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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獨한 단독자의 土着意識
-李姓敎시인의 시세계
정 일 남 시인
1. 詩의 出發과 鄕土意識
神은 인간에게 鄕愁를 느끼게 하는 인자를 부여 하였다. 이런 현상은 고향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고향을 갖지 못한 遊牧民은 향수를 느끼는 인자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다만 막연한 旅愁에 시달릴 뿐이다. 향수란 집단 마을을 이루고 살아 온 토착민들의 소유물이며 고향을 이탈 해 외지에서 살므로 발생되는 심리작용이기도 하다. 대체로 고향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향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사람들이 아니라 불행 했다든가 궁핍하게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기구한 운명적 경험이 많을수록 향수에 대한 농도는 짙게 마련이다. 그러나 토착의식이란 막연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단순 논리가 아니다. 전통고수라는 명제를 앞세우기 전에 오늘에 있어서 가치관의 혼란과 무분별한 자기도취로 이어지는 현기증을 감당하기 힘들 때 토착의식은 이 시점에서 더욱 필요하다. 고향을 낡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원초적 자기 모습을 찾아봄으로써 잊어버렸던 정서에서 새로운 자기 발견을 가져온다. 막상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찾아 갔을 때 고향은 여러 가지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잡히는 고향은 다르다. 변한 것 보다 변하지 않은 것을 시인은 원한다. 그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품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시인은 고향을 마음속에 더욱 소중하게 감싸 안는다.
우리는 한국 시단에서 고집스럽게 토착정서를 일관되게 천착 해 온 한 시인을 갖고 있다. 그 장본인이 李姓敎시인이다. 그는 시종일관 향토시를 써 왔으며 그의 詩心이 고향을 벗어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생 동안 한결같이 자기 詩學을 천착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집념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토속적 향기가 오늘에 와서 새로운 빛을 발산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가 끄집어 내 보이는 고향의 풍속과 서민들의 삶이 우리들 육체를 한번씩 거쳐 간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교 시인의 고향은 강원도이다. 그럼 강원도의 정서란 어떤 것인가. 북에서 뻗어 내린 태백산맥으로 해서 영동과 영서로 구분 되는 그러한 지리적 환경이다. 정선아리랑으로 대변 되는 정서가 내륙지방의 특성이라면 좁은 해안지방에 형성된 어촌의 정서가 그 두 번째다. 따라서 동백꽃으로 표상 되는 정서가 내륙의 정서라 볼 수 있다면 바닷가에 피는 해당화의 정서가 영동지역을 감싸 온 정서라 할 수 있다. 정선아리랑이 갖는 비애는 단종이 이 지방으로 유배되어 옴으로써 그 비극성이 첨가되기도 했으며 그 정서는 국토로 확장 되었다. 그러나 해당화가 해변에서만 피는 비밀을 알지 못하듯이 이성교의 시의 비밀을 알려면 그의 고향인 月川里로 가보지 않고는 불가능 하다. 다시 말하면 한 시인에 대한 고찰은 시인이 태어난 환경이 갖고 있는 배경에 대한 고찰이 전제 되지 않고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성교 시인의 고향에 대한 고찰은 시인의 시에 대한 비밀을 밝히는데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月川里는 흔히 많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동해안의 작은 마을이다. 통상 다래마을 이라고도 한다. 달이 있는 냇가라 해서 다래마을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포 새장터 쇠송골을 합병하여 월천리라고 하였다. ‘깨끗한 강과 산 나와 함께 맑은데/누대 가는 곳마다 管絃소리 들리네/좋은 말에 고운 계집을 태운 것이 아니면/三韓이 태평하다 누가 말하랴’ 金九容의 시를 읽노라면 이 지방의 무구세계가 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들점심 만드느라 여인은 굶으며/새벽부터 마음은 밭고랑에 있네/한낮이라 서둘러서 밭머리에 갔다가/농사짓는 남편 먹고나면 아양걸음으로 돌아오네’ 安축은 이와 같은 시를 지어 이 고장사람들의 부지런함과 인정의 안온함을 들추어내었다. 반면에 내가 뒤져 본 기록에 의하면 이 고장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의 중요한 역사 현장이었다. 그 하나가 신라 鄕歌에 나오는 ‘獻花歌’의 작품현장이라는 것과 그 둘째가 일제시대에 있었던 ‘임원의 임야 측량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헌화가’에 대해서는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신라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 높은 바위에 피어있는 철쭉꽃을 어느 노인이 꺾어 노래를 지어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의 현장이 명확한 지명으로 나와 있지 않으나 이 고장의 그 어느 곳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기록에 나오는 ‘臨海亭’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금의 臨院과 가까운 곳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신라 때부터 이미 가사를 익혀 온 정서의 고장이라 할만하다. 이와는 반대로 ‘임원의 임야측량사건’은 이 지방 사람들이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임원 농민항쟁은 이렇다. 1913년 4월에 임원 일대의 국유림과 사유림의 경계 측량을 하는데 사유림에 대하여 부당하게 국유지에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일본인 측량기사를 죽인 사건이다. 일본 현병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니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 숨겨진 고장이 ‘헌화가’의 작품현장 일 뿐만 아니라 불의에 항거한 농민항쟁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두개의 역사 성격을 보여준다. 하나는 부드럽고 온화한 꽃의 정서 이고 다른 하나는 거친 바다에서 익혀 온 투쟁심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고향은 강온 양면성을 다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성교 시인은 이런 곳에서 태어났으며 가친이 일본인 교장과 심한 언쟁을 벌인 뒤 초등학교 입학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지는 수모를 당한다. 일본인 교장이 가고 난 다음에야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강릉으로 유학의 길에 오른다. 강릉상고에 재학 중 동인지 ‘山草園’을 프린트판으로 내는데 ‘受驗生’지에 ‘男妹’가 당선되기도 한다. 1956년 ‘현대문학’ 9월호에 ‘輪廻’가 추천 되고 동지 12월호에 ‘혼사’가 추천 되었으며 다음 해 2월호에 ‘노을’이 추천 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 시기에 등단한 시인들로는 黃錦燦 文德守 朴在森 高銀 朴鳳宇 朴成龍 朴龍來 成贊慶 申庚林 등이다.
복사꽃이
빨개지면
누가 꼭 왔다간 것만 같아.
어머니는
웃다가
울다가.
달이 지는 것도
팔자라 하였지
홍도색 시악시야.
말 못하던
그때 일이
샘물 솟듯
푹푹 쏟아지고.
무질래나 있으면
그거나 지근지근
씹어나 보지.
-‘혼사’ 전문
‘姓敎를 보는 것은 솔로몬의 노래로 말하자면 무더운 여름에 향그러이 불어오는 시원스런 바람과 같다고나 할까. 그것도 메마른 데를 부는 바람이 아니라 석류라든지 그런 꽃나무의 열매들도 많이 익고 있는 무성하고 기름진 맑은 항구를 불어 닫는 바람을 보는 것 같다.’
위에 인용한 글은 그의 첫 시집 ‘山吟歌’의 서문을 쓴 未堂의 말이다. 미당이 이성교의 시를 좋게 본 매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자네는 강원도의 세계가 좋아 그걸 꾸준히 갖고 나가면 소설가 이태준 못지않게 이름날 것일세.’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강원도의 세계, 즉 강원도의 정서란 위의 시 ‘혼사’에서 빚어진다. 이 시에서는 복사꽃이 빨개지는 산촌마을이 전개되고 그 복사꽃 울타리 그늘로 누가 몰래 찾아와서 혼담을 주고받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 된다. 이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숨쉬기초차 힘든 두근거림이 된다. 그리고 그 혼담은 다음 날 금방 마을로 퍼져나간다. 이것이 우리 고유의 토착정서가 아닌가 한다. 혼담이 오고 간 마을은 그래서 한 삶이 새로 시작되고 산촌마을을 이끌어 나간다. 오늘의 세대들이 볼 때에는 답답하고 시대착오적인 풍속임이 틀림없으나 홍도처럼 부끄러워했던 여인들의 순박함이 우리 토착정서 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향토색 짙은 시학을 출발부터 이끌어 온 그는 리리시즘의 깃발을 올리기 전에 이미 그의 영혼의 피신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詩의 길은 다른 길과 달라서 자꾸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길이
나설 때는 그것을 위해 전력투구 해야 한다. 자기가 닦은 길에서 새로움을
창조해야 한다. 여기에 그 시인 나름의 독창적인 세계가 있는 것이다.’
萬海 韓龍雲은 황금의 꽃을 찾아 영혼의 끝없는 방황을 하였다. 황금 꽃을 찾아 헤맸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와 부재의 사이를 넘나든 것이 황금의 꽃이었다면 이성교가 찾아낸 황금종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시집 ‘山吟歌’를 세상에 알린 화음이었으며 ‘輪 廻’와 ‘婚事’ 그리고 ‘노을’ 다음에 찾아낸 화음이다. 그러나 그 황금종은 외로웠다. 귀를 모은 사 람은 많지 않았다. 시류에 유행하는 재즈나 팝송에 몰리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독 했는 지 모른다. 황금종은 금으로 만든 종이 아니라 그 소리의 비밀이 금과같이 귀하다는 뜻일까. 그 는 황금종이 울리는 곳에 인정문이 열린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음으로 이 鐘音은 대관령으로 이 어진다.
작년 봄 우리 님이 산을 넘을 제
아흔 아홉 굽이마다 눈물이 서렸나니,
얼켰던 머리카락 눈빛에 새로워라.
소복하고 오실님의 머나먼 구름밭
정왕산에 비만내려 산천만 푸르렀다
해발 八百米. 돌아가면 천리. 올라가면 만리.
봄바다 멀리 산앵두 핀다
내려다보면 어찌도 푸른 짐승이
높디 높은 하늘처럼 둥둥 떠서 놀까.
갈매골의 상가는 비에 그치지 않고
바위 바위마다 피가 맺혀 통곡을 한다.
솔바람에 젊은 가슴도 애타거니
굽이 굽이 몇 천리를 산새는 울고 갔나.
이 산을 다스리느라고
바다는 얼마나 발버둥 쳤을까.
어떤 입술은 피에 젖고
어떤 입술은 불에 그을려
아혼 아홉 굽이마다 새로운 철이 간다.
아 뺨이 달아 .올라라
능경산의 보드라운 싸리밭
횡계벌의 물은 맑아, 우리 님의 오실 날이나
눈이나 쏟아지지.
에헤야 데이야, 바다로 흐르는 楸木.
봄은 오고, 여름은 가고
가을은 오고, 겨울은 가고
풋풋한 감자 내음만
초막골을 풍긴다.
고루쇠, 들미, 박달, 가래, 물버들, 참나무......
이렇게 한 조상이 살다가면 얼마나 세월이 바뀔까.
미당님 도포자락도
나의 그늘이 되어
가슴만 가슴만 불타 오른다.
종은 울어라. 이 산이 다하는 날까지 종이여 울어라.
점텃골의 피뿌린 자국만 높고
기우제의 뿌린밥도 비에 젖는다.
약천 삼포암에 흐르는 물. 그 물을 먹고
우리는 자랐거니, 벗꽃, 매자꽃, 함박꽃, 진딜래꽃,
동백꽃- 아흔 아홉 굽이마다 핀다.
선자령을 따라서 국수당에 오르면
피에 젖은 옷 조각. 마르지 않는 눈물.
귀신나무 소나무만 애처러이 자랐거니
목이 말라도 목이 말라도 이 산을 부르면
눈앞엔 시원한 海圖가 열린다.
-‘대관령을 넘으며’ 전문
이성교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대표작인 ‘대관령을 넘으며’를 분석 해 보지 않고는 불가능 하다. 그는 ‘대관령을 넘으며’ 속에 그의 정서와 사상과 미래에 전개 될 詩의 판도를 그려 놓았다.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애수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소월의 민요풍을 답습한 것은 물론 아 니다. 音律에 있어서 호흡이 긴 편이며 톤이 굵다. 눈물과 한에 있어서도 님 하나에 의존하고 있 는 것 같지만 실은 거기엔 복수를 이루는 숱한 조상들과 비극적 역사가 얼비친다. 그렇다고 목 월의 세계에 가깝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목월의 완만한 남도 길의 정서인 ‘경상도의 가랑잎’ 과 도 다르며 음악적인 효과와 토속적인 소재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하나 목월의 초기에 드러난 동요풍의 시와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물론 미당의 동양적 향기에 빠져들긴 했으나 악마주의적 인 냄새가 없었으며 禪적인 정서와는 무관했다. 이렇게 볼 때 미당과 素月과 木月의 개성과 특 색을 조금씩 다 수용 했으면서도 독특한 강원도의 특색을 강조하는데 남달랐다. 이것은 강원도 적 현실을 투시하는 토착의식과 전통의식이 소박한 정서의 美學으로 주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교는 대관령이라는 상징적 대상을 통해서 역사 현실까지 드러내 준다. 정왕산에 내리는 비, 갈매골의 喪家, 능경산의 싸리밭, 횡계벌의 청수, 초막골의 감자 냄새, 점터골의 피뿌린 자국, 삼포암의 약수, 선자령의 피에 젖은 옷조각, 그리고 고루쇠, 들미, 박달, 가래, 물버들, 참나무, 귀신나무, 소나무 등을 통해서 대관령의 지리적 분포도를 펼치고 그 잡목 숲에서 종이여 울어라, 고 외친다. 그의 지루하고 괴로웠던 긴 나날이 비로소 시원한 해도를 열게 만든다. 그의 관점은 대관령을 넘으며 통곡과 발버둥으로 이어지는 감동이며 향토적 승화의 심상이다. 이 시의 비극성은 6. 25 동란에 의한 동족의 참상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지만 멀리 고려로 거슬러 올라 몽고의 침입에 의한 항전지로서의 역사적 비극성도 내포 된 것 같다. 그의 토착의식은 그 뿌리가 역사의식에 깊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향토적인 정서를 끌어냄으로써 현대성에 향토성의 옷을 입 히려고 했다. 이것은 전통을 근저에 뿌리박은 다음에야 현대성을 수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결국 그의 의지는 눈물 고통 발버둥에서 그치지 않고 종의 울림을 통해서 비로소 열린 바다에 이른다. 그의 노래는 노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고향을 어떤 방식으로 보존 계승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이 대표작 ‘대관령을 넘으며’의 표상이다. 따라서 ‘산음가’의 세계는 대관령을 통해서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강원도의 정서이며 그 여음은 아흔 아홉 굽이를 통해서 확장 된다.
아아 내 가슴에 / 떨어진 流星아./ 밤비는 / 너의 울음이 었다. / 땅이 움직
여도 / 산에 돌이 떨어져도 / 네가 온통 / 이 세상에 / 많은 것 같구나. /
내 가슴에 / 묻혀 있는 / 너의 무덤에 / 해마다 무슨 꽃으로 / 피워주련./
술을 먹어도 / 술을 먹어도 / 취하지 않는 밤./ 밤비는 한잔 술에 운다./
아빠가 태워준 / 창경원의 비행기 / 이 밤에도 찬비 맞고 / 빙빙 돌겠지. /
이제와 / 머리에 뒷짐인 / 옛날을 말하지 않으련다. / 멀리 흰 나비 한마리 /
훨훨 강을 / 건너고 있는데 / 이리도 내 가슴에 /천둥이 치랴.
-‘밤비’1 전문
시인은 추적 추적 내리는 밤비 소리를 들으며 죽은 딸아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밤에 시인은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늘의 유성이 떨어져서 가슴에 박힌다. 밤비 오는 소리가 딸의 울음소리로 들린다. 그러니까 밤비는 딸아이의 눈물일 수밖에 없다.
2. 土俗的 울림의 파장
그가 두번 째로 들고 나온 시집이 ‘겨울바다’다.
하루 종일 / 바다를 바라보면 / 눈맞는 이가 / 또 있을까 / 어쩌다 뭍으로
나온 / 파아란 선 위에 / 하얀 물거품이 인다 / 날마다 수천 마리의 / 양떼
를 몰고 온 바다 / 후미진 마을마다 / 밀선이 닿는데 / 눈을 들면 / 눈이 멎
어 오고 / 손을 들면 / 손이 젖어 온다 / 이젠 아픈 머리도 / 저절로 쑤욱
들어 갔는지 / 저 바위를 / 돌아 나가면 / 수없이 안개는 피는데 / 포구마
다 / 게딱지처럼 / 반짝이는 눈 / 물 위엔 / 숱한 길이 / 흩어지고 / 해파리
는 / 고향에 가곺아 / 몸을 일렁이고 있다.
-해안선[3] 전문
그가 바라보는 바다는 여름 해수욕장으로 붐비는 바다가 아니다. 그럼 어떤 바다인가. 그는 겨울바다의 포구를 택했다. 그리고 해안선이 이어진 육지와의 경계선에서 게딱지나 해파리의 운명까지 걱정하는 괴로움에 빠진다. 이성교의 바다는 메이스필드나 헤밍웨이가 겪었던 바다와는 다르다. 메이스필드가 실제로 선원이 되어 바다를 떠돌면서 읊었던 해양시와는 다르며 헤밍웨이처럼 바다를 도전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바다는 어머니의 손끝에서 움직이던 요지경과 같은 바다로 다가온다. 날마다 빛이 바뀌고 색갈이 변하는 바다였으며 水路夫人이 생일날이면 찾아오는 바다인 것이다. 그리고 사둔 댁 양미리가 푸석 푸석 익어가는 바다며 날마다 수천 마리의 양떼를 몰고 오는 바다로 변한다. 그는 하루 종일 바다를 보는데 하품이 났지만 그저 보기엔 그렇지 않아도 속으로 뒤틀리는 살 속으로 바다는 한시도 속편할 날이 없다고 규정지었다. 다시 정리 해 보면 그가 ‘山吟歌’에서 황금종을 통하여 토속적 정서를 울림의 파장을 통해 전달 했다면 ‘겨울바다’에서는 수로부인이 끌려 들어간 심해의 공간을 보여주기도 하며 어부들이 넘나들던 수평선 너머의 공간까지 제시하면서 어촌 사람들이 이끌어 온 정서를 노래하였다. 그는 고향을 해안에 두었기 때문에 바다와 내륙을 넘나들며 자유로이 시의 세계를 넓힐 수 있었다고 본다.
제3시집 ‘보리필 무렵’으로 가볼 차례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 산골짜기에 / 물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 산천에 버려
진 유리조각에도 / 새 빛이 돋아 / 가슴은 마냥 환해진다. / 그러니까 / 아예
성과 이름을 묻지 말자. / 꽃잎처럼 피었다 / 풀꽃처럼 진다해도 / 마음에
이는 불길은 / 끄 수 없다. / 어쩌다 서로 만나 / 이야기 해 보면 / 어느 샌
가 눈이 멀어진다. / 잔잔한 봄물 속에 / 어른거리는 얼굴들. / 아무리 고집이
세다 해도 / 지남철의 인력은 / 도시 당할 수가 없다.
-‘고향 사람들’ 전문
인간의 마음을 끄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바다 쪽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학식이 없고 모양을 낼 줄도 모르지만 그래서 마음이 더 끌리는 법이다. 무슨 실수를 해도 욕될게 없으며 부담도 갖지 않는다. 상대편의 마음을 환히 드려다 보기 때문에 만나면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들린다. 그러니까 아예 姓과 이름을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쩌다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눈이 멀어진다고 했다. 아무리 고집이 센 사람이라 해도 끌리는 마음은 지남철과 같다고 했다. 이 시인의 표현이 이 땅을 붙든 향토의식의 기저가 아닌가 여겨진다.
궁기에서 그는 봄의 해는 속도가 느리다고 했다. 그만치 배를 채울게 없었던 까닭이지만 칡 파러 간 임자는 오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춘궁기가 보리고개 임은 물론이다. 여기서 시인은 고향의 궁핍했던 시절을 떠올리지만 오늘의 세대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는 햇비에서 몸에서는 스멀거리던 氣가 없어지고 천지엔 금싸라기가 쏟아진다고 했으며 답답한 가슴엔 샘물이 터지고 발끝에서 땅소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고향 사투리에서는 멍든 가슴으로 살았다 해도 순희의 사랑은 잊을 수 없다고 진술한다. 그것도 사투리로 말이다. 그런가 하면 東海線에서는 차가 머무는 곳마다 정을 익힌 사투리가 보따리에서 쏟아진다고 했으며 가을 운동회에서는 연신 터지는 출발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한편 水流作用에서는 한번 물줄기가 돌아 나가면 물빛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한다. 물결의 인상에서 때로는 눈앞까지 밀려 왔다가 먼 설법으로 다시 사라지는 물결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溪谷에서는 눈을 들어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이상한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감지한다. 瑞氣에서 간밤에 불은 물결로 까치소리가 달라졌다고 기뻐한다. 봄 산에서는 깊이 숨었던 요정들도 한꺼번에 몰려와 무엇을 논의 한다고 귀를 기우리기도 하며 樹木 아래에서는 한 오라기의 색실을 누가 매듭짓고 갔느냐고 야속해 하기도 한다. 이상 대충 살펴 본 것이 ‘보리필 무렵’의 작품 공간이다. 이 시집에 암시된 시의 세계는 시집 후기에 쓴 다음의 글이 대변 해 준다. 내가 부른 고향의 노래가 남 보기에 낡았든, 새롭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노래는 곧 내 성장의 노래였으니까. 그것은 이미 ‘山吟歌’와 ‘겨울바다’에서 나타난 바 있다. 이번에 내는 ‘보리필 무렵’도 역시 그 세계의 연장이라 하겠다. 앞으로도 이 길을 꾸준히 걸어갈 작정이다. 좀 더 안으로 익히면서 말이다.
댓잎이 소슬대는 마당가에
우리들의 살갗은
돋치고 있었다.
담 밑에 피어있는 맨드라미도
썰렁한 햇볕을 받고 있었다.
어른들이 자리를
비운 뒤가
비로소 우리들의 차지였다.
우리들은 실과랑, 떡이랑, 고기가
담겨 있는 木器 앞에서
국수 그릇을 게눈감추듯
비워 버렸다.
너무 목기그릇이 얕았다.
-‘木器 앞에서’ 전문
제4시집 ‘눈 온 날 저녁’의 깊이를 파헤쳐본다. 이 시집에는 일부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이 비치기는 하지만 대체로 산촌 마을의 이모저모와 거기서 뿌리박고 살아가는 삶들의 과거와 현재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 그는 산비는 온 몸을 떨면서 내린다고 했으며 후두둑 후두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죽었던 신령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제시 하였다. 과연 신령들은 추적추적 비오는 날에 나타난다고 조상들은 믿었다. 그러니까 시인은 그 조상들의 신앙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전통의 맥은 이어진다. 고추밭에서는 잠자리가 빨간 물감을 나르고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발상은 고추잠자리의 계절이 스쳐가지 않고는 고추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일깨워 준다. 나의 집에서는 이대로 쭉 가면 또 다른 세상이 나올까, 를 근심하며 강물이 다하는 곳에 또 다른 나의 집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막연한 기대를 해보게 된다. 이건 실제로 집이 없을 경우와 집이 있다 해도 또 다른 마음속 이상세계를 상정할 수도 있다. 伯父님에서는 조상 묘를 지킨 눈매로 말씀은 여름 바람이었다, 라고 여기기도 한다. 李慶光씨 댁에서는 법이 없어도 살집이라 했으며 오후만 되면 그 집 뜨락엔 비둘기 손님들이 와있다고 전한다. 木器 앞에서 바라본 그의 관찰은 우리 고유의 정신 같은 것을 잘 담아 주었다. 잔칫날의 정성어린 음식을 담았던 木器는 오늘에 와서 거의 도태되고 말았다. 이처럼 잊혀 져 가는 유물을 우리 앞에 펼쳐 보임으로써 과거를 기억하게 만든다. 어른들이 자리를 비운 뒤에 비로소 아이들이 차지했다는 예절은 풍속과도 통했다. 그런 풍속이 오늘에 와서 단절된 상태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써 안타까워한다. 이상 살펴본 것과 같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제4시집의 성격은 기존의 시집들과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기존의 시집을 바탕으로 한 전통의 깊이와 그 정서의 확장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나 희망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이성교 시인의 진술대로 ‘강원도의 토속적인 세계에다 신앙세계를 하나 더 했다.’는데 있을 것이다. 동양적 서정에 기독교적 사랑의 빛이 더했다는 것은 그의 시집‘南行 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온몸에 흠뿍 배인 땀방울도
어쩌면 그리 시원한지
속에서 마구 샘물이 솟았다.
할델루야.
어둡던 애급의 동굴도
환히 빛을 받았다.
-‘새 하늘이 열리던 날’ 일부
당신과 나와는
어차피 하늘에서 만날
운명 이지요.
-‘임의 환상’ 일부
이젠 다시 놓치지 않을
그 임을 잡고
온갖 푸념을 늘어 놓으리
안방이고 골방이고
어디고 다 들어가서
그 임을 증거하리.
-‘기도원에서’ 일부
온 천정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어서 기어나와 강복하라고
기도 하라고......
-‘새 아침에’ 일부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종교에 心身을 바치게 되는 경우는 개별마다 결정적인 동기가 있을 것이다. 이성교 시인의 경우는 그가 열아홉 살 나던 해 어머니를 사별한 후에 비로소 교회로 나간 것 같다. 어머니가 생전에 교회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고 했으나 미쳐 깨닫지 못하다가 어머니를 보낸 후에 마음을 굳힌듯 하며 196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딸 선미를 잃고 난 후에 그의 신앙심은 더욱 굳어졌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신앙심이 그의 詩를 위축시킨다. 거나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토속정서에 ‘이상한 빛’을 더해 주었다. 그의 전통사상에 어떤 변화가 온 것은 아니며 현실인식에 있어서 절망과 좌절을 밀쳐내고 봉사와 사랑으로 고통의 현실을 극복 해나가는 힘을 갖는다. 그래서 종전의 눈물과 탄식은 많이 사그라지고 詩의 도처에 ‘이상한 빛’이 어른거리며 그 빛이 시인의 생활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준다.
상여를 놓고
그렇게 울던 곳
그곳엔 이상한 빛이 서려 있었다.
-‘비오는 날’[1] 일부
무시로 오는 계절에
해와 달이 뜨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살림을
가꾸어 갔으니
아, 이 땅엔 빛이 넘쳐라.
빛이 넘쳐라.
-‘삼천리엔’ 일부
까막까치 우짖는 숲 너머로
이상한 빛이 마구 열려오네.
-‘正初에’ 일부
여기서 ‘이상한 빛’은 이성교 시인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빛이다. 그 알듯 말듯 한 신비의 빛이 시인을 늙지 않게 만들며 詩를 빚는데 힘이 되어준다. 그래서 그는 詩를 쓰는데 스스로 즐겁기만 하다고 진술한다. 시집 ‘南行 길’은 그래서 고단한 길이 아니며 온갖 이름 모를 꽃과 까치와 마을 형제들의 사투리가 마구 쏟아지는 人情의 길로 통한다. 그는 큰 산을 노래하되 낮이면 낮대로 표정을 짓고 밤이면 밤대로 침묵을 치켰다고 했다. 봄춤에서는 아직도 봄춤은 산협에 더 많이 남아있는데 벌써 하늘이 노랗다고 했으며 신들린 사람들이 막판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노래한다. 동짓달에서는 골말 순이네 잔칫날은 아직 멀었는데 가슴은 왜 그리 설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영둥날 지난 후에는 물 냄새에 취해 고개를 들면 산 밑에서는 소죽 쑤는 연기가 났으며 먼 다리 밑에 못자리 풀짐이 바람에 실려 가는 것을 지켜보기도 한다. 다시 마을에 돌아와 이상한 바람이 불어 온 마을이 술렁거리는 것을 보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나 너는 어쩌면 그리 양심도 없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안개꽃을 보면서 뻐꾸기 소리를 듣는데 박달나무 골짜기에서 너는 얼마나 울었느냐고 물어본다. 그는 또 갈령재에 가서 옛날 꽃문둥이가 득실거리던 전설을 들추어내고 눈이 가지런히 차오르는 봉우리마다 조상들의 뼈가 묻혀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다시 임원바다에 돌아와서는 깊은 물속에 해초가 나울거려도 물빛을 알고 갈매기가 울어도 바다의 움직임을 그는 알아낸다. 그가 이렇게 길을 걷다가 이른 청령포에서는 그리운 이름을 불렀지만 모두 다 벼랑으로 떨어졌다고 탄식을 하고 원망스러운 왕의 이름이여, 라고 비극의 역사를 뒤돌아보기도 했다. 이렇게 남행길은 이어지면서 가는 사람은 가고 오는 사람은 또 온다고 술회한다. 그가 가는 길은 누구든지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고 가는 길이다. 눈을 감고 가도 훤하게 가름할 수 있는 길이 그의 길이다. 그는 바위 위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갈 사람이 아니다. 한없이 흰 구름이 일고 있는 길을 눈을 감고 그는 가고 있다.
이젠 다시 ‘강원도의 바람’을 맞이해야 할 차례다.
3. 강원도의 바람과 詩의 향기
'여기까지 오는데는 나는 처음 마음 먹은대로 시는 노래 되어야 한다는 명
제를 잊지 않았다. 따라서 시어의 세련미, 섬명한 이미지 부각, 표현에 있어
서 조화 된 가락 등은 한번도 늦추어 본 적이 없다. 이제 나는 처음 마음 먹
었던 그 정신대로 방황하지 않고 강원도 생활이라는 무대를 대 전제로 하여
산골이든 어촌이든 가리지 않고 폭넓게 전통정신을 노래하련다.'
-‘요지음 내가 생각하는 詩’ 중에서
시집 ‘강원도 바람’의 세계는 ‘南行 길’에서 돌아와 자연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다. 고향을 노래하는 즐거움이 詩속에 있으며 고향 인사들과의 경험을 노래함으로써 자연에 빠져든다. 여기서 하나 명기할 사실은 시인이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 되었다는 사실이며 그 오래된 옛 기억을 어떻게 그처럼 재생시킬 수 있느냐,하는 점이다. 이성교는 서울에 살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시의 복잡한 생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詩心이 고향에 가 있을 수 있느냐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몸은 서울에 있고 마음은 고향에 가 있는 것이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는 雲霧 속의 고향을 도시에서 살며 천착한다는 것은 어떤 집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넘보기 어렵다. 그의 주변에서 괴롭혀 온 새로운 모델과 첨단사상이 그의 앞에서는 현실적으로 아무 값어치가 없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처럼 고집스러운 강원도의 바람을 불어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목월이나 미당의 시가 단계적으로 변화의 과정을 밟고 있었음에 비추어 볼 때 이성교의 오솔길은 고독했으며 앞으로도 이 고독의 길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강산에 불밝힌 역사.
항상 강원도는 고운 햇살이 내려
마음이 훈훈했다.
무시로 오는 계절에
해와 달이 뜨고.
그리운 사람들 마음속엔
무엇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뚝밭의 허수아비도
태평세월을 만난 양 허허 웃고 있다.
이제는 아쉬운 마음을 훌훌 털고
잠자리처럼 허공을 날아볼꺼나.
아, 풍요로운 그 들판
그곳에 내 사랑이 피어났었다
그곳에 내 눈물이 열렸었다.
-‘강원도 바람’1 전문
강원도의 바람은 경상도나 전라도의 바람과는 다르다. 강나루를 건너서 구름에 달이 가듯이 스쳐가는 것이 경상도의 바람이라면 전라도의 바람은 그 8활이 미당을 키워준 바람이다. 그렇다면 이성교의 바람, 즉 강원도의 바람은 이성교의 정신을 강원도 안에 묶어놓는 바람이다. 그러니까 이성교의 바람은 강원도를 떠나지 않고 강원도에서만 맴도는 바람이다. 때문에 그 바람은 맑고 싱싱하다. 이른 봄에 동백꽃을 피우게 한다. 감자밭에서 감자꽃을 피우기도 하고 바닷가에서는 오징어나 미역을 말리기도 한다. 이런 바람을 결집해 묶은 것이 시집 ‘강원도의 바람‘이다. 박월리 바람도 강원도의 바람이다. 강릉의 박월리에 모인 바람은 그리운 사람의 살섞인 바람이다. 그러니까 그 바람의 냄새를 맡으면 그리운 사람의 살 냄새가 나게 되어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박월리 사람들은 그래서 외로움을 모르고 산다는 뜻일까. 또 月川江邊엔 어떤 바람이 모여 있는가를 살펴보자. ‘설 지나온 냇물엔 / 한참 음모가 일고 있다./ 그것은 물에 부는 바람으로도 / 그 기미를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깊은 물에 부는 바람이 월천리의 바람이 틀림없는데 그 월천강변엔 그 바람으로 해서 어지러운 혼들이 다 어디로 가고 만 것이다. 그래서 꽹가리 소리가 들리고 잔치가 벌어지며 옛날의 사머리도 잔치에 초대하라고 분부를 내린다.
그런데 이 강원도의 바람이 199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 년 동안 머물다 돌아온다. 여기서 얻은 것이 ‘廣島戀歌’ 연작 10편이다. 이성교는 거기서 우리 동포들의 영혼을 생각하며 바닷가에 가서 격한 울음이 되고 광동교회에서 고려 북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기서 광동연가는 제국주의의 전쟁 도발상을 징계하기 보다는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동포들의 희생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연민의 눈으로 관찰하면서 강원도의 따뜻한 온기로 감싸 안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그의 최근의 시집 ‘東海岸’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素月이 그의 고향을 詩로 쓰면서 영변 곽산 삭주 구성 약산 삼수갑산 등의 지명을 詩속에 수용 했다는 것은 그만치 고향에 애착심을 갖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성교 또한 장호 초곡 용화 작진 호산 월천 고포 나곡 부구 죽변 등의 고유지명을 수용함으로써 토착정서의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런 면에서 이성교는 素月과의 맥을 같이했다고 조심스럽게 중얼거려 본다. 위의 지명들은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고만 고만하게 분포되어 있다.
억지로 눈을 돌려도
피어오르는 바다
애바위는 한송이 꽃이었다.
얼마나 비바람 속에서 울었길래
얼굴이 거멓게 되었는가.
사시장철 파도로 하소연 하는 말
‘보고 싶다’
바람은 불지 않아도
늘 애처로운 말은
가슴에 붙어있다.
마을에는 큰 액땜이 없는데도
흰 旗가 날리고 있다.
-‘新南의 悲話’1 전문
이 ‘신남의 비화’에는 애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옛날 조선왕조 시대 임진왜란의 병화가 할퀴고 간 뒤의 일이다. 궁벽한 어촌 마을은 굶주림으로 가득 찼다. 이 마을 아름다운 처녀가 같은 마을 총각을 사모하고 있었다. 어느 날 처녀는 총각에게 ‘애바위’에 미역 따러 가겠으니 배로 실어줄 것을 부탁했다. 애바위에서 미역을 딴 처녀는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를 갖고 와야 할 총각이 오지 못했으므로 그만 파도가 휩쓸고 가버렸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총각의 꿈에 처녀가 나타나 원혼을 달래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총각은 나무로 男根을 깎아 매달고 위령제를 올렸다. 다음 날부터 신기하게도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일화이다. 시인은 이처럼 먼 옛날의 전설을 詩로 美化함으로써 素月이 ‘접동새’에서 보여주었던 비극성을 전해주고 있다. 이 해신당의 전설이야 말로 어부들이 흉어기에 겪었던 고통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움을 더해준다. 이처럼 바다와 운명을 같이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애환이 시집 ‘東海안’에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해질녘 수수밭에서도 비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큰 홍수가 지난 뒤에 저 바다로 떠내려간 영혼들을 시인은 보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부구리 별곡에서도 울 할머니 울 어머니 살림 다 뺏기고 벼랑 끝에서 한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는 비화리 누님을 생각하며 하는 말이 왜 하필이면 그곳으로 시집가서 목말라 하느냐고 원망을 한다. 여기서 시집간 누님의 궁핍한 생활을 시인은 어쪄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탄식만을 하지는 않는다. 어촌 크리스마스에서는 한결 환한 얼굴이다. 그 노여운 바다도 이날만은 잔잔한 목소리로 간구한 탓이라고 여긴다. 동해안 사람들은 많은 곡절을 겪었으나 어촌 마을을 버리지 않고 이끌어 왔다.
4. 傳統情緖의 천착과 그 結實
지금까지 이성교 시인의 전반적인 작품집을 미비하나마 훑어 본 셈이다. 한국적 전통 리리시즘이 그 계보를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으로 이어지며 그 다음으로 이성교 이동주 박재삼으로 맥을 이어 왔다. 이들 시인들은 대개 한국적 정서와 풍속, 윤리와 신앙을 중요시 했으며 회고적 취미와 자연에의 도취 내지는 토속어의 애용 등으로 독특한 정서를 詩속에 담았다. 그들은 외래사조와 어지러운 사상의 혼돈 속에서 시류에 물들지 않고 일관되게 한국적 정서에 몰입 해 왔다. 그들은 일각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현실을 외면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문제시의 위기를 운운하는 마당에 전통 리리시즘은 되살릴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교의 시는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성교가 주로 애용하고 즐겨 표현 해 온 것은 토착정서에 회고적 취미를 수반한 서민들의 삶과 풍속을 밀착 된 언어를 통해서 詩의 꽃을 발산 시켰다. 그의 향토색은 강원도라는 특수지역을 택했으며 강원도의 내륙과 동해의 해변지방을 폭넓게 수용 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세계의 확장이었으며 내륙과 바다의 경계선을 詩의 중심부에 두었다. 때문에 수로부인이 끌려갔던 심해의 공간도 이성교의 영역 안에 있었으며 대관령과 갈령치를 통해서 외부세계와 닿아있다. 무엇보다 대관령은 강원도의 토착정서가 한국적 정서로 확장 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말하자면 강원도의 정서를 보는 것은 한국적 정서의 원형을 보는 것과 같다. 이성교의 시는 초기에 소월의 민요풍이 비치기도 했으나 임에 대한 원망과 연민의 슬픔이 아니었으며 속에서 울고 밖으로는 그것을 감추려는 경우와도 달랐다. 그는 눈물에 젖어있는 상태가 아니며 비록 원망스러운 세월이라 할지라도 세월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여유를 갖었다. 그래서 鐘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눈앞에 일망무제의 海圖가 열리기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소월이 고향이 부르는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가는 경우와도 달랐다. 이성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에서 더욱 고향을 감싸 안는 집착을 보인다. 이성교는 소월처럼 임 하나에 빠져들지 않았고 그가 바라 본 만상이 임이 될 수 있었으며 그래서 한과 눈물의 감정을 여과 순화시켜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한 마음을 갖게 할뿐 헤어날 수 없는 비애의 늪에 빠져들게 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소월과 다른 점이다.
이성교는 거울과 같이 맑은 이미지의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였다. 향토의 풍물 내지 서민들의 삶과 배경을 시로 묘사하는 데는 윤선도의 서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동해와 남해라는 지리적 차이는 있었으나 새로운 자기 언어로 독창적인 美를 자연에서 찾은 윤선도의 시학이 그것이다. 고기잡이 떠나는 광경을 동양화처럼 그린 묘사라든가 여름 숲의 뻐꾸기와 푸른 숲을 조화롭게 다룬 면이 그의 예이다. 아무튼 윤선도와의 대비 관계는 연구과제로 남는다. 다시 되풀이 하거니와 이성교의 시는 소월처럼 눈물의 詩學이 아니었으며 목월처럼 평탄한 남도 길의 정서도 아니었다. 미당의 동양적 향기에 젖어들긴 했으나 악마주의 적인 냄새도 없었으며 그중에도 김영랑의 음악적 요소에서 시의 음률의 틀을 짜는데 영향을 받은 듯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이성교의 시는 미당과 소월과 목월의 각기 다른 개성을 조금씩 수용 했다고 보며 그 토대 위에서 강원도의 독특한 특색을 드러내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것은 강원도라는 특성 때문에 그의 시가 한결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성교 시인은 현대에 살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인간이 도시에서 살아가는데 온갖 악조건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하나 둘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려고 하며 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이성교 시인의 토착의식은 이미 한발 앞서 우리들 눈을 뜨게 해 주었으며 은연중에 그런 역할을 해 왔다. 시인의 고향 월천리에는 지금도 쪽빛 바다가 그림처럼 열려있고 봄이면 갈령재에 철쭉꽃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끝)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일남 선배님의척이 낳은 시인 이성교박사님의 시세계<孤獨한 단독자의 土着意識>를 잘 읽었습니다. 주제를 정히 잡은 것에 동감합니다.척 태생인 정일남 선배님이 아니면 쓰기 어려운 ' 詩의 出發과 鄕土意識'을 비롯하여 시집 전체의 흐름을 분석하고 맥락과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열정, 박목월과 김소월과 서정주와 박재과 고산 윤선도와의 비교를 통하여 이끌어 나간 박식한 입심 또한 대단합니다. 연세 많으신 문학 선배님의 척 사랑과 열정에 를 보냅니다. 이성교 선배님의 시를 다시 한번 공부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늘 좋은 날 되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교장선생, 별일 없으시지요. 벚꽃이랑 모란꽃이 봄비에 지고 이제 모란이 필 차례지요. 4월이 갑니다. 곧 장미도 필겝니다.
부디 후학들 잘 키워주시길 바랍니다. 언제 산정님과 갈겁니다. 건강하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