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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16> 서장 (書狀)
진소경에 대한 답서(2)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떻게 외도와 이승의 선적단견(禪寂斷見)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겠으며, 어떻게 자기 마음의 밝고 묘한 작용과 완전한 안락과 있는 그대로가 청정한 해탈이 되는 묘함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자연히 옛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의 말을 휘두를 수가 있습니다. 깨끗한 마니(摩尼) 구슬이 진흙탕 속에 아무리 오래 놓여 있더라도 때가 낄 수 없는 것은 그 바탕이 본래 깨끗한 때문입니다.
이 마음도 그와 같아서 어리석은 때에는 티끌 경계에 미혹되지만, 이 마음의 바탕은 마치 연꽃이 물에 젖지 않듯이 본래 미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문득 자기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 이 마음은 본래 부처로서 완전히 자재하며 있는 그대로 안락하며 온갖 묘한 작용들도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보통 참선한다고 하면 조용한 곳에서 묵묵히 앉아 있거나, 사람들과 동떨어진 토굴에서 홀로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로 여기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하여 참선이라는 특별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선방(禪房)이나 토굴이라는 외딴 장소를 찾는다거나, 특수하게 설계된 집에서 특별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생활하여야 참선이라는 특별한 효과를 얻는 것으로 여기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선을 보통사람은 가지고 있지 않은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의 소산으로서 이른바 이법(二法)에 떨어진 것이다. 마음은 둘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불법(佛法)은 곧 불이법(不二法)이라고 한다. 선이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마음을 가지고 선(禪)을 따로 추구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수능엄경>에 나오는 아쥬냐닷타 장자처럼 제 머리가 없다고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짓이다. 밖으로는 아무리 찾아도 따로 찾을 수가 없지만, 찾고 있는 그것이 바로 찾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찾을 일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선을 고요함이라고 여기고 생각을 끊어야 그 고요함이 달성된다고 하는 선적단견(禪寂斷見)의 어리석음이라 하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 깨달을 것을 추구하는 잘못이라고 한다. 선은 생각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의식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이 근본에서 비롯되지만, 이 근본은 의식으로 파악되는 대상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의식을 통하여 이 근본은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의식을 떠나서 근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불이법(不二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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