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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순례는 22차로 1박2일로 대전 교구의 완료 코스이다. 수리치골 성모성지, 청량 다락골 성지, 갈매못 순교성지, 대흥봉수산 순교성지, 홍주 순교성지, 해미 순교성지로 6곳인데 순례지로 다들 만만한 곳이 아니다.
2024. 4월 13일(토) 아침 7시 성당 출발. 봄맞이 순례로 제격이다. 전국성지를 다니다보면 순례지 인증 스탬프 찍는 것을 빠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성지를 나오다가 알고 다시 가서 찍은 일도 몇 번 있다. 그런데 최근에 정리를 하다 보니 작년 11월에 갔던 황새바위 스탬프를 빼먹을 것을 알았다. 다시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데 다행히 황새바위 성지는 오늘 우리가 가는 도중에 있는 성지여서 가는 길에 찍기로 했다.
먼 산이 기지개를 켜면서 연두색을 띠기 시작했는데 경주보다는 충청도 지역이 확실히 빠른 것 같다.
일정 계획은 첫날인 오늘은 6곳 중 남쪽에 있는 수리치골 성모성지, 청량 다락골 성지, 갈매못 순교성지를 순례하고 내일 북쪽에 있는 대흥봉수산 순교성지, 홍주 순교성지, 해미 순교성지를 가기로 한다.
오는 도중에 두 번이나 휴게소에 들러서 쉬고, 황새바위 성지에 들러서 스탬프를 찍고 수리골 성지에 도착을 하니 11시가 좀 넘은 시간이다.
수리치골 성모성지 - 한국 성모 신심의 발상지 |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356-6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역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란 지명은 수리취 나물이 많이 나던 골짜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리취는 취나물 가운데 가장 잎이 가장 커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고 수릿날(단오)에 떡을 만드는 취나물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잎이 넓고 뒷면이 하얀 색인 이 취나물은 반찬 용도로는 쓰지 않고 뜯어 말렸다가 떡을 만드는 용도로 쓰인다.
수리치골이 특별한 의의를 갖는 것은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때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에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창설되어 공주 지역의 성모 신심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성모 성심회(聖母聖心會)
성모 성심회는 본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이다.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첫째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둘째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때인 1846년 11월 2일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에 의해 공주(公州)의 수리치골에 처음으로 조직되었고, 그 뒤 널리 보급되어 박해 속에서 살아가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당시 성모성심회의 창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들은 경당이 없어 많은 신자가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외딴 곳에 열심한 교우 한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잡았다.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4일 뒤 선교사들은 파리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 데즈네트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수리치골에 이렇게 세운 작은 신도회를 그의 명부에 올려 달라고 청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당시 한국 성모성심회 창설 당시에는 회합 장소마저 없어서 외따로 떨어진 한 교우의 가정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윗글에서처럼 수리치골은 당시 기존의 교우촌이 아니라 한 교우의 집에서의 활동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은 물론이다.
당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다블뤼 신부의 편지에서는 성모 성심회가 기도하고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듣는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일날에 성모 성심회의 교우들이 조선말로 경문을 외우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고 상쾌하여,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 나라말로 성모를 찬미하고 죄인을 회두케 하시는 은혜를 갈구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인자하신 성모 마리아여, 많은 지방에 허다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과 같이 우리 지방에도 베풀어 주실 지어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하여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님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잡지 등에 쓴 글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고 했으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성모 마리아 신심 단체가수리치골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순례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수리치골 교우촌과 성모 성지가 확인 개발되기까지는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와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를 설립한 정행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의 특별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다. 수차례 답사를 통해 위치를 확인한 정 신부는 1986년부터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성직자들을 위한 성모성심 봉쇄수도원을 1990년에 완공하고 천주성삼상을 제막하였으며, 1993년에는 성모 칠고상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1997년 봉쇄수도원이 다른 곳으로 옮긴 후 현재 이곳에는 2012년 이후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에 있던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총원이 들어와 한국교회 성모성심 신심의 뿌리를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 교구에서는 2017년 둘레길 주차장, 휴게소 건축하였고, 2018년 12월 31일 성체조배실을 건립하여 대전교구장 유흥식(라자로) 주교 주례 축복식 미사 거행했으며 2019년 성모성심의 집, 성당, 강의실. 회의실 등 부대시설을 확충했다.
성지 입구에 도착해 보니 초기 교우촌 치고는 그리 작은 골짜기가 아니다. 필요한 만큼의 건물은 다 받아들일 정도로 넓다. 가장 먼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피정 센터인 성모성심의 집 마당의 성모님이 맞이해 주신다.
일단 안내도를 보면서 동선 코스를 택한다. 순례길로 1, 2, 3의 세 코스가 있지만 다 걸을 수가 없다.
안내도를 보면 일단 방문할 시설이나 장소로는 성모성심의 집에서 출발하여 계곡 안쪽으로 성지 휴게실, 영상실, 미리내 성모성심수녀원, 성체조배실, 성모광장의 성모당이 이어진다. 그 성모당에서 국사봉 해발 449.9m 대형 십자가까지 오르는 길이 3순례길인데 그 도중에 성모성심회 발족터가 있다. 안내문에는 3순례길의 소요시간은 약 60분이라고 되어 있다. 일단 힘들기는 하지만 이 코스를 택한다
국사봉(國師峰)이라는 산 이름은 전국적으로 많다. 옛날 궁중에서 왕자를 가르치던 국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왕자가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는 왕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왕에게 하직 인사를 했는데 왕은 금돈 한 닢을 주었다. 그는 전국을 떠다니다가 이 산에 와서 금돈은 땅에 묻고 토굴을 파서 수도 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금돈을 이 산에 묻었다는 말만 하고 죽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1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에 이 성지를 다 순례하려면 점심은 늦어질 터라 가지고 간 간식을 꺼내 쉼터 겸 영상실로 들어가니 마침 아무도 없고 영상물이 혼자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영상물을 보면서 간식을 먹었다.
미리내 성심수녀원
영상실에서 나와 계곡 안쪽으로 오르면 미리내 성심수녀원 입구에 성모동산이 나오고 연이어 광장 안쪽에 성체조배실이 나온다. 이곳의 성모님은 승리의 성모님이시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은 나지막한 단층 건물인데 건물 오른쪽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상 앞에 슬퍼하지는 성모님 모습의 조각상이 있고 꽃잔디로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다.
성체조배실 안에는 정면에 아름다운 꽃 모양의 십자가가 새겨진 감실이 있다. 꽃모양의 십자가는 수녀원 성당 제대 후벽에 모셔진 십자가라고 한다. 그 옆에 성모상이 있고 나무의자 여남은 개가 놓여 있을 뿐 참 간소하고 소박했다
성체조배실 위쪽은 넓은 잔디광장이 있고 그 위쪽에 성모당이 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 있어 성모당까지 기도하며 갈 수 있도록 했다.
십자가의 길 - 14처는 대부분 손과 십자가로 만든 조각품으로 신앙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예술적 가치도 보유하고 있다. 길 옆 잔디밭에는 야외 제대도 놓여 있다.
성모당
성모당은 아치형 감실인데 물고기 모양이라고 한다. 어쩌면 꽃봉오리 같기도 하고 북극 지방의 얼음집 이글루 같다는 인상도 준다. 뒷 벽면으로 틈이 있어 바깥을 볼 수가 있기에 답답하지가 않다.
수리치 성모성지의 중심은 성모당이다. 따라서 모든 길은 성모당으로 통하고 또 모든 길은 여기서 출발한다. 안내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안내도에서 맨 오른쪽 보라색 코스가 제3순례길이다. 성모당에서 십자가까지의 이 길은 700m(왕복 1.4km)라고 하는데 매우 가파른 길이다. 안내도에도 경사가 급하므로 성모성심 발족터를 통해서 가면 경사가 완만하여 편하다는 안내가 되어 있다. 경사가 아니더라도 일단 성모성심 발족터는 보아야 하기에 우회도로를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제1, 제2 순례길로 내려가는 길도 갈라진다.
불과 50m 거리에 성모성심원 발족터가 있다. 여기에 가기 위해서는 성모칠고 길을 걸어야 한다.
제1고 아기예수님을 만난 시메온의 예언을 들은 성모님의 고통
제2고 이집트로 피난 가시는 성모님의 고통
제3고 예루살렘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린 성모님의 고통
제4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난 성모님의 고통
제5고 십자가게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신 성모님의 고통
제6고 예수님의 주검을 품에 안은 성모님의 고통
제7고 아드님 예수를 무덤에 묻으신 성모님의 고통
성모성심회 발족터
1846년 11월 2일 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에 의해 창설된 성모성심회는 처음에는 작은 교우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이 성모성심회가 발족된 교우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은 안내판이 있고 다섯 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가운데 세 분은 페레올 주교(뒤쪽 좌)와 다블뤼 신부(뒤쪽 우), 그리고 그 앞에 김대건 신부이다.
겟세마니 동산
겟세마니 동산 십자가와 제대 그리고 예수님 상은 2016년 성모성심회 설립 170주년을 맞아 세웠다. 겟세마니 기도는 십가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잔을 거두러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이에 반하여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형 십자가가 서 있고 예수님이 바위에 기대어 기도를 하고 계신다.
겟세마니 동산 성모성심회 회원들이 드리는 기도문 “죄인들의 피신처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와 성모송을 한 번 바치면 회원들에게 부여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더운 날씨에 힘이 들어 멀리는 보지 않고 계단만 세고 오르다가 그 계단을 올라서는 땀을 닦고 쉬었다. 아마도 100m마다 쉬었다고 생각된다. 경사가 매우 가팔라 지금까지 다닌 곳 중에 가장 힘든 코스였다.
대형십자가
드디어 해발 449.9m 국사봉의 한 봉우리가 나타났다. 몇 개의 벤치가 놓였고 조그만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철탑 양식의 십자가가 한껏 키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꼭 이렇게 철제 빔과 철사로 십자가를 만들어야 했을까? 아무리 건축도 시대 양식을 따른다고 하지만 아쉬운 감이 든다. 작년에 갔던 감곡 매괴 성지의 15m에 이르는 산정 십자가가와 비교가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십자가면 똑같이 숭고한 것이지 무슨 품격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오히려 높은 산 위에 철자재를 운반하여 힘들게 만든 제작자의 노고에 감사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
내려가는 길은 신선의 길이다. 올라올 때보다 더 많은 꽃이 핀 것 같다. 누가 봄날의 한 시간은 천금이라고 했나 봄날의 한 시각은 이처럼 꽃과 잎을 많이 피운다.
고통의 신비 5단과 동시에 성모당에 하산했다. 단체 순례자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다. 벌써 낮 1시 반이 다 돼가는 시간,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휴게소로 이동했다.
내려오는 길옆에 또 길이 있다. 목재 데크 둘레길인데 걷기에 편한 길이다. 여러 종류의 순례길, 기도의 길이 거미줄처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수리치골 성모성지 휴게소
이 휴게소는 수녀회에서 운영하는데 수녀님들이 직접 만든 빵이나 케익, 성물,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그리고 김밥, 라면 등 간단한 식사도 판매한다. 안에 들어가니 왼쪽에 성물방이고 오른쪽에는 식당이다.
식당에 들어가서 케익 판매대 앞에서 무엇 먹을까 하는데 수녀님 한 분이 오셔서 식사를 하지 않았으면 자신들이 먹는 오늘 메뉴 비빕밤이 여유가 있다면서 아무려면 캐익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하신다. 고마운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식당 한쪽에는 열 명 가까운 수녀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순례객들도 한 팀이 있었다.
벽에는 1984년 요한바오로 교황님께서 방한하셔서 뱍해 중 이페레올 주교께서 수리치골에서 겨레와 교회를 성모신심에 봉헌했다고 하신 말씀을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어머니 성모자상 성화도 걸려 있다.
식사 중인 수녀님들 가운데 멀리서 봐도 아주 작고 앳된 두 분이 있어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미얀마에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온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성소자가 나날이 줄어드는 것은 수도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성직자를 수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본다.
공짜로 식사를 한 터라 케익을 종류별로 좀 낫게 샀더니 수녀님께서 오히려 많이 사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오늘처럼 순례지에서 식사를 하면 시간이 엄청 절약된다. 이로서 수리치골 성모성지 순례는 마친다.
낯설다는 것은 곧 (수리치골에서)
깊이 숨어야
깊이 숨쉴 수 있는 것입니까?
깊은 고요 찍어 만드는
새들의 기도 속에서
나는 은밀히 전화를 하고 싶습니다.
내가 낯선 사람이 되어
낯선 음성으로 전화를 하고 싶습니다.
낯설다는 것은 곧
숨은 불빛에 떠는 설렘일 것입니다.
빤질한 시끄러움의 상한 눈빛으로는
함께 눈물 섞을 수 없고
누구 하나 깨울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라야 맑게 흐르는 물
나도 나를 버리고 이곳 골짜기에 든다면
어느덧 낯선 음성의 눈빛이 되어
눈물 어린 전화 할 수 있을까요?
더욱 가난해지려는 사람의 전화는
날마다 걸려 와도
날마다 낯선 미소 밝을 것입니다.
○ 한국의 수호자이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순교자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 우리 천주교회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오후 2시가 가까운 시간에 다음 목적지인 청양 다락골 성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