(伏誅)되면서 그 칼도 없어지고 뇌환의 칼은 아들이 차고 다니다가, 복건성(福建省) 연평진(延平津)에 이르렀을 때 차고 있던 칼이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면서, 없어졌던 장화의 칼과 합하여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한 뒤 사라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張華傳》
♣ 동근연지[同根連枝]같은 뿌리와 잇닿은 나뭇가지. 즉, 형제자매(兄弟姉妹)를 일컫는 말이다.
♣ 동기[童欺]두보의 모옥위풍우소파가(茅屋爲風雨所破歌)에 “南村群童欺我老無力"이란 어구가 있음. 이 연(聯)은 자기의 신세를 두보에게 비하여 쓴 말임.
♣ 동기상구[同氣相求]기풍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서로 동류를 찾아 모인다.
♣ 동낙서경[東洛西京]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 동남[東南]東南은 모두 여울과 먼지 구덩이.
♣ 동남누접[童男樓艓]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불(徐市)에게 명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선약(仙藥)을 구하도록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 동남비[東南轡]한(漢)나라 범방(范滂)이 지방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안찰사(按察使)로 임명되자,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서 개연(慨然)히 천하를 밝힐 뜻이 있었다.
♣ 동녀[童女]결혼하지 않은 소녀.
♣ 동녀시[童女詩]지원(至元) 12년(1352 元 順帝 12년, 恭愍王 元年) 원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명령하여 양가(良家)집 딸 50명을 뽑아 데려갔으니, 대개 옛날 종주국(宗主國)ㆍ번국(藩國) 간의 혼인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 동년[同年]같은 방(榜)에 급제한 사람을 말한다. 국사보(國史補)에 “급제(及第)한 것을 진사(進士), 서로 공경하는 것을 선배, 함께 합격한 것을 동년, 시관(試官)을 좌주(座主)라 한다.” 하였다. 동년방(同年滂). 동방급제(同榜及第)
♣ 동대[東臺]동도 어사대(東都御史臺)의 준말로,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 동도주[東道主]주인이 되어 내방(來訪)한 손을 안내하는 사람을 말한다. 좌전(左傳) 희공삼십년(僖公三十年)에 “촉지무(燭之武)가 진백(秦伯)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鄭) 나라를 동도(東道)의 주(主)로 삼아 행리(行李)의 내왕에 있어 그 곤핍(困乏)한 것을 지공하게 한다면 군(君)도 해로울 것 없으리라’ 했다.” 하였다.
♣ 동도주인[東道主人]손[客]이 주인을 이르는 말. 춘추시대 때에 정(鄭) 나라가 진(秦) 나라에 대하여, “동도 주인이 되겠다.” 하였으니, 그것은 진 나라 동쪽으로 나올 일이 있으면 정 나라가 주인노릇으로 편리를 보아주겠다는 뜻이다.
♣ 동도풍우[東都風雨]동한 말기에 세상이 요란함을 말한 것인 듯하다.
♣ 동동[憧憧]마음이 잡히지 않는 모양, 끊임없이 오가는 모양
♣ 동동[冬冬]문을 두드리는 소리
♣ 동동[橦橦]북소리
♣ 동동[洞洞]착실함, 텅 빈 모양, 형태가 없는 모양, 더 할 나위 없이 효경스런 모습, 검은 모양
♣ 동동[曈曈]해가 돋을 때의 해 모양, 태양처럼 빛나는 모양
♣ 동동촉촉[洞洞燭燭]매우 공경하고 삼가하여 조심스러운 모양.
♣ 동둔무사객[東屯無事客]두보(杜甫)가 파촉(巴蜀)에서 논농사를 지으며 한가로이 보낸 것을 말한다. 두보의 시에 “東屯稻畦一百頃 北有澗水通靑苗”라는 구절과 “東屯大江北 百頃平若案”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15 夔州歌 6, 卷19 行宮張望 補稻畦水歸》
♣ 동래자기[東來紫氣]노자(老子)가 올 때 보라색 기운이 하늘에 감도는 것을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보았다는 “紫氣東來”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老子韓非列傳 注》
♣ 동량지재[棟樑之材]기둥이나 들보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 한 집이나 한 나라의 큰 일을 맡을 만한 사람
♣ 동려[桐廬]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가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하며 숨어살았다 한다. 《後漢書 嚴光傳》
♣ 동령[動鈴]구걸(求乞)하는 일. 조선 후기에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그 관아의 사령(使令)들이 수령에 대한 문안을 핑계하여 동령 혹은 조곤(釣鯤)이라 칭하면서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는데 동령은 맨손으로 구걸하는 것, 조곤은 술을 가지고 구걸하는 것이다.
♣ 동로가[東魯家]주인 없이 텅 빈 고향 집을 가리킨다. 이백(李白)의 시 ‘동로에 있는 어린 두 자식에게 부치다.[寄東魯二稚子]’에 “동로에 붙어사는 우리네 가족, 귀음의 전답에다 누가 씨를 뿌려 줄까.[我家寄東魯誰種龜陰田]”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12》
♣ 동로옹[東魯翁]공자(孔子)를 가리킨 말이다.
♣ 동뢰수연[同牢壽宴]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잔치를 말한다. 신혼 부부가 침실에서 함께 혼례 음식을 드는 것을 동뢰(同牢)라고 하였다. 《禮記 婚儀》
♣ 동료[凍醪]봄에 먹기 위하여 겨울에 빚어 둔 술을 말한다.
♣ 동룡[銅龍]동룡문(銅龍門).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 이름. 제왕의 궁궐의 뜻으로 빌려 쓰기도 한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에 “왕이 급하게 태자를 부르니 용루문(龍樓門)에서 나왔다.” 한 주(注)에 “문루(門樓) 위에 구리로 만든 용[銅龍]이 있으므로 용루(龍樓)라고 한다.” 하였다.
♣ 동룡문[銅龍門]구리로 만든 용으로 장식한 한(漢) 나라 태자의 궁문(宮門) 이름인데, 보통 제왕의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成帝紀》
♣ 동루[銅樓]동루는 한대(漢代) 태자궁(太子宮)의 문루(門樓)인 동룡루(銅龍樓)의 준말,
♣ 동류[東流]사물이 점차 사그라져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 동류불일[東流不溢]동쪽으로 흘러 넘치지 않는다.
♣ 동륙[東陸]태양이 운행하는 동방 칠수(東方七宿)의 구역을 말한다.
♣ 동릉[東陵]진(秦) 나라 때 소평(召平)이 동릉후(東陵侯)로 있다가 진 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布衣)를 입고 지내면서 장안성(長安城)의 동쪽에 오이를 심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동릉오이’ 또는 ‘청문오이’라고 불렀다.
♣ 동릉과[東陵瓜]한(漢) 나라 소평(邵平)이 동릉후(東陵侯)를 그만두고 청문(靑門) 밖에서 가꾼 감미로운 오이를 말한다.
♣ 동릉과지[東陵瓜地]동릉은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진 소평(召平)을 말함. 그는 진 나라가 망하자 가난한 선비가 되어 장안(長安) 동쪽 땅에 오이를 심어 가꾸었는데, 오이가 매우 맛이 좋아 세속에서 이를 ‘동릉과(東陵瓜)’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五十四》
♣ 동릉소평포[東陵邵平圃]소평(邵平)이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졌는데,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가난한 선비의 신분으로 장안(長安)의 성(城) 동쪽에 오색과(五色瓜)를 심어서 생활을 영위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동릉주선포인간[東陵晝膳脯人肝]도척(盜跖)이 동릉(東陵)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 동릉후[東陵侯]동릉후는 곧 진(秦) 나라의 소평(召平)의 봉호. 소평은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성(長安城) 동쪽에 살면서 오이를 심어 생활을 영위했다. 세상에서는 이 오이를 동릉과(東陵瓜)라 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
♣ 동리[東里]동리는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살았던 지명으로 곧 자산을 지칭하는 말인데,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사명(辭命)을 짓는 데는 비심(裨諶)이 초(草)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자우(子羽)가 수식(修飾)하고, 동리가 윤색(潤色)한다.” 하였다.
♣ 동리국[東籬菊]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3》
♣ 동리연분[東籬緣分]국화를 가장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 도잠(陶潛)의 시에, “동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음.
♣ 동리옹[東籬翁]동리 노인은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동쪽 울타리 가에 국화를 심었으며,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서 마셨다.
♣ 동리유상원[東籬幽賞遠]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국화를 몹시 좋아하였는데, 그가 지은 시에 “동쪽 울서 국화꽃을 따 들고, 한가로이 남쪽 산을 바라다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南史 卷75 隱逸列傳上 陶潛》
♣ 동리일타[東籬一朶]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 잡시(雜詩)의 “동쪽의 울밑에서 국화를 따다 무심히 남녘 산을 바라본다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나온 것으로, 국화를 가리킨다.
♣ 동리진물색[東籬眞物色]도연명이 9월 9일 중양절에 좋아하는 술도 없이 울타리 가의 국화꽃을 따면서 하염없이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때마침 자사(刺史)인 왕홍(王弘)이 보낸 백의 사자(白衣使者)가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취하도록 마시고 돌아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93 陶潛傳》
♣ 동림[東林]동림서원(東林書院)의 약칭. 송(宋)의 양시(楊時)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다 동림서원을 세워두고 학문을 강론했는데, 당시 사대부들로서 가슴에 경륜을 지니고 세상과 맞지 않은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때 집권파인 위충현(魏忠賢) 일파로부터 동림당(東林黨)이라는 지목을 받고 숙청까지 당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된 후 다시 번성하였음. 《明史 顧憲成傳》
♣ 동림[東林]동쪽에 있는 숲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 동림사[東林寺]중국에 있는 절인데 백거이(白居易)가 있었다.
♣ 동림사[東林寺]진(晉) 나라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머물던 여산(廬山)의 절 이름으로, 이곳에서 당시의 고사일인(高士逸人) 18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함께 모여 노닐었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 동림승패[東林勝敗]사화(士禍)나 당쟁(黨爭)을 말함. 송(宋)의 양시(楊時)가 무석(無錫)에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웠는데, 명대(明代)에 와서 고헌성(顧憲成)등이 그것을 중수하고 학문을 강마하면서 혹은 국정을 논평하기도 하고 인물을 품평하기도 하여 당시 사대부들이 많은 향응을 하였고 그리하여 드디어 동림당(東林黨)이 형성되었다. 그 후 위충현(魏忠賢)이 득세하자 그간 동림당을 시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것을 기회로 중상모략을 하여 당옥(黨獄)을 일으켜 거의 망타가 되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되고 나서 공론이 다시 밝아졌다고 함. 《明史 顧憲成傳》
♣ 동마부[董馬賦]동중서(董仲舒)와 사마천(司馬遷)의 부(賦).
♣ 동명[東明]고구려시조(始祖). 그의 아버지,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모수(解慕漱).
♣ 동명왕[東明王]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인 고주몽(高朱蒙)을 가리킨다.
♣ 동모[桐帽]오동잎으로 만든 모자를 이르는데, 옛날 은자(隱者)가 착용했다고 한다.
♣ 동모산[東牟山]요령성 심양현(瀋陽縣) 동쪽에 위치한 산. 일명 천주산(天柱山)으로 당 나라 고종이 고구려와 발해(渤海) 등을 평정하고 군대를 두어 지키게 한 산임.
♣ 동무[同畝]같은 밭에 심다.
♣ 동무음[東武吟]동무음은 악부(樂府) 초조곡(楚調曲)의 이름인데, 당(唐) 나라 이백(李白)에게 가사(歌辭)가 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시사(時事)의 변천과 영화(榮華)의 덧없음을 상심하는 뜻을 담고 있다.
♣ 동묵[銅墨]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의 준말로, 지방의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 동문[同文]동문은 천하가 같은 문자(文字)를 쓴다는 말로, 중용(中庸) 이십팔장에 “지금 천하가 수레는 제도가 같고, 책은 문자가 같고, 행동은 질서가 같다.[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하였다.
♣ 동문과[東門瓜]동문은 성(城)의 동문. 옛 진(秦)의 동릉후(東陵侯)였던 소평(召平)은 진이 멸망하자, 포의(布衣)로 장안(長安)의 성 동쪽에 오이를 심고 살았는데, 오색(五色) 오이가 있어 유명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
♣ 동문궤[同文軌]온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뜻. 문궤(文軌)는 ‘서동문(書同文) 거동궤(車同軌)’란 말에서 온 것이다.
♣ 동문동궤[同文同軌]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뜻함. 同文은 문자를 통일하게 하는 것이고, 同軌는 법을 같게 한다는 것이다.
♣ 동문동적[東門銅狄]장생불사하는 신선의 일을 가리킨다. 선인(仙人) 계자훈(薊子訓)이 장안(長安) 동문 패성(覇城) 가에서 어떤 노인과 함께, 진시황(秦始皇) 때 이적(夷狄)의 거인(巨人)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동인(銅人)을 쓰다듬으며 “이것을 만드는 것을 본 뒤로 5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後漢書 方術列傳 子訓傳》
♣ 동문서답[東問西答]동쪽에서 묻는데 서쪽에다 대답함. 묻는 말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스승 밑에서 같이 학문을 닦고 배움.
♣ 동문오[東門吳]위(魏) 나라 사람 동문오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가신(家臣)이 묻기를 “공의 아들 사랑은 천하에 둘도 없었는데, 이제 자식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옛날에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이 없다고 그때 슬퍼하지 않았었다. 지금 자식이 죽은 것은 옛날에 자식이 없었던 것과 똑같은데,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列子 力命》
♣ 동문일궤[同文一軌]천하가 통일되어 글은 글자가 같고, 수레는 궤(軌)의 제도가 같다[車同軌 書同文字]는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동문지요상[東門之堯顙]공자가 정(鄭) 나라 동문(東門)에 혼자 섰더니 어느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요(堯)와 같고 얻어먹지 못한 상가구(喪家狗)와 같다.” 하였다.
♣ 동미함음[桐尾含音]채옹(蔡邕)이 타다 남은 오동나무를 가지고 거문고를 만들었다.
♣ 동방[同榜]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 동방[洞房]깊숙한 데에 있는 방. 전하여 부인의 침방(寢房)을 말한다.
♣ 동방[東方]당(唐)의 시인(詩人) 동방규(東方虯)를 말하는데, 사람의 시재(詩才)를 극구 칭찬한 말이다.
♣ 동방규[東方虯]당(唐) 나라 시인.
♣ 동방만청[東方曼倩]만청은 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자(字). 그는 문사(文辭)에 능하고 해학(諧謔)도 잘하였다. 속설(俗說)에는 “그가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먹고는 장수(長壽)하였으므로,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이라 일컫는다.” 한다.
♣ 동방삭[東方朔]동방삭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字)는 만청(曼倩). 해학(諧謔)과 골계(滑稽)에 뛰어났으며 벼슬이 태중대부 급사중(太中大夫給事中)에 이르렀는데, 그는 또한 선술(仙術)로도 널리 알려졌다. 《漢書 卷六十五》
♣ 동방삭[東方朔]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의하면, 동방삭이 살았을 때에 동사랑(同舍郞)이 말하기를 “천하에 아무도 동방삭을 알 자가 없고, 오직 태왕공(太王公)만이 안다.” 하였는데, 동방삭이 죽은 뒤에 무제(武帝)가 그 말을 듣고는 태왕공을 불러 “네가 동방삭을 아느냐?”고 묻자, 태왕공이 천문(天文)으로 알 수 있다고 하므로, 무제가 또 묻기를 “모든 별이 다 갖춰져 있느냐?”하니, 태왕공이 대답하기를 “다른 별들은 그대로 있으나 다만 세성(歲星)은 18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다시 보입니다.” 하자, 무제가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기를 “동방삭이 살아서 18년 동안을 내 곁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세성이었음을 내가 몰랐구나.”고 했다 하므로, 이것이 곧 동방삭의 전신이 세성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또 참된 은자[大隱]가 되었다는 것은 동방삭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같은 사람은 조정(朝廷) 사이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속세에 묻혀 살며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노니, 궁전(宮殿) 안이 곧 세상을 피하여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곳인데, 하필 깊은 산중을 들어갈 것이 있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六, 李太白集 卷十一 書懷贈南陵常贊府詩》
♣ 동방지일[東方之日]제풍(齊風)에 실린 장명. 그 내용은 “東方之日兮 彼姝者子 在我室兮 在我室兮 履我卽兮 東方之月兮 彼姝者子 在我ꞟ兮 在我ꞟ兮 履我發兮”라는 것으로 2장(章) 5구(句)임.
♣ 동배주창류[同杯酒娼類]한 잔의 술을 같이 마신 창녀(娼女). 곧, 한 사내에게 약속하고 몸을 맡긴 창녀.
♣ 동번[東樊]조선 철종(哲宗) 연간의 문신이며 시인이었던 이만용(李晩用)의 호이다.
♣ 동벽[東壁]동벽은 문장(文章)을 맡은 별 이름으로, 전하여 천자(天子)의 도서(圖書)를 관장한 비부(祕府)를 이름. 《大象 列星圖》
♣ 동벽[東壁]홍문관원의 별칭.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ㆍ전한(典翰)ㆍ응교(應敎)ㆍ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 동벽성[東壁星]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하나, 이 벽성은 문장을 맡은 별이라 한다.
♣ 동벽휘[東壁輝]제(齊)나라에 서오(徐吾)라는 가난한 부인이 있었다. 이웃 부인들과 밤에 촛불을 어울려 방적(紡績)을 하는데, 서오는 가장 가난하여 촛불을 계속해 대지 못하니 이웃 부인들이 촛불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서오는, “내가 가난하여 촛불을 같이 대지 못하므로, 항상 먼저 와서 소제(掃除)하고 자리를 정돈하여 당신들 오기를 기다린다. 한 방에서 나 한 사람 더 있음으로 해서 촛불이 따로 소비될 것도 아니니 동벽(東壁)의 남은 빛을 왜 아끼는가.” 하니, 이웃 부인들이 서오에게 촛불을 같이 쓰기를 허락하였다.
♣ 동병상련[同病相憐]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 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잘 이해해 줌
♣ 동보[同甫]동보는 진량(陳亮)의 자(字)로 학자들이 용천 선생(龍川先生)이라고 불렀다. 가슴에 웅대한 계책을 품고 있었으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몇 번이나 하옥되었다가 겨우 풀려나곤 하였다. 주희(朱熹)와 황제 왕패(皇帝王霸)의 학문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주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그의 뜻을 뺏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宋元學案 卷56》
♣ 동복[僮僕]말구종 드는 하인.
♣ 동봉[東峯]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별호임.
♣ 동봉[東封]사마상여가 임종(臨終) 전에 지은 봉선문(封禪文)을 가리킨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무제(漢武帝)에게 동쪽으로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의 제사를 드리라고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동봉[東封]옛적에 제왕(帝王)이 천하가 태평한 공을 이루면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옥첩(玉牒)을 땅에 봉하는 것이니, 이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 동봉자[東峯子]김시습(金時習)의 별호.
♣ 동부[銅符]구리쇠로 만든 부신(符信). 동어부(銅魚符)의 준말로, 지방관이 차는 인끈. 동인(銅印)과 같은 말로, 지방 수령을 뜻한다.
♣ 동부[洞府]도교(道敎)의 용어로, 신선(神仙)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宋史 禮志》
♣ 동부담병[同父談兵]동보는 송 효종(宋孝宗) 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의 자임. 재기(才氣)가 뛰어나 병법을 담론하길 좋아하였으며, 일찍이 옛사람이 무력을 사용한 것과 승리하고 패배한 것에 대한 사적을 상고하여 작고론(酌古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六 陳亮傳》
♣ 동북[東北]관동(關東)과 관북(關北). 곧 강원도와 함경도.
♣ 동분서주[東奔西走]동쪽으로 뛰고 서쪽으로 달린다. 사방으로 이리저리 부산하게 돌아다님을 뜻한다.
♣ 동빈[洞賓]동빈은 8선(仙)의 하나로 불리는 당(唐) 나라 여암(呂巖)의 자(字)인데, 자신에게는 3검(劍)이 있다고 하면서 각각 번뇌(煩惱)와 탐진(貪嗔)과 색욕(色慾)을 끊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 동빙한설[凍氷寒雪]얼음이 얼고 눈보라가 치는 추위
♣ 동사[彤史]궁중 생활의 기록을 맡은 여관(女官), 또는 그 생활의 기록. 붓대가 붉은 붓을 잡고 궁중(宮中)에서 군후(群后)의 일을 기록하였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 동사[桐社]동향(桐鄕)의 사당으로, 어진 수령을 제사 지내는 사당을 말한다. 동향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이다. 한(漢) 나라 때 주읍(朱邑)이 젊어서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그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 장사 지내라.”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 장사 지내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 동사백[董思白]명 나라 동기창(董其昌)을 말함.
♣ 동사부[東槎賦]사행(使行) 길에 지은 시를 말한다. 중종 16년(1521)에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조선에 왔을 때 우리측의 접반사 이행(李荇), 종사관 정사룡(鄭士龍)ㆍ소세양(蘇世讓) 등 당대의 저명한 시인들과 서로 많은 시를 수답하였는데, 그들이 돌아간 뒤에 그 시들을 묶어 동사집(東槎集)이라 이름한 데서 나온 말이다. 《稗官雜記 卷四》
♣ 동사자수[同舍自羞]한 문제(漢文帝) 때 직불의(直不疑)가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이 때 동사인(同舍人)이 금(金)을 잃어버리고 직불의를 의심하자, 직불의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 금을 보상해 주었던 바, 뒤에 직불의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금을 잃었던 사람이 대단히 부끄럽게 여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三》
♣ 동산[東山]동산(東山)은 시경(詩經) 빈풍의 편명이다. 일찍이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무경(武庚)을 대신 세운 다음, 자기 아우인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을 은(殷)에 보내서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무왕이 돌아가고 이린 성왕(成王)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관숙ㆍ채숙이 무경에게 붙어 “주공(周公)이 장차 유자(孺子; 성왕)에게 불리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성왕이 그 말을 듣고 숙부인 주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하여 무경과 관숙ㆍ채숙을 모두 토멸하였는데, 이 동산시는 바로 주공이 무경 등을 토멸하고 3년 만에 돌아와서 병사들을 위로한 노래이다.
♣ 동산[東山]동산은 중국 절강(浙江) 상우현(上虞縣) 서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처음에 좌저작랑(佐著作郞)을 지내다가 병이 들어 그만두고 그곳에 은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자,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석(安石)이 나오려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창생을 어찌할꼬.” 하였는데, 40세에 다시 나가서 환온(桓溫)의 사마(司馬)가 된 뒤에 사도(司徒)까지 지냈다. 《晉書 卷七十九 謝安傳》 ☞ 고와동산(高臥東山)
♣ 동산[銅山]철산(鐵山)의 옛 이름이다.
♣ 동산각소노[東山覺小魯]공자가 노(魯) 나라의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 上》
♣ 동산고와[東山高臥]동산에 은거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함. ☞ 고와동산(高臥東山)
♣ 동산기[東山妓]진(晉)의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놀면서 기생을 늘 대동하였다고 함. 《晉書 謝安傳》
♣ 동산부[銅山富]돈이 풍부한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일찍이 촉(蜀)의 엄도동산(嚴道銅山)을 영신(佞臣) 등통(鄧通)에게 주어서 임의로 주전(鑄錢)하게 하였다.
♣ 동산화옥[東山華屋]동산은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은거(隱居)하던 곳이다. 사안(謝安)이 죽은 뒤에 존경하던 양담(羊曇)이 그 집을 지나다가 조자건(曹子建)의 시에 “살아서는 좋은 집[華屋]에 거처하더니 죽어서는 산으로 돌아간다"라는 글귀를 읊고 통곡한 고사가 있다.
♣ 동상[東床]극감(郄鑒)이 문생(門生)으로 하여금 왕도(王導)의 문하(門下)에서 사윗감을 간택하게 하였더니 왕씨 문중(王氏門中)의 여러 소년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자신(自身)을 칭양하였으나, 왕희지(王羲之)만은 배를 드러내고 동상(東床)에 누워 모른 체하자 그를 사위로 삼았다. 《晉書 卷八十 王羲之傳》
♣ 동상[董相]동상(董相)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 동상이몽[同床異夢]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꿈. 겉으로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서로 딴 생각을 품음 또는 같은 처지와 입장에서 저마다 딴 생각을 함.
♣ 동생[董生]동생은 한(漢)나라 광천(廣川)사람인 동중서(董仲舒)를 말한다.
♣ 동생심장려[董生深長慮]동생(董生)은 한(漢)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동중서가 재이지기(災異之記)를 써서 사람의 잘못이 결국 천재지변을 부른다는 경고의 뜻을 담았는데, 그 속에 풍자가 들어 있다 하여 천자(天子)로부터 죄를 받고 그후로는 끝내 재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함. 《史記 儒林列傳》
♣ 동생유견[董生乳犬]동생은 당(唐) 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동소(董召)를 이름. 동소의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개도 새끼를 먹일 것이 없어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닭이 와서 벌레를 쪼아가지고 개 새끼를 먹이려 하였으나, 개 새끼는 먹지 않고 슬피 울기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董生行》
♣ 동서[東序]하(夏) 나라 시대의 태학(太學)으로 이곳에서 국로(國老)를 봉양하기도 하였는데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대옥(大玉) 등은 동서(東序)에 둔다.”고 하였다.
♣ 동서계[東西階]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主人就東階 客就西階 客若降等 則就主人之階”라고 보임.
♣ 동선[銅仙]동선은 한 무제(漢武帝) 때에 구리를 가지고 ‘선인(仙人)이 손으로 쟁반을 받쳐들고 감로(甘露)를 받는 형상’으로 주조한 기물(器物)이다.
♣ 동선[同船]후한(後漢) 때 곽태(郭太)가 낙양(洛陽)에 노닐면서 고사(高士) 이응(李膺)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응이 그를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어 서로 친구가 되었는데, 뒤에 곽태가 향리로 돌아올 적에 수천 명의 선비들이 배웅을 나왔는바, 이때 곽태가 오직 이응하고만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갔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六十八》
♣ 동선사한[銅仙辭漢]임금이 도성을 떠나 파천(播遷)한 것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명제(明帝)가 한 무제(漢武帝) 때 세워진 동선(銅仙) 즉 선인장(仙人掌)을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기려 할 때 승로반(承露盤)이 땅에 떨어져 크게 소리를 내며 부서지자 동선이 눈물을 흘렸다는 ‘동선사한(銅仙辭漢)’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魏書 明帝紀 注》
♣ 동선장[銅仙掌]천상(天上)의 선로(仙露)를 받기 위하여 한 무제(漢武帝)가 구리로 만들어 세웠다는 선인(仙人)의 손바닥. 연꽃잎.
♣ 동선하로[冬扇夏爐]겨울의 부채와 여름의 화로. 아무 소용 없는 물건을 말한다.
♣ 동성[東城]서울 중구 광희 2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을 말한다. 당시 도성에서 나오는 모든 하수가 빠져나가는 수문으로, 각종 오물과 쓰레기를 폐기했던 곳이자,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서울六百年史 第一卷》
♣ 동성상응[同聲相應]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여 어울린다. 의견을 같이 하면 자연히 서로 합치게 된다는 의미.
♣ 동성이속[同性異俗]사람의 성질은 본래는 같으나 습관에 따라 변함을 뜻함.
♣ 동속[同俗]예기(禮記) 왕제(王制)에 “팔정을 고루 행하여 음란함을 예방하고, 도덕을 일관되게 펼쳐 풍속이 같게끔 한다.[齊八政以防淫 一道德以同俗]”라는 말이 나온다.
♣ 동손[桐孫]동목(桐木)의 손지(孫枝). 즉 오동나무 가지에서 다시 생겨난 가지를 말한다.
♣ 동수[銅綬]동수는 구리 인장의 인끈. 한(漢) 나라 제도에 지방 수령은 구리 인장을 사용하였다 하여 현감이나 군수 등의 별칭으로 사용한다.
♣ 동시[東市]낙양성 동쪽에 있었던 우마시(牛馬市).
♣ 동시[東市]동시는 장안(長安) 동쪽 시가지로 여기에서 사형을 집행하곤 하였다.
♣ 동시[東施]미인 서시(西施)가 가슴병을 앓아 찡그리매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그 마을의 못 생긴 여인 동시(東施)가 보고 부러워하여 가슴을 쥐고 찡그리니 사람들이 보기 싫어 문을 닫았다.
♣ 동시[彤矢]시경(詩經) 소아(小雅) 彤弓(동궁)의 “시위 느슨한 붉은 활을 받아서 간직하네. 내게 좋은 손님 있으니 성심으로 내려주네[彤弓弨兮 受言藏之 我有嘉賓 中心貺之]"에서 나온 말로, 공을 세우면 천자가 붉은 화살을 상으로 내렸다 한다.
♣ 동심결[同心結]실 같은 것으로 두 고를 내고 맞맺어서 풀리지 않도록 굳게 맺는 매듭을 말하는데, 이는 곧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양무제(梁武帝) 유소사시(有所思詩)에 “허리에 띤 두 비단띠가 꿈에 동심결이 되었다.[腰間雙綺帶夢爲同心結]"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심루[同心縷]실이 풀리지 않도록 굳게 맺는 매듭. 이 또한 부부가 굳게 서로 사랑하는 뜻을 부친 것이다.
♣ 동심인성[動心忍性]더욱 큰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자기의 성질을 참아 강인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로,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온다.
♣ 동심지언[同心之言]같은 마음에서 나온 말. 절친한 친구 사이
♣ 동심화[同心花]다른 두 나무의 꽃이 서로 맞붙어 한 꽃을 이룬 것이라 한다.
♣ 동쌍성[董雙成]옛날의 여선(女仙)으로 서왕모(西王母)의 시녀(侍女)였다고 한다.
♣ 동씨유[董氏帷]동씨(董氏)는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동중서는 춘추(春秋)를 전공하였으며, 경제(景帝) 때에 박사(博士)가 되어 장막을 드리우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3년 동안 밖에 나오지도 않았다. 《漢書 董仲舒傳》
♣ 동아왕[東阿王]曹植. 魏 文帝 曹丕의 동생.
♣ 동악[動樂]궐희(闕戱) 때의 놀이의 한가지. 사학(四學)에서 보낸 사신을 예조(禮曹)에서 대접할 때 어린아이에게 솥뚜껑을 치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 동악[東岳]이안눌(李安訥)의 호이다.
♣ 동악상제[同惡相濟]함께 악을 행하여 서로 돕는 것.
♣ 동악신묘[東嶽神廟]광녕(廣寧)의 동쪽 성 밖 몇 리 되는 곳에 있는 묘우(廟宇)로, 동악, 즉 대악(岱岳)의 신인 제천인성제(齊天仁聖帝)를 모신 사당이다.
♣ 동안심법[同安心法]심경부주(心經附註) 권3에 “오늘날 배우는 이들이 장족의 발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소년 시절에 동안에 있으면서 밤에 종소리를 들었는데, 하나의 종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이 마음이 벌써 다른 곳으로 치달리는 것이었다.[嘗記少年時在同安 夜聞鍾聲 聽其一聲未絶 此心已自走作] 그리하여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경책하고 반성하여 학문은 모름지기 전심치지(專心致志)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주자(朱子)의 말이 실려 있다.
♣ 동안현리종성단[同安縣裏鐘聲斷]주자(朱子)의 제자 장현보(張顯父)가 주자에게 올린 편지에 “선생께서 ‘지난번 동안현(同安縣)에서 종소리를 들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마음 거둬들이는 법을 깨달았다.’고 하시셨습니다. ……" 한 데에 대하여, 주자의 답서에 이르기를,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수시로 드나들어서 종소리 하나가 쉬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도 이미 수없이 변하던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朱子大全 卷五十八》
♣ 동액[東掖]당 나라 때 왕명의 출납과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던 문하성(門下省)의 별칭으로, 우리 나라의 승정원을 뜻한다.
♣ 동야[東野]동야는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 맹교(孟郊)의 자인데, 그는 연해 세 아들을 낳았으나 낳을 때마다 수일 만에 잃었으므로, 한유(韓愈)가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지은 맹동야실자시(孟東野失子詩)에 “하늘에게 묻기를 인간을 주관하되 후박을 왜 안 고르게 하는가 하니 하늘이 이르되 하늘과 땅과 사람은 본래부터 상관이 없다 하였네[問天主下人 薄厚胡不均 天曰天地人 由來不相關]”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七ㆍ韓昌黎集 卷四》
♣ 동야[東冶]지명.
♣ 동야거빈가구소[東野居貧家具少]당나라 시인(詩人) 맹동야(孟東野)의 이거(移居)하는 시에, “수레를 빌어 가구(家具)를 실으니 가구가 수레보다 적구나.” 하였다.
♣ 동약[僮約]동약은 노예(奴隷)의 계약(契約)을 기술한 문장명(文章名)으로, 한(漢) 나라 때 왕포(王褒)가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노예를 사서 부리는 데에 있어 매우 까다로운 조건으로 노예를 혹사시킴을 기술하고 있다.
♣ 동양[東陽]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가리킨다.
♣ 동양[東瀼]중국 기주(蘷州)에 있는 물이름으로, 당 나라 두보(杜甫)가 그곳에 부쳐살았다 하여 타향의 뜻으로 쓰인다.
♣ 동양[東陽]평산(平山)의 옛 이름이다.
♣ 동양대공이[東陽帶孔移]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지낸 남조 양(南朝梁)의 시인 심약(沈約)을 가리킨다. 태수로 나간 지 1백여 일 만에 허리띠를 몇 번이나 다시 졸라맬 정도로[革帶常應移孔] 몸이 수척해졌다고 한다. 《梁書 沈約傳》
♣ 동양도위[東陽都尉]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신익성(申翊聖)의 봉호이다.
♣ 동양소수[東陽銷瘦]몸이 바짝 말라 쇠약해진 것을 말한다. 양(梁) 나라의 시인 심약(沈約)이 동양 태수(東陽太守)로 나가서 힘들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허리띠가 자꾸 줄어들고 팔뚝이 반으로 가늘어졌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梁書 沈約傳》
♣ 동양위[東陽尉]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신익성(申翊聖)의 봉호(封號)이다.
♣ 동양진[動梁塵]양진(梁塵)은 들보 위의 티끌. 옛날 노(魯) 나라의 우공(虞公)은 소리를 발하면 매우 청월(淸越)하여 노래하면 들보 위에 있는 티끌이 움직였다 한다.
♣ 동어[銅魚]동어부(銅魚符)의 준말로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부신(符信)을 이름. 관등(官等)에 따라 금(金)ㆍ은(銀)ㆍ동(銅)의 구별이 있다.
♣ 동어부[銅魚符]구리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부신(符信)인데, 옛날 지방관이 이를 몸에 지니었었다.
♣ 동엽봉제[桐葉封弟]장난 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동생을 제후(諸侯)에 봉(封)한다는 뜻으로, 제후를 봉하는 일을 뜻하는 고사성어.
♣ 동엽전규[桐葉剪圭]규는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나게 옥으로 만든 것인데, 천자가 제후를 봉(封)할 때에 내려 주는 것이다.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어릴 적에 아우 강숙(康叔)과 희롱하면서, “오동잎[桐葉]을 오려서[剪] 규를 만들어 강숙에게 주며 이것으로 너를 봉(封)해 주리라.” 하였다.
♣ 동영[冬榮]겨울 꽃.
♣ 동영[東瀛]조선 시대에 홍문관(弘文館)을 영각(瀛閣)이라 했으니, 동영은 바로 홍문관을 가리킨 것이며, 선화(仙化)했다는 말은 홍문관에 들어가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선이 된 것과 같다는 뜻이다.
♣ 동오[東吳]춘추시대 오(吳) 나라 지방으로 오늘날의 절강성(浙江省)과 호남성(湖南省) 일대인데,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동오[童烏]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아들 신동(神童) 오(烏)를 가리킨다. 그는 무척 총명하여 일곱 살에 웅이 논한 현문(玄文)에 참여하였는데, 불행히도 아홉 살에 요절하였다. 《華陽國誌 先賢揚雄傳》
♣ 동온하청[冬溫夏凊]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겨울에는 따습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린다는 뜻이다. 《禮記 曲禮》
♣ 동옹[東翁]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을 가리킨다.
♣ 동요[棟撓]주역(周易) 대과(大過)에 “대과는 들보가 휜 것이다.[大過棟撓]”하였고, 단사(彖辭)에 “들보가 휜 것은 본말이 약한 때문이다.[棟撓本末弱也]”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용[動容]초목이 모습을 바꾸는 것
♣ 동우인[桐偶人]동우인은 동목(桐木)으로 만든 우상(偶像)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병이 났을 적에, 일찍이 여태자(戾太子)와 사이가 나빴던 강충(江充)이 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상(上)의 병환은 무고(巫蠱)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 하고 옥사를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이고, 끝내는 무당을 시켜 동우인을 만들어서 태자의 궁중에 묻어 놓았다가 뒤에 이것을 파내어 마치 태자가 임금을 저주한 것처럼 꾸밈으로써 결국 태자와 황후까지 모두 자살하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四十四》
♣ 동원[東垣]금(金) 나라 때의 명의(名醫) 이고(李杲)의 별호임.
♣ 동원[董源]남당(南唐)사람. 자는 북원(北苑).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하였음. 《十國春秋》
♣ 동원[東園]동원은 한(漢) 나라 때 왕공 귀족의 무덤에 쓰이는 기물을 만들어 제공하는 일을 맡았던 소부(少府)에 소속된 관서의 이름이다.
♣ 동원기[東園器]동원기는 즉 동원 비기(東園秘器)의 준말로, 한(漢) 나라 때에 동원이란 관서(官署)에서 제작한 최상품의 상장 도구(喪葬道具)를 말하는데, 이것은 주로 제왕(諸王)이나 공훈이 큰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하사하던 것이다. 《晉書 宣帝紀》
♣ 동원비[東園秘]동원은 한(漢) 나라 때 장구(葬具)를 만들던 관서(官署)의 이름이고, 비기는 곧 장사(葬事) 때 쓰는 관(棺) 이하 여러 가지 장구를 가리킨다. 한 나라 때 특히 공신(功臣)ㆍ대신(大臣) 등이 죽었을 적에는 관례적으로 이 동원의 비기를 하사했다고 한다.
♣ 동원숙자환[東垣叔子環]아들이 어려서 일찍 죽은 슬픔을 말한다. 서진(西晉)의 정남장군(征南將軍) 양호(羊祜)가 다섯 살 되었을 적에, 이웃에 사는 이씨(李氏)의 동쪽 담 뽕나무 밑으로 곧장 가서 금환(金環)을 찾아내어 가지고 놀았는데, 이씨 집에서 이것을 보고는 “어려서 죽은 내 아들이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던 물건이다.”라고 경악해 마지않았으며, 당시 사람들도 이씨의 아들이 양호로 환생(還生)했다고 믿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晉書 卷34 羊祜傳》 숙자(叔子)는 양호의 자(字)이다.
♣ 동월[東越]지금의 절강성 동부와 남부, 복건성 동남부 지역에 걸쳐 있던 나라.
♣ 동월작부[董越作賦]동월은 명(明) 나라 영도(寧都) 사람이다. 헌종(憲宗) 때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효종(孝宗) 때에 우서자(右庶子)가 되어 사신으로 조선(朝鮮)에 나와서 저술을 많이 남기었고 사동일록(使東日錄)이 있다. 《國朝獻徵錄 卷五十二》
♣ 동위[東闈]왕세자 있는 곳
♣ 동유[董帷]동중서(董仲舒)의 장막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동중서는 일찍이 박사(博士)가 되어 학문에 전념하느라 장막을 내리고서 강의하였으며, 제자들에게 차례로 학업을 가르치므로 혹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漢書 卷五十六 董仲舒傳》
♣ 동의[童衣]동의는 청의동자(靑衣童子)를 줄인 말이다. 옛날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이 사람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사면령(赦免令)을 쓰고 있었는데, 쉬파리[靑蠅]가 한 마리 날아들어와 쫓으면 다시 오곤 하였다. 조금 뒤에 사람들이 사면령 내릴 것을 전부 알고 있으므로, 사실을 알아보니 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길거리에 사면령이 내렸다고 소리치고 다녔다 했다. 그제서야 부견은 전의 쉬파리가 바로 청의동자로 화했음을 알았다 한다. 《白孔六帖》
♣ 동이누[東夷陋]공자가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되, “누(陋)하리이다.” 공자가 말하되, “군자가 살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 동이불화[同而不和]겉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내심은 그렇지 않음.
♣ 동이수[童二樹]동이수는 청 나라 산음(山陰) 사람인데 이름은 옥(鈺), 자는 박암(璞巖), 호는 이수이다. 산수(山水)ㆍ난죽(蘭竹)ㆍ목석(木石)에 두루 공력이 있었음.
♣ 동인[銅人]구리로 주조하여 궁문(宮門)과 묘문(廟門) 앞에 세웠던 동상. 동적(銅狄)이라고도 함.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에 계자훈(薊子訓)이 장안(長安) 동쪽 패성(霸城)에서 한 늙은이와 함께 동인을 마사(摩挲)하며 서로 이르기를 “마침 이것을 지어붓는 것을 보았는데 이미 5백 년이 가까웠다.” 하였음. 소식의 시에 “摩挲古銅人 歲月不可計"라 하였음.
♣ 동인[銅印]동인은 지방 관원이 차는 동호부(銅虎符)를 말한다.
♣ 동인[同人]뜻을 같이하는 벗을 말한다.
♣ 동인[同仁]피차(彼此)의 차별없이 평등하게 인애(仁愛)를 베푼다는 뜻.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1 원인(原人)에 “성인(聖人)은 온 천하를 한결같이 보아 인애를 같이 베푼다.” 하였다.
♣ 동인괘[同人卦]뜻이 맞는 사람들의 화합을 상징함.
♣ 동자[董子]동중서(董仲舒)로 중국 전한 때의 대학자로 한때는 학문에 열중하여 3년 동안이나 자기집 밭을 들여다보지 않기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史記 儒林列傳》
♣ 동자하유[董子下帷]이 말은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下帷講誦 弟子傳以久次相授業 或莫見其面”이라고 보임.
♣ 동작대[銅雀臺]동작대는 악부가사(樂府歌詞)의 이름. 이 동작대 가사의 내용은 위 무제(魏武帝 삼국(三國)시대의 조조(曹操))가 죽을 무렵에 그의 기첩(妓妾)들을 연연(戀戀)한 일과 그의 기첩들이 무제가 죽은 뒤에 쓸쓸히 무제의 은총을 추모하는 등의 일을 서술하였다.
♣ 동장[東墻]송(宋) 나라 조사행(趙師睪)의 호(號). 그 당시에 정권을 잡은 한탁주(韓侂冑)가 애첩(愛妾) 14명을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북주관(北珠冠) 4개를 선사하였다. 탁주는 4명의 애첩에게만 나누어주었으므로 나머지 10명이 모두 욕심을 냈으나 주지를 못했다. 사행은 그 소문을 듣고 돈 10만 꾸러미를 들여 북주(北珠)를 사서 관(冠) 10개를 만들어 바치고, 자기의 첩을 시켜 벼슬을 구하도록 하여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승진되었다. 《宋史 卷二百四十七》
♣ 동장[銅章]지방 수령이 차는 구리로 된 관인(官印)을 말한다. 동부(銅符)라고도 한다.
♣ 동장묵수[銅章墨綬]지방관이 차는 관인(官印)과 인끈으로, 외직(外職)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2천 석(石) 이하의 관리가 몸에 차던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로, 보통 현령(縣令)을 뜻하는 말이다.
♣ 동적[銅狄]동인(銅人)이라고도 하고 금적(金狄)이라고도 하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만들어 함양(咸陽; 장안)에 세워 두었던 것이다. 후한(後漢) 때 도사 계자훈(薊子訓)이란 사람이 장안의 동쪽 패성(覇城)에서 어떤 노인 한 사람과 동인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나누기를 “내가 때마침 이것을 주조한 일을 보았는데 벌써 5백이 다 되어 간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장수를 누린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後漢書 卷八十二下 薊子訓傳》
♣ 동전미긍부[董傳未肯附]양웅(揚雄)의 당시의 세력 가진 정부(丁傅) 동현(董賢)에게 붙지 않고 태현경(太玄經)을 짓다가 뒤에 왕망(王莽)에 붙어서 미신부(美新賦)를 지었다.
♣ 동정[動靜]고려 시대에 이부(吏部)가 해마다 백사(百司)의 서리(胥吏)를 가려서 유임시키거나 이동하는 것.
♣ 동정[東征]고려와 원(元)의 연합군으로 일본을 쳤는데, 제1차 동정은 원종(元宗) 15년(1274) 10월, 제2차가 충렬왕(忠烈王) 7년(1281) 5월이었다.
♣ 동정[銅鉦]구리로 된 종 모양의 북으로 상고 때 전쟁에서 군대의 진격을 중지시키는 신호로 치던 것이다.
♣ 동정[洞庭]남방에 있는 수택(水澤) 이름. 지금의 동정호(洞庭湖).
♣ 동정[彤庭]대궐의 뜰을 말함. 천자의 궁정(宮庭)은 붉은 칠(漆)로 바르기 때문임.
♣ 동정[東井]동정은 동쪽에 있는 정수(井宿)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이다.
♣ 동정[彤廷]동정은 붉은색을 칠한 한(漢) 나라 대궐의 뜰이다.
♣ 동정동감적[動靜洞感寂]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느낌을 받으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한다[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마음의 영묘(靈妙)함을 말한 것이다.
♣ 동정서벌[東征西伐]전쟁을 하여 여러 나라를 이리 저리로 정벌함.
♣ 동정심존육이곤[動靜心存六二坤]속마음은 곧고 바르게 하면서 외부에 드러내는 행동은 유순(柔順)하게 한다는 말이다. 곤괘(坤卦) 육이효(六二爻)는 지도(地道)를 상징하는 곤괘의 주체가 되는데, 그 효사(爻辭)에 “정방형의 땅처럼 광대한지라,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直方大 不習 無不利]”라고 하였다.
♣ 동정지부[彤庭持斧]대궐 뜰에서 도끼를 손에 쥔다는 것은 곧 죽기를 각오하고 임금을 극간(極諫)하는 일이다.
♣ 동정춘색[洞庭春色]동정(洞庭)에서 나는 귤(橘)이 가장 유명한데 귤의 빛깔을 비유한 것이다.
♣ 동정향[洞庭香]동정산(洞庭山)에서 생산되는 감귤을 말함. 동정산의 감귤은 특히 껍질이 얇고 맛이 좋다고 한다. 동정호 근처에서 나는 것이 제일 향기롭다는데,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 한다.
♣ 동정호위근[動靜互爲根]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設)에, “양(陽)은 동(動)하고 음(陰)은 정(靜)한데 동이 극도에 가면 정이 되고 정이 극도에 가면 동이 되어 서로 뿌리가 된다.” 하였다.
♣ 동제[東帝]봄을 맡은 신인 동방청제(東方靑帝)를 가리킨다.
♣ 동제란도[銅鞮攔道]남조(南朝)때 양양(襄陽)의 동요(童謠) 가운데 “양양백동제(襄陽白銅鞮)”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이 즉위한 뒤에 이를 고쳐서 백동제(白銅鞮)라는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이백(李白)의 시에 “양양의 어린것들 일제히 손뼉치며, 거리 막고 다투어 백동제 노래 부르누나.[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6 襄陽歌》
♣ 동제속환천[東齊俗還遷]한(漢) 나라 때의 어진 수령인 공수(龔遂)가 제(齊) 지역에 가 보니, 사람들이 사치를 좋아하고 농사에 힘쓰지 않았다. 이에 공수가 검약을 실천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상(農桑)에 힘쓰게 하니 백성들의 풍속이 바뀌어졌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 동조[東朝]동조는 한(漢) 나라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있던 장락궁(長樂宮)의 별칭으로, 늘 태후가 이곳에 거하였으므로 황태후(皇太后)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동조[同調]취향이 서로 같은 사람을 말한다.
♣ 동조간서도[東棗間西桃]제삿상을 말하는 것인데, 원래 복숭아는 제사에 사용하지 않으나 신선들이 먹는 과일을 들었기 때문에 쓴 것이다. 한(漢) 나라 때 방사(方士)였던 이소군(李少君)은 “일찍이 해상(海上)에 유람하다가 안기생(安期生)이 오이만한 큰 대추를 먹는 것을 보았다.”《漢書 卷二十五 郊祀志》 하였는데, 안기생은 옛 신선의 이름이며, 서왕모(西王母)라는 천도(天桃)가 있었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천 년을 산다 한다. 한(漢)의 동방삭(東方朔)은 이 복숭아를 3개 훔쳐 먹어 3천 살을 살았다 한다. 《漢書 卷六十五 東方朔傳》
♣ 동족방뇨[凍足放尿]언 발에 오줌누기.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임시변통.
♣ 동주[銅柱]구리로 만든 기둥. 국경을 표할 때 쓰는 것으로, 중국의 남쪽 변방 지방을 가리킴. 후한서(後漢書) 마애전(馬援傳)에 “마원이 교지(交趾)에 이르러 동주(銅柱)를 세워, 한(漢) 나라의 경계를 만들었다.”라 하였다.
♣ 동주[東周]동주는 동방의 주 나라임. 인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려 매우 이상적인 나라인 옛 주 나라처럼 만들어보려고 했다는 것임.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만일 능히 나를 써주는 자가 있다면 나는 주도(周道)를 동방에 다시 일으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하였음.
♣ 동주마형잉도지[銅柱磨瑩仍塗脂]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구리 기둥에 기름을 칠하고 그 밑에 탄(炭) 불을 깔아 놓은 다음 죄인을 구리 기둥에 매달려 있게 하였는데, 죄인이 탄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웃지 않던 왕비 달기(妲己)가 비로소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列女傳 卷7 殷紂妲己》
♣ 동주상구[同舟相救]사람은 알건 모르건 친하건 미워하건 상관없이 위급한 경우를 함께 만나면 서로 도와주게 된다는 의미.
♣ 동주의[東周意]동쪽 나라를 주(周) 나라 같은 이상국가로 만들어보겠다는 뜻. 《論語 陽貨》
♣ 동주장군[銅柱將軍]마원(馬援)이 동주(銅柱)를 세웠다.
♣ 동주지지[東周之志]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 주는 자가 있다면 내가 동주(東周)를 만들겠다.” 하였는데, 주(周)는 서(西)에 있으므로 동방에서 자기를 써 주는 이가 있다면 동주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 동주표[銅柱標]후한 때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가서 구리로 만든 기둥을 세워 한(漢) 나라의 끝 경계로 삼았던 것을 말한다.
♣ 동중서[董仲舒]동중서는 한(漢)나라 광천(廣川) 사람으로 한대(漢代)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젊었을 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공부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3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고 책만 읽어 그의 제자들 중에는 스승의 얼굴도 보지 못한 자가 있었다 한다. 평생 동안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하였는데 유학을 떠받들고 잡가(雜家)를 배격함으로써 후세에 유학을 정통으로 삼는 국면을 열어놓았다. 유향이 그를 일러 왕좌지재(王佐之才)가 있다고 하였으며, 당시에 순유(醇儒)라 하여 모든 학사(學士)들이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史記 董仲舒傳ㆍ漢書》
♣ 동중천[洞中天]신선이 산다고 하는 명산(名山) 승경(勝景)을 말한다.
♣ 동지[彤墀]전정(殿庭)을 이름.
♣ 동지력[冬至曆]옛날에는 동짓날 관상감(觀象監)에서 달력을 만들어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을 동지력이라 불렀다.
♣ 동지발[銅指鈸]동발(銅鈸)과 같은 말로, 동(銅)으로 만든 악기(樂器)이다.
♣ 동진두릉시[東津杜陵詩]두릉(杜陵)은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그의 시에 “면주 땅 부강(涪江) 동쪽 나루터[綿州江水之東津]”로 시작되는 ‘관타어가(觀打魚歌)’와 “고기잡이 구경하러 동진에 다시 왔네.[東津觀魚已再來]”라는 구절의 ‘우관타어(又觀打魚)’가 있다. 《杜少陵詩集 卷11》
♣ 동차궤[同車軌]모든 제도를 통일하여 왕권을 이룩한다는 말. 중용(中庸) 이십팔장(二十八章)에 “이제 온 천하가 수레는 바퀴의 제도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행하는 데에는 도가 같다.” 하였다.
♣ 동창[東窓]송(宋) 나라의 간신(奸臣) 진회(秦檜)의 별칭이다. 그가 충신인 악비(岳飛)를 죽이려고 할 때 그의 처 왕씨(王氏)와 동창(東窓) 아래에서 모의하였는데, 나중에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온갖 고통을 맛보는 가운데, 자기 부인에게 “동창의 일이 발각되고 말았다[東窓事發矣]고 전해 달라.”고 도사에게 말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西湖游覽志餘 倖盤荒》
♣ 동창계[東窓計]충신을 해치는 음모를 말하는데, 송(宋) 나라 때 간신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이기 위해 동창(東窓) 아래서 음모를 꾸몄던 일에서 유래한다.
♣ 동척[銅尺]건초(建初) 동척의 원품(元品)에 “建初六年八月十五日造"라고 전예(篆隸)간의 문자로 명각(銘刻)된 것인데 옹성원(翁星原)이 추사에게 진척(眞尺)의 탁본(拓本)과 목척(木尺)의 탁본 두 종을 기증하였음.
♣ 동천[洞天]도가(道家)의 용어로, 골짜기 안에 따로 있는 별천지(別天地)라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세계를 가리킴.
♣ 동천[東遷]동쪽으로 추방되다.
♣ 동천[僮千]만석군의 집에 동복(僮僕)이 천여 명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 동천[東遷]주 유왕(周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된 뒤에 그의 아들인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으로 왕도(王都)를 옮긴 일을 가리킨다.
♣ 동천남도공잉주[東遷南渡孔仍朱]공자(孔子)는 서주(西周)가 약해져서 동천한 뒤에 태어났고, 주자는 북송(北宋)이 약해지자 남도(南渡)할 때의 사람이다.
♣ 동천복지[洞天福地]신선이 사는 곳에 있다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로, 천하의 절승(絶勝)을 의미한다.
♣ 동천왕부[洞天王府]천하의 승경(勝境).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 십육동천(十六洞天)이니, 또는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이니 하는 따위다.
♣ 동청[冬靑]동청은 항시 푸르른 사철나무의 이름이다.
♣ 동춘[動春]봄에 움직이다. 꽃망울이 움틈.
♣ 동취[銅臭]구리 냄새, 즉 동전 냄새라는 말로, 재산을 써서 관직을 얻는 사람이나 재물을 탐하는 사람을 일컫는 고사성어.
♣ 동치[童稚]어린 자식.
♣ 동타[銅駝]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낙양궁문(洛陽宮門)에 서 있는 구리쇠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장차 네가 가시밭에 서 있는 것을 보리다.” 하였다. 그것은 나라가 곧 망할 것이란 말이다.
♣ 동타[銅駝]진(晋)나라 장한(張韓)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낙양(洛陽) 궁문에 있는 구리쇠로 만든 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장차 네가 가시덤불 속에 누워 있는 모양을 보리로다.” 하였다.
♣ 동타예형극[銅駝翳荊棘]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고는, 낙양(洛陽)의 궁문 앞에 서 있는 동타(銅駝)를 가리키며 “너도 형극(荊棘) 속에 묻히고 말겠다.”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索靖傳》
♣ 동타형극[銅駝荊棘]진(晉) 나라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이 장차 서진(西晉)이 멸망할 줄을 예감하고는, 낙양(洛陽) 궁문(宮門) 앞에 서 있는 구리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앞으로는 네가 가시나무 덤불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겠구나.[會見汝在荊棘中耳]”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0 索靖傳》
♣ 동택[董澤]중국 산서성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 동파[東坡]동파는 송(宋) 나라 문장가 소식(蘇軾)의 호. 그는 항주(杭州; 송대의 임안(臨安))의 지부(知府)로 좌천되었을 때 그곳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많은 유적(遺蹟)을 남겼다.
♣ 동파계[東坡界]소식(蘇軾)이 정혜흠장로(定慧欽長老)에게 하답한 시에, “유마힐(維摩詰)에게 그만 기대고 한번 이 동파의 세계를 찾아오게나.[請判維摩憑 一到東坡界]” 한 것이 있다.
♣ 동파역[東坡驛]경기도 문산(汶山)이다.
♣ 동파옥상동[東坡屋上銅]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뜻. 소식(蘇軾)이 황주(黃州)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그 고을 동쪽 언덕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자기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했는데, 당시 큰 부자를 상징하는 구리기와[銅瓦]를 얹을 턱이 없었기에 한 말임.
♣ 동파점[東坡店]경기도(京畿道) 파주(坡州)에 있는 역 이름이다.
♣ 동파회록좌무전[東坡懷祿坐無田]동파는 소식(蘇軾)의 호인데, 소식의 차운주개조장관견기시(次韻周開祖長官見寄詩)에 “점차 전사를 꾀하면서도 녹봉에 연연하고, 파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또 물가를 곁하였네[漸謀田舍猶祿 未脫風濤且傍洲].”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十九》
♣ 동판[銅板]구리로 만든 판. 운판(雲板)이라고도 한다. 역시 이를 두드려 소리를 낸다.
♣ 동편[彤編]궁중 생활의 기록을 맡은 여관(女官), 또는 그 생활의 기록을 뜻한다.
♣ 동평선락[東平善樂]동평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여덟째 아들인 동평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을 말하는데, 누가 그에게 묻기를 “집에서는 무슨 일이 가장 즐거운가?”하니, 대답하기를 “선을 하기가 가장 즐겁습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동평완[東平阮]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일찍이 동평상(東平相)이 되었던 완적(阮籍)을 가리킨다. 《三國志 卷21》
♣ 동포[東浦]동포는 맹사성(孟思誠)의 호이고, 온양(溫陽)은 맹사성이 태어난 곳이다.
♣ 동포물아[同胞物我]우주에 있는 만물은 똑같이 천지(天地)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으니 한 동포라는 뜻.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물건은 나의 친구이다.[民吾同胞 物吾與也]" 하였다.
♣ 동포전[洞布錢]대원군(大院君)이 섭정할 때 장정 한 사람에게 1년에 2민(緡)씩 받아들이던 세금.
♣ 동표[銅標]오랑캐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쪽 변방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멀리 교지(交趾)를 정벌한 뒤, 두 개의 구리 기둥을 세워 한 나라의 영토임을 알린 고사가 있다. 《後漢書 馬援列傳》
♣ 동풍[東風]봄바람.
♣ 동풍기[東風起]도리(桃李)가 다 지고 나면 다른 꽃들이 다시 피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북쪽 동산에 동풍이 건듯 불어오니, 별의별 꽃들이 차례차례 피는구나.[北園東風起 雜花次第開]”라는 구절이 있고, 소식(蘇軾)의 시에 “수줍은 꽃의 자태 아쉬워하지 마소, 뒷날 동풍이 건듯 불어오리니.[幽姿不可惜 後日東風起]”라는 구절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9 北園ㆍ蘇東坡詩集 卷20 雨中看牧丹》
♣ 동필[董筆]동필은 동호필(董狐筆)의 약칭으로 사실을 숨김없이 바르게 쓴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사관(史官) 동호의 사필(史筆)을 말함.
♣ 동합영군현[東閤迎羣賢]동합은 동쪽으로 난 소문(小門)을 가리키는데, 전한(前漢) 때에 승상공손홍(公孫弘)이 동합을 열어놓고 어진 선비들을 맞아들인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八 公孫弘傳》
♣ 동해견래조호발[東海遣來朝虎發]회계(會稽) 지방에서 정월 14일이 되면 무당을 불러 백호(白虎)의 신(神)에게 제를 지낸 뒤 홍록색의 실로 백호의 화상을 매어 문 위에 부착시켜 놓고 “백호를 떼어 보낸다.” 하는 의식에서 인용된 말이다.
♣ 동해노련비[東海魯連悲]강포(强暴)한 적에게 짓밟히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국사(國士)의 처절한 마음을 말한다. 전국 시대 제 나라 노중련(魯仲連)이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蹈東海而死] 포악한 진(秦) 나라가 천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3》
♣ 동해비[東海碑]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가리킴. 미수 허목이 이 비에 글씨를 썼다.
♣ 동해삼세[東海三世]동해는 선경(仙境)인 봉래도(蓬萊島)가 있다는 동쪽 바다를 가리키고, 삼세는 선녀(仙女)인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동해가 세 번 상전(桑田)으로 변한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동해상전[東海桑田]선녀(仙女)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말하기를, “동해(東海)가 물이 말라서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하였다.
♣ 동해제련[東海齊連]전국시대 장평전(長平戰) 이후 진(秦)이 조(趙) 나라 서울을 포위하자, 위(魏) 나라 임금은 신원연(新垣衍)을 조 나라에 보내어 진왕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조왕을 설득하라고 시켰는데, 마침 조 나라에 와 있던 제(齊) 나라 사람 노중련(魯仲連)이 신원연을 만나 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 때 노중련은, “만일 진 나라가 황제가 된다면 우리 선비와 인민들을 종으로 부릴 것이니, 나는 차라리 동해 바다에 빠져 죽겠다.” 하였다 한다.
♣ 동해직구[東海直鉤]동해는 동해 사람인 강태공(姜太公)을 말하고, 직구(直鉤)는 고기가 걸리지 않도록 낚시바늘을 곧게 한 것을 이르는데, 즉 강태공이 주(周) 나라에 등용되기 전에 위수(渭水)에서 항상 곧은 낚시바늘로 낚시질을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동해효부[東海孝婦]한나라 때 동해에 주청周靑이라는 효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고생만 시키는 것을 걱정하여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이에 시누이가 주청이 시어머니를 목매달아 죽였다고 모함하였고, 관부에서는 곧 주청을 체포하였다. 가혹한 형벌 때문에 주청은 자신이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는데, 형이 집행되기 전 주청은 만약 자신이 정말로 죄가 있다면 목의 피가 아래로 흐를 것이고, 죄가 없다면 목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흐를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형이 집행된 후, 과연 목의 피는 거꾸로 흘러 사형장 깃대 끝으로 솟구쳤다. 주청이 죽은 후, 그 지방에는 삼 년 동안이나 큰 가뭄이 들었다.
♣ 동향[桐鄕]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인데, 수령이 어진 정사를 베푼 고을을 뜻한다. 한(漢) 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젊은 시절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정사를 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적에 그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었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 장사 지내라.”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다가 장사 지내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循吏傳 朱邑傳》
♣ 동향유애[桐鄕遺愛]지방관이 정사를 잘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음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 주읍(朱邑)이 동향색부(桐鄕嗇夫)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그곳 백성들이 그의 묘 옆에 사당을 짓고서 세시(歲時)에 향사를 올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循吏傳》
♣ 동현문동취[東縣聞銅臭]촉 땅 사람들이 철전(鐵錢)을 사용하다가 무산을 지나면 동전(銅錢)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이에 연유하여 무산의 강 위에 있는 두 돌이 동전퇴(銅錢堆)와 철전퇴(鐵錢堆)로 명명되었다 함.
♣ 동호[銅壺]누수(漏水)를 만들 때에 밑에 물 담는 것을 호(壺)라 하는데, 구리쇠로 만들었다.
♣ 동호[東湖]독서당(讀書堂)의 별칭.
♣ 동호[童號]동호는 자는 정서(廷瑞). 명(明) 나라 홍치(弘治) 연간에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지냈고, 저서에는 고매화시집(古梅花詩集)이 있음.
♣ 동호[董狐]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사관(史官)으로서 어떤 위세(威勢)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대로 직필(直筆)하였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사관으로 이름 높았다. 영공(靈公)이 조순(趙盾)을 죽이려고 하니, 조순은 외지로 도망갔는데 이윽고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였다. 조순은 환국하여 조천을 토죄(討罪)하지 아니하므로 동호는 사책에 쓰기를, “조순이 그 임금을 죽였다.” 하였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동호는 고대의 양사(良史)이다.” 하였음. 《左傳 宣公 二年條》
♣ 동호[東胡]흉노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동북방의 호족(胡族)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 동호부[銅虎符]한대(漢代)에 구리로 범 모양처럼 만든 부절(符節).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 썼다. 한서(漢書) 제4권 문제기(文帝紀)에,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 하였다.
♣ 동호여계[董狐厲階]동호는 여악(厲惡)의 계제가 되었다.
♣ 동호지필[董狐之筆]중국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인 동호의 직필(直筆). 권세나 외압에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대로 적음
♣ 동호직[董狐直]동호(董狐)는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사관(史官). 영공(靈公)이 조돈(趙盾)을 죽이려 하자, 조돈은 망명했었다. 뒤에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자, 조돈은 돌아와 조천을 토벌하지 않았다. 동호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 하여, 직접 시해하지는 않았지만 동조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이렇게 쓴 것인데, 공자는 “동호는 옛날의 양사(良史)다.”고 칭찬했으므로 후세에 직필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左傳 宣公二年》
♣ 동호직필[董狐直筆]동호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태사(太史)인데, 조순(趙盾)이 그 임금 영공(靈公)을 시해했다고 곧장 쓴 고사를 말함. 실제로 임금을 시해한 자는 조천(趙穿)이었는데, 이때 조순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를 토벌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그에게 돌린 것으로서 기록을 하는 자가 거리낌없이 바른 대로 쓰는 것을 말함. 《春秋左氏傳 宣公 二年》
♣ 동홍[冬烘]겨울에 불 땐 듯이 뜨거운 것. 겨울에는 머리가 식어서 차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따뜻하다는 말로, 당(唐) 나라 정훈(鄭薰)이 시험관이 되어, 안표(顔標)를 안진경(顔眞卿)의 후손인 줄로 잘못 알고 장원을 매겼다는 고사이다. 전(轉)하여 훈장(訓長)을 기롱하는 말로 쓰인다.
♣ 동화[東華]동화는, 중국의 중앙 관서가 동화문(東華門), 즉 도성의 동문(東門) 안에 있었던 데에서 조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동화[東華]송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처음 임명되면 동화문(東華門)으로부터 들어가서 좌승천문(左承天門)에 이르러서 말[馬]에서 내렸다.
♣ 동화문[東華門]궁성(宮城) 동문(東門)의 이름인데, 학사(學士)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고 한다.
♣ 동화문[東華門]명(明) 나라 때 궁성의 동쪽에 있던 문인데, 중앙 관서가 이 문 안에 모여 있었다.
♣ 동화잠[東華簪]중앙 관서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한다. 동화는 궁성의 동쪽 문 이름인데, 이곳에 중앙 관서들이 모여 있다.
♣ 동화잠신[東華簪紳]조정의 관직을 뜻한다. 중국의 중앙 관서가 모두 궁성의 동화문(東華門) 안에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동황[東皇]봄을 주관하는 신(神)의 이름이다. 봄은 동방(東方)과 청색(靑色)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동제(東帝), 동군(東君), 청황(靑皇), 청제(靑帝)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상서위(尙書緯)에 “봄은 동황이 되고 또 청제(靑帝)가 된다.” 하였다.
♣ 동황태을[東皇太乙]굴원(屈原)의 구가(九歌)에 동황태일(東皇太一)이 나오는데, 태일은 천신(天神)의 이름으로, 동제(東帝)에 배비(配比)하기 때문에 동황태일이라 한다 하였다. 태을은 태일과 같다.
♣ 동황태일[東皇太一]봄을 주관하는 신(神)의 이름이다.
♣ 동회[東淮]호가 동회거사(東淮居士)인 신익성(申翊聖)의 호이다.
♣ 두[斗]두는 북방 현무(北方玄武) 7성의 하나. 《協紀辨方書義例五》
♣ 두가구원[竇家仇怨]후한(後漢)의 두무(竇武)가 태후(太后)의 명으로 영제(靈帝)를 받아들여 제위(帝位)에 앉힌 공로로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문희후(聞喜侯)에 봉해졌으며, 아들과 조카들까지도 모두 후에 봉해져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었다. 그러나 두무는 조금도 자만하지 않고 태부(太傅) 진번(陳蕃) 등과 함께 국사에 진력하면서 당시 정권을 농락하는 고질적인 존재인 환관(宦官)들을 숙청하려다가 뜻을 못 이루고 도리어 환관 조절(曹節)ㆍ왕보(王甫) 무리들에 의해 멸족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두무가 처음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두무와 함께 한 마리의 뱀을 더 낳아 그를 숲 속으로 보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장차 두씨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고 함. 《後漢書 卷六十九》
♣ 두각[頭角]머리끝이라는 뜻으로,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학식이나 재능이 특히 뛰어난다는 말.
♣ 두각열[頭角熱]머리를 자구 조아렸다는 말이다.
♣ 두각참연[頭角嶄然]이 말은 한유의 유자후 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雖少年 已自成人 能取進士第嶄然見頭角”이라 했음.
♣ 두각초상소[頭角稍相踈]이 시구는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年至十二三 頭角稍相疎”이라고 보이는데, 글을 읽은 자는 학식과 재능이 두각을 나타내서, 점점 글을 읽지 않은 자와 차이가 생긴다는 뜻.
♣ 두간용광[斗間龍光]진(晉) 나라 무제(武帝) 때,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가 뻗치는 것을 보고,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名劍)을 얻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36》
♣ 두강[杜康]주(周) 나라 사람으로 술을 맨 처음 만들었다 하는데 이 때문에 술 이름으로도 전용 되었다 한다. 《尙友錄》
♣ 두강[頭綱]차의 이름. 북원다록(北苑茶錄)에 “백차(白茶)와 승설(勝雪)은 경칩(驚蟄) 전에 따서 경사(京師)에 올라오므로 두강옥아(頭綱玉芽)라 일렀다.” 하였음.
♣ 두강생[杜康生]두강은 황제(黃帝) 때의 재인(宰人)으로 맨 처음 술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 두강주[杜康酒]술 이름인데 옛날 술을 잘 만들었던 두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 두개회[豆稭灰]콩깍지를 태운 재. 눈[雪]을 비유하기도 함.
♣ 두견상재배[杜鵑尙再拜]촉(蜀) 나라의 망제(望帝)란 임금이 타인에게 위(位)를 전하고 서산(西山)에 들어가 숨었다가 뒤에 두견(杜鵑)이 되었는데, 후인들이 망제의 덕을 사모하여 두견새의 울음을 듣고 절을 하였다는 전설을 말한다. 《華陽國志 蜀誌》
♣ 두계련무죄[杜雞憐無罪]두계는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박계행(縛鷄行)을 말하는데, 이는 어떤 종이 벌레를 잡아먹는 닭을 미워하여 꽁꽁 묶어가지고 시장으로 팔러 가는 것을 보고 읊은 것으로, 닭도 팔려가면 죽게 될 것이니 벌레나 닭이나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닭만을 묶는단 말인가? 닭을 풀어줘라 한 내용에서 온 것이다.
♣ 두곡[杜谷]서천(舒川)의 속역(屬驛)이었던 마을 이름이다.
♣ 두곡[杜曲]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남쪽에 위치한 지명. 당(唐)나라 때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이 대를 이어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 두곡종남[杜曲終南]두곡은 당(唐) 나라 대성(大姓)인 두씨(杜氏)가 대대로 살아 온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동남쪽 지역을 가리키고, 종남은 그곳의 산 이름이다.
♣ 두공부[杜工部]당 나라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벼슬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었으므로, 세칭 ‘두공부’라 하였다.
♣ 두공부집[杜工部集]당(唐) 나라 두보의 시문집(詩文集). 공부(工部)는 관명인데. 두보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두공부라 부름.
♣ 두구[荳蔲]두구는 풀 이름임. 이 꽃이 활짝 피기 이전의 꽃망울을 마치 소녀(少女)가 임신한 것과 같다는 데서 함태화(含胎花)라 부르기도 하므로, 전하여 소녀가 임신한 것을 가리키는데, 두목(杜牧)의 시에 “예쁘고 간드러진 십삼 세 남짓의 소녀여 두구 가지의 꽃망울이 이월 초승이로다[娉娉嫋嫋十三餘 荳蔲梢頭二月初]”하였다.
♣ 두구초두[荳蔲梢頭]두구는 육두구(肉荳蔲)의 준말로, 이 꽃이 활짝 피기 전의 불룩한 상태를 함태화(含胎花)라고 하기 때문에 나이 어린 아가씨가 임신(妊娠)한 데에 비유한 것이다.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시에 “아리따운 아가씨 십삼여 세에, 두구의 초두가 두 달째라네 [娉娉嫋嫋十三餘 荳蔲梢頭二月初]" 하였다.
♣ 두기[斗箕]두 별의 이름. 이 두 별의 사이는 은하(銀河)가 가로놓였으므로, 간격이 있어 원활하지 못한 것의 비유.
♣ 두기[杜夔]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음악가로 음률에 정통했다. 위 문제(魏文帝)가 빈객 가운데서 생(生)과 금(琴)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기는 난색을 지었다. 문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아 두기를 내쫓아 버렸다. 《三國志 魏志》
♣ 두기[豆萁]형제끼리 화목하지 못하고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조식이 문제의 위협에 쫓겨 지은 ‘칠보시(七步詩)’ 가운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속에서 눈물 흘리네.[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라는 구절이 있다. 《三國志 卷19》
♣ 두남[斗南]“相一星在北斗南”이라는 진서(晉書) 천문지 상(天文志上)의 기록에서 비롯되어 재상(宰相)의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두남[斗南]북두성(北斗星)은 하늘의 북쪽에 있으므로 북두의 남쪽이란 천하를 말하는 것이다.
♣ 두남명[斗南名]두남은 북두성(北斗星) 남쪽이란 뜻이니, 두남의 명성이란 곧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임을 의미한다.
♣ 두남일인[斗南一人]두남은 북두칠성의 남쪽. 즉, 온 천하에서 제일 가는 현재(賢才)를 의미한다.
♣ 두노[杜老]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 두당양[杜當陽]두 당양은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진 진(晉) 나라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그 역시 문제(文帝)의 누이동생인 고륙공주(高陸公主)와 결혼했는데, 청빈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유명(遺命)을 남긴 내용이 진서(晉書) 권34에 나온다.
♣ 두대주[斗大州]말만 한 고을이라는 뜻으로, 보통은 작은 읍성을 가리킨다.
♣ 두덕기[杜德機]생동(生動)하는 기틀을 막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뜻함. 신무(神巫) 계함(季咸)이 열자(列子)와 함께 호자(壺子)를 보고 나와서 열자에게 말하기를 “자네 선생은 죽을 것이다.” 하자, 열자가 다시 들어가 호자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호자가 이르기를, “아까 내가 그에게 대지(大地)의 조용한 형상을 보여 주었더니, 그가 나의 두덕기를 약간 본 모양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應帝王》
♣ 두랑[荳娘]묘령(妙齡)의 소녀를 가리킨다.
♣ 두랑납량[杜郞納涼]두랑(杜郞)은 두생(杜生)이니, 송(宋)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송사(宋史) 두생전(杜生傳)에 “두생이 문 밖을 나오지 않은 지가 15년이었다. 여양위(黎陽尉) 손진(孫軫)이 이유를 묻자 웃으며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지나친 것이오.’ 하고는 문 밖에 있는 뽕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15년 전에 일찍이 저 뽕나무 아래에서 바람쐰 기억이 나는데, 어찌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할 수 있겠소.’하였다.” 한다.
♣ 두로[杜老]두로는 바로 두보(杜甫)를 높여 이른 말인데, 그의 곤오어숙자위이시(昆吾御宿自逶迤詩)에서 세상이 태평하지 못함을 걱정하는 뜻을 은밀히 부치어 “벽오동은 봉황이 깃들던 가지만 늙은 채로 남았구나[碧梧棲老鳳凰枝]”고 하였다. 《杜少陵集 卷十七》
♣ 두로[頭顱]머리를 이름.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暴骨草澤 頭顱僵仆 相望於境”이라고 보임.
♣ 두로강촌흥[杜老羌村興]두로(杜老)는 두보(杜甫)를 말한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5에 오언 고시(五言古詩)로 강촌(羌村) 3수가 실려 있다.
♣ 두로견응착[杜老見應錯]두로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의 시 장부성도초당도중유작(將赴成都草堂途中有作)에, “새 솔은 천 척 높이 안 자라서 한스럽고, 나쁜 대는 만 줄기를 낫으로 쳐낼 거네.[新松恨不高千尺 惡竹應須斬萬竿]”하였다.
♣ 두로고응비호락[杜老故應悲濩落]두로(杜老)는 두보(杜甫)를 말한다. 참고로 그의 시에 “居然成濩落 百首甘契濶”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4 自京赴奉先縣詠懷》
♣ 두로미[杜老眉]두보(杜甫)는 당 나라 때 시인으로 그는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국가가 어지럽자, 관산융마(關山戎馬) 등 나라를 걱정하는 시를 많이 읊었다.
♣ 두로음시수[杜老吟詩瘦]이백(李白)이 두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백이 장난으로 지어 두보에게 준 [戱贈杜甫] 시에 “묻노니 그대는 작별한 뒤로 왜 그리 수척한가. 이는 모두 그 동안 시를 읊느라 그런 것이네.[借問別來太瘦生 總爲從前作詩苦]" 하였다. 《李太白集 卷三十 詩文拾遺》
♣ 두로추잠태임빈[杜老抽簪太恁頻]벼슬을 그만두는 일을 자꾸만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누상(樓上)’이라는 오언 율시(五言律詩) 첫머리에 “천지간에 부질없이 머리만 긁적이며, 백옥의 비녀를 자꾸만 뽑는구려.[天地空搔首 頻抽白玉簪]”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2》
♣ 두류산[頭流山]지리산(智異山)의 별칭이다.
♣ 두륜산[頭輪山]해남(海南)에 있음.
♣ 두릉[杜陵]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 두릉[杜陵]두릉은 오늘날 섬서(陝西) 서안시(西安市) 동남에 있던 지명.
♣ 두릉계졸[杜陵計拙]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생계가 곤궁하여 늘 타향을 떠돌아다녔다.
♣ 두릉노[杜陵老]두릉(杜陵)에 살았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말한다. 이백(李白)과 함께 당대(唐代) 시인의 쌍벽(雙璧)으로 일컬어지는 불후의 시성(詩聖)으로서, 두릉야로(杜陵野老)라고 자호(自號)하기도 하였다.
♣ 두릉대아질소사[杜陵大雅軼騷些]두릉은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 말이고 대아는 곧 큰 문장이라는 뜻이다. 초소(楚騷)는 춘추시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을 말한 것으로, 즉 두보의 문장이 굴원보다 훌륭하다는 뜻이다.
♣ 두릉야로[杜陵野老]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말함.
♣ 두릉옹[杜陵翁]당(唐) 나라 때의 시인으로 호가 소릉(少陵)인 두보(杜甫)를 높여 이른 말이다.
♣ 두릉인[杜陵人]난리로 인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우국(憂國)의 심정을 읊었던 두보(杜甫)를 말한다.
♣ 두릉증식노장군[杜陵曾識老將軍]두릉(杜陵)은 두보(杜甫)를 지칭하고 노장군(老將軍)은 엄무(嚴武)를 지칭한다. 두보가 성도(成都)를 다스리던 엄무(嚴武)의 깊은 지우(知遇)를 입어 보살핌을 받다가, 그가 죽은 후 의지할 데 없이 유랑하였다. 《舊唐書 列傳 卷一百九十》
♣ 두릉추흥팔수[杜陵秋興八首]두릉(杜陵)은 두릉야로(杜陵野老)의 준말로,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호이다. ‘추흥팔수’는 대력(大曆; 唐代宗의 연호) 원년에 기주(玘州 사천성 동북방의 진절현(秦節縣)) 서각(西閣)에 있을 때 지은 연작시(連作詩)이다. 《杜少陵詩集 卷17》
♣ 두릉팔애[杜陵八哀]두보의 팔애시. 당(唐) 나라 때의 현신(賢臣)인 왕사례(王思禮)ㆍ이광필(李光弼)ㆍ엄무(嚴武)ㆍ왕진(王璡)ㆍ이옹(李邕)ㆍ소원명(蘇元明)ㆍ정건(鄭虔)ㆍ장구령(張九齡) 등 여덟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여 노래한 것이다. 《杜少陵集 卷十六》
♣ 두림칠서[杜林]두림은 후한 때의 경학자이고, 두림이 일찍이 칠서(漆書)로 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어 매우 소중히 간직해 오다가, 마침내 위굉ㆍ서순을 만나 그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二十七》
♣ 두모[杜母]두모(杜母)는 후한 때 남양태수(南陽太守)로서 남양을 대단히 잘 다스려, 백성들이 그를 어머니와 같다 하여 두모라 호칭했던 두시(杜詩)를 가리킨다. 《後漢書 卷三十一》
♣ 두목[杜牧]만당(晩唐) 시인, 자(字)는 목지(牧之) 호(號)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能)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으며 강개롭게 병사(兵事)를 논하기를 즐겼다. 《唐書 卷一百六十六 杜牧傳》
♣ 두목중서루배낭[杜牧中書屢拜囊]조낭은 검은 베로 만든 전대인데 여기에 글을 싸서 임금에게 올렸다. 당(唐) 나라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낸 두목은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뛰어난 절개가 있어 매양 조정의 대사(大事)와 시폐(時弊)를 잘 논술하여 당시 직소(直疏)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新唐書 卷六十六 杜牧傳》
♣ 두목지[杜牧之]두목(杜牧)의 자(字), 호(號)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能)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다. 《唐書 卷一百六十六 杜牧傳》
♣ 두목참[杜牧慙]당(唐) 나라 문장가로 자(字)는 목지(牧之)이며, 진사로 뽑힌 뒤 호주 자사(湖州刺史) 등을 지냈다. 그가 포의(布衣)로 있을 당시 친구가 자사(刺史)로 있는 호주(湖州)에 놀러갔다가 10여 세에 지나지 않는 절색의 기생을 만났는데 그때 그는 10년 후 자기가 자사로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하고 돌아왔다. 14년 만에 자사로 부임하자 이미 그녀는 결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거느린 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 두목호주거교지[杜牧湖州去較遲]당(唐) 나라 두목이 호주(湖州)에 노닐 때 그곳 자사(刺史)와는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는 자사의 주선으로 여러 미녀를 두루 보았으나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다가 10여 세 된 소녀가 하나 왔는데 자세히 보니 참으로 절색이었다. 그러자 두목은 10년 뒤에 맞이하겠다면서 만약 10년 뒤에 맞이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데로 출가해도 좋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14년이 지난 뒤에야 가 보니, 그녀는 이미 3년 전에 출가하여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으므로 두목은 “봄을 찾는 약속이 늦었으니 꽃다운 시절 한할 필요 없으리. 광풍이 붉은 꽃 다 떨어뜨려 푸른 잎 짙게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하구나.”라는 시를 남기고 섭섭해하였다. 《張君房 麗情集》
♣ 두무악[頭無岳]남방 해변에서 해채(海採)를 생업으로 하는 제주인(濟州人)으로 이들은 조주(操舟)ㆍ잠수(潛水)에 능하였다. 두무악은 본디 한라산(漢拏山)의 이명(異名)이다.
♣ 두문불출[杜門不出]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음. 곧, 집안에만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가지 않음.
♣ 두미[斗尾]전북 진안(鎭安)의 산골 이름이다.
♣ 두미삼전[斗米三錢]옛날에는 쌀값이 쌀수록 백성이 살기가 좋다는 것이다.
♣ 두방[杜房]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재상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을 말한다.
♣ 두번천[杜樊川]번천은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이다.
♣ 두병[斗柄]두병은 북두칠성의 손잡이를 뜻한 것인데 북두성이 바가지[杓] 형태로 생겼다 하여 다섯째에서 일곱째 별까지의 셋을 가리켜 손잡이라 한다.
♣ 두보[杜甫]중국 당(唐)나라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長安) 남쪽 근교의 소릉(小陵)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을 본거지로 하는 소호족(小豪族) 출신.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뜻에서 시성(詩聖), 이백(李白)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 이두(李杜), 당나라 말기의 두목(杜牧)에 견줄 때는 노두(老杜)ㆍ대두(大杜)라 불린다. 먼 조상에 진(晉)나라 초기의 위인 두예(杜預)가 있고 당(唐)의 초기 시인 두심언(杜審言)은 조부이다.
♣ 두보[杜保]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계량(季良)인데, 자로써 행세(行世)하였다. 그는 특히 의협심이 강하기로 유명하였다. 《後漢書 卷二十四》
♣ 두보배두견[杜甫拜杜鵑]당(唐) 나라의 두보가, 금수들조차도 촉제(蜀帝)의 혼(魂)이 화하여 된 새인 두견새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하는데 사람으로서 천자를 존경하지 않으니 새만도 못하다는 내용으로 두견행(杜鵑行)을 지어서 세상의 인심이 나쁨을 한탄하였다.
♣ 두사[蠹死]포박자(抱朴子)에 “뽕나무가 잘리워지면 나무굼벵이가 죽는다.[桑木見斷而蠹殄]”하였음.
♣ 두사훈[杜司勳]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두목이 일찍이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두상옹초선[頭上擁貂蟬]초선(貂蟬)은 담비 꼬리로, 높은 고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옛날에 고관들의 관에는 담비 꼬리로 장식하였다.
♣ 두소[斗筲]두(斗)는 열 되, 초(筲)는 대그릇 두 되들이. 모두 작은 그릇인데, 짧은 재주와 얕은 도량(度量)을 지닌 소인을 “두초의 사람”이라 한다.
♣ 두소릉[杜少陵]소릉은 두보(杜甫)의 호.
♣ 두소지인[斗筲之人]한 말 두 되 들이의 대그릇 같은 사람. 즉, 사람의 식견이나 그릇이 좁은 것을 비유한다.
♣ 두솔궁[兜率宮]도솔궁은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있는 칠보(七寶)로 된 궁전. 석가여래가 전생에 도솔궁에서 머물렀는데, 중생 제도의 인연을 품부받고 이 세계에 내려왔다 한다.
♣ 두수삼년적[杜叟三年笛]두보의 청적(聽笛) 시에, “3년 피리 속에 관산의 달이요, 만국 병장기 앞에 초목 바람[三年留裏關山月 萬國兵前章木風].”라고 하였다.
♣ 두수여점부[斗水如霑鮒]미천하고 곤궁한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주(周)가 어제 오는데 도중에서 누가 부르는 자가 있기에 뒤를 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괸 물 속에 붕어가 있었다. ……그 붕어가 말하기를 ‘나는 동해(東海)의 파신(波臣)인데, 당신이 두승(斗升)의 물로써 나를 좀 살려주지 않겠느냐?’ 했다.” 하였다.
♣ 두순압[杜荀鴨]당나라 두순압(杜荀鴨)은 시인(詩人) 두순학(杜荀鶴)을 사모하여 순압(荀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 두시정오[杜詩正誤]채흥종(蔡興宗)이 두시정오(杜詩正誤)를 지었는데 주자(朱子)가 칭찬했다.
♣ 두심언[杜審言]당(唐)의 문인. 두보(杜甫)의 종조부(從祖父).
♣ 두십이[杜十姨]양용수(楊用修)가 말하기를 “항주(杭州)에 두습유(杜拾遺)의 묘(廟)가 있는데 촌학구가 두십이(杜十姨)라 쓰고 드디어 여상(女像)으로 만들어 유령(劉伶)과 짝을 지었다.” 하였다.
♣ 두압[杜鴨]당나라 두순압(杜荀鴨)은 시인(詩人) 두순학(杜荀鶴)을 사모하여 순압(荀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 두약[杜若]향초(香草)의 이름. 초사(楚辭) 구가(九歌) 상군(湘君)에 “저 방주(芳洲)에서 두약을 캐노라.” 하였다.
♣ 두약주[杜若洲]두약은 향초(香草)인데 물가에 나며, 잎은 능하(菱荷)와 같고 줄기 끝에 꽃이 핀다. 초사(楚辭) 구가상군(九歌湘君)에, “방주에서 두약을 뜯는도다.[採芳洲兮杜若]”하였다.
♣ 두양[竇梁]동한(東漢) 때의 권신(權臣)인 두헌(竇憲)과 양기(梁冀)를 가리킨다.
♣ 두어오[蠹魚惡]비파기(琵琶記) 효부제진(孝婦題眞)에 “향초 잎 향기 진동하자 책 벌레 모두 달아나네.[芸葉分香走魚蠹]”라는 시구가 있다.
♣ 두엄[竇儼]송(宋)의 어양(漁陽) 사람. 재주가 높고 글을 잘했으며 박학다식하여 당시의 사사(祀事)ㆍ악장(樂章)ㆍ종묘(宗廟)ㆍ시호(諡號)등 제도에 관하여도 많은 것을 찬정(撰定)하여 주위로부터 해박하다는 찬사를 받았음. 《宋史 卷二百六十三》
♣ 두여방[杜與房]당 태종(唐太宗)을 도와 정관(貞觀)의 치적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태종조의 쌍벽이었음. 《唐書 卷九十六》
♣ 두예[杜預]진(晉)나라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凱)이다. 하남 윤(河南尹)과 탁지상서(度支尙書)를 지내다가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어 수리사업(水利事業)을 추진, 1만여 두락의 논을 옥토로 만들었고 태강(太康) 원년(元年)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오(吳)나라를 쳐서 멸망시킨 전략가인데, 유가의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 춘추좌씨전집해(春秋左氏傳集解)를 저술하였다. 《晉書 卷三十四 杜預傳》
♣ 두예[杜預]진(晉)나라 초엽의 명장‧정치가‧학자. 자는 원개(元凱).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오(吳)를 정벌하고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무공을 세움. 춘추(春秋), 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도 유명함. 저서로는 좌전집해(左專集解), 춘추석례(春秋釋例)등이 있음.
♣ 두예침비[杜預沈碑]진(晉) 나라 때 오(吳) 지역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운 두예(杜預)는 평소에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일찍이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으로 된다.” 하면서, 자신의 공을 새긴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산(萬山)의 아래에 묻고, 하나는 현산(峴山)의 위에 세워놓았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 두예침비[杜預沈碑]진(晉)나라 두예(杜預)가 형주(荊州)를 지키는 대장으로 있으면서, 부하들과 함께 현산(峴山)에 올라가 탄식하기를, “이 산은 항상 있건마는 이 산에 놀던 사람은 천추 뒤에 누가 알겠는가.” 하고, 비석(碑石) 돌을 만들어 자기의 사적을 새겨서, 하나는 산 위에 세워 두고, 하나는 후일에 산천이 변하여 산이 못이 되고, 못이 육지가 될 때를 예상하여 연못 속에 던져두었다.
♣ 두오랑[杜五郞]두오랑은 송(宋) 나라 때의 은사로서 이름을 알 수 없어 당시에 두오랑으로 일컬어졌고, 초막집에 살면서 30년 동안이나 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고을 사람들에게 택일(擇日)이나 해 주고 의약(醫藥)을 팔아서 생활을 근근히 영위하였다 한다. 《宋史 卷四百五十八》
♣ 두우[杜佑]당 헌종(唐憲宗) 때 사람. 그는 유질(劉秩)이 만든 정전(政典)에다 신례(新禮)를 더 첨가, 통전(通典) 2백 편을 엮었음.
♣ 두우[斗牛]두성(斗星)ㆍ우성(牛星). 오(吳)ㆍ월(越) 지방의 분야(分野)에 해당한다.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에 “상수ㆍ한수에서 길이 나누어지니 두성ㆍ우성을 바라본다.[路已分於湘漢 星猶望於斗牛]" 하였다.
♣ 두우륙[杜郵戮]충신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다란 뜻의 고사성어.
♣ 두우정기[斗牛精氣]옛날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명검이 땅속에 묻혀서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를 발산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36 張華傳》
♣ 두우혼[杜宇魂]두우혼이란 두우의 넋이란 뜻으로, 옛날 촉제(蜀帝) 두우(杜宇)가 타향에 나갔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그의 넋이 새로 화했다고 하는데, 이 새가 피를 토하며 비통하게 울어대므로 이 새를 촉제의 이름을 따서 두우(杜宇; 두견새)라고 했다 한다.
♣ 두운[杜韻]두운이란 두보(杜甫)가 지은 시의 운(韻)을 그대로 쓴 것이다.
♣ 두원[頭黿]당(唐) 나라 때 화성(畫聖)으로까지 일컬어졌던 오도자(吳道子)는 특히 공자(孔子)의 초상(肖像)을 비롯해서 불화(佛畫)들을 많이 그렸는데, 소식(蘇軾)이 오도자의 불화를 예찬한 시에 “오랑캐 임금 귀신 우두머리 천명 만명이 서로 밀치고 다퉈 들어와 머리가 자라 같구나[蠻君鬼伯千萬萬 相排競進頭如黿]”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
♣ 두원[杜園]두보(杜甫)의 동산.
♣ 두위랑[杜韋娘]당(唐) 나라 기생.
♣ 두율천궁[兜率天宮]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이며 욕계의 정토(淨土)에 있는 천궁으로 지상에서 32만 유순(由旬)의 거리에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곳에 살면서 석가의 교화를 받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고 한다.
♣ 두인[豆人]그림 속의 콩알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 두인[斗印]두인은 무장(武將)의 관인(官印)이다.
♣ 두입[斗入]북두성 모양으로 휘어져 들어간 것을 말한다.
♣ 두자미[杜紫薇]당 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인데, 이 시의 첫귀가 두자미의 시이다.
♣ 두자미[杜子美]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자, 호는 소릉(少陵).
♣ 두자진회야[杜子秦淮夜]두목(杜牧)의 야박진회(夜泊秦淮)시에, “연기는 찬물에 자욱, 달은 모래에 휘영청. 밤에 진회에 대니 술집이 바로 옆에 있네[煙寒實水月籠沙 夜泊秦淮近酒家].”라는 구절이 있다.
♣ 두장[斗帳]작은 휘장. 말[斗]을 덮을 정도로 작다 하여 이렇게 일컫는다.
♣ 두전표[斗轉杓]해와 달이 바뀜을 뜻한다. 두표는 북두성(北斗星)의 꼬리 부분인 자루 모양으로 된 별을 말하는데, 이 별이 일년(一年) 십이개월(十二個月)에 걸쳐 십이진(十二辰)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정월에는 인(寅)을 가리키고, 2월에는 묘(卯)를 가리키고, 3월에는 진(辰)을 가리키는 등이다.
♣ 두점방맹[杜漸防萌]애시당초 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점(漸)은 사물의 처음. 맹(萌)은 싹. 곧 좋지 못한 일의 조짐이 보였을 때 즉시 그 해로운 것을 제거해야 더 큰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
♣ 두종[杜悰]당(唐)의 두종(杜悰)은 문음(門蔭)으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뒤에 장상(將相)을 역임했으나 자신의 자봉(自奉)에만 힘쓰고 인재를 천거 기용한 일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독각서(禿角犀)라고 하였음. 《唐書 卷一百六十六》
♣ 두주[杜酒]두주는 집에서 빚은 박주(薄酒).
♣ 두주[頭籌]제일 첫머리의 산가지. 어떤 기예(技藝)를 겨루어서 먼저 승리를 거둔 것.
♣ 두주백편[斗酒百篇]이태백(李太白)처럼 한자리에서 술 한 말을 해치우고 백 편의 시를 지을 만큼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기개가 호방한 것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한 말 술에 시 백 편 짓는 우리 이태백, 장안 저자 주막에서 잠을 자누나.[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라는 구절이 있다.
♣ 두주불사[斗酒不辭]한 말 술도 사양하지 않음. 주량(酒量)이 세다는 뜻.
♣ 두주쌍감[斗酒雙柑]남조 송(南朝宋) 때 대옹(戴顒)이 봄날에 술 한 말과 밀감 두 개를 가지고 나가므로, 누가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간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두준[杜濬]명말(明末)의 학자로서 명이 망하자 금릉산(金陵山)에 은거하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변아당집(變雅堂集)이 있다.
♣ 두찬[杜撰]근거 없이 저술하는 일. 두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하나를 들면, 야객총담(野客叢談)에, “두묵(杜黙)이 시(詩)를 짓되 율(律)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일이 격에 맞지 않은 것을 들어 두찬이라 한다.” 하였음.
♣ 두천[斗千]두십천(斗十千)의 준말인데, 십 천은 곧 일만 전(一萬錢)으로, 미주(美酒) 일두(一斗)에 돈이 일만 전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 두초[斗筲]두(斗)는 열 되, 초(筲)는 대그릇 두 되들이. 모두 작은 그릇인데, 짧은 재주와 얕은 도량(度量)을 지닌 소인을 “두초의 사람”이라 한다.
♣ 두타[頭陀]불가(佛家)의 말로 고행(苦行)을 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연산군 때에 늙은 흥청(興淸)들이 말썽을 일으킬까봐 집을 마련하여 살게 하고 관리하던 곳.
♣ 두통첩[肚痛帖]장욱의 초서 서간(書簡)으로 두통첩이 있음.
♣ 두평[斗萍]두평(斗萍)은 크기가 말만한 평실(萍實)로, 큰 공훈이나 맛있는 음식을 뜻한다. 초(楚) 나라 소왕(昭王)이 강을 건널 적에 크기가 말만한 어떤 물체가 배에 다가오자, 소공이 괴이하게 여겨 건져 올리게 한 다음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공자에게 사신을 보내어 물어보니, 공자가 “이것의 이름은 평실(萍實)이라고 하는데, 쪼개면 먹을 수가 있다. 다만 패왕(霸王)이 될 만한 사람이라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바, 상서로운 징조이다.” 하였다. 《孔子家語 致思》
♣ 두풍[頭風]병명(病名). 머리가 항상 아프거나, 또는 계속하여 부스럼이 나는 병.
♣ 두풍유[頭風愈]시문이 뛰어남을 이른 말이다. 삼국 시대에 원소(袁紹)가 진림(陳琳)을 시켜 조조(曹操)를 성토하는 격문(檄文)을 초하게 하여 조조에게 보냈더니, 조조는 때마침 두풍(頭風)을 앓고 있다가 그 격문을 보고는 모골이 송연하여 부지중에 두풍이 나았다 한다.
♣ 두함[頭銜]관리(官史)의 위계(位階)를 적은 관함(官銜)을 이름.
♣ 두헌[竇憲]동한(東漢) 때의 권신(權臣). 두헌은 화제(和帝) 때 황제가 어린 틈을 타 두 태후(竇太后)의 오빠로서 권력을 차지하여 마음껏 권력을 부리다가 화제가 장성한 뒤에 자살을 명 받고 자살하였다. 《後漢書 卷23 竇融列傳 竇憲》
♣ 두후침비[杜侯沉碑]두후는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진서(晋書) 두예전(杜預傳)에 “두예는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여 자기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산(萬山) 아래 있는 못에다 잠겨 놓고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워 놓고는 ‘후세에 골짜기가 언덕이 되고 언덕이 골짜기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했다.” 하였다.
♣ 두흑[頭黑]머리가 아직 검은 젊은 시절.
♣ 두힐[豆肹]전라도 나주목(羅州牧) 회진폐현(會津廢縣)의 백제(百濟) 시대 이름. 《新增東國輿地勝覽》
♣ 둔곡[遯谷]둔곡은 운둔자가 살기에 합당한 골짜기라는 말이다. 주역(周易) 택풍대과괘(澤風大過卦)의 상사(象辭)에 “못의 물이 나무 위에까지 차오르는 것이 대과괘의 상이니, 군자는 이 점괘를 보고서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澤滅木 大過 君子 以 獨立不懼 遯世無悶]”하였다.
♣ 둔괘삼효[遯卦三爻]둔괘는 날로 정의가 없어지고 부정 부패가 만연되는 때에 군자가 은둔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데, 구삼효(九三爻)에는 은둔하고 싶어도 처자 권속 때문에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채 집에서 가만히 쉬는 내용이 담겨 있다.
♣ 둔덕령[屯德嶺]충청도 비인(庇仁) 동쪽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 둔세[遁世]세상을 피해 숨음.
♣ 둔암시[遯庵詩]돈암은 중종(中宗)~광해(光海) 때의 문신 황섬(黃暹)의 호. 광해군 때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화를 입자, 영경의 처남으로서 이에 연좌되어 파직당하였음.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열중하였음.
♣ 둔옹[鈍翁]둔옹은 청(淸) 나라 왕완(王琬)의 호. 왕완은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예학(禮學)에 이르기까지 발명(發明)한 것이 많았다.
♣ 둔옹[遯翁]송(宋) 나라 주희(朱熹)의 호이다.
♣ 둔옹[遁翁]이집(李集)의 별호.
♣ 둔운[屯雲]뭉친 구름인데, 궂은 운명의 상징이다.
♣ 둔일[遁逸]숨어 살다.
♣ 둔전병[屯田兵]변경(邊境)에 주둔(駐屯)‧토착(土着)시켜 평상시에는 농사도 짓게 하던 군사.
♣ 둔황공업[屯湟功業]송(宋) 나라 휘종(徽宗) 때 왕후(王厚)가 황주(湟州)에 진을 치고 강족(羌族)을 정벌하여 대승을 거두고 실지(失地)를 한꺼번에 수복했던 고사를 말한다. 《宋史 卷328, 卷492》
♣ 득가서[得家書]두보(杜甫)가 안녹산(安祿山) 난리 때 봉상(鳳翔)에 있으면서 부주(鄜州)에 있는 식구들 소식이 궁금해 서신을 보냈으나 답신이 없어 안절부절하다가 늦게야 서찰을 받고는 ‘득가서(得家書)’라는 제목으로 시를 읊어 기쁨을 나타내었음. 《杜少陵詩集 卷五》
♣ 득노병[得老兵]술친구를 찾아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사혁(謝奕)이 술 마시기를 아주 좋아하였는데, 술에 취하면 조정의 예의를 따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상관인 환온(桓溫)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피해 도망쳤다. 그러자 사혁은 다시 환온의 수하에 있는 장수를 붙잡고 함께 마시면서 말하기를, “한 노병이 도망치자 또다시 한 노병을 얻었으니, 또한 무슨 괴이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晉書 卷79 謝奕列傳》
♣ 득득[得得]일부러, 새삼스러이, 득의의 모양, 의기가 오르는 모양
♣ 득록[得鹿]상고 때 정(鄭) 나라의 어떤 사람이 들녘에서 나무를 하다가 놀란 사슴을 만나 잡아죽인 뒤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엉겁결에 구덩이에 밀어넣어 파초잎으로 덮고 나서 기쁨을 가누지 못하다가 얼마 후에 그곳을 찾아내지 못해 결국 꿈이 되고 말았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참과 거짓이 되풀이되는 인간사의 허무함을 비유한 것이다. 《列子 周穆王》
♣ 득롱망촉[得隴望蜀]후한(後漢) 초(初)에 광무제(光武帝)가 롱(隴)을 정복하고 보니 촉(蜀)이 욕심나서 또다시 촉나라를 쳤다는 데서 나온 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뜻한다.
♣ 득마괴거장적후[得馬愧居張籍後]당 나라 시인(詩人) 장적(張籍)이 배도(裴度)에게서 말[馬]을 한 필 선물로 받고는 시를 지어 사례(謝禮)하였더니, 한퇴지(韓退之)ㆍ백낙천(白樂天)이 화답한 시가 있다.
♣ 득마실마[得馬失馬]인간의 이해 득실(利害得失)이 무상하여 예측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으로,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새옹마(塞翁馬)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득실양장곡[得失羊臧穀]현상적으로는 잘되고 못 되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똑같은 결과가 되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장(臧)과 곡(穀) 두 사람이 양(羊)을 돌보던 중에, 장은 책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리고 곡은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변무(騈拇)에 나온다.
♣ 득실여환[得失如環]진(晉)의 양호(羊祜)가 다섯 살 때 유모(乳母)에게 “내가 가지고 놀던 금환(金環)을 가져오라.” 하니, 유모가 “애당초 가지고 놀던 금환이 없었는데 무슨 말이냐.” 하자, 즉시 이웃집 이씨(李氏)의 동쪽 담장 밑에 있는 뽕나무 사이로 가서 금환을 찾아냈다. 이씨가 알고 깜짝 놀라며 “이는 나의 죽은 아이가 잃었던 것인데 어찌된 셈이냐.” 하였다. 그는 그 죽은 아이의 후신(後身)이었다. 《晉書 羊祜傳》
♣ 득어망전[得魚忘筌]장자(莊子) 외물(外物)의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린다.”에서 나온 말로, 일단 목적을 이룬 뒤에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잊어버리는 것에 비유한다.
♣ 득어이군[得御李君]이군은 동한(東漢)의 명사 이응(李膺)을 가리킨 것으로 훌륭한 사람을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다는 뜻.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에 “순상(荀爽)이 일찍이 이응을 만나 수레를 몰고는 집에 돌아와서 ‘내가 오늘 이응을 위하여 수레를 몰았다.’ 하면서 기뻐하였다.” 하였다.
♣ 득여[得輿]수레를 얻는다는 것은 주역 박괘(剝卦)의 “상구는 큰 과일은 먹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헐릴 것이다[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에서 나온 말이다.
♣ 득의만면[得意滿面]뜻한 바를 이루어 기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함.
♣ 득의양양[得意洋洋]만족스런 듯 기뻐하다란 뜻의 고사성어.
♣ 득일[得一]도가의 지순한 도를 터득하다.
♣ 득일망십[得一忘十]한 가지를 얻고 열 가지를 잃어버림. 기억력이 좋지 못함을 뜻한다.
♣ 득전어주종무상[得全於酒終無傷]술에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져도 상(傷)하지 않는 것은 그 천진(天眞)을 온전히 한 까닭이다. 《莊子》
♣ 득정사증씨[得正師曾氏]숨을 거둘 때까지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임종(臨終)할 무렵, 대자리를 바꿔 깔도록[易簀] 자제에게 명하면서 “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한 말에서 연유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
♣ 득지[得之]김대덕(金大德)의 자(字)이다.
♣ 등[滕]등 나라는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있었던 작은 나라로 곁에 큰 나라인 제(齊)와 초(楚)가 있어 이러할 수도 저러할 수도 없었던 나라이다. 등 문공(滕文公)은 맹자에게 “등 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제(齊)ㆍ초(楚)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제 나라를 섬겨야 하겠습니까, 초 나라를 섬겨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孟子 梁惠王下》
♣ 등가[登歌]나라의 대제(大祭) 때 당상(堂上)에 올라가 부르는 노래를 말함.
♣ 등가[登歌]나라의 제사를 거행하거나 대규모의 조회 때 악사가 마루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것. 그 악사가 연주하는 노래를 말함.
♣ 등가[登伽]마등가녀(摩登伽女)의 준말. 불교에서 말하는 음녀(淫女)의 이름인데, 그의 딸 발길제(鉢吉帝)를 시켜 환술(幻術)로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아난(阿難)을 유혹하여 파계하게 하자, 석가모니는 이를 알고 신주(神呪)를 외어 아난을 구제하였다 한다.
♣ 등각장천[滕閣長天]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다[秋水共長天一色].”란 말이 있다.
♣ 등거[登車]동한(東漢) 사람 범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기주(冀州)의 도적들을 평정하러 떠날 때 수레에 올라 개연히 천하를 깨끗하게 할 뜻을 가졌었다 함. 《後漢書 卷六十七黨錮列傳》
♣ 등경산[鄧景山]당 나라 사람. 문관(文官)으로서 태원윤(太原尹)에까지 이르렀으나, 너무 각박하게 부하들을 다루다가 그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음.
♣ 등계적[登桂籍]문과(文科)에 등과하여 관원으로 되는 것을 계적에 올랐다 한다.
♣ 등고[謄告]말을 달리며 부르다.
♣ 등고[登高]음력 9월 9일의 이칭. 후한(後漢) 때 환경(桓景)이 비장방(費長房)을 따라 선술(仙術)을 익히던 어느 날 밤 장방으로부터, 오는 9월 9일에 환경의 집에 재앙이 있을 터이니 급히 가서 가족들에게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넣어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도록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시행했는데, 과연 9월 9일에 닭ㆍ개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의 가족은 무사했다고 한다.
♣ 등고구일[登高九日]전거에는 구일등고(九日登高)로 되어 있다. 남조(南朝) 양(梁) 오균(吳均)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 구일등고에 “여남 환경(桓景)이 비장방(費長房)을 따라 여러 해 동안 유학하였다. 비장방이 오균에게 말하기를, ‘9월 9일에 너희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인데 빨리 집으로 가 식구들마다 붉은 주머니를 만들어 거기에다 수유를 담아 팔에 차고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환경이 그의 말처럼 온 가족이 산에 올라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가축이 갑자기 죽어 있었다.”고 하였다.
♣ 등고난만취[登高爛慢醉]세속에서, 9월 9일이 되면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속례를 말한다. 《續齊諧記》
♣ 등고자비[登高自卑]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낮은 곳부터 밟아야 한다. 일을 하는데는 반드시 차례를 밟아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를 낮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 등고작부[登高作賦]높은 데 올라가서 부를 짓는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보임.
♣ 등공기구추[滕公起廐騶]등공(滕公)은 한(漢)의 하후영(夏侯嬰)을 말함. 하후영은 패(沛)땅 사람으로 처음에 패에서 말을 관리하는 천역(賤役)을 하던 자였는데, 유방(劉邦)과 사이가 좋았던 관계로 뒤에 유방이 한 나라를 세우고 천자(天子)가 되자 하후영은 태복(太僕)이 되었으며 한 나라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음. 《漢書 卷四十一》
♣ 등공신천[滕公新阡]등공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유방을 도와 한 나라를 세운 하후영(夏侯嬰)의 별칭이다. 그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공경들이 상여를 따라 도성의 동문 밖에 당도하자 말이 더 이상 가지 않고 땅바닥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 그곳을 파보니 석곽(石槨)이 나왔는데 거기에 “암울했던 가성(佳城)이 삼천 년만에 태양을 보았도다. 아, 등공이여 이 집에서 살지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마침내 거기에다 묻었다 한다. 《史記 卷九十三 夏侯嬰傳注》
♣ 등공장[滕公葬]등공은 한 고조(漢高祖)의 명신인 하후영(夏侯嬰)의 봉호. 등공이 일찍이 말을 타고 동도문(東都門)에 이르렀을 때 말이 가지 않고 발로 땅을 허비적거리므로, 그곳을 파 본 결과 석곽(石곽) 하나가 나오자, 이를 깨끗이 씻어서 보니, “답답하던 가성(佳城)이 삼천 년 만에 태양을 보았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등공의 유명(遺命)에 의해서 등공이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등과기[登科記]합격자 성명록.
♣ 등누점자기[登樓占紫氣]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길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거의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누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다가, 보라색 기운[紫氣]이 관문 위로 떠오는 것을 살펴보고는, 분명히 진인(眞人)이 올 것이라고 예측을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과연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仙傳 上ㆍ關令內傳》
♣ 등단[登壇]대장(大將)에 임명되었다는 말이다. 옛날 사령관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단을 쌓고 예식을 행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淮陰侯列傳》
♣ 등단[登壇]회맹(會盟), 제사, 사신 접대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말한다.
♣ 등단주소호[登壇周召虎]주(周)나라도 한 때에는 국가가 쇠약하였던 것을 선왕(宣王)이라는 왕이 중흥시켰는데, 그때에 대장으로서 전쟁에 성공한 사람이 소호(召虎)였다. 예전부터 대장은 단(壇)을 모으고 거기에 올라가서 하늘과 전군에 맹서하였으므로 대장되는 것을 등단(登壇)한다고 말한다.
♣ 등당입실[登堂入室]마루를 거쳐 방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순서를 밟아 학문을 닦으면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論語 先進》
♣ 등대자미[登臺子美]자미(子美)는 두보(杜甫)의 자. 그의 9월 9일 등고(登高) 시 세째 연(聯)에, “만 리에 가을을 슬퍼하니 늘 나그네의 신세, 백 년에 병이 많아 홀로 대에 올랐네.”라 했다.
♣ 등래[登萊]등래는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합칭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일대를 말한다.
♣ 등롱[燈籠]대나무 또는 나무나 쇠 같은 것의 살로 둥근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비단 또는 종이를 씌워 그 속에 등잔을 넣는 것이다.
♣ 등루[登樓]한(漢) 나라 말에 왕찬(王粲)이 난을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얻지 못함에 누각에 올라가서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랜 고사를 말한다. 《三國志 魏志 卷二十一 王粲傳》
♣ 등루거제[登樓去梯]누상(樓上)에 오르게 하고,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치운다. 즉, 처음엔 남을 기쁘게 해놓고 뒤에 괴롭게 한다.
♣ 등루부[登樓賦]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왕찬(王粲)이 17세 때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동탁(董卓)의 난을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지었다 한다. 《三國志 卷二十一 王粲傳ㆍ文選 卷十一 遊覽》
♣ 등루장소[登樓長嘯]진(晉) 나라 때 유곤(劉琨)이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있을 적에, 호병(胡兵)에게 겹겹으로 포위를 당하자 유곤이 성루에 올라 긴 휘파람을 부니 호병이 이 소리를 듣고는 향수에 젖어있는 틈을 타서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는 고사. 《晉書 劉琨傳》
♣ 등륙[滕六]전설 속의 눈 귀신[雪神] 이름이다.
♣ 등륜[燈輪]불사(佛事) 때 등을 달아 놓는 곳. 당 예종(唐睿宗) 선천(先天) 2년에 안복문(安福門) 밖에 20장(丈) 높이의 등륜을 설치하고 5만 개의 등을 달아 놓아, 마치 미묘한 꽃과 같았다 한다. 《朝野僉載》
♣ 등림[鄧林]등림은 좋은 나무만 있다는 숲으로, 신선이 구름을 타고 다니며 노는 곳이라 한다. 필원(畢沅)은 산해경(山海經) 중산경(中山經)의 “夸父之山, 北有桃林.”이라는 구절에 근거해 ‘도림(桃林)’이 ‘등림(鄧林)’이며, 그 땅은 초(楚)의 북쪽 경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 등림[鄧林]회남자(淮南子)에, “과보가 막대를 버린 것이 등림이 되었다 [夸父棄其策是爲鄧林].”라는 말이 있다. 과보는 신수(神獸)인데, 하수(河水)를 마시고도 부족하여 서해(西海)를 마시려고 가다가 중로에서 목이 말라죽었다. 그가 막대기를 심은 것이 살아나 큰 수풀이 되었는데, 전설에 나오는 아름답고 무성한 수풀이다.
♣ 등문객[登門客]등용문객(登龍門客). 인정과 추천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卷六十七 李膺傳에 “이응의 명망이 높아 그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용문에 올랐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 등사[螣사]용처럼 생긴 뱀. 운무(雲霧)를 제맘대로 일으켜 그 속에서 논다고 함. 《爾雅 釋魚》
♣ 등산극[登山屐]등산을 하지 않았음을 뜻한 말로, 남조(南朝) 송(宋) 때 사영운(謝靈運)이 등산할 때면 반드시 나막신을 신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등산사[登山謝]사영운(謝靈運)은 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의 문장가. 산수를 좋아하여 회계(會稽)에 있을 때 언제나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곤 하였다. 《宋書 謝靈運傳》
♣ 등산임수[登山臨水]친지를 떠나 보내는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때 보통 쓰는 표현으로, 초사(楚辭) 구변(九辯)의 “산에 올라 멀리 강물을 바라보며 돌아가는 길손을 전송한다.[登山臨水兮 送將歸]”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 등상[騰傷]등상은 호랑이가 날뛰어 이광에게 상처를 입혔다[虎騰傷廣]는 데서 온 말이다.
♣ 등생구절군[滕生求浙郡]늙음을 이유로 외임(外任)을 자원함. 송의 등원발(滕元發)이 강직한 성품 명쾌한 안목으로 신종(神宗)때 많은 치적(治績)을 내외에 남기고는 뒤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늙음을 이유로 회남(淮南)을 맡아 나갈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음. 《宋史 卷三百三十二》
♣ 등석[燈夕]상원(上元). 즉 정월 대보름날 밤을 말한다. 예부터 이날은 밖에 등을 켜놓아 밤을 밝게 하였으므로 이름된 것이다. 속칭 원소절(元宵節)이라고 한다.
♣ 등석[燈夕]음력 4월 8일 밤에 등대를 세우고 등을 달고서 석가모니의 탄일(誕日)을 기념하는 날.
♣ 등석연[燈夕宴]음력 4월 초파일에 ‘등석(燈夕)’이라 하여 등을 달고 등대를 세우고, 밤에 불을 켜서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잔치이다. 관등(觀燈) 놀이와 같다.
♣ 등설[滕薛]춘추 시대에 독립된 두 소국(小國)의 이름인데, 전하여 지방관을 비유한 것이다.
♣ 등씨동산[鄧氏銅山]등씨는 전한(前漢)의 등통(鄧通)을 말한다. 문제(文帝)가 등통을 매우 총애하여 그를 부자(富者)로 만들기 위해, 촉(蜀)의 엄도(嚴道)에 있는 동산(銅山)을 떼어 주어, 거기서 나는 동(銅)으로 돈을 주조해서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등씨의 돈이 온 천하에 퍼졌었다. 《漢書 佞幸傳, 史記 佞幸列傳》
♣ 등아[燈蛾]등촉(燈燭)을 보면 서로 불을 뺏으려고 빙빙 돌다가 등유(燈油)에 빠지거나 불에 타서 죽는 불나방. 색욕과 탐욕에 어두워 신명(身命)을 망치는 우인(愚人)을 비유한다.
♣ 등영[登瀛]선비가 총애와 영광을 입은 것을 신선의 세계에 오른 것에다 비유한 것인데, 영주는 전설에 신선이 사는 산이라고 하였다. 당(唐) 무덕(武德) 4년에 태종(太宗)이 태자가 되어 궁성의 서쪽에 문학관(文學館)을 열고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명을 학사(學士)로 삼고 정사를 자문하였다. 그 선발에 든 사람을 사람들이 선망(羨望)하여 등영주(登瀛洲)라고 일컬었다. 《新唐書 卷一百二 褚亮傳》
♣ 등영주[登瀛洲]영주는 당 태종(唐太宗)이 설치한 문학관(文學館) 이름으로, 여기에 임명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이른바 ‘십팔학사(十八學士)’를 당시에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영주에 올랐다[登瀛洲]’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02 褚亮傳》
♣ 등오정[登鼇頂]동해에 자라[鼇]가 산을 이고 있는데, 그 위에 신선이 산다 한다.
♣ 등왕각[縢王閣]당나라 문인 왕발(王㪍)이 교지령(交趾令)으로 있는 아버지 복치(福畤)를 보러 가는 길에, 꿈에 강신(江神)이 와서 말하기를, “내일 9월 9일에 남창(南昌)의 등왕각(滕王閣)을 중수(重修)한 낙성식(落成式)이 있으니 참석하여 글을 지어 이름을 내라.” 하였다. 왕발이 대답하기를, “여기서 남창까지 7백 리인데 하룻밤 사이에 당도할 수가 있읍니까.” 하니, 강신(江神)은, “배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바람을 빌려 주리라.” 하므로, 왕발은 과연 하룻밤 사이에 남창에 도착하니 홍주 자사(洪州刺史)가 등왕각에 낙성식을 크게 열고 여러 손들에게 필묵(筆墨)과 종이를 돌려 글을 짓게 하였다. 사실은 자사(刺史)가 자기의 사위를 시켜 미리 글을 지어 두고 여러 손들이 사양하기를 기다려 사위의 글을 자랑하려 하였던 것이다. 다른 손은 모두 사양하는데 왕발이 사양하지 않고 붓을 드니 자사는 불쾌하여 사람을 시켜 왕발의 글을 쓰는 대로 엿보고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중간에 가서, “떨어진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다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하는 구절을 쓰니, 자사가 듣고, “참으로 기이한 재주로다.” 하였다. 왕발은 끝에 다시 시(詩)를 쓰기를, “그림 그린 기둥은 아침에 남포의 구름에 날고 주렴은 저녁에 서산 비에 걷는다 [畵棟朝飛南浦雲 珠簾暮捲西山雨].” 하였다. 등왕각은 등왕(滕王)에 봉해진 당고조(唐高祖)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홍주(洪州)의 도독(都督)으로 있을 때에 세운 누각이다.
♣ 등용[登龍]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의 명망가인 이응(李膺)의 집을 찾아가 그의 대우를 받는 것을 당시에 영광으로 알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했던 고사가 있다.
♣ 등용문[登龍門]용문(龍門)은 황하 상류에 있는 급류로, 잉어가 여기를 통과하면 용이 된다는 말이 있음. 입신출세의 관문에 오름
♣ 등우[鄧禹]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군으로, 일찍 대공(大功)을 세우고 24세의 나이로 대사도(大司徒)가 되었었다. 《後漢畫 卷十六》
♣ 등원실목지도율[騰猿失木只掉慄]혼란한 세상을 만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뛰어다니는 원숭이[騰猿]들이 큰 나무 위에서 걱정없이 지내다가 가시나무 사이로 떨어지게 되어서는 오직 눈치를 살피고 벌벌 떨면서[危行側視 振動悼慄]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山木》
♣ 등유[鄧攸]아들이 죽어 후계자가 없게 된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등유가 어린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 도중 모두 온전하게 살릴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구했는데, 그 뒤에 아들을 다시 얻지 못해 후사(後嗣)가 없게 되자 사람들이 “하늘도 무심하다.[天道無知]”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良吏傳 鄧攸》
♣ 등창[背瘡]한의학에서, 등에 나는 큰 부스럼을 일컫는 말.
♣ 등춘대[登春臺]“뭇사람들 즐거워 봄 대에 오른 듯[衆人熈熈 如登春臺].” 장자(莊子) 그 주석(注釋)에 이르기를, “봄엔 음양이 교통하고 만물이 감동하므로 대(臺)에 올라 바라보면 기분이 아주 흐뭇하다는 뜻이다.” 하였다.
♣ 등춘대[登春臺]태평 성대의 백성들은 마치 풍성한 잔치상을 받은 듯, 또는 봄에 높은 대관에 올라가 사방을 전망하듯 즐거워한다는 노자(老子)의 말에서 온 것으로, 즉 태평 성대를 비유한 말이다. 《老子 二十章》
♣ 등파[藤婆]죽부인(竹婦人)의 일종.
♣ 등하[登霞]멀리가다. 제왕(帝王)의 죽음을 말함. 하(霞)자는 하(遐)자의 뜻으로 하늘에 오른다는 뜻.
♣ 등하불명[燈下不明]등잔 아래가 어둡다. 곧 가까운 곳을 도리어 잘 모른다.
♣ 등화[燈花]등잔불 심지 끝이 타서 맺히는 꽃 모양의 불똥을 말한다. 불이 꺼지려 할 즈음에 이 등화 현상이 일어나면 조만간 기쁜 일이 있게 된다고 한다. 《本草 燈花ㆍ西京雜記 3》
♣ 등화가친[燈火可親]가을밤은 서늘하여 등불을 가까이 두고 글읽기에 좋다는 말
♣ 등후[鄧侯]등우(鄧禹)를 말한다. 등우는 한 광무제(漢光武帝)를 섬겨 천하를 평정하고 중흥(中興)의 제일공신이 되었는데, 나이 2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고 찬후(酇侯)로 봉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