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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고 했을까
최후의 만찬.
그 와중에도 예수는 ‘마지막’을 예견했다. 제자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를 향해
시시각각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 사도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최후의 만찬’은
말 그대로 마지막 식사였다. 예수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예루살렘 성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성의 맞은편 올리브산으로 갔다. 올리브 기름을 짜는 방앗간이 있던 겟세마
네에서 피가 배인 땀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 ‘최후의 만찬’을 했던 밤과 ‘겟세마네의 밤’은
같은 날 밤이었다. 그 밤에 예수는 성전 경비병들에게 끌려갔다. 이튿날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었다. 그러니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죽기 바로 전날 밤의 사건이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왔다. 예루살렘 성의 서쪽 성문인 자파 게이트로 갔다.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이 있었다. 넓고 복잡한 예루살렘 성에서 자파 게이트는 일종의
‘약속 장소’였다.
그곳을 지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던 장소로 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대략
15분쯤 걸었을까. 예루살렘 성의 또 다른 성문 시온 게이트 바로 바깥에 ‘최후의
만찬장’이 있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가자 오래된 건물이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갔다. 마가복음에도
최후의 만찬장이 ‘큰 이층방’(마가복음 14장15절)이라고 기록돼 있다.
2층에 올라서자 널따란 방이 나왔다.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이 장소가 최후의 만찬장’이라는
오래된 전승이 있다. 이 작은 건물도 이스라엘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쯤 지났을까. 서기 70년 유대인은 무기를 들고 로마에 항거했다. 끝까지
버텼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 와중에도 이 건물은 온전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최후의 만찬’ 건물의 상당 부분이
파괴됐다. 유럽에서 십자군이 내려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서야 다시 지어졌다. 그때 1층에는
‘다윗의 묘실’을 옮겨 왔고, 2층에는 ‘최후의 만찬장’이 재건됐다. 지금도 ‘다윗의 묘실’이 있는
1층은 유대교의 성지이고, 2층은 그리스도교의 성지가 돼 있다. 1층에선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2층에선 그리스도교인들이 기도한다.
1333~1552년에 걸친 200년 넘는 세월동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곳을 맡았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스라엘을 장악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곳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최후의 만찬’을 한 곳으로 알려진 건물은 한때 이슬람 사원으로도 쓰였다. 벽과 창에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예수 최후의 만찬장. 2층의 홀 안에는 이슬람
모스크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이슬람의 문자가 벽에 새겨져 있고, 스테인드 글라스에도
이슬람 특유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반대편 구석에서는 그리스도교 순례객들이 찾아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나는 방 가운데 서서 눈을 감았다.
2000년 전, 바로 이 방. 바로 이 자리에 있었을 ‘예수의 마지막 밤’을 묵상했다.
그날은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날밤이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 역사에서 결코 잊힐 수 없는 절기다. 구약의 모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대 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대 지도자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왕에게 ‘유대 민족의 해방’을 요청했다. 파라오는 거절했다. 그러자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 죽을 것이다”고 경고했다. 왕의 첫 아들을
비롯해 노예의 첫 아들까지, 모든 가축에게서 태어난 첫 새끼도 다 죽을 것이라 예언했다.
유대인들은 예외였다. 모세가 ‘피할 수 있는 묘책’을 일러주었다. 집집 마다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우슬초(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라는 박하과 식물, 영적인
정화를 상징함)에 묻혀 대문의 틀에 바르라고 했다. 그럼 신의 재앙이 비켜서 지나갈
거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따랐다. 유대 달력으로 1월14일 밤이 되자 파라
오의 장남이 죽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첫 아들까지도 죽었다. 처음 태어난 가축
새끼들도 모두 죽었다. 문틀에 피를 바른 유대인들의 집에는 변고가 없었다. 이날이
‘유월절’이다. ‘넘을 유(逾)+건널 월(越)’해서 유월절(逾越節)이다. 영어로는 ‘재앙이
지나간다’는 뜻으로 ‘패스 오버(Pass over)’라고 부른다. 더 이상의 재앙을 두려워한
파라오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떠나는 걸 허락했다. 이 일이 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유월절 저녁부터 7일간은 무교절(無酵節)이다.
‘교(酵)’는 ‘누룩을 넣어 삭히다’는 뜻이다. 무교절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빵’을 먹는다.
유대인들은 무교절 첫날과 마지막날에 모여서 예배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 예수가
12사도와 함께 음식을 나눈 ‘최후의 만찬’도 그랬다. 그건 유월절 저녁식사였다. 그게 유대
달력으로 1월14일이다. 요즘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따지면 3월이나 4월에 해당한다.
그러니 ‘최후의 만찬’은 봄날 저녁에 있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봄볕은 한국의 한여름만큼
따갑지만 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달도 3월이나 4월이었을 터이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물었다. “파스카(패스 오버·유월절) 음식을 어디에 차릴까요?” 예수가
답했다.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따라가라. 그 집의 주인이
큰 이층 방을 보여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마가복음 14장13~15절) 집주인은 누구였을까.
그는 예수를 아는 인물이었겠지. 예루살렘 도성에 집이 있었으니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을
터이다. 그는 왜 예수를 후원했을까. 유월절 저녁식사 자리를 왜 자신의 집에다 차려주었을까.
그는 어디서 예수를 처음 만났을까. 어쩌면 시장 모퉁이를 지나다가 우연히 예수의 설교를
들었을까. 그래서 자신의 묵은 상처를 씻어내리기라도 했을까.
저녁때가 되었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다. 이집트 노예 시절
유대인들이 먹었던 빵이다. ‘그때 그 시절’을 잊지 말자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저녁식사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 구운 양고기와
포도주 등을 먹었다. 예수의 식탁에도 그런 음식들이 놓였을까. 식사 도중에 느닷
없이 예수가 말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가복음 14장18절)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어땠을까. 그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묻기 시작했다.”(마가복음 14장19절)
최후의 만찬을 했다는 이층 방. 구석에 가서 나는 쪼그려 앉았다.
2000년 전, 이곳에 13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예수, 나머지 열둘은 사도였다.
그 장면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궁금했다. 예수의 말을 듣고 제자들은 왜 근심했을까.
왜 차례대로 돌아가며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었을까. 그들은 무엇이 불안했을까.
그게 지금이라면 어떨까. 만약 이 자리에 예수가 나타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방에
서 있는 순례객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 한 사람, 이 방에 있는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담담하게 그 말을 듣고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예수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아니면 성서 속의 사도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까.
저마다 걱정에 차서 예수에게 묻게 될까.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설마 저는 아니겠
지요? 제발 아니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게 저만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예수에게 매달리게 될까.
눈을 감은 채 나는 물었다. ‘나라면 어땠을까. 예수를 향해 나는 뭐라고 말을 했을까.’
식탁에 앉아 있던 제자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그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물었다.
왜 그랬을까. 찔리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걸 자신이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에게 물었을 터이다. “그게 나는 아니겠지요?”. 스스로
찔리지 않았다면 굳이 그렇게 물을 필요도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면 그 장면이 실감나게 되살아난다. 제자들은
세 사람씩 무리지어 앉아 있다. ‘욱’하는 성격의 베드로는 예수 쪽으로 고개를 쭉 뺀다.
오른손에는 식탁에 놓여 있던 나이프를 쥐고 있다. 베드로가 어깨를 짚은 사도 요한은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그 둘 앞에 돈주머니를 손에 쥔 갸롯 유다가 식탁을 짚은 채
예수를 쳐다보고 있다. 다들 “나는 아니겠지요?”라고 할 때 유다만 속으로 “어떻게
알았나요?”하고 묻는 얼굴이다.
식탁의 왼쪽 끝에도 세 사람이 있다. 안드레는 두 손바닥을 펼친 때 깜짝 놀라고 있다.
“세상에 그런 일이!”라는 표정이다. 가운데 앉은 야고보는 베드로의 등을 치고 있다.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왼쪽 끝에 앉은 바돌로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다.
격분한 모습이다. 예수 오른편에도 세 사람이 있다. 도마는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빌립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 둘 사이에
앉은 야고보도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식탁 오른쪽 끝의 세 사람은 마태(푸른 옷)와
다대오, 시몬이다. 그들도 서로 묻는다. “대체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다시 들여다 본다. 예수와 12사도.
그림 속에는 정말 13명의 인물만 있는 걸까. 안드레와 베드로의 사이에, 사도 요한과
예수의 사이에, 빌립과 마태의 사이에 우리도 앉아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예수에게
묻고 있지 않을까.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이다.
실은 알고 있다. 우리도 알고 있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따지듯이 묻는다.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스스로 알기에 더 크게 묻는다. 갸롯 유다뿐만이 아니었다.
예수에게 등을 돌린 사람 말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됐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끌려가는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만이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
그랬던 베드로도 결국 부인했다. “당신도 한패가 아니오?”라는 말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며 세 차례나 부인했다. 닭이 울기도 전에 말이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라는 예수의 한 마디는 누구의 가슴을 찔렀을까. 12사도 모두의 가슴을 찌르지 않았을까.
200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듯이 말이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는 예수의 말에 대한 우리의 표정도 저
그림 속의 하나가 아닐까.
제자들은 음식을 먹었다. 예수는 빵을 들고 축복했다. 그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마태복음 26장26절)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누가복음 22장19절)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린 뒤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복음 26장27~28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은 새 계약이다.”(누가복음 22장20절)
예수는 말했다. “내가 떼어서 주는 이 빵이 나의 몸이요, 내가 주는 이 잔의 포도주가 나의 피다.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이 너와 내가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 무슨 뜻일까. 누룩을 넣지
않은 소박한 무교절 빵을 왜 예수는 ‘나의 몸’이라고 했을까. 또 잔에 담겨 있던 붉은 포도주를
왜 ‘나의 피’라고 했을까. 그걸 왜 “받아 마셔라”고 했을까.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정체’를 착각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그게 ‘예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존적 예수’‘역사적 예수’에만 방점을 찍기도 한다. 그건 동전의 한쪽 면만 보는 셈이다.
눈에 보이는 바깥 풍경만 보는 셈이다. 동전에는 양쪽 면이 있다. 둘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동전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역사적 예수’‘실존적 예수’는 동전의 앞면이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
나무의 밑동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동전의 뒷면이 있다. 나무로 치면 땅 속에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뿌리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다. 뿌리로 인해 몸통과 가지와 잎도 서 있다. 예수
에게도 뿌리가 있다. 그것까지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내면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아름드리 나무의 밑동을
파보면 ‘신의 속성’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와 ‘복음적 예수’는 둘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동전의 뒷면에
‘복음적 예수’가 있다. 또 ‘복음적 예수’라는 동전의 앞면에 ‘역사적 예수’가 있다.
예수는 동전 자체다. 하나의 예수를 둘로 쪼개는 건 사람들이 ‘땅 밑의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 위에 솟아 있는 부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나무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가 말한 ‘나의 몸’은 뭘까. 예수가 설한 ‘나의 피’는 뭘까. 그게 정말 예수가
손에 집어서 떼어준 한 조각의 빵일까. 아니면 잔에 담겨 있던 한 모금의 포도주일까.
성찬례나 미사에서 우리도 빵과 포도주를 먹는다. 그걸 먹으면 정말로 ‘예수의 살’
‘예수의 피’를 먹게 되는 걸까. 그게 다일까. 그걸로 끝난 걸까.
‘최후의 만찬’을 했던 방. 그곳을 거닐며 생각했다. 나는 첫 단추를 묵상했다.
‘예수는 왜 나의 몸, 나의 피를 받아먹으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게 뭘까. 그렇다. ‘우리의 몸, 우리의 피’를 바꾸기 위함이다. 예수의
몸이 나의 몸이 되고, 예수의 피가 나의 피가 되게끔 말이다. 그렇게 ‘바뀜의
순간’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
그건 예수의 몸, 예수의 피를 나의 몸과 피로 체험한 이의 고백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몸’‘예수의 피’가 뭘까. 그건 예수의
정체성이다. 예수의 주인공이다. 그게 뭘까.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그게
진정한 예수의 몸이자, 예수의 피다. 그래서 예수는 “내 피로 맺은 새 계약”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율법이 아니라 ‘신의 속성으로 맺은 새 계약’이다.
“나의 몸을 먹고, 나의 피를 마셔라.” 예수의 이 말은 물음이다. 1000년, 아니 2000년이
흘러서도 녹슬지 않고 날아와 꽂히는 화살 같은 물음이다. 그 화살은 지금도 우리를
쏘아본다. 너는 예수의 몸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셨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 너의
주인공은 무엇인가. 예수는 그렇게 묻는다. ‘나의 몸이 너의 몸이 되고, 나의 피가 너의
피가 되었다. 그럼 너는 누구인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사는 것인가, 아니면 네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인가.”
<백성호의 예수뎐. 21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의 예수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