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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은 조소의 예술이다>의 줄거리:
미술에서 조소라는 말은 조각과 소조를 합친 것입니다. 조각은 나무나 돌 같은 재료를 밖으로부터 깎아 들어가는 것인 반면 소조는 나무나 금속의 뼈대에 점토를 발라가면서 형상을 만들어 갑니다. 신앙의 성숙은 삶에서 조각과 소조의 변환이 분명하고 그 타이밍이 적합하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조각고 소조의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조소(彫塑)의 예술이다
(마26:47~56)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믿음은 조소(彫塑)의 예술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은 조소의 예술이다.’
미술에서 조소라는 말을 씁니다.
조소가 뭐냐 하면 조각과 소조를 합친 말입니다. 조소(彫塑)!
그러니까 조소라는 말을 그 자체로 뜻을 풀이해 보자면, 재료를 깎거나 새기거나 아니면 빚어서 입체적인 형상을 만드는 예술 활동을 말합니다.
조각과 소조를 합친 말인데, 조각은 뭡니까?
예를 들어 통나무나 아니면 돌덩어리를 밖에서부터 정을 들고 깎아 나가거나 아니면 또 새겨 넣는, 돌로 된 벽면에 새겨서 볼륨을 만들어내서 입체감을 가지고 형상을 만들어내는 게 조각이라면, 소조는 점토 있잖아요, 진흙으로 갖다 덧대서, 갖다 붙여서 모양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소조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조각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깎아 들어가면서 모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소조를 만들 때 조금 모양이 아주 작은 거면 상관이 없는데 조금이라도 모양이 커지게 되면, 예를 들어 어거스틴의 두상을 만든다! 그럴 때 나무나 이 금속으로 철사 같은 것으로 뼈대를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진흙을 갖다 붙여가면서 모양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조각은 점감적이라 그럴까요? 점차적으로 감소되어져 가면서 형상이 만들어진다고 한다면 소조는 점층적인, 점차적으로 붙여가면서 늘어나면서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생을 조각하는 시간과 소조하는 시간으로 나누어서 때를 따라 적합하게 변환시켜가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각이 일어나는 인생의 때와 소조가 일어나는 인생의 때가 합쳐지면서 신앙인의 삶이 형상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에요.
어떨 때는 내 인생의 시간이 조각의 시간을 통해, 조각이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 인생의 시간에 형상이 만들어지고 내 인생의 모습이 갖추어지고, 어떨 때는 소조의 방법을 통해서 내 인생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조각할 때와 소조의 때를 알아서 적합하게 변환하는 동안에 아름다운 작품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공생애는 인류역사상 있을 수 없을 만큼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입니다.
그분의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메시아로서의 삶의 의미를 제외해 놓더라도, 이런 종교적이고 생명적이고 진리에 찬 의미를 제외해 놓더라도, 안목이 있다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 황금 비율로 조각과 소조가 이루어진 씨줄과 날줄처럼 맞추어진 아름다운 예술품인가 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여러분, 예수님의 체포 장면이 나옵니다. 이 체포 장면을 거듭 읽으면서 참 강하게 느껴지는 바가 있어요.
그게 뭐냐? 지금 보세요.
너~무 너무 수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유다가 와서 입을 맞추면 입을 맞추도록 허락하시고, 유다가 하려는 일을 하게 하시고, 사람들이 와서 붙잡으면 붙잡히시고, 사람들이 와서 포박하면 포박을 당하시고, 사람들이 와서 끌고 가면 끌려가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발칵 뒤집어 놓으십니다.
유월절에 때가 되서 사람이 200만 명가량 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왕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대관식을 여십니다.
그리고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든 상을 다 뒤엎어 버리고, 대제사장을 향해서 도저히 사람들 앞에서 대제사장이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굴욕을 안겨버리십니다.
그러고 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까지 합세 된 그 그룹들과 끝임 없는 논쟁을 펼치시면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도저히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독설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우리가 다 봤던 것이에요.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창녀와 세리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더 늦게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고 해 대시는 분입니다.
더 이상 공격적일 수 없고, 더 이상 위험한 고비를 감수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당신의 의중을 드러내실 수가 없을 정도로, 과격하신 공격성과 적극성을 보이시다가, 지금은 완전히 죽은 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십니다.
입을 맞추면 맞춰주시고, 잡으면 잡혀주시고, 묶으면 묶여주시고, 끌고 가면 끌려가시는!
이것이 바로 조각과 소조의 삶이 어우러진 주님의 삶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자! 주님의 공격적인 삶, 이것이 조각의 삶입니다. 조각하는 삶이에요,
지금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읽은 이 장면 소조의 삶입니다.
그러면 조각과 소조가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일어난다는 것이냐?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야 되는 신앙적 삶이에요.
조각의 삶을 살아야 되고, 소조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삶이 예술품처럼 완성되어 가는 것이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조각의 상황!
인생에 있어서 조각이라는 것은 내게 주어지고 내가 만나지고 있는 상황, 현실, 내가 만나는 사람, 그 관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정을, 망치를 들고 정을 갖다 대고 쪼아 대면서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겁니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이 조각의 삶이 주님께서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 들어가 같이 공존하시면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실 때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조각하는 타이밍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들어오셔서 밖으로 발산해 나가십니다.
이때, 예수님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은 예수님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공격적으로 손을 대시는 조각의 상황이 됩니다, 조각의 재료가 됩니다.
그것이 제자들이건 그것이 바리새인이건, 대제사장이건, 그것이 타락한 성전이건, 아니면 병든 사람이건, 앉은뱅이건 그때 예수님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통하여 만나게 되는 모든 현실에 대하여 하늘의 능력을 뿜어내시면서 그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이게 조각의 순간이지요.
그럼 소조의 시간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 바깥에서 역사를 해 나가십니다.
예수님에게, 예수님이라고 하는 뼈대에 진흙을 붙여나가듯이, 예수님 바깥에서 하나님이 상황과 섭리를 인도하시면서 덧대고 붙여나가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소조라는 방법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애를 이루어가고 계시니까…
그러다 조각의 타이밍이 될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볼 땐 깜작 놀랄 정도로 과격하게 공격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소조의 타이밍이 될 때는, 정말로 답답하고 바보라고 여겨질 정도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나타나십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드라마틱한 생애의 시간들을 채워 가시면서 이 세상의 인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조각과 소조가 어우러져서 이루어지는 예술품으로서의 삶을 사셨다는 얘기에요.
그렇다면 누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달리 살아가느냐?
완전히 혼란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지금 소조의 타이밍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 이 골격에다가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시고 완성시키기 위해서 덧대 가십니다.
진흙을 점토를 갖다 붙이듯이 십자가 사건을 완성시키기 위해 덧대 가십니다.
주님은 단지 골격이 되어 드릴 뿐입니다, 가만~히 있는 골격이 되어 드릴 뿐입니다.
소조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12중에 하나인 자 베드로! 요한복음에 베드로라고 명시를 해요.
근데 아마 마태복음은, 이 마태복음이 쓰여 지는 이 시대에 기독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명시 했을 경우에 베드로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까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베드로라는 이름을 뺍니다.
어쨌든 이 소조의 시간에 주님은 뼈대만 댔을 뿐, 하나님께서 사건과 현실들을 가지고 진흙을 덧대듯이 덧대고 있는 소조의 시간에 가만히 계시는데, 베드로는 칼을 들어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자들의 종,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고 그러죠? 그 귀를 잘라버립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2군단 더 되는 천사들의 무리를 불러들여서 요까짓 것 다 전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에 어떻게 성경에서 말한 대로 이루어지겠느냐?’
다시 말하면 ‘그렇게 적극성을 띨 시간이 아니다.,지금은 조각의 시간이 아니라, 나는 뼈대로서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현실을 그대로 덧붙여짐을 당하고 있을 소조의 시간이고, 이렇게 소조의 시간을 통해서 완벽한 하나님의 컨셉에 완벽하게 합치되는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적극성을 띠는 거예요.
소조의 시간에 조각을 하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문제에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은 소조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린 조각을 하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자!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자식이 가출을 했다 보름 만에 들어왔어요.
정말 미쳐버리겠어요, 그 자식 놈 꼬라지를 보면.
자! 이 시간이 자식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내가 조각을 해 들어가야 될 시간입니까? 아니면 자식이 가출했다 돌아왔다는 이 상황을 소조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린 모르는 거예요, 사업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자식과의 관계 부부와의 관계 모든 인간관계를 내가 지금은 조각을 해 들어가야 되는 것이냐, 이 사람이 잘못했다고 공격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되는 것이냐, 아니면 이 사람의 이 행동, 마치 가롯 유다가 나를 파는 것과 같은 그런 원수의 행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소조의 타이밍으로서 그냥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냐? 아! 알 길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이걸 알아갑니까?
겟세마네기도, 애널리스트의 무덤을 거쳐야 된다는 거예요.
애널리스트가 뭐라 했지요? 문자 그대로는 분석가입니다.
그러나 분석을 왜 합니까? 합당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합당한 구실을 만들려고, 합당한 이유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내 행동의 이유, 명분을 대주기 위해서 애널리스트가 존재하는 거예요.
‘당신이 투자하는 것이 맞다, 이윤을 남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한 분석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자! 내가 엄마입니다.
그러면 엄마라는 신분 때문에 그 아이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우리는 습관적이고 자동적인 명분을 따라 움직여 갑니다.
나는 어느 직장의 과장이다, 그러므로 과장이라는 지위와 신분에 있으려면 거기에 합당하게 이런 행동을 해야 된다.
습관과 관습과 자동적인 체제에 의해서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조각도 하나님의 소조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과 함께 죽으면서…, 무엇에 대해 죽습니까?
내가 지금 현실 속에서 맺고 있는 관계 주로 인간관계, 아니면 돈이 없다든지 하는 이런 상황, 현실관계, 주어진 상황과의 관계, 이 모~든 관계로부터 빠져 나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발가벗고 만나기 이전에 미리 그 관계가 있으면, 그 관계에 의해서 나는 행동할 수밖에 없이 끌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조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소조가 나타날 겨를도 없이 그냥, 이 관계가 하나님을 알몸으로 만나기 이전에 이미 관계되어 있으면,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아빠고 이미 엄마고 이미 아내고 남편이고 이미 어느 회사의 사장이고 어느 회사의 과장이고 하면, 그것이 이미 내 행동을 결정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조각이 나타날 수도, 하나님의 소조를 알아볼 수도 없는 게 돼버려요.
모든 관계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기도하면서,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나는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아내도 남편도 아니고 누구의 자식도 아니고 다~ 이세상이 내게 부여한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립니다.
가난한 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닙니다.
물질과의 관계도 다 끊어버립니다.
예쁜 사람도 아니고 못생긴 사람도 아닙니다.
몸과의 관계, 얼굴과의 관계도 다 끊어버립니다, 못생기면 성형해야 된다고 하는 이상한 행동의 원리가 나타나는 거예요, 거기서.
명분이 주어집니다, 못생긴 얼굴이 명분을 주는 거예요, ‘성형해라’라고.
그러니까 내 얼굴에 대해서조차도 죽는 거예요, 모든 관계가 죽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첫 번째 관계로 맞이합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관계로 맞이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 예상치도 않았던 배부름이에요, 기쁨이고 만족이고 행복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만나야 하나님으로 만난다는 거예요.
그렇게 만나고 나면 조각의 타이밍과 소조의 타이밍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원을 주십니다.
이 소원은 이 세상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모든 관계, 세상에서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세상에서 부여한 지위와 신분을 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하고 알몸으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면,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천국을 느끼게 될 때에 세상에 대한 소원이 없어요.
내가 소원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이 이루고 싶은 소원이 발동하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내 생각 속으로 주어집니다.
바리새인을 볼 때에 주님이 판단하신 판단을 얘기하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어 오셔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갖고 계신 뜻을 전달하신 거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전을 향하여 하고 싶으셨던 그 행동을 주님께서 채찍을 들어 뒤엎으면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 나의 분노가 아니라는 걸.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분노도 어떤 소원도 느끼질 못할 정도로 하나님으로 온~전히 만족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모든 관계를 다 끊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안에 들어오시고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내 마음이 만~족하고 이 세상에서 이룰 게 아무것도 없고 소원도 없는 상태에서 뜻이 생기고 소원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소원이고 조각의 상황이 주어지고…
아~무런 뜻과 아무런 소원과 아무런 계획이 주어지지 않고…
그런데 원수들은 들끓고 있습니다, 이때는 소조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원수들이 나를 죽이려 할지라도 내 마음에 다른 계획과 다른 뜻과 그리고 거기에 따른 능력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을 골조로 삼아서 덧대고 계시는 소조의 시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원수들의 들끓음을 통해서, 아니면 도와주는 사람들의 들끓음을 통해서 뭔가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이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이슬을 맞으며 기도하듯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듯이, 낮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듯이 십자가의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십자가와 주기도를 합쳐서 기도를 드려 보세요.
그렇게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모든 관계가 다 끊어지고 하나님과 온전히 알몸으로 첫 번째 관계로 맞게 되면 하나님께서 안에 들어오셔서 조각을 해 나가시고, 하나님께서 내 바깥의 상황을 인도하시면서 ‘나’라는 사람의 인생에 덧대 가시면서 소조를 해 나가시고, 조각과 소조의 변환이 자유자재로 적합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예술품으로 완성되어 갈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명분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이 중단되게 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을 첫 번째 관계로 맞이하면서 내 안에서 조각하시고 내 밖에서 소조하시는 가운데 내 인생이 하나님의 컨셉에 합치되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