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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州. 본래 고구려의 闕口로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顯宗 9年에 來屬하였고 睿宗 元年에 監務를 두었다 高宗 46年에 衛社功臣 成均大司成 柳璥의 內鄕이므로 올려 文化縣令官으로 삼았다 別號를 始寧 成廟의 定한 바이다 이라 하였다 九月山 세상에 阿斯達山이라고 전한다 장장평 세상에 檀君이 도읍한 곳으로 전하니 곧 唐莊京의 訛傳이라 하겠다 三聖祠 檀因 檀雄 檀君의 祠堂이 있다 가 있다.
고려사
儒州,縉陽軍,中,刺史。唐置。後唐同光二年隸新州。太宗改奉聖州,仍屬。有南溪河、沽河、宋王峪、桃峪口。統縣一:
요사
유주 진양군은 당나라가 설치하고 후당동광2년에 신주에 예속되었다. 태종이 진성주로 개명하고 남쪽에 해하 고하 등이 있다.
당토명승도회 선화부
http://blog.daum.net/sabul358/13937663 향고도님 자료제공
송나라때 고지도인 우적도
유주는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에 떼주었다고 하는데 요나라기록에는 유주에 속한 1개군밖에 없으며 송나라는 아예 자기땅이 아니라고 기록되있다. 반면 고려는 유주가 자기땅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어놨다. 조선시대기록에도 유주에 당장경이 있다고 했는데 단군의 수도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한자는 儒자가 아닌 幽자를 썼다. 즉 명나라때 유주라고 생각한 북경일대에 고조선의 수도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조선은 유주가 자기땅이 아니라고 했고 고려는 유주가 자기땅이라고 했다.
고려에서는 이곳을 서해도 혹은 황해도로 분류했고 동국여지승람에 아쉽게도 고려8도중 1도인 황해도가 명에 넘어갔다고 써있다.
서글픈 일이다.
고조선유적도 실제로 북경남쪽에서도 대량발굴되었다. 사서의 기록과 유물 모두 고조선의 수도가 북경의 남쪽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청나라때 고지도
고려와 요는 유주를 분할한 것이고 요나라가 차지한 선화부일대가 원래 고구려의 땅임을 알수 있다. 게다가 현재 선화부고성과 그북쪽 장가구일대에는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와 옹이 남아있는 고성유적이 있다. 또한 한장성이 끝나는 하북성수성진에서 새로이 시작되는 장성이 고구려와 고려가 쌓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케 한다.
하북 산둥 강소를 고려가 차지한 증거들
조선의 후예 2010.08.31 16:47
http://blog.daum.net/manjumongol/710
http://blog.daum.net/sabul358/13937663 당토명승도회 보정부 향고도님 제공
청나라때 지도인 당토명승도회에 진장성을 표기해두었다. 매국노들이 가르친대로 지금의 산해관이 진나라가 쌓은 곳이라면 산해관을 그린 영평부지도에 진장성이라고 표기해야 할텐데 오히려 이곳 보정부 북쪽 수성진일대에 진장성이라고 표기했다.
즉 과거 어느시점에는 저 곳이 진장성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고 그 옆의 산을 갈석산이라고 생각한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수성진을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중국지방지에서 밝히고 있다. 저곳이 진짜 진나라 장성의 출발점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할것이다. 저곳은 한나라 장성의 출발점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장성학계가 그린 한나라장성지도는 대략 저곳일대를 출발점으로 잡는다.
아마도 저 곳에서 출발하는 장성이 고려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베이징동쪽장성은 고려가 쌓은 것임을 밝혀냈으니 나중에 명나라가 연결하여 지금의 산해관에 이르는 장성이 아닐까 한다.
송나라때 고지도인 구역수령도에 수성과 안숙이 나온다. 청나라때 지도와 대략 비슷한 그림이다. 안숙서쪽에 수성이 있고 수성서쪽에 큰산이 있다. 송나라는 수성이 있는 곳이 고려땅이라고 했다. 그러니 고려의 땅이 서쪽으로 얼마나 멀리 갔는지 알수있다. 송사에는 고려를 동서2300리 남북 3000리라고 했는데 아마도 수성까지를 2300리로 본듯한다.
청나라지도에서 보정부의 동남쪽에 안주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곳이 고려의 안주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원풍(元豐) 원년(1078, 문종32)에 경동(京東)과 회남(淮南)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정관(亭館)을 짓게 하였는데, 아주 장대하고 화려하게 하였으므로 밀주(密州)와 해주(海州) 두 주에 소요가 생겨 도망치는 자가 있었다. 《동파집(東坡集)》
○ 《화만록(畫墁錄)》에, “하북(河北)에 오도창(五都倉)을 설치하였는데, 고려와 강화(講和)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역을 다 마치기도 전에 황제가 죽었으니, 이는 하늘이 연계(燕薊)의 백성들을 중국에 귀속시키지 않으려는 것인가 보다.” 하였다.
구역수령도
녕주가 고려땅임은 이미 앞에서 증명했고 고려도경에 체주 바로 맞은편이 고려땅이라고 했으니 하북성 해안지대가 고려땅임을 알수 있다.
송나라때 기록인 태평환우기에는 고려땅은 흉산의 동쪽이라 했다. 그러니 산둥반도가 누구땅인지 대략 알수 있으며 게다가 밀주와 해주에서 민란이 난것은 고려사신을 맞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고려가 한반도에만 같힌 나라였으면 여기다가 지을 필요가 없다.
당시의 해로는 육지에 바짝 붙여서 가거나 아니면 요동반도 최남단에서 섬을 징검다리삼아 산둥반도 북쪽으로 건너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지을려면 등주에다 짓던지 래주에다 짓던지 왜 밀주와 해주인가 송나라는 아직 개봉이 수도였던 때였기에 상식에 맞지 않는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흉산의 위치를 생각하건데 지금 표기된 밀주와 해주는 당시에 저곳에서 한참 서쪽에 있었던 것이 예상 가능하다. 그래야 개봉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흉산동쪽은 고려땅이라고 기록하고선 해주는 흉산의 동쪽에 있고 송나라땅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개봉으로 가는 해로에 있으려면 밀주와 해주는 내가 보기에 좀더 서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요나라가 태행산일대를 장악한 이후 고려는 기존의 송나라 등주로 향하던 뱃길을 밀주와 해주쪽으로 돌린 것인데 송나라의 등주가 제장성 서쪽에 있었음을 내가 밝혀냈으니 요나라가 고려의 보주와 정주를 차지하고 남하하여 태행산일대까지 완전 장악하자 고려에서 뱃길로 송나라 등주로 가던 길이 요나라의 감시망에 걸릴수 있으니 일부러 우회하여 밀주와 해주를 통하여 개봉으로 간 것이다.
고려의 남쪽땅경계는 송나라기록에 나타나있다 바로 절강성영파부와 마주본다고 한 곳이 고려의 남쪽경계이다. 그곳은 지금의 강소성 해안지대로 고려는 강소의 해안지대도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흉산이 있는 곳동쪽일대는 송나라 말기까지 고려땅이라고 봐야한다.
신이 3년 전에 고려에 포로로 잡혀 낭관(郞官)으로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살펴보건대, 승라주가 《송사》에는 승라주(昇羅州)로 되어 있다.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前路)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 길을 취하여 곧장 압록강과 대하(大河)를 건넌 다음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이상 모두 요사》
개경동쪽 1400-2800리에 서경이 있다(당시 사람은 하루 100리 말은 하루 400리 이상 말에따라 다르다. 천리마는 말그대로 천리를 가지만 당시 보통 말은 200-400리 내외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개경의 남쪽에 두개의 큰 도시 아마도 남경과 또다른 성을 말하는 것 같다. 즉 개경과 서경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것을 알수 있고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걸친 큰 나라가 고려였음을 바보도 알수 있다.
거란은 요해(遼海) 밖에 끼어 살며 또 두 하수(河水)에 가로막혀 있으므로 서로 사귈 길이 없는데다가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을유 4년(985), 송 옹희 2년ㆍ거란 통화 3년
거란은 요해(遼海)의 바깥에 끼어 있고 또 대매하(大梅河)ㆍ소매하(小梅河)의 두 강으로 막혀 있으며,
송사
요사에 기록된 압록강다음에 나오는 대하를 현재의 요녕성 요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압록강 다음에 요하인가?
북한 압록강건너고 요하를 건너면 고려수도에 다다르는가? 좀 생각을 해보고 주장을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차라리 영정하나 청장하 하류같은 큰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백제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군인의 수는 70만으로 최고로 많다.
고려사람들은 통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며 송나라과 인구와 국력에서 대등한 황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무역능력은 멀리 아라비아에 미쳐 결국 코리아라는 이름을 세계에 퍼뜨린 장본인다. 고구려가 곡과 마곡이란 이름을 퍼뜨렸다면 고려는 바로 현재의 우리의 이름인 코리아를 퍼뜨린 자랑스런 나라인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산둥과 하북남부의 고려점거 기록
조선의 후예 2010.08.28 11:48
http://blog.daum.net/manjumongol/708
그대를 冊하여 開府儀同三司 尙書令 高麗國王으로 삼노라. 아아 海岱 (海垈 = 東海서부터 泰山 사이에 있는 地域이니 舊 靑州 지금의 山東省을 말함. 書經 禹貢에 ?海)惟靑州?라 하였음.)의 밖에 그대만이 오직 홀로 높고 辰 卞의 區宇를 그대만이 오직 全有하도다.
고려사
中国三大幹龍総攬之圖
지도상의 요하는 현재의 백하로 추정된다. 천수산옆에 바로 동쪽에 있는 강은 현재의 백하이다.압록은 난하로 추정된다.
명대 고지도
천수산 옆에 강이 1개 더 있다. 즉 천수산 바로 옆의 강이 현재의 백하이며 그 다음이 현재의 난하로 위의지도는 요하를 지금의 난하로 추정하고 그 동쪽으로 요동이라고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요수를 옛날에 압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삼국유사가 원나라시기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명때의 2개의 고지도는 즉 일연이 알고 있던 현재의 난하라는 강이 압록이라 불렸던 적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대청광여도
청나라때 지도와 비교하면 더 정확하게 이해할수 있다.
명나라때 고지도를 인용한 이유는 바로 고대에 산둥을 섬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백제가 동해가에 있다라는 북위의 기록은 바로 산둥을 말함이다. 당시에는 황하가 바다로 인식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의 강도에 있다는 견자산은 산둥반도에 지금도 그 지명이 남아 있다. 고려사에 나오는 해대의 밖에 고려가 있다라는 기록은 바로 태산과 당시의 동해라고 생각한 황하동쪽지류를 말하는 것으로 위의 명나라때 고지도가 당시의 지리인식개념을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은 동해밖에 조선이 있다라고 하지 해대의 밖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굳이 태산을 끼워넣은 점은 바로 태산밖 산둥의 땅이 고려땅이라는 것이다.
山東南의 忠 慶 尙州 三道撫問使를 삼고 兼御史雜端 兵部郎中 金若珍과 禮部郎中 崔尙과 함께 山南의 晋 羅 全 淸 廣 公 洪州 七道撫問使를 삼고
고려사
고려사에는 산동이라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한다. 산동남의 충 경 상주 삼도무문사라는 직책이 있다.
元이 山東 東西道宣慰使 塔察兒와 刑部尙書 王泰亨을 보내어 詔하기를 「向者에 그대 나라가 스스로 不安을 지음(作)으로 平章政事 闊里吉思 等을 보낸 것은 臨時로 王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하게 하여 써 鎭?하려 함이었고 오래 그곳에서 留任시키코자 함이 아니었으므로 이제 모두 命하여 歸朝케 한 것이다
고려사
원이 산동 동서도선위사 를 보냈다.
고려가 만일 산동에 땅이 없었다면 이와같은 기록이 존재할수가 없다.
이미 玄?의 墓에 封하니 滄渤(渤海)로써 옷깃(襟) 삼음을 表하였도다. 어찌 반드시 白馬를 죽여 써 맹세하리오. 黃河가 띠와 같기(黃河之如帶)306)를 맹세하였도다.
고려사
창해와 발해 즉 창주와 발해군일대가 고려의 옷깃이라고 한다. 명나라기록에는 조선은 명의 겨드랑이와 비슷한 지형이다라고 했다. 즉 고려때는 고려가 하북성해안지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명나라때는 베이징동남쪽일대에 조선땅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기록이 나온것이다.
구역수령도 송나라때 고지도
당시기록과 고지도를 참고하건데 현재 하북성의 동부해안은 고려땅이 맞다. 만일 한반도 반만 차지했다면 창주와 발해를 옷깃이라고 한다면 기록한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기쁘게 어진 아들을 낳아서 茅土(封土)는 이미 그의 父服(職)을 이었으니 可히 妻道의 始終을 완전히 하였도다. 진실로 湯沐인 安平(山東의 地名)을 따라 넓게 大封에 昇進치 아니하면 어찌 尊屬을 들추어내는 것이 되리오.
아아 그 나라로부터 北闕(帝居)까지가 무릇(最) 길(道里)이 5000(里)인데 近甸을 東秦에 옮기니 모두 山河가 12로다.
고려사
구역수령도
고려사해설에는 안평을 산동의 지명이라고 주석을 달았는데 송나라때 고지도인 구역수령도에는 안평이 녕주밖에 있다.
녕주가 고려땅임은 증명했기 때문에 안평일대가 고려땅임도 증명이 되는 것이다. 탕목은 영지를 말하는 것으로 고려왕의 탕목(영지)가 안평이라고 했다.게다가 북관까지가 5천리라고 한다. 송나라시대 기록에는 고려땅의 남쪽끝이 남으로 5천리라고 되어있다. 즉 수도를 중심으로 송나라는 고려가 남으로 5천리 원나라는 고려가 북관까지 5천리라고 했으니 수도의 남북끝이 1만리라고 할수도 있다. 혹은 그냥 고려가 남북으로 5천리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조선에서 작성한 고려사지리지는 우리는 옛부터 1만리라고 했다. 아마도 고려가 남북으로 1만리인것을 말하는 것 같다.
山東地方이 새로 歸附하여 百姓이 困難할 것이니 高麗使臣은 그길로 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하므로
고려사
산동일대가 주원장한테 항복했다는 것인데 명사와 조선왕조실록을 검토한 결과 명나라 전기에 산둥과 산서에서 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났으며 그들을 가리켜 달자 즉 타타르족이라고 했다. 아마도 머리를 한족처럼 기르지 않고 우리방식대로 댕기머리를 한것을 말하는 것 같다. 북위는 처음 머리를 땋았으나 효문제(한족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가 갑자기 머리를 한족방식대로 바꾸고 언어도 바꾸고 복식도 바꾸어 버렸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자 선비족들이 한족화되어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명에 넘어간 산둥과 하북남부의 주민들은 계속 머리를 땋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산서지방은 고구려이래로 계속 우리민족의 차지였기 때문에 머리를 계속 땋아서 생활한 모양이다.
그러니 명나라와 조선은 그들을 타타르라고 표현한 것이다.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후 겨우 진압되었지만 명나라말기 이들은 청나라에 바로 투항해 버렸다.
오랜세월이 흐르자 고려인후손들이 한족화 되어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 만주족이 청나라강희제때 한족과 비율이 2:8이었고 청나라가 망한후에도 3-4천만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겨우 1천만이다. 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종족이 핍박받으면 숨기는 것이 다반사이다.
왕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려때 그 많던 왕씨는 조선개국후 살해당하거나 명으로 도망하거나 혹은 성씨를 바꾸어 살았다. 그러니 왕씨가 지금 굉장히 적은 것이다.
그들의 본 뜻은 山東 一帶에서의 船隻과 軍馬의 動靜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고려사
조선초기 이런 기록이 자주등장한다.
조선군은 이상하게 산둥일대를 굉장히 정찰을 많이 한다. 오히려 북경일대를 정찰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어차리 당시기술로는 해군이 황해를 곧바로 건널수가 없고 요동반도와 북경동남쪽해안지대를 거쳐 산둥에 가야했다. 그러니 북경을 먼저 정찰해야 되는데 조선군은 산둥일대를 정찰한다. 아마도 고토수복에 대한 태조의 열망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려의 영토가 한반도뿐이라는 사람들에게
조선의 후예 2010.08.18 11:46
http://blog.daum.net/manjumongol/687
거란국지에 실린 거란지리도
擅乘船由海入界河及往高麗、新羅、登萊州境者
송사
배를 멋대로 타고 바다를 경유해 계하에 들어가면 고려 신라 등주 래주의 경내에 다다른다.
지금의 북경동남쪽이 고려 신라의 땅이라는 해석외에는 나올수가 없다. 금사에는 저곳에 백제하가 있다고 하고 송사에도 백제가 북경동쪽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직도 고려가 한반도 반토막만 차지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