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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로 하신 이유 /마13:1-17 /20220109낮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7가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에 대한 비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3-9절에서, 씨 뿌리는 비유 즉 네 가지 밭에 대한 비유
31-32절, 겨자씨 비유
33절, 누룩 비유
36-43절, 가라지 비유
44절부터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1)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비유
2)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
3) 그물 비유
이 7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중에 오늘 본문은 4가지 밭에 씨를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18절부터 23절까지는 이 비유에 대하여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하신 말씀입니다.
3-8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아마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이라면 이 본문으로 말씀을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시며, 10절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시나이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11절에서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 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왜요?
이유가 무엇이랍니까?
14-15절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11절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듣도록 비유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님이 비유를 드신 것이 ‘예를 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이 드는 비유는 예를 드는 것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자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비유를 드신 것은 목사들이 드는 비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비유는 알기 쉽게 하려고 드는 비유입니다.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비밀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감추려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목사들이 드는 비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계시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깊이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비유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하는 설명이고 수단입니다.
오늘 본문의 30배 60배 100배의 말씀도 대부분 성장의 과정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이 비유는 성장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11-17절을 잘 보시면 이 비유는 하나님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감추시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11절을 보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 되었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종류, 즉 ‘너희’와 ‘그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너희’와 ‘그들’은 누구입니까?
1차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너희’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면 ‘너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일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성령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처럼 설교자들이 적절한 예화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주변에서 익숙하게 알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쉽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굽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듣고도 마음을 닫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기적과 이적을 보아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으려고 들은 게 아닙니다.
알고자 들은 게 아닙니다.
어떻게 라도 예수님의 흠을 찾고, 트집을 잡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들에게는 천국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들리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알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믿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하신다는 겁니다.
알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믿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을 거부하는 완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려서부터 종교 훈련을 다 받으며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메시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다 배우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기심과 잘못 된 메시아 관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수없는 표적들을 보고도 믿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들에게는 더욱더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닫아두신다는 겁니다.
14-17절을 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 하였느니라”
이미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바라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표적을 보아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11절을 통하여 주님은 비유 자체가 ‘천국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비밀’인 비유를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께 자신을 나타내시려는 그 뜻이 그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도 신앙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골1:27).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구세주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나라의 열쇠십니다.
죄 사함 받는 능력이요.
우리의 구주시오.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의 축복이요, 아버지의 기업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비밀을 아무리 알려줘도 모릅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헌신도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한 사람은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하소서” 하지만, 한 사람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고 합니다.
교회를 수 십 년 다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심을 모르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유를 비밀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이치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옥토에 떨어진 씨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또 돌밭에 떨어진 씨는 자라다가 썩어진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여기서 비유를 하나의 이치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닫힌 사람은 길가에 떨어진 씨로 새가 와서 먹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아무 능력이 없게 됩니다.
이들은 이치를 깨닫는 자들이고,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깨닫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선지자들이 보고자하고, 듣고자 한 그 비밀을 주님께서 너희들에게만 허락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복이 있다고 합니까?
“보고 듣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듣고 누구를 보았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듣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비밀의 중심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비밀의 내용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비유의 중심이 예수 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옥토란, 날 때부터 마음이 착한 사람을 옥토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내 주님이라고 아는 사람이 옥토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치로는 모릅니다.
논리로는 모릅니다.
율법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오히려 율법 때문에 더 모릅니다.
율법으로 마음이 굳어져서 그렇습니다.
오직, 옥토란 ‘예수가 내 주님’이라고 아는 사람이 옥토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예수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땅이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보고자 해도 보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아는 자 만이 예수님을 볼 수가 있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선지자들이 기다리고 고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니”라고 하여, 그 이후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직접 예언 하셨고 그 이후에는 성령이 예언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예언자로서는 요한이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요한까지입니까?
이는 그들이 기다리고, 보려고 했던 예수님을 요한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도 예수님에게 침례 주었지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에게는 그 비밀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요한이 죽은 다음에야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예언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 가운데서는 단 한마디도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 없습니다.
모두가 죽는 데 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현상유지는 할 수 있으나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게 끝입니다.
결국 그들은 죽어야 할 자를 보았지만, 죽는 길은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어 했지만 정작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자는 복되고, 듣는 자가 복된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죽을 때에 죄인이 죽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메시아가 죽는 것으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들은 길바닥 같은 굳어진 밭이라 들어도 들리지를 않는 겁니다.
가시밭과 같아서 씨를 뿌려도 자라나지를 못합니다.
예수를 모르면, 이 비밀을 모르면 아무리 들어도 모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모릅니다.
배웠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아는 게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는 옵니다.
예배는 드립니다.
그러나 말씀이 안 들립니다.
재미난 얘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나 찬송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가 긴 게 싫습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 그냥 형식적인 예배나 드리자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도 계속 따집니다.
이치적으로, 논리적으로, 계산적으로, 따지고, 항변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땅이라는 것은, 주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선지자들이 보려고 해도 보지 못했던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그분이 왜 죽으셨는가를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다시 오실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정말로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열심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성경을 읽지 말라고 해도 읽습니다.
요한복음 14장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지킵니다.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합니다.
기도생활을 합니다.
헌신을 합니다.
예수를 어떻게 압니까?
예수를 알게 하심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믿어지질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 예수를 구하는 겁니다.
그분의 말씀을 구하시고
그분의 영을 구하시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때
누가 역사하십니까?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예수를 알게 하고, 믿게 하고, 전하게 하시는 성령님이 예수를 구할 때 역사하시는 줄을 믿으시고,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찬양하며 예수님을 구 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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