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8. 천복사 소안탑에서- 법현스님과 의정스님
진리찾아 목숨건 두 스님의 위대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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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탑> |
사진설명: 원래 15층(높이 50m)이던 탑은 1557년 섬서지방에 몰아친 대지진에 2층이 무너져 13층(높이 38m)으로 축소됐다. 인도에서 귀국한 의정스님은 706년 이 탑이 있는 천복사에 들어와 713년 입적할 때까지 역경에 몰두했다. |
장안(서안)은 중국에서 인도로 여행 가려는 ‘모든 사람(구도자 포함)’들이 이용한 출발지였다. 장안에서 출발, 하서주랑을 거쳐 돈황에 도착한 여행자는 그곳에서 충분한 휴식으로 건강, 여유를 회복한 뒤, 옥문관, 양관을 지나 서역으로 나아갔다. 두 관문을 나서면 바로 서역(西域)이다. 끝없는 사막이 펼쳐지는 그야말로 ‘불모(不毛)지대’다. 하늘에는 따가운 햇볕이 쨍쨍거리고, 땅에는 뜨거운 복사열이 여행자를 괴롭히는 타클라마칸 사막. 사막을 가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사막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지금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하면 괴로운데, 장비도 부실한 그 옛날 사막을 건너려면 얼마나 어려웠을까.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사막의 힘에 밀려, 천축(인도)의 경전을 갖고 오겠다는 웅대한 여행 계획도 헛되이, 모래 위에 백골만 남겨놓은 채 사라진 구도자가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급(짊어지고 다닐 수 있는 책 상자)과 약간의 식량을 등에 지고, 입으로는 경문(經文)을 외면서 탈진에 가까운 몸을 용맹심(勇猛心)만으로 이겨내며, 기갈, 배고픔, 도적 등 수없이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과 싸우며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다행히 이러한 입축승(入竺僧) 가운데 성공한 스님들이 있다. 법현스님, 현장스님, 의정스님, 오공스님, 혜초스님 등이 대표적인데, 각기 여행기를 남겨놓았다. 현장스님은 앞에서 살펴보았고, 이번에는 인도에 도착해 오랫동안 공부한 다음 경전들을 가지고 돌아온 ‘최초의 중국인’ 법현스님(317~420)에 대해 살펴보자. 법현스님이 남긴 여행기가 바로〈불국기〉-〈법현전〉이라고도 한다 - 인데,〈불국기〉를 통해 5세기 초 중앙아시아 일대 및 인도의 풍습과 불교를 알 수 있다.
산서성 평양에서 태어난 법현스님은 3살 때 절에 보내져 사미가 됐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대계(大戒)를 받고 율장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부터 율장이 빠진 것을 한탄했던 스님은 온전한 율장을 중국어로 번역하기 위해 399년 - 당시 법현스님의 나이는 이미 60을 넘어섰다 - 혜경, 도정스님 등 4명의 동료와 함께 장안을 출발해 천축으로 향했다. 돈황에 도착한 일행은 돈황 태수 이호의 도움으로 선선국(오늘날의 누란)으로 나아갔다. 선선국에서 천산북도를 따라 오이(현재의 언기)를 지나 호탄다리아(호탄강)를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 질렀다. 그러나 이 길은 “악귀들과 뜨거운 바람으로 가득 차고,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안내판 구실을 하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길이었다.
우전에서 휴식을 취한 법현스님은 탁스쿠르간을 거쳐 눈 덮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인도 서북부 지역에 들어섰다. 우디아나, 탁실라, 푸르샤푸르(폐샤와르) 등지를 순례하고,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쉬라바스티, 쿠시나가라 등에도 차례로 방문했다. 파탈리푸트라(현재의 인도 파트나)에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발견한 스님은 인도어를 배우는 한편 대중부의 율장을 필사하는 일에 2년 동안 열중했다. 목적하던 것을 구한 스님은 귀국하기로 작정했다. 해로를 이용하기 위해 탐랄립티로 가 그곳에서 실론(스리랑카)으로 떠났다. 2년 동안 실론에 머물면서 화지부의 율장과 설일체유부 경전의 일부를 얻는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법현스님은 인도서 경전 들고 온 첫 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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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천축으로 가는 구도승의 모습을 그린 상상도. |
실론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으나, 폭풍을 만나 현재의 자바 섬인 듯한 곳으로 밀려갔다. 자바에서 남해로 향하는 상선에 다시 몸을 싣고 항해하던 중 또 다시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 산동반도의 장굉군 노산에 도착했다. 우여곡절 끝에 건강(동진의 수도)에 도착한 것이 413년. 전후 15년이 걸린 대 여행이었다. 귀국 후 413년에 여행기 〈불국기〉를 쓴 데 이어,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 등 모두 6부 63권을 한역했다. 인도에서 갖고 온 나머지 경전들을 역경하다 420년 형주에서 입적했다. 〈법현스님 천축구도여행도 참조〉
법현스님의 일생은 말 그대로 ‘진리를 위해 몸을 버린’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삶이었다. 6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빠진 율장을 찾아 어렵고 힘든 천축 구도 행에 나섰다는 것 자체만 해도 하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사막에는 많은 악귀와 열풍이 있으며 이들을 만나면 아무도 무사할 수 없다”는 〈불국기〉 구절을 통해, 우리가 비록 선구자적인 구법승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1500년 이상이나 떨어져 있지만 법현스님이 겪었을 공포와 고난 그리고 위험 등을 고스란히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런 공포를 뚫고, 천축에 들어가 율장을 구하고 귀국한 뒤에는 역경에 나머지 생을 바친 법현스님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시사하는 매우 크다.
법현스님 현장스님에 이어 입축(入竺) 구법에 나선 대표적 스님이 의정스님(635~713)이다. 범양(현 북경)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출가한 스님은 15살 때 인도로 구법여행 갈 것을 결심했다. 결국 당 고종 함형 2년(671), 나이 37세에 양주에서 광주로 가 배를 타고 인도행에 올랐다. 당초 여럿이 함께 떠나려고 했으나 모두들 포기하고 의정스님만이 결행했다. 의정스님 당시엔 서역의 실크로드를 이용할 수 없었다. 751년 탈라스 전투의 패배로 서역은 당나라 세력권에서 멀어졌고, 게다가 티베트가 흥기해 신강성 일대를 장악해 버렸다. 실크로드를 이용하려고 해도 이용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7세기 중반 경 인도차이나 반도의 해변과 군도(群島)들은 이미 인도문화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에 자리 잡은, 사이렌드라 왕조가 세운 슈리비자야국이 남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이렌드라 왕조는 자바에 있는 보르보두루 대탑 건립을 후원할 만큼 불교를 홍포한 국가였다. 이 길을 지나간 의정스님은 자연스레 동남아시아 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광주를 떠난지 2년 뒤인 673년 갠지즈강 하류에 있는 탐랄립티에 도착했다. 여러 성지를 순례한 의정스님은 나란다에 10년간 머물며 불경을 공부하고, 685년 귀국길에 올라 다시 해로를 이용했다. 〈의정스님 천축구도여행도 참조〉
인도에서 모은 엄청난 분량의 범어문헌(50여만 송)을 한역하기 위해 먼저 슈리비자야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역경 작업은 혼자 하기 힘든 일이었다. 다시 남해로 돌아가 도와줄 사람을 구해 슈리비자야국으로 돌아와 번역작업을 계속했다. 695년 마침내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런 점에서 의정스님은 “해로를 이용했던 최초의 중요한 스님”이라 할 수 있다.
의정스님은 바닷길 이용해 인도구법여행
의정스님이 귀국했을 땐 측천무후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귀국한 구법승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의정스님은 역경을 더 원했다. 측천무후도 의정스님의 역경을 돕도록 일군의 학자들을 배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역경을 위해 의정스님이 머무른 사찰이 바로 대천복사, 즉 소안탑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의정스님은 68부 290권을 한역했고, 이전에 〈남해귀기내법전〉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등을 저술, 중국불교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행로(行路)로만 보면 의정스님의 여로(旅路)는 현장스님 보다 단순하다. 그러나 전체 구법기간은 25년으로, 현장스님의 17년보다 훨씬 길다. 남긴 저술도 3권으로 현장스님(1권) 보다 많다. 물론 역경의 양을 비교하면 현장스님과 비교되지 않지만, 질이나 조직 면에서는 현장스님의 그것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에 대해 정수일 씨는〈씰크로드학〉(창작과비평사)에서 “의정스님은 율장 번역에 치중해 역경의 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저술과 역경에서 인도에 갔다 온 3대 구법승(법현스님 현장스님 의정스님)의 한 사람답게 큰 업적을 쌓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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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법현스님, 현장스님, 의정스님이 천축으로 구도여행을 떠날 당시 기착지였던 서안시내. |
법현스님과 의정스님의 구도여행을 생각하며, 2002년 10월6일 소안탑이 있는 천복사에 도착했다. 천복사는 현재 공원으로 변모돼 서안 시민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 고종의 죽음 100일을 기념해 창건(684년)된 천복사는 본래 수복사로 불리다 690년 천복사로 개칭됐다. 중종 때 천복사는 더욱 번창, 장안의 거찰로 이름을 날렸다. 인도에서 돌아온 의정스님이 706년 천복사에 번경원을 두고 역경에 몰두, 모두 68부 29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경전을 한역했다.〈유부율〉〈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금광명최승왕경〉〈대공작왕주경〉등은 이 때 번역된 중요한 경전들이다.
의정스님의 역경을 상상하며 천복사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다. 관관상품 파는 상점으로 전락한 전각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38m 높이의 13층 소안탑이 보였다. 탑 안에 들어가 위로 올라갔다. 1965년 대수리 때 누각식 이던 탑 내부를 계단식으로 바꿔, 꼭대기까지 올라 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 서안 시내를 조망했다. 대안탑에서 보던 만큼 탁 트이지는 않았으나, 넓디넓은 서안 시내가 들어왔다. 그 옛날 불교로부터 정신적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후예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순간 “법현스님 현장스님 의정스님의 힘들고 외로웠던 구도여행을 알고 있는지”를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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